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 현대사상의 모험 27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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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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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은 푸코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지만 이 책을 좋은 번역으로 접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 대개의 국내 독자들에게는 꽤 당혹스러울 만한 책이다.

 

우선 이 책은 [광기의 역사](1961)의 독자들이 보기에 낯선 책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의 [성찰](1641)과 광인들의 대대적인 감금(1640)이 정확히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면서, 근대의 합리성이 어떻게 광기의 배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 분석한다. 따라서 이성과 광기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으며, 해방되어야 할 것은 광기다. 반면 [말과 사물]은 더 이상 광기를 이성과 대립하는 위치에 놓고 있지 않으며, 광기의 역사가 아니라 ‘인문과학의 고고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일종의 합리성의 역사, 이성의 역사를 쓰려고 시도한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푸코의 또 다른 유명한 책, [감시와 처벌](1975)의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책이다. 푸코 하면 권력의 이론가, 지식과 권력의 계보학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에는 규율이나 감옥, 감시에 관한 논의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대신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양 르네상스(16세기)와 고전주의 시기(17-18세기)의 수많은 학자들, 문필가들의 저술에 관한 그야말로 박학다식한 논의가 종횡무진 펼쳐지기 때문이다. 푸코는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었을까? [말과 사물] 앞에서는 박식한 인문학자들마저도 평범한 교양 독자들이 떠올릴 법한 소박한 질문을 저절로 던져보게 된다.

 

하지만 [광기의 역사]와도 다르고 [감시와 처벌]과도 다른 이 책은 사실 푸코의 일관된 지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푸코는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늘 근대성의 한계를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근대성이라고 부른 것은 대략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서구 문명을 가리킨다. 이 시기의 성격과 한계를 밝히기 위해 푸코는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진보의 노선에 따라 역사를 분석하는 기존의 역사학 방법론을 거부하고, 대신 근대와 이전 시기들 사이의 불연속성을 새롭게 고찰한다.

 

특히 [말과 사물]은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역사학 방법론에 따라 근대 인문과학이 이전 시기와 다른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성립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어떤 역사적 시기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적 담론들의 차이와 대립, 거리의 관계가 전개되는 장(場)을 뜻하는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은 근대의 합리성이 고대 그리스는 고사하고 르네상스나 고전주의 시기와도 무관한 새로운 바탕에 기반하여 성립했음을 보여준다. 인문과학의 주체이자 대상인 “인간은 최근의 발견물이자 출현한 지 두 세기도 채 안 되는 형상”(20쪽)이라는 푸코의 충격적인 주장은 이러한 탐구의 결론인 셈이다.

 

1970년대에 들어 푸코는 분석의 영역을 담론에서 비(非)담론으로 바꾸고, 고고학 대신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채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말과 사물]의 결론의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근대 담론만이 아니라 근대 권력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새로운 시도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푸코 사상의 연속과 불연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너뛸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ㆍ출간된 것은 1987년이었으며, 이번에 나온 책은 근 30여 년 만에 새로 번역해서 낸 책이다. 그 사이의 온축 덕분인지 아니면 역자의 능력 덕분인지, 새 번역은 이전 번역보다 훨씬 정확하고 잘 읽히는 좋은 번역이다. “선험적 감성학” 내지 “초월론적 감성학”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절할 원어가 “선험적 미학”(437쪽)으로 번역되는 등 사소한 시빗거리가 없지는 않지만,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 같은 난해한 대작을 공들여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투정에 불과하다. 푸코의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덜 알려진 이 책을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우선 역자에게 깊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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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2-05-0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구입한 책입니다. 귀한 책이라... 열심히 읽어보려구요^^

balmas 2012-05-05 02:39   좋아요 0 | URL
비연님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최근에 책을 구입하셨군요. 재미있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

독자 2012-05-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광기의 역사>에 대해 안과 밖으로 이분된 것이 아니라 모두 안에 있다고 '푸코의 이분법'을 비판한 데리다가 생각나는 군요. 프랑스혁명을 이성의 절정 또는 광기의 절정으로 이해한 푸코의 독특한 시선도 저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군요.

다른 출판사에서 푸코의 책들이 출간되고 있으니 가능성은 없다고 보지만 혹시 그린비에서도 푸코의 책들이 출간되는 건가요? <푸코> 평전이 있는 걸 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달랑 평전만 있으니까 좀 어색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balmas 2012-05-23 03:12   좋아요 0 | URL
ㅎㅎ 예. 짐작하신 대로 그린비에서는 제가 알기로는 푸코 원전을 번역할 계획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기회가 없다고 해야겠죠. 아시다시피 저작권이 있어야 책을 번역할 수 있는데, 푸코 주요 저작은 이미 거의 출간된 상태고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역시 저작권이 다 판매된 상태여서 번역을 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그럴 만한 기회가 없답니다.

Joule 2012-05-05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푸코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고 있었는데 벌써 읽으셨네요. 예전에, 음... 한 5-6년쯤 전에 <말과 사물>을 읽긴 읽었는데 그땐 이해도 잘 안 되고 얼른 와 닿지도 않았었어요.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이번에는 좀 다를까요.

그리고 뭐 하나만 여쭤보고 싶어요. 이번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책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추영현 번역, 피앤비에서 나온 황태연 번역, 책세상에서 나온 조현진 번역입니다. 세 권 중에 어떤 책을 선택하면 난해한 번역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진만 빼고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꼭 읽어보시지 않았어도 발마스 님 느낌에 난 이 책이 좀 나을 것 같다 정도로 찍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

balmas 2012-05-06 03:4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줄님.^^
[말과 사물]은 사실 재미있게 읽기는 쉽지 않은 책입니다. 워낙 많은 담론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고, 게다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전개된, 우리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담론들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답니다. 그래도 이번 번역본은 번역도 잘 돼 있고 군데군데 상당히 매력적인 논의들이 많아서 읽어볼 만한 것 같습니다.^^

[에티카]를 읽으시겠다니 반가운 말씀이네요.^^ 말씀하신 번역본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제가 읽어본 게 없네요. 그래서 제가 읽어본 것 중에서 권하자면 서광사에서 나온 강영계 교수의 [에티카]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 강영계 교수의 번역본은, 개념 번역의 정확성이라든가 스피노자 논의 맥락의 세심한 전달 등에서는 꽤 문제가 많긴 해도, 전반적으로 큰 오역이 많지 않고 가독성도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국역본 중에서 권한다면 강 교수의 번역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물론 새로 나온 번역본들 중에서 더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은 나중에 한번 읽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

Joule 2012-05-07 00:55   좋아요 0 | URL
둘 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푸코도, 스피노자도. 강영계 번역의 <에티카>는 집에 있어요. 소중한 주말에 짬을 내어 다정한 답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D
 
 전출처 : balmas님의 "[코멘트]푸코 심포지엄 참관기-교수신문"

ㅎㅎ 예 맞습니다. 그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아마 알튀세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알튀세르의 경우에는 더 역설적일 수 있을 텐데요, 다른 누구보다도 비경제적인 것(곧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역사와 정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이 알튀세르였으니 그렇겠죠. 다만 알튀세르(를 포함한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왜 경제만 리얼리티냐,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등(하도 끝도 없다)도 모두 리얼리티 아니냐'라고 반문할 경우, 다시 말해 리얼리티의 복수성, 다수성을 무한정하게 확장할 경우, 인식론적 비규정성에, 따라서 정치적 무력화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 걱정스러웠겠죠. 사실 도그마님이 질문한 것처럼,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이 다 리얼리티라면, 따라서 경제와 똑같은 인식론적, 정치적 비중을 지니게 된다면, 거기에 더 이상 정치가 존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더욱이 어떤 포스트맑스주의자도 아마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같은 것을 '경제'와 대등한 리얼리티라고 하지는 않겠죠.

 

'선거를 통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은 저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선거말고 다른 것을 통해서만 리얼리티가 바뀐다는 뜻인지, 아니면 리얼리티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는 뜻인지도 불분명하구요. 우선 도그마님의 생각을 스스로 좀더 정확히 정리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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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5-1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회의주의?

balmas 2012-05-10 16:55   좋아요 0 | URL
도그마님 저는 이 문제로 도그마님과 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참고문헌을 딱히 소개해드리기도 어려운 게, 저는 도그마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치나 권력 문제에 관해 공부하고 싶으시면 그쪽 문헌을 보시면 될 테고, 리얼리티와 회의주의 문제를 공부하고 싶으시면 가령 데이비드 흄의 저작들을 공부해보는 것도 좋겠죠.
 
 전출처 : balmas님의 "푸코 심포지엄 참관기-교수신문"

전체적으로 무엇을 질문하려는 의도인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가 생각보다 좀더 미묘합니다. 도그마님이 정리하신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전적인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ㅎㅎ

 

사실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변화했다고 볼 수 있고, 그 이론 내부에 얼마간 애매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1) 알튀세르는 리얼리티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그 리얼리티를 넒은 의미의 '경제', 곧 생산양식이라고 생각했고, 맑스주의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고 봤죠. 도그마님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도그마님이 이미 포스트맑스주의적 관점을 은연중에 전제하기 때문일 겁니다. 적어도 알튀세르 자신은 맑스주의자로서 리얼리티는 계급투쟁, 특히 생산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리얼리티를 직접 인식하지 않고 상상계를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정의하죠.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 또는 이렇게도 정의합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 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다."

 

여기서 핵심 논점은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현실적인 실존 조건이란 계급적 조건을 말합니다. 곧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사회에서 모든 인간, 개인은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추상적인 개인이나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떤 계급에 속한 사람은 어떤 계급의 성원으로 나타나지 않고(재벌, 노동자, 농민, 지식인 ...)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나타납니다. 곧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급 성원으로서 x는 추상적인 개인 x로서, 계급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그러한 조건에 앞서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개인으로서 상상적으로 표상/재현/상연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은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전혀 환상적이거나 공상적인 것은 아닌데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는 법적 체계를 통해 모든 사람을 법적 주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주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도적 차원에서 그렇게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실 사회에서 각 개인은 계급이라는 현실적인 존재조건에 따라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계급적 조건에 선행하는 추상적인 개인 x로 나타나며, 또한 이데올로기적 제도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어 있는 거죠.

 

알튀세르가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든 사례를 보면, 노동자와 자본가는 계급적으로 상이하고 또 불평등하지만, 법적인 관계에서 보면 동등한 개인, 동등한 법적 주체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고용 계약을 맺는 거죠.

 

3) 이렇게 본다면,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게 '경제'를 '리얼리티'로 간주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리얼리티에 대한 '표상'이나 '상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리얼리티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고전 맑스주의와 상당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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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마 2012-04-13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알튀세르를 왜곡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조심스럽게 얘기할 필요는 있지만 그게 바로 알튀세르의 머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아닐까요? (알튀세르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의 정의는 아닐지라도)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리얼리티"라면 다른 것들, 예를 들어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등```(한도 끝도 없다!) 이것들은 "리얼리티"인지 아닌지 궁금하군요. 그건 리얼리티를 계급으로 환원한 것 아닌가요?

가장 궁금한 것은 알튀세르는 어떻게 그것이 "리얼리티"인지를 알았는가? 하는 겁니다.

덧붙이자면 "민족"이나 "국민"만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로 표현된 이상) "계급"이라는 것도 모호한 것입니다.

좀 더 고백하자면 저는 "리얼리티"가 언어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리얼리티"는 언어 바깥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비로소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보는 거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겠죠.

어쨌든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포스트맑스주의를 섞어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를 왜곡한 게 되겠군요.)

그렇다고 해도 선거를 통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 없다! 는 주장을 철회할 필요는 없겠죠?


balmas 2012-04-14 01:46   좋아요 0 | URL
ㅎㅎ 예 맞습니다. 그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아마 알튀세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알튀세르의 경우에는 더 역설적일 수 있을 텐데요, 다른 누구보다도 비경제적인 것(곧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역사와 정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이 알튀세르였으니 그렇겠죠. 다만 알튀세르(를 포함한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왜 경제만 리얼리티냐,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등(하도 끝도 없다)도 모두 리얼리티 아니냐'라고 반문할 경우, 다시 말해 리얼리티의 복수성, 다수성을 무한정하게 확장할 경우, 인식론적 비규정성에, 따라서 정치적 무력화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 걱정스러웠겠죠. 사실 도그마님이 질문한 것처럼,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이 다 리얼리티라면, 따라서 경제와 똑같은 인식론적, 정치적 비중을 지니게 된다면, 거기에 더 이상 정치가 존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더욱이 어떤 포스트맑스주의자도 아마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같은 것을 '경제'와 대등한 리얼리티라고 하지는 않겠죠.

'선거를 통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은 저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선거말고 다른 것을 통해서만 리얼리티가 바뀐다는 뜻인지, 아니면 리얼리티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는 뜻인지도 불분명하구요. 우선 도그마님의 생각을 스스로 좀더 정확히 정리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그마 2012-05-07 13:3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 세계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프랑스나 한국이나) 선거를 통해서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 정의에 좀 더 충실해도 프랑스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모른다고 결론내려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알튀세르의 정의에 충실하다면 "누군가는 리얼리티를 안다"고 되기 때문에 좀 더 복잡해지겠죠.
 
성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37
르네 데카르트 외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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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토요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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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웬만한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알고 있는 서양 근대 철학의 아버지다. 또한 ‘코기토 에르고 숨’,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인문학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이다.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니 전집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의 주요 저작은 당연히 다 번역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책인 [성찰]이 라틴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성찰]과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성찰에 대한 학자들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은 올해 들어서야 마침내 한글로 번역되었다.

 

사실 교양 독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는 홉스, 로크, 버클리,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근대 철학의 대가들의 저작 중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책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전문가들이 신뢰할 수 있게 번역한 책들은 더욱 더 적다. 이는 그만큼 국내 철학계가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ㆍ출간된 데카르트의 이 저작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책이다.

 

보통 독자들만이 아니라 대개의 철학 전공자들도 잘 모르는 [성찰]의 비밀 아닌 비밀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또한 「옮긴이 해제」에서 잘 소개하고 있듯이 [성찰]은 처음부터 다른 학자들과의 토론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자 장-뤽 마리옹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찰]은 애초부터 ‘답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성찰]에서 전개되는 논변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7개의 반박문과 더불어 데카르트의 답변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굳이 이런 배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반박문을 집필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면면을 본다면 이 책은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하다. 가령 두 번째 반박문은 데카르트의 후원자이자 당대 유럽 지식계의 소통 창구였던 메르센 신부가 집필했고, 세 번째 반박문은 홉스가 썼으며,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지도자였던 앙투안 아르노는 네 번째 반박문에서 날카롭게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있다. 또 근대 유물론 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피에르 가상디는 가장 긴 다섯 번째 반박문을 썼다.

 

논쟁의 주제들 역시 [성찰]의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신존재증명, 정신과 신체의 연합, 회의의 타당성, 데카르트 관념이론의 성격, 자유의 본성, 사고하는 주체의 정체 등 근대 철학의 주요 쟁점들이 이 반박과 답변에 담겨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근대 철학이 이 한 권의 책 속에 집약돼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근대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좀더 상세하고 엄밀한 검토는 전문적인 토론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겠지만, 성글게 읽어본 바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라틴어에 능숙한 데카르트 전공자가 번역해서 원전을 일일이 살피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책의 말미에 역자가 덧붙인 「해제」는 이 책의 몇 가지 쟁점에 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사족처럼 덧붙인다면, 본문에 나오는 전문 용어들이나 논쟁의 배경에 관해 좀더 상세한 역주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책의 구조와 논쟁의 쟁점들에 대한 좀더 폭넓은 해제가 있었더라면, 이 번역은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 같다. 물론 이 사소한 딴죽이 이 번역의 의의와 역자의 노고를 결코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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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4-1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문예출판사(이현복 역)에서 나온 "성찰"보다 이 책의 번역이 더 좋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혹시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으셨다면 그 책에 대한 발마스 님의 서평이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balmas 2012-04-11 04:07   좋아요 0 | URL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성찰]이고,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책은 이 [성찰]을 둘러싸고 데카르트 비판가들과 데카르트가 주고받은 반박과 답변의 기록이니까 두 책이 서로 다르죠.

[피로사회]는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만한 게 없습니다.

nom 2012-05-0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코기토 에르고 숨’이 아니라‘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가 제시되는 이유에 대한 데카르트의 자신의 언급은 없는 건가요?

balmas 2012-05-01 04:27   좋아요 0 | URL
예 데카르트 자신의 언급은 나오지 않죠. 이 주제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학위논문 주제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cplesas 2012-07-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서야 이름을 걸고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기존 nom이라는 가명의 댓글은 저의 것입니다. 저의 이름을 숨기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알라딘 서재로 로그인이 이어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만큼 이 곳이 낯설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선생님께 데리다의 <입장들>과 <법의 힘>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는, 전남대 철학과 학생 이무영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학부생이었는데, 지금은 석사를 졸업하는 시점에 있어요. 선생님께 질문드린 바로 그 주제로 석사논문을 작성해서 제출하였습니다. 덧붙여 원석영 선생님의 국역본 도움에 힘입은만큼, 오늘 <성찰> 국역본에 서평을 달다가, 선생님의 링크를 보고 다시 여기로 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쯤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제가 서울에 살지 않아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군요. 많은 번역서들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립니다. :)

balmas 2012-07-09 11:08   좋아요 0 | URL
무영님 반갑습니다. 벌써 석사졸업을 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제로 논문을 쓰셨네요. 앞으로 공부에 많은 진전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종종 들르세요.
 
젠더와 민족 트랜스 소시올로지 11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 그린비 / 201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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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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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네이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저런 문헌을 읽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필자가 니라 유발-데이비스였다. 특히 네이션과 여성의 문제라는 주제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이름을 볼 수가 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벼르던 참에 그녀의 대표작 중 한 권이 번역ㆍ출간되었길래, 냉큼 이 달의 서평 대상 도서로 골라잡았다.


이 책의 기본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1980년대 이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의 도입으로 이론상으로도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 후반까지 여성의 입장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고찰하는 저작은 매우 드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네이션에 관해 페미니즘적인 접근법을 도입한 문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왜 네이션의 문제가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서구 중심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의 소산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공통의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서구의 여성과 이슬람 여성, 아프리카의 여성, 아시아의 여성은 억압의 방식과 차별 및 배제의 경험에서 각각 다르다. 따라서 자매애라는 추상적 연대의 몸짓은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 현실을 은폐하기 십상이다.


또한 네이션은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틀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에게 중요한 문제다. 네이션은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가장 효과적이고 일상적인 준거다. 그런데 여성은 네이션의 생물학적 재생산의 임무를 할당받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러시아, 어머니 아일랜드, 어머니 인도”(88쪽)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추방과 살해, 모욕과 배제 같은 각종 폭력이 가해진다.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덮어두려고 하거나 위안부 박물관 건립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보는 시선은 어찌 보면 네이션 속에서 여성의 위상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네이션과 젠더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횡단성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횡단성의 정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233쪽)와 구별되는 정치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논점을 포함한다. 우선 횡단성의 정치는 자기 중심의 상실을 가정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연대나 통합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나 약소자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연대의 근거가 사라질뿐더러 연대 자체가 무비판적인 동질화로 변질되기 쉽다. 연대가 진정한 연대이기 위해서는 연대하는 이들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 삶의 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둘째, 서로 상이하고 독특한 이들 사이의 ‘옮기기’의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 횡단성의 정치는 연대하는 이들과 일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양립할 수 있는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본문이 240쪽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겠거니 짐작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까 만만치 않았다. 이는 이 책이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책이 비서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사례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 투쟁들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려움은 늘 추상적으로만 사고하는 필자와 같은 한국의 남성 철학도의 한계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자에게 구체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 호된 죽비와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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