니체 - 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 클래식 클라우드 2
이진우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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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 옛적에 니체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읽었던 책이 입문을 위해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아 자서전이란게 있네?

이래서 본게 <이 사람을 보라>

처음에는 키득거렸던 것 같다. 제목도 어찌나 잘 써주셨는지....

이 책 속 소제목이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뭐 이런식이었다.

아! 이 무슨 자뻑 대마왕이란 말인가?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위선적으로 겸손했던 - 지금은 아주 절절하게 진심으로 겸손하다. 인생의 쓴맛을 제법 본 덕분에....

젊은 시절의 나는 저 제목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감당할 수 없는 게 있었으니 바로 내용이었다.

아 도대체 무슨 말이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이 정녕 한글 번역본이 맞단 말인가?

그래 한 줄 한줄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문단을 읽었는데 왜 머리속에 아무것도 안 떠오르지? 왜? 왜? 왜?

아 나는 바보인가봐....ㅠ.ㅠ

 

그래도 그 때는 시간도 많고 인내심도 있어서 어쨌든 보기는 다봤다.

다 보고 나니 뭔가 니체가 말하려는게 여태까지의 통념적인 상식과는 다르다는 그냥 느낌만 느껴졌었다.

그냥 느낌이다. 내용은 모르겠다.

 

지금보다 훨씬 용감했던 나는 다음 책으로 <도덕의 계보>를 집어들었다.

보다 보면 언젠가는 알 수 있을거야라는 별로 신빙성도 없는 느낌만으로...

그래도 <도덕의 계보>는 <이 사람을 보라>보다는 좀 나았다.

일단 뭘 말하려는지 큰 줄기는 알 것도 같았다.(여기서 알 것도 같다는 말은 중요하다. 왜냐? 안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 것같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여전히 니체를 모른다.)

 

<도덕의 계보>에서 말하는 건 결국 현재의 도덕, 도덕적 기준, 선악의 기준 이런 것들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설파하는 듯했다.

그래서 말 그대로 계보, 즉 도덕의 기원까지 따라 올라가면서 현재의 선악 이분법의 도덕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른 삶이 왜 중요한지 등등을 얘기하고 있었다.

근데 이건 내가 이렇게 이해한 바가 이렇다는 거지, 이 책의 서술과 논리 전개 과정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으며 요약정리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니체의 책에서 글을 읽은게 아니라 행간과 행간을 띄엄띄엄 읽었던 느낌이다.

그리고 내 맘대로 아 이건 이런 뜻인가봐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원래는 마지막 책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니체의 생각을 1차 정리해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의 용기는 딱 2권째 <도덕의 계보>까지였다.

그 후로 오랫동안 니체를 잊고 살았다.

차라투스트라까지 읽으면 나도 춤을 출 수 있을까 싶었지만, 뭐 춤을 못춰도 사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지금 저 오래된 기억을 소환시킨 이 책은 니체 전문가이면서 니체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며 니체에 대한 이야기 또는 해설서이다. 또 한편으로는 니체처럼 생각하기를 실천하는 학자의 여행기이기도 하다.(오래전에 질린 니체를 지금 내가 읽은 건 이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2권이기 때문이다. 숫자나 순서에 일종의 강박이 있는 나는 1권 셰익스피어가 좋았기 때문에 이 시리즈를 완독하기로 결심했고, 완독은 당연히 한권도 빼지 않고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

 

이 책 역시 참으로 니체적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니체가 생각했던 방식대로 책의 쓰여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게 읽다보니까 뭔가 아! 하는게 있다.

니체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니체를 읽는 방법이 보인다.

그러니까 니체를 읽을 때는 먼저 내 머리부터 비울 일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본적으로 책을 읽을 때 나의 머리는 준비자세를 취한다.

특히 그 책이 인문 사회과학같은 이론서일 때는,

"자 너의 머리를 준비해! 지금부터 너의 머리를 풀가동해서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논리적으로 굴려. 그래야 너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올바른 지식과 태도에 이를 수 있을거야." 딱 이 자세다.

그런데 딱 이 자세가 바로 니체가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이었던 것이다.

 

논리적 합리적이란게 무엇인가?

이런 생각의 방법 역시 계보학적으로 따라가보면 결국 근대의 산물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한 후에 이성과 이성의 작용인 합리성, 논리성은 모든 영역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져왔다. 사실 이건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철학이 줄기차게 걸어왔던 길인데 데카르트에 이르러 한 획을 긋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이런 이성과 합리주의의 전통은 근대의 위대한 너무도 유명한 철학자들, 우리가 안 읽어도 이름은 다 아는 헤겔, 칸트, 마르크스 이런 이들에 의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상상해본다.

여기 홀로 칼을 빼들고 춤추는 이가 있다.

이성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감성과 본능, 이성과 합리의 영역을 넘어선 자유, 인간이 만든 선악의 카테고리를 벗어나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을 꿈꾸고 주장하는 이.

근대철학의 한가운데서 근대철학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바로 니체다.

니체가 결국 정신분열을 일으킬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너무 일찍 태어난 천재였던 것이다.

포스터 모던 - 근대 너머를 너무 일찍 기획했던 니체의 마지막 삶이 광인이었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이 가버린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내가 니체의 책이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앞에 말했듯이 나의 사고습관은 논리성과 합리성을 찾도록 자동 방향설정이 되어 있다.

그렇게 모던 - 근대를 뛰어넘자고 포스터모던 어쩌고 하지만 사실상 근대를 뛰어넘는건 쉽지 않다.

우리의 뇌의 작용방향은 아주 질기게도 근대의 이성을 향해 있다.

사실 이것의 가장 큰 이유는 학교교육에 있다.

답을 찾지 않는 학교 교육? 판단하지 않는 학교교육? 상상이 가는가?

제도권 학교교육이 너무 잘 되어 있어 국민 대부분이 이 과정을 거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니체의 사고를 따라가는건 정말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 세상에는 내가 잘 못하고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꼭 먼저 가서 해보고 알려주는 이가 있다.

어디나 선생님들이 있고, 또 인터넷의 발달로 그런 선생님을 찾아가는 것이 너무 쉬워졌으니 이것만은 복받은게 틀림없는듯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분인듯하다.

그 어려운 니체를 먼저 공부하고 니체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니체가 사고했던 방식대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면서

"자 어렵죠? 여러분! 하지만 불가능한건 아니예요. 그리고 완벽하려 애쓰지 말고요. 나도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니체의 말을 음미해보고 이렇게 생각해보고 살아보면 불가능한건 아니예요. 니체의 말을 잘 음미해보면 우리의 삶을 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니체가 위대한 것은 그의 사상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사고의 방법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나를 학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니체를 또다시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니체의 생각의 방식, 사고의 방식을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 것은 큰 기쁨이다.

오래된 열등감 - 책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한-을 이제 살짝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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