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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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일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뒤로 두번째다.  그 전에는 <소설의 기술>을 수업 교재로 읽고, 나중에 모임을 만들어 그 책으로 소설 작법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느낀 것이지만 쿤데라가 쓰는 글은 언제나 '탁월'한 점이 있다(밑줄을 긋지 않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이번에 읽은 <농담>은 책의 귀퉁이를 너무 많이 접어야 해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새 책이 볼품없이 더러워지는 꼴을 보지 못하는데(그래서 좋은 구절은 표시해 두었다가 옮겨 적는데) 예외적으로 쿤데라의 책을 읽을 때면 귀퉁이를 여러 번 접을 뿐 아니라 색펜으로 밑줄을 긋고 단상을 책 한 구석에 써놓기까지 한다. 결국 책은 엉망이 되고, 나는 더러워진 책을 보면서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한 권 더 사야지 하며 마음을 정리한다. 

전에 읽은 쿤데라의 책들도 그렇고, 이번에 읽은 <농담>도 그렇고 나는 쿤데라의 책을 한 번에 읽지 못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려고 집어든 당시에는 거기에 온전히 정신을 쏟아부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저 눈으로 글자를 훑으며 겉돌았다. <농담>은 몇 달 전에 사십여 쪽을 읽고 놔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읽기 시작한 거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처음 열 몇 장을 읽다가 못 읽고 일 년이 지나서야 다시 읽었다. 징크스라기보다 그 당시에는 아직 쿤데라의 책을 받아들일만큼의 역량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책을 읽을 때 그에 걸맞은 소화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쿤데라의 책을 통해 깨달았다. 그와 관련하여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연애를 한 이후였다(연애를 하기 전까지는 쿤데라가 읽히지 않았다. 더 빨리 시작했다면 좋았을 걸). 나는 연애를 하는 사람, 그리고 연애를 하고 난 사람이 연애를 하기 전과 상당히 다른 걸 발견할 때가 종종 있는데, 다른 사람의 삶에 별 관심없던 사람도 연애를 하고 나면 상대에 대한 '이해력'이랄까 그런게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어떤 소설은 독자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반면 어떤 소설은 독자가 삶에서 치러낸 경험,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 속에 섞이는 즐거움과 고통 이후에야 읽히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쿤데라의 소설은 후자에 속한다. 사람 속을 꿰뚫는 쿤데라의 문장을 보며 이게 '말'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게 누군가의 직접적인 목소리였다면 내가 그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을지 (또 얼마나 경탄했을지)...책을 덮으면 이 문장들을 숨길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읽는 이의 연애가 가혹하면 가혹할수록(그래서 더 예민해질수록) 쿤데라의 소설이 뼈에 박히는 그런 것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나는 뭐 비교적 평탄하고 행복한 연애였지만)  

<농담>도 그렇다. 간략히 하자면 이건 '(거대한)농담'과 '사회주의'와 '음악'과 '종교'와 '관계'와 '복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것들과 별 상관도 없이(아니면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중심인 양)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루드빅에게서 나의 지나간 연애를 발견했다. 루드빅이 루치에의 '고요' 속에 믿고 있던 이미지, 일상적인 평화와 차분하고 영롱한 기운 같은 것이 결국 루드빅 자신이 만들어낸 오해임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청년기의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나에게로(나의 고독, 나의 예속, 애정과 사랑에 대한 나의 욕구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343)'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내 머리속에 지난 저녁식사때 들은 한 가지 소식이 떠올랐고 내가 얼마간은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저녁 식사 중에 나는 2년 전 헤어진 사람에게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말로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 물론 나도 그 사이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 하지만 그것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파장을 일으킬까 하는 생각조차 없었다.(파장이 일어났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누구를 만났다 혹은 사귄다'는 단편적인 소식으로 헤어진 상대를 상처입힐 수도 있음을 깊이 헤아린 적이 없었다. 상처는 생겨버린 뒤에 깨닫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아주 나중에 내가 이 글을 다시 읽으면 잊을 수 있었던 어떤 것을 또 한 번 떠올리게 될까 두려워 그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어쨌든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 2년 동안 내 안에서 그의 존재가 상당히 오해된 채로 (환상적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단어가 좀 더 확고해졌다. 만약 <농담>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마음의 정리는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나는 빠른 마음의 정리가 결코 좋다고 생각지 않는다. 누군가 대신 생각해주고 길을 터주고 마음이 아플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아주 효율적이지만, 그 효율성 때문에 나는 거기에 반항감이 생기곤 했다. 나는 이런 반항감이 나를 '바보'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때는 책이 싫다. 쿤데라 같은 작가도 너무 치밀해서 무섭다. 그렇지만 이런 저항이나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누구한테 배웠겠는가.  

솔직히 나는 이 책을 팔십여 쪽 남겨두고 이 리뷰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쓰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 리뷰를 쓰게 만든 사람은 루드빅이 아니라 코스트카이다. 코스트카,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하는 루드빅을 마음 깊이 비난하는 코스트카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작 루드빅을 용서하지 못하는 코스트카의 괴로움을 보며, 누군가가 미워서 괴로움 속에 살던 내 모습이 떠올랐고, 좋아하는 마음이든 싫어하는 마음이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말이 맞긴 맞지만(그래서 나도 사랑이든 미움이든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지만) 그건 마치 물에 녹은 설탕가루와 같아서 어느 날 물이 증발되면 유리그릇 바닥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걸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설탕가루. 쿤데라의 소설이 자꾸 그걸 꺼내보이게 해서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하지만 리뷰를 쓴 뒤 다시 읽게 될 <농담>의 남은 팔십여 쪽에 얼마나 많은 귀퉁이가 접혀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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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2-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 <참을 수 없는...>을 겨우 다 읽었는데 뭔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주위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 그러고. 그때 얼마나 말을 아꼈던지. 무식이 탄로날까 봐.
지금 다시 읽으면 토끼님 같은 느낌을 갖게 되려나요?
나중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농단도 같이...축하해요.^^

김토끼 2010-03-30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렇게 부르는 게 맞나요?) 어쨌든 스텔라님 댓글을 지금에서야 확인했네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2월달에 마이리뷰에 올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정말..뒤늦게 알았지만 아주 기쁘네요. 저도 예전에 쿤데라 소설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해서 '아아. 왜 다들 쿤데라를 좋아하는 거지? 도대체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거야. 으으.' 했던 적이 있어요.(물론 저도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는..) 하지만 세월(?)이란 게 뭔지 ㅎㅎ 우연히 다시 읽어보니 읽어지더라고요. 스텔라님도 저처럼 다시 읽어보시면 '와. 이렇게 좋은 구절이 있네'하실 거예요. 특히 실연의 후폭풍 속에서 읽으면 왠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하하.

지야 2010-06-04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읽고 김토끼님께 반했다는. ㅎ 중간의 연애 이야기는 정말 탁월하네요. 공감!

김토끼 2010-06-06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했! 감사합니다 ㅠ '중간의 연애 이야기'는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