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은 대답을 망설였다. 당시에는 그와 만나기만 해도 사상을 의심받던 시절이었다. 마치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여기듯이.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그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신발 위에 내려 쌓였다. 그는 그 거리에서 곧 지워질 것처럼보였다. - P70

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1958년 북한의 사람들에게 자유가 전혀 없었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들은 들으라는대로 듣고, 보라는대로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라는 대로 말해야만 했다. - P85

"저는 전봇대가 계속 웅웅거렸다고 기억하는데, 아빠 이야기는그렇지 않아요. 아빠는 기차가 떠난 뒤로는 세상이 적막했다고 기억해요. 기차가 떠나고 누군가 말했대요. 우리는 세상에 버려진것이라고, 그리고 또 말했대요. 죽으라고, 우리 죽으라고 이런 곳으로 보낸 것이라고. 그랬더니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고, 그러자엄마들도 울었고, 할머니들도, 아빠들과 할아버지들도 다 울었다. - P94

그 시절의 새벽, 기행의 이웃들은 아직 푸릇푸릇한 기운이 감도는 대동강 변을 따라 하염없이 걷거나 제자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거의 매일 목격했다. 눈만 돌리면 보이는 그 유령과도 같은이미지는 마치 기행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것처럼 착각하게만들었다. 꽉 막힌 세계 속에서 오갈 데 없이 헤매는 기행의 비판받는 자아들처럼, 그렇게 서서, 혹은 버드나무 몇 그루 아래를 걸어갔다가 되돌아오며 기행은 누군가의 명백한 악의마저도 자기운명의 일부로 여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를쓰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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