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푸코 심포지엄 참관기-교수신문"

전체적으로 무엇을 질문하려는 의도인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가 생각보다 좀더 미묘합니다. 도그마님이 정리하신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전적인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ㅎㅎ

 

사실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변화했다고 볼 수 있고, 그 이론 내부에 얼마간 애매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1) 알튀세르는 리얼리티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그 리얼리티를 넒은 의미의 '경제', 곧 생산양식이라고 생각했고, 맑스주의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고 봤죠. 도그마님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도그마님이 이미 포스트맑스주의적 관점을 은연중에 전제하기 때문일 겁니다. 적어도 알튀세르 자신은 맑스주의자로서 리얼리티는 계급투쟁, 특히 생산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리얼리티를 직접 인식하지 않고 상상계를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정의하죠.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 또는 이렇게도 정의합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 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다."

 

여기서 핵심 논점은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현실적인 실존 조건이란 계급적 조건을 말합니다. 곧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사회에서 모든 인간, 개인은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추상적인 개인이나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떤 계급에 속한 사람은 어떤 계급의 성원으로 나타나지 않고(재벌, 노동자, 농민, 지식인 ...)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나타납니다. 곧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급 성원으로서 x는 추상적인 개인 x로서, 계급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그러한 조건에 앞서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개인으로서 상상적으로 표상/재현/상연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은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전혀 환상적이거나 공상적인 것은 아닌데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는 법적 체계를 통해 모든 사람을 법적 주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주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도적 차원에서 그렇게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실 사회에서 각 개인은 계급이라는 현실적인 존재조건에 따라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계급적 조건에 선행하는 추상적인 개인 x로 나타나며, 또한 이데올로기적 제도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어 있는 거죠.

 

알튀세르가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든 사례를 보면, 노동자와 자본가는 계급적으로 상이하고 또 불평등하지만, 법적인 관계에서 보면 동등한 개인, 동등한 법적 주체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고용 계약을 맺는 거죠.

 

3) 이렇게 본다면,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게 '경제'를 '리얼리티'로 간주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리얼리티에 대한 '표상'이나 '상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리얼리티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고전 맑스주의와 상당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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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마 2012-04-13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알튀세르를 왜곡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조심스럽게 얘기할 필요는 있지만 그게 바로 알튀세르의 머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아닐까요? (알튀세르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의 정의는 아닐지라도)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리얼리티"라면 다른 것들, 예를 들어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등```(한도 끝도 없다!) 이것들은 "리얼리티"인지 아닌지 궁금하군요. 그건 리얼리티를 계급으로 환원한 것 아닌가요?

가장 궁금한 것은 알튀세르는 어떻게 그것이 "리얼리티"인지를 알았는가? 하는 겁니다.

덧붙이자면 "민족"이나 "국민"만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로 표현된 이상) "계급"이라는 것도 모호한 것입니다.

좀 더 고백하자면 저는 "리얼리티"가 언어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리얼리티"는 언어 바깥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비로소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보는 거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겠죠.

어쨌든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포스트맑스주의를 섞어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를 왜곡한 게 되겠군요.)

그렇다고 해도 선거를 통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 없다! 는 주장을 철회할 필요는 없겠죠?


balmas 2012-04-14 01:46   좋아요 0 | URL
ㅎㅎ 예 맞습니다. 그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아마 알튀세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알튀세르의 경우에는 더 역설적일 수 있을 텐데요, 다른 누구보다도 비경제적인 것(곧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역사와 정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이 알튀세르였으니 그렇겠죠. 다만 알튀세르(를 포함한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왜 경제만 리얼리티냐,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등(하도 끝도 없다)도 모두 리얼리티 아니냐'라고 반문할 경우, 다시 말해 리얼리티의 복수성, 다수성을 무한정하게 확장할 경우, 인식론적 비규정성에, 따라서 정치적 무력화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 걱정스러웠겠죠. 사실 도그마님이 질문한 것처럼,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이 다 리얼리티라면, 따라서 경제와 똑같은 인식론적, 정치적 비중을 지니게 된다면, 거기에 더 이상 정치가 존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더욱이 어떤 포스트맑스주의자도 아마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같은 것을 '경제'와 대등한 리얼리티라고 하지는 않겠죠.

'선거를 통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은 저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선거말고 다른 것을 통해서만 리얼리티가 바뀐다는 뜻인지, 아니면 리얼리티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는 뜻인지도 불분명하구요. 우선 도그마님의 생각을 스스로 좀더 정확히 정리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그마 2012-05-07 13:3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 세계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프랑스나 한국이나) 선거를 통해서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 정의에 좀 더 충실해도 프랑스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모른다고 결론내려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알튀세르의 정의에 충실하다면 "누군가는 리얼리티를 안다"고 되기 때문에 좀 더 복잡해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