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rim > [임재석] 악몽은 릴레이될 수 없다 - 한겨레 21

이라크 오무전기 차량 피격사건에서 살아 돌아온 임재석씨, 그가 청와대 1인시위 벌인 사연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그에게 지난해 겨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계절이다. 이런 그에게 당시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잔인한 짓이었다. 입술을 떨며 한마디 한마디 이어가던 그는, 끝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토해냈다. 지난 다섯달 동안 병실에서 몸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견뎌야 했지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무관심과 외로움이었다.


△ 지난 6월9일부터 나흘간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인 임재석씨.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 때문에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목포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사진/ 류우종 기자)

참을 수 없는 무관심과 외로움

임재석(32)씨는 지난해 겨울,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라크 한국인 피격사건’의 당사자다. 당시 오무전기의 노동자로 이라크에 파견된 지 하루 만에 그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고 동료 2명을 잃었다.

귀국한 뒤 고향인 전남 목포에서 ‘조용히’ 치료를 받던 그가 지난 6월9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나흘간 1인시위를 벌였다. 허벅지와 무릎에 박힌 총탄 파편 탓에 목발을 짚고도 다리는 연신 후들거렸지만, 임씨는 ‘파병 철회’와 ‘산업재해 인정’이라고 쓰인 피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가 “위험하다”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까지 올라온 까닭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 때문이다.

지난해 11월29일, 임씨는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의 하나인 송전탑 건설을 위해 이라크를 찾았다. 당시 오무전기는 미국 워싱턴그룹의 하청을 받아 50여명이 넘는 노동자를 이라크에 파견한 상태였다. 입국 다음날인 30일, 송전탑 점검을 위해 티그리트의 현장사무소를 나섰다. 흔히 ‘알리바바’라고 불리는 이라크 좀도둑들이 송전탑을 세워놓는 족족 바로 뜯어가는 바람에 송전탑을 매일 점검하는 일은 현장 노동자들의 필수 업무였다.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송전탑의 점검을 차례로 끝낸 뒤, 길을 묻기 위해 이라크 민간인의 집을 찾았다. 건장한 사내는 경계의 눈초리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이라크인 운전사가 “코리아”라고 답했다. 그 집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주유소에 들렀을 때도 누군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고, 운전사는 다시 “코리아”라고 답했다. 주유소를 떠난 지 몇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뒷자리에서 창 밖을 보던 임씨가 놀라 고개를 돌렸을때, 운전사는 가슴팍에 피를 흘리며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승용차 한대가 임씨 일행이 탄 차를 바짝 뒤따르자, 임씨가 탄 차가 2차선으로 비켜난 순간이었다. 승용차에 탄 이라크인들은 급정거하는 차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 위험을 무릅쓴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 참여는 결국 화를 불렀다. 이라크 게릴라들에게 피격당한 오무전기 직원들의 차량.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또다시 총알이 퍼붓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밑으로 숨었지만, 허벅지와 무릎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상원씨는 임씨 위로 쓰러졌고. 머릿속이 하얘질 때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임씨는 신음하는 이상원씨에게 “우릴 죽이려고 오나봐요. 숨쉬지 마시오” 하고 속삭였다. 2명이 다가와 각각 창문 양쪽에 서서 한참을 지켜봤다. 잠시 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임씨와 이씨는 차 밖으로 기어나왔다. 이라크인 운전사와 조수석에 타고 있던 김만수씨, 운전석 뒷자리의 곽경해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10여분 뒤 지나가던 미군에게 구조됐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이라크 병원에 후송된 뒤에도 ‘악몽’은 계속됐다. 밤이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과 대포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초저녁에 모든 불은 꺼졌고, 담배를 피러 밖에 나가려 해도 “불빛이 보이면 표적이 된다”며 병원 관계자가 말렸다. 낮에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경계심를 늦추지 않는 미군의 행렬과 이라크 민간인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선명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한달 가까이 머무른 독일의 미군 병원에서는 많은 군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팔과 다리를 잃거나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린 군인들은 너무나 흔했다.

부상당한 지 39일 만인 지난 1월 초,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고통이 임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형편은 ‘당연히’ 크게 기울었다. 오무전기쪽에 직접적인 보상책임이 있지만, 워낙 영세한 업체라 크게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라크에 가기 전에는 한달에 500만원의 수입을 올리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부인과 아이 셋이 처갓집에 의지하고 있다. 결국 이달 초, 기초생활보장법 수급권자가 되었다. 사고 당시 “치료와 보상 등 일체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한 정부는 임씨를 외면하고 있다. 지난 3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며 청와대 인터넷 게시판 신문고와 외교통상부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그러나 “정부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 회사와 법적으로 해결할 문제니 대한법률구조공단으로 가라”는 차가운 답변이 전부였다.

임씨는 “당시 이라크 현지조사단이 ‘이라크는 안전하다’고 발표했다. 좀 꺼림칙했지만 정부 말을 믿고 간 것”이라며 “이제 와서 정부가 발뺌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씨와 함께 부상당한 이상원씨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엉덩이와 다리에 총 세발을 맞아 하반신 신경이 손상된 이씨는, 애초에는 회복 기미가 보였지만 지금은 발가락도 움직일 수 없다. 역시 보상은 없다.


△ 이라크 티크리트주 인근의 작업현장에서 고압선을 연결하기 위해 송전탑으로 올라가는 오무전기 직원.(사진/ 연합)

누군가 총을 들고 쫓아오는 꿈…

임씨는 특히 숨진 김만수씨 가족을 볼 면목이 없다. 이라크에 가기 전부터 가족끼리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돌아온 뒤에는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형님은 죽었는데 나만 살아왔으니 미안하고 죄스러운 거죠, 뭐.” 김씨의 가족은 회사에서 3억원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빚잔치를 하고 나서는 여전히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고 임씨가 전했다.

임씨는 이라크에서 겪은 일을 될 수 있으면 잊고 싶어한다. 자신의 눈앞에서 관자놀이와 목에 총을 맞고 죽어간 김만수씨 등 동료들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결국 같이 방을 쓰던 환자들이 방을 바꿔달라고 병원에 요구하는 바람에, 임씨가 3인실에서 2인실로 옮겨가야만 했다. “요즘에도 낮에 이라크에 있었던 얘기를 하면, 밤에는 누가 총을 들고 막 쫓아오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도망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나오는 거예요. 이라크에서 겪은 일이 꿈에 그대로 나타나기도 해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올라와 1인시위에 나선 임씨의 바람은 ‘소박’하다. 임씨가 본 이라크는 너무나 참혹했다.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었다. “파병 문제는 국민들이 함께 다시 생각하고 다시 검토하고, 또 정말 합당한지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이라크인들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파병은 막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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