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고 이 멋진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확 늘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이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쇼리>

더군다나 이 작가의 책은 단편집 아니면 모두 시리즈물이고 단행본이 딱 2권인데 그게 <킨>과 <쇼리>인것.

그것도 <킨>은 작가의 명성을 널리 알린 첫번째 소설이었고, <쇼리>는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다.

뭔가 운명적인 게 느껴지지 않나?

어쨌든 <킨>을 읽었으니 "아 그럼 <쇼리>부터 읽고 나머지 <와일드 시드>와 <블러드 차일드>로 넘어가야지"한게 <쇼리>를 읽기 전까지의 생각.

 

이 2권의 공통점을 추린다면

<킨>은 시간여행, <쇼리>는 벰파이어의 세계로 일단 SF적인 또는 판타지를 주요 소재로 한다는 것.

2권 모두 이런 소재를 통해 당면한 사회부조리, 젠더의 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 정도 되겠다.

 

하지만 차이점이 더 큰데

일단 <킨>은 흑인인 여주인공이 미국 노예제시대로 타임슬립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이야기의 축으로 하면서 노예제의 진정한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리고 여성 흑인 노예의 입장에서 보는 노예제란 어떤 것인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어 나를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로 입성하게 하였다.

 

그런데.........

 

<쇼리>의 시작은 흥미진진했다. 인간의 나이로는 10살정도밖에 안되보이는(하지만 벰파이어, 이책에서는 이나라고 하는 존재로는 50년쯤 산) 흑인소녀가 동굴에서 만신창이로 깨어난다. 기억을 모두 상실한채...

이후 쇼리라는 이 소녀가 자신의 종족을 찾아가면서, 그리고 왜 자신이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사건을 알아가는게 이야기의 주요 내용인데 이야기의 흥미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한다. 뭔가 뻔하달까?

심지어 그 일이 해결되는 과정도 그리 흥미롭지 못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게 아니다.

내 생각에 작가는 뭔가 새로운 공동체의 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재의 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것과는 다른 절대적으로 선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그런 공동체말이다.

그것이 벰파이어들의 공동체같은데 이건 시작부터 아 이건 뭐야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면 폴리아모리같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 폴리아모리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벰파이어가 어떤 인간을 흡혈하면, 그 인간은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을 경험하게 하고 그 인간에게 묻는다.(여기서 중요한 건 최초의 흡혈경험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는거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

 

<네가 우리 세계로 들어오게 되면 이 느낌을 늘 경험할 수 있고, 덕분에 너는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면서 200년 내지는 300년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네가 내기치 않으면 거부할 수 있어.

일단 우리 세계로 들어오면 너는 나의 흡혈과 나와의 섹스를 통해 항상 황홀한 이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나를 보호하고 나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 수 있어.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아이는 생길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다른 벰파이어와 짝을 지어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어야 해. 물론 인간인 넌 너와 같은 처지의 다른 인간들과 짝을 짓고 아이를 낳는 것도 할 수 있어. 아니면 같은 동성끼리 짝을 짓는 것도 되고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어. 그렇게 벰파이어와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뤄 행복하게 살아가는거야. >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동체는 지극히 폴리아모리적인 세계다.

폴리아모리가 나쁘다는게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르니까 그렇게 사는게 더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자유의지로 내가 결정한 것이 맞냐는거다.

 

인간이 저 훌륭해보이는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일단 벰파이어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그리고 일단 벰파이어에게 동의하지 않은 흡혈을 당해야 한다.

또한 저 흡혈을 한 번 당하고 나면 중독증세가 시작되는거다.

인간이 동의하는지 안하는지 질문하는건 그 다음이다.

 

아니 나는 폴리아모리고 뭐고 싫을 수 있잖아.

근데 내가 왜 선택당해야 하고, 벰파이어의 독에 일단 중독시키고 나서 묻는건 뭐냐고?

그게 정말 차별없는 행복한 공동체가 맞을까?

이 책에서 주요 조연인물이 쇼리가 깨고 난 이후 처음 만난 라이트라고 하는 청년이다.

이 청년은 사실 알 수 없는 이유로 쇼리에게 마음이 끌리고 흡혈을 당하고 섹스를 한다.

그리고 쇼리를 사랑하게 된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 바로 이 라이트라는 청년이 쇼리의 세계를 받아들여가는 과정인데, 내가 보기에 이 과정은 정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다.

라이트는 벰파이어의 공동체 마음에 안든다. 왜냐하면 쇼리를 공유하고싶지 않으니까.

라이트가 상징하는 세계는 기존의 일부일처제 사회다.

하지만 이미 흡혈을 당했고, 쇼리에게 중독되었고, 그래서 사랑을 하고,

또 하지만 쇼리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혼자 쇼리를 독점하는 것은 안되고.....

그래서 점점 자신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고....

 

나는 점점 저 라이트의 입장에 절절하게 동일시하면서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 결과는 도대체 이 빌어먹을 공동체는 뭐야

이게 <킨>의 세계관이 도달한 궁극적 이상향이라면 아 정말 난 동의못하겠다.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냐 폴리아모리냐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소설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벰파이어든 인간이든 완전한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잖은가 말이다. 내가 <킨>에서 만난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벰파이어의 것이다.

심지어 그 벰파이어들은 전부 부자이기까지 하다.

평등하지 못한 관계, 애초의 자유의지가 묵살된 관계위에 성립된 공동체가 정말 이상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만약 작가가 이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상적인 평등한 공동체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면 아마 내가 심각하게 책을 오독한 거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한에서는 그런 비판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살아있다면 구글 번역을 열심히 해서 편지라고 보내고 싶은 기분이다.

 

<쇼리>덕분에 당연히 읽으리라 했던 책 2권 <와일드 시드>와 <블러드 차일드>가 읽을 책 순서에서 확 밀려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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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1-01-03 0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꾸역꾸역 읽다가 리뷰라도 보려고 들어왔어요. 킨하고 블러드 차일드 읽었는데 둘 다 좋아요. 추천합니다. 와일드 시드는 사두기만하고 아직 못 읽었네됴. 쇼리는 으으.. 이제 반 정도 읽었는데 얼른 읽고 치워야겠어요.

바람돌이 2021-01-05 01:0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오랫만이예요. 잘 지내시죠?
킨은 읽고 너무 좋아서 쇼리를 든거였는데 실패. ㅎㅎ 앞에 읽은 킨이 아니었다면 전 중간에 덮었을텐데, 지금은 그냥 덮을걸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블러드 차일드는 대체로 다 평이 좋군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