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이다. 따라서 저자가 예로 드는 사회적 현상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그 사례의 내용들이 오늘의 한국에 갖다놔도 별로 어색함이 없다. 이건 글로벌화의 영향도 있을테지만 더 중요하게는 유럽 사회와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가 비슷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제기하는 핵심 담론들은 큰 위화감없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로 읽어도 무방했다.

이 대목에서 세계를 균질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아니 자본의 힘에 또다시 짓눌리는 느낌이다. 자본의 세계화만큼 그에 대한 저항도 세계화 될 수 있을것인가를 생각하면 잠시 암담하다. 그러나 암담하다고 생각과 행동을 멈출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세상의 변화를 믿는 철없는 낭만주의자라는 내 포지션을 지키고 싶으니까..... 물론 이 말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할뿐만 아니라 몽상적이기까지 함을 모르는바는 아니다. 며칠전 휴가여행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도 엄청 질타받았던 바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런 희망이라도 갖지 않으면 삶이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끊임없이 책을 읽고싶은 이 욕망도 어쩌면 이 암담한 세상에 매몰되고싶지 않은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 열정페이도 마다하지 말고. 그러면 너는 성공해서 부와 성공을 이룰 것이다.

수많은 책들이, 유명인사들이 부르짖는다. 그 첨병에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오프라 윈프리같은 유명인사들이 포진해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면서 외면하고 있다. 젛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얼마되지 않으며, 좋아하는 일을 해도 성공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걸. 왜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의 끝은 남과 다른 신화 창조적 부와 성공이어야 하나?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면서 그 일의 노동조건과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투쟁과 연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건 왜 말하지 않는가? 사실은 모두가 답을 알고 있다. 자본의 입장에서 유리한 것은 수많은 개미들이 죽어라고 경쟁하는 것임을. 그래서 오늘도 신화는 만들어지고 널리 널리 울려퍼진다. 청년들이여. 연대하지 말고 경쟁하라! 그래서 성공하라!

같은 의미에서 이제 실업은 사회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실패로 귀결된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개인 실업자들 조차도 다른 실업자와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나와 타인을 구분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이 대목에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OECD 상위 국가들의 중산층 신화를 생각해보게 된다. 실제의 처지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나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능력이 없어 실업자가 되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생각, 이런 심리적 허구적 중산층의식 역시 나와 타인을 구별짓고 실업자간의 연대를 무시하며 이 차별적 사회의 근간을 굳건히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이주민은 설 자리가 없다.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청년문제 실업자문제에서 그러하듯이... 제주에 예멘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 우리 사회가 보인 극도의 히스테릭한 반응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최대한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선을 그었다. 그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 나라로 전 세계의 난민이 몰려오고, 그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일 것이며, 결국 우리의 세금을 도둑질하는 악이 될것이란 상상이 그 히스테리의 근저에 있지 않았을까? 최대가 아니라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듯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는 무엇인가에서 출발한다면 좀 더 이성적이기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난민문제가 어렵다는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극우세력이 하는 주장을 우리는 반 이상의 국민이 주장한다는 것이 너무 서글펐을뿐....

성, 젠더의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도 여성의 입장에서의 접근뿐만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의 접근이 흥미롭다. 미국의 총기사건은 대부분 남성 그것도 중산층 백인 남성이 절대 다수란다. 자신의 억압된 남성다움을 폭력으로 폭발시키는 양상에 주목하면서 남성성을 강요하는 문화에 대해 고민을 던져준다. 이것은 또한 성범죄, 왕따문제, 시기피해 등에 있어 피해자에게 오히려 책임을 묻는 사회현상과도 당연히 관련되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회는 어느 정도 공정하고 나만 잘하면 부당한 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정한 세상 가설‘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지배층에 가까울수록 이 가설을 믿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성공이 공정하다고 가정해야 자신이 도덕성이 훼손되지 않을테고 성공 역시 정당한 것이 될테니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며 나와 선을 긋고,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무화시킨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미투참가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보라. 피해 예방에 애쓸것이 아니라 가해 예방에 애쓸 일이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시각 중 하나는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들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것이다. 유기농 식품의 섭취 및 재배, 공정무역상품 구매, 친환경 여행 상품의 구매,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한 제품의 구매 등 소비 영역에서의 이 변화들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질까? 물론 이런 행동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행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소비행위에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거리두기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뒤집어 생각해보자. 비싼 유기농 제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친환경이고 뭐고 도대체 해외 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말이다. 진정 환경을 위한다면 아예 여행을 안가는게 맞다. 이런 말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소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소비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결국은 계급의 문제다.

근대사회에서는 계급의 문제가 자본과 노동의 문제로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났다. 누구의 눈에도 극명하게 계급 차별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 시대 계급문제는 노골성과 은폐가 교묘히 결합되어있다. 특히나 유럽이나 우리나라처럼 살만한 나라들에서는 누구나가 중산층이며 상류층으로 역전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부당함은 나의 부당함이 될 수 없다. 거기에 나와 타자의 구별과 차별, 거리두기가 있르며 이 선을 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희망은 멀고도 멀것이다.

최근의 새로운 부동산법을 둘러싸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온국민이 잠재적 부동산 투기자이고 과반의 국민이 실제적 부동산 투기자인 나라에서 어떤 부동산정책도 결국 보수화되어버리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다. 부동산을 통한 중산층 상류층으로의 신화달성! 그 속에 내집마련이 환상이 되어버리는 빈곤층이나 이제 출발하는 청년들이 설 곳이 생길 수 있을까?

묵직한 주제에 비해서 책의 내용은 어렵지않다. 제목 때문에 얼마전에 읽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일상적 미시적 차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면 이 책은 조금 더 거시적이고 이론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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