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의 아주 고전적인 자세와, 그에 답하는 한아의 전혀고전적이지 않은 자세. 연기와 빛 속에서 그건 정말 희한한구도였다.
"나도 저렇게 여기에 왔어. 2만 광년을, 너와 있기 위해왔어."
- P93

"엥, 그렇게 말하면 좀 저열하게 들리지 않아? 조금 다르다고! 어찌되었건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 P102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 P146

"하지만 전 우주가 자본주의가 불완전하다는 생각에는동의하니까. 새로운 노력들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이 가혹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지구도 재밌는 샘플이니 어쩌면 여기서 아주 다른 대안이 탄생할지도 모르고."
- P159

그 입술이 원래 다른 누군가의 입술을 따라 만든 모형이라는 건, 껍질뿐이라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껍질은 언제까지나 남기 마련이었다. 지구와 은하계와 이 차원을 넘어선다 해도 분명 알 수없는 세계가 더 큰 바깥벽으로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까 결국 한아에겐 지금, 여기, 이 입술밖에 없었다. 멀리 날아온입술, 한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입술,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입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조각된 입술, 그 감정적인입술이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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