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5.18 Wed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의 정신

얼굴은 본적이 없지만 이따금 이메일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얼마 전에 광주항쟁에 대해 잘 모르니 알 수 있는 책이나 사이트를 소개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의외였습니다. 그는 요즘치곤 꽤 반듯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는 대학생인데 어떻게 광주를 모를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지금 대학생이면 1980년엔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어린아이였으니 말입니다. 당시 고3이었고 청년 시절 내내 광주를 품고 살았던 저희 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저와 비슷한 세대이면서 광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태”라고 할 때는 “사태”인 줄 알고 “항쟁”이라고 하니 “항쟁”인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무식하다’고 합니다. 유식하다 무식하다는 제도교육 학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한국 사회는 갈수록 그런 무식한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하여튼 광주는 25년이 되었고 다른 모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속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 속의 사건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광주항쟁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부하고 싶은 건 광주항쟁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하라는 겁니다. 광주항쟁을 제대로 모르면서 한국 사회와 역사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학술적인 책을 사볼 것까진 없고 여러분들 아마도 매일 인터넷에 들어갈 테니 시간을 조금만 헐어서 광주항쟁 관련한 사이트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기본적인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은 5.18기념재단도 있고 여럿 있습니다.

광주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광주항쟁을 통해 이른바 ‘민주주의’의 뜻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광주 전의 민주화 운동은 반독재 운동, 즉 선거나 개인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절차를 회복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좀 딱딱하게 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었지요. 그러나 광주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좀 더 근본적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운동으로 바뀝니다.
그 동기는 미국입니다. 광주가 계엄군이 일시 퇴각하고 해방된 상태이던 80년 5월 24일 미국 항공모함 코럴씨 호가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론 신군부의 쿠데타나 계엄군의 작전은 미국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진행되고 있었죠.
광주를 거치면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미국에 대한 자각이 생기는데 이건 미국이라는 일개 나라에 대한 자각을 넘어 미국식 민주주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으로 발전합니다. 80년 5월 22일부터 닷새 동안의 해방 광주의 모습은 바로 그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그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광주를 진압한 군사 파시즘은 더 강력한 공포정치에 들어갔지만 그럴수록 저항은 되살아났습니다. 80년대 중반이 채 되기 전에 한국의 사회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좇는 부분이 남아있었지만 그 성원의 대부분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좇는 변혁적인 성격을 갖게 됩니다.
87년 6월 29일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한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을 거쳐 절차적 민주주의는 계속 정착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80년대에 변혁운동을 했던 운동세력의 상당수가 변신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민주주의니 변혁이니 하는 건 다 지나간 일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사회주의가 80년대 말 무너지자 그들도 함께 무너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속이기로 한 것입니다.
절망감에 빠진 많은 청년들이 사회운동을 포기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사람을 욕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운동 안 했던 사람에 비하면 백배 훌륭한 사람들이지요. 모든 사람이 활동가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니 현실적인 삶을 살면서도 얼마든 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을 사용해서 주류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불거지는 경우는 이른바 ‘386정치인들’입니다. 학생 시절의 신념은 슬그머니 뒤로 버리고 그 운동을 통해 얻은 제 명망을 사용해서 제도 정치권에 들어갔습니다. 세상이 달라졌다느니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느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다 개소리고 그들은 결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 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10년 쯤 지나면 이 자리에서도 역시 그런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운동의 종목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바로 90년대 중반 이후 급성장한 시민운동입니다. 활동가라면 한눈에도 체제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영등포나 구로동에 구질구질한 사무실에서 구질구질한 옷차림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젠 시내 한 복판에 번듯한 사무실에 넥타이를 맨 활동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운동의 주제는 근본적인 것에서 시민의 일상과 관련한 것들, 다시 말해서 체제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체제 안의 문제들을 위주로 했고 시위나 싸움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빠른 시간 안에 대중의 각광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안티조선운동을 비롯한 언론개혁운동, 정치개혁운동들과 결합하고 확산되면서 결국 정권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그런 개혁운동들이 갖는 의미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안티조선 운동의 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제가 만들었던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는 일종의 좌우 합작이었지만 공동의 적은 조선일보라고 밝히고 있지요. 저는 개혁운동의 진보운동의 일부라는 사실과 기존의 진보운동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잡아냈다는 사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그 운동이 갖는 반동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 운동이 여전히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진보운동을 철지난 운동,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행태로 몰아붙이는 부분에 대해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하든 안 하든 개혁운동이 ‘오늘의 진보운동’을 자처하는 한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운동이 진보를 자처하면 한국사회는 보수 대 진보의 구도가 아니라 극우보수 대 개혁보수의 구도가 되고 진보는 아예 무대에서 밀려나버리는 것입니다.
개혁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혁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야만과 폭력성을 제거하여'합리화'하는 운동입니다. 세상이 바뀐다고 하는 것은 나쁜 신문이 곤경에 처하고 비리 정치인이 잡혀 들어간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세상의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도 언론이나 정치란 바로 세상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왜곡이나 비리가 줄어든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바뀐다는 건 바로 그 언론이나 정치의 뿌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의 문제이고 계급적 문제입니다. 그 부분에서 한국사회는 민주화와 개혁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양극화되고 있다는 건 이젠 한나라당 의원들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노동자들의 생활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 절반은 비정규노동자고 그 비율은 늘어가는 중입니다. 농업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포기한 지 오래지요. 그런 문제들은 개혁운동에서 배제되고 촛불시위에서도 배제됩니다.
이런데도 여전히 언론개혁이나 정치개혁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면 초인적으로 순진한 사람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이 학교 안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근래 맑스주의가 어떻고 좌파가 어떻고 말하는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도 모르게 개혁운동의 최면에 빠져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파시즘 상태에 있습니다. 새로운 파시즘, 군사파시즘이 아니라 자본의 파시즘이지요. 군사파시즘은 억압과 폭력으로 우리를 다스리지만 자본의 파시즘은 우리에게 자본의 욕망을 심어서 스스로 복종하게 만듭니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본의 매우 충성스런 백성들입니다. 얼마 전 고대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와 관련한 반응들은 바로 그 사실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고대나 고대학생들의 태도가 “밥그릇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인터넷 신문에 보니까 그 발언을 두고 “직격탄을 날렸다”고 적혀 있던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밥그릇 때문”이라는 말은 속으론 인정하지 않지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어쩔 수없이 인정한다는 뜻인데 제가 보기엔 그게 아니라 그들은 진짜로 진심으로 이건희를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그들은 이건희와 다른 건 이건희보다 돈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노동자 착취와 정경유착과 온갖 비리로 부자가 된 아버지를 둔 덕에 부자가 되어선 다시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재산을 제 자식에게 상속하는 사람이 한국이 자랑하는 기업인입니까? 노조조차 만들 수 없는, 노동자들의 위치추적을 하고 협박을 하는 회사가 세계적인 첨단 기업입니까? 지금 한국 사람들이얼마나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지 뻔히 알면서 프랑스의 스키장을 통째로 빌려서 스키를 타는 인간이 과연 철학을 가진 인간입니까? 그런 인간에게 이 나라의 대표적인 명문대학이라는 곳에서 명예 철학 박사학위를 주려고 작전을 벌이고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학생들이 현실을 깨우쳐주었는데도 총장은 엎드려 용서를 빌고 보직교수들은 사퇴서를 내고 수천명의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탄핵하는 서명을 하고, 이게 대체 정신병원입니까 대학입니까?
그러나 바로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한국인들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건희라는 파렴치한 인간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한국인들에게 더 이상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성이라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게 원수라 저런 놈 밑에서 일한다”고 부끄러워해도 신통치 않을 판에, 그런 파렴치한 인간을 왕처럼 떠받들며 노조조차 없는 회사에서 ‘삼성맨’의 자부심에 젖어 삽니다. 참으로 무지한 그러나 돈은 많은 주인 아래서 배불리 먹여준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머슴들이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런 삼성맨을 부러워합니다. 대학생들은 삼성맨이 못되어서 안달이 나고 그들의 아버지들은 이건희처럼 살수 없다는 것을 인생의 한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 모든 사람이 자본의 권력에 자발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탄압받고 억압받아도 정신만은 해방되어 있던 시절보다 스스로 정신을 내어준 시절은 더욱 끔찍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절보다 나은 음식을 먹고 자가용과 휴대폰을 갖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욕망이 인간을 억압하는 걸 넘어 우리 스스로 자본의 욕망에 젖어서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고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뭘 가르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오늘 부모들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경쟁에서 동무를 누르고 이길 것만을 가르치고 사랑이나 존경조차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지요.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서 엘리트가 된다 한들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돈으로 안락을 살 수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박사학위를 얻을 수는 있지만 그 박사학위는 내가 아니라 돈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이건희가 돈이 없다면 누가 그를 존경할까요? 모든 사람이 그의 돈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이건희 씨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프랑스에 가서 스키장을 통째로 빌려서 울타리 밖에선 다 보고 있는데 혼자 스키를 타는 사람이 과연 자의식을 가진 인간일까요? 여러분 같으면 쪽팔려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정신이 완전히 파탄 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건희라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대체 얼마나 추켜올렸으면 사람이 그 지경이 되었을까요?
오늘은 5.18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부른 이유도 오늘이 5.18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묵념도 했지만 5월에 죽어간 사람들,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광주는 처음엔 엘리트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마지막에 가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떠납니다. 계엄군과 협상을 해서 더 이상의 희생을 줄여야 한다, 헛되게 죽지 말고 힘을 기르자,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를 주장하던 수습파들은 떠나고 무릎 꿇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항쟁파만 남습니다. 그 순간부터 시민군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부터 광주 인민의 군대라고 해야 맞습니다. 항쟁파의 대부분은 평소에 인간 취급 못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인간으로서 품위가 목숨보다 귀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 취급 못 받고 사는 세상,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처럼 살자. 결국 그들만이 인간의 품위를 간직했습니다.
지나간 일, 자신의 삶과 직접 관련을 갖지 않는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주 진보적이라는 역사학자 한 분이 대학생 시절의 추억까지 끌어대면서 유시민 씨를 두둔하고 나서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 체 게바라나 김산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우리는 현실 속의 체 게베라나 김산엔 관심이 없거나 그들을 비웃곤 하지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주에서 끝까지 싸웠던 사람들을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다시는 만난 수 없는 늙은 어머니, 처음으로 입을 맞춘 날의 두근거림이 그대로 남은 애인, 제 목숨보다 귀한 새끼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독립군들처럼 죽고 나서 존경과 명예가 남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폭도요 빨갱이로 남는 것입니다. 남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언제까지 어떤 고통을 겪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끝까지 총을 들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정신입니다.
여러분들 매일 밤 인터넷에서 활동하지요? 지금 이 나라의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먹고 나서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 다들 사회평론가로 활동합니다. 바야흐로 온 국민이 사회평론가인 시절이지요. 그러나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얼굴이지만 그 대부분은 개혁이라는 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을 뿐입니다. 체제는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이라고 부추기고 그들은 다시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들”로서 활동합니다. 오로지 체제가 제공하는 이슈에 매일 밤 메뚜기 떼처럼 몰려다니며 좀 더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들을 은폐하는 데 동원되지요.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광주의 정신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당장 실현가능한 문제에만 매몰되지 말고 우리가 인간임을 진정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아니 설사 내 생애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라 해도 그것이 옳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그 일에 대한 신념을 버려선 안 됩니다. 중세의 암흑 속에서 근대라는 세상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신념을 버리지 않은 아주 적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서 어떤 소리를 들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했겠지요. 그러나 바로 그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 깨지고 또 깨지면서 결국 중세는 무너집니다. 우리의 암흑도 그렇게 무너질 것입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정신,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연세대 강연문)

Posted by gyuhang at 2005.05.18 11:4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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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5-21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이었군요.

balmas 2005-05-2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무슨 말씀이신지 ...
어디에서 이 글 가지고 논란이 있었나요?

사량 2005-05-2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대 강연문'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선생님은 '연세대 강연문' 안 올려주시나요? ^^;;;

balmas 2005-05-23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님, ㅎㅎㅎ 연세대 강연문은 지금 올릴지 말지 생각 중이랍니다. ^^;;
 
 전출처 : 딸기 > 네무코님을 위한 중동/이슬람 책소개

어차피 저는 일 때문에 이쪽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고, 네무코님이야 일 때문에 공부를 하셔야 하는 입장은 아니니까 그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들, 제가 본 것 중에서 일러드릴께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

★ 이슬람에 대한 개설서들

1001개의 거짓말 - 문학동네 세계문학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한 책은 아닙니다. 그냥 소설입니다.
하지만 중동 쪽에 관심이 전혀 없으시더라도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술탄 살라딘을 읽으셨으니, 다음엔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
라픽 사미는 시리아 작가인데, 이 소설 증말증말 재미있습니다!


중동의 새로운 이해 - 국가안보정책연구소 기획총서 1
손주영 외 엮음 / 오름

저는 이 책을 읽었지만 이게 좀 옛날 책이예요.
아무튼 이슬람에 대한 개괄서를 한권 읽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이슬람'이라는 제목으로 이희수 교수의 책과 손주영 교수의 책이 나와있는데,
둘 다 안 읽어봤습니다만-- 저라면 손교수 책을 읽겠습니다. 
국내에는 저명한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책도 몇권 나와 있지만,
사실 루이스의 책은 '재미'는 별로 없습니다. 굳이 공부하실 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해요.


이슬람문명
정수일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이 책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고졸한 문체에, 글 읽는 맛이 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
위의 이슬람 책이나 이 책, 둘 중에서 골라서 읽으셔도 무방할 듯.

★ 조금 더 나아가고 싶으시다면


이슬람 1400년
버나드 루이스 엮음, 김호동 옮김 / 까치글방

루이스의 책으로는 '중동의 역사'와 '무엇이 잘못되었나'도 나와 있는데요,
'중동의 역사'나 이 책 중에 한권 골라보시면 될 듯.
둘 중에선 이 책이 더 쉽게 읽힐 것 같아요.


근본주의의 충돌 - 아메리코필리아와 옥시덴털리즘을 넘어
타리크 알리 지음, 정철수 옮김 / 미토

'술탄 살라딘'의 그 작가, 타리크 알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장병옥.이윤섭 옮김 / 창해

아무래도 이쪽 책을 읽다보면 (맘에 안 드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프리드먼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은 쓰여진 시기가 좀 오래되긴 했고,
이후 프리드먼의 관점도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고나면
중동 뉴스가 좀 달리 보일 거예요 ^^
프리드먼의 또다른 책 '경도와 태도'를 읽으셔도 좋고요.


★ 더 세분화된 주제들을 다룬 책으로는


추악한 전쟁 - 아프가니스탄, 미국 그리고 국제 테러리즘
존 K. 쿨리 지음, 소병일 옮김 / 이지북

9.11과 빈라덴, 아프간, 그리고 이른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에 대해
이 책만큼 잘 서술한 책은 못 봤습니다.
문제는... 번역이 개판 x 50000000000000000000000 이어서요... ㅠ.ㅠ


예루살렘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지음, 이동진 옮김 / 그린비

네무코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예루살렘에 대한 책입니다.
작가가 그리스정교 쪽 사람인지라 아무래도 편견이 없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지역 르포를 만화로 담은 건데요,
이걸로 그 동네 사정을 알기는 사실 힘듭니다만. 우선은 이걸 보시면
'선입견' 같은 것은 많이 없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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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0)

 

 

 

 

원래는 지난 주말에 작성되어야 하는 글이었는데, 사정상 며칠 늦어졌다. 그 런 사정을 반영하여, 제일 처음에 꼽고자 하는 것은 새로 나온 <단테>와 그 해설서이다. 이건 오늘 아침에 한국일보에서 <신곡>을 완역한 한국외대 한형곤 교수와 그 해설서 <신곡 - 단테, 신의 나라로 여행을 시작하다>(서해문집)를 쓴 부산외대 박상진 교수의 대화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다시 검색해 보니까 한형곤 교수의 이탈리어어 완역본은 지난 78년에 삼성출판사(세계문학전집)에서 나왔었고, 2003년에 개역본이 한국외대출판부에서 <풀어 쓴 단테의 신곡>으로 다시 나왔다. 이후에 새로운 판본이 다시 나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요즘 <신곡>보다 더 많이 팔려나가는 것은 <단테 클럽>이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같이 단테의 이름을 '참칭'한 책들이지만,  교양있는 독자라면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세계 3대 문호로까지 꼽히는 단테의 <신곡>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혹은 읽은 척이라고 할 필요가 있고, 적어도 책이라도 서가에 꽂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말 역자나 해설자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커녕 끝까지 다 읽은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나부터도 그렇지만). 그건 원작 자체가 완벽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시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번역도 까다롭거니와 원작의 맛을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 이 '숭고한' 책에 대해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건 읽어보려고 노력하거나, 읽은 척하는 것이다. 다시 나온 번역본이나 새로 나온 해설서가 요긴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적어도 읽은 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정말로 '읽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게 '읽은' 한국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나로서도 단테는 (페트라르카 등과 함께) 하나의 콤플렉스 거리이다. 푸슈킨도 이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해서 여러 모로 참조하고 있지만("푸슈킨과 단테"라는 게 "푸슈킨과 셰익스피어"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연구주제이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고골의 <죽은 혼>이 그 3부작 구성에 있어서 이 <신곡>의 구성을 의도했었다는 점. 그러니, <죽은 혼>을 (강의에서건 어디에서건) 얘기할 때마다 단테의 <신곡>도 덩달아 언급하게 되지만, '정보' 이상의 내용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강의'에 걸맞는 얘기를 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하지만, '언어장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여건상 그간에는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이번에 나온 해설서는 그런 의미에서 반갑다. 물론 영어권에서 나온 해설서들도 참조할 수 있겠지만, <신곡>을 영역본으로 읽는 건 또 만만하겠는가?(나는 러시아어본도 구하긴 했다.)  

지난 2월에는 단테의 <새로운 인생>(민음사)도 우리말 번역본을 얻은바 있으니 언제 짬을 내서 단테의 세계로 한번 잠수해볼 일이다(이 책은 이탈리어 역이 아니라, 단테 로세티의 영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T. S. 엘리엇에 의하면,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 그 사이에 제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괴테가 들으면 섭섭해 할 일이지만, 하여간에 사정들이 그러하다고도 하니 우리의 얄팍한 교양에 (헛)바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라도 단테를 좀 읽어보도록 하자(중2 때 단테의 <신곡>을 들고 다니던 한 친구 때문에 나도 덩달아 얄팍한 번역서 한 권을 들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번역이 제대로 읽혔을 리 없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해설에서 읽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뿐).  

 

 

 

 

두번째 책은, 역시나 우리의 교양과 관련된, 그리고 단테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첫손가락에 꼽았을 책인바,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문학동네)이다.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의 형이기도 이탈리아 출신의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는(우리의 경우 그런 형을 둔 영화감독으로 봉준호가 있다) 동생만큼 유명한 건 아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영문학 '연구자'의 한 사람이다(그에게 걸맞는 칭호는 '이론가'나 '비평가'가 아니라 '연구자'이다. 실제로 그는 스탠포드대학의 소설연구센터를 지휘하고 있는 연구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이미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로 우리에게 소개된바 있고 몇 년전에는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지만, 겸손하게도 고작 '연구자'인 탓인지 주변에서 생각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모레티는 중요하다(적어도 재미있다). 그러니 읽을 필요가 있다. 중요해서건, 재미있어서건.(모레티는 페터 지마만큼 이론 지향적이지만, 테리 이글턴만큼 재미있다.) 

모레티는 문학연구에 통계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등을 도입하는 걸로 유명한데, 기본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제한다면, 그의 프로젝트는 '(러시아)형식주의 + 다위니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의 형식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그는 텍스트사회학의 창시자 페터 지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지마가 문학사회학의 상관항으로서 '텍스트성'을 파고든다면, 모레티는 대범하게 그러한 형식이나 텍스트성의 진화에 대해 고찰하고 기록한다(거기서 중요한 건 진화의 '단위'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아예 <유럽소설의 지도 1800-1900> 같은 걸 만들어보기도 한다. 비록 재미있다 하더라도 문학연구의 '핵심'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는 그의 작업 스타일은 내가 보기엔 역사학 연구에서 인구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인구변동의 통계나 다룰 듯하지만, 인구학적 접근은 역사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걸 얘기해주는데(가령 인구학자 토드의 <유럽의 발견> 같은 책), 모레티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 문학사를 '문학의 도살장'으로 보는 그의 시각은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참신한 것인지!

지난 1987년에 처음 나온 <세상의 이치>는 모레티의 비교적 초기 저작이다(나는 Verso에서 나온 이 1판을 갖고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얼마전 개정판이 나왔다. 확인해 보니까 2000년에 'New Edition'이 나온 것).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이란 부제에 걸맞게 책은 '상징적 형식으로서 교양소설'이 근대사회사의 전개 속에서 갖는 의미맥락을 추적하고 재구성한다. 그런데, 결코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면, "모레티의 저작에는 페이지마다 순수한 지성이 살아숨쉰다." 읽어볼 도리밖에.

참고로, 러시아문학과 관련해서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1831)과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1840)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러시아문학 작품(곧 교양소설)이다. 주로 스탕달을 다루고 있는 장에서. 이 때문에, 나는 이전에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었었다. 이들과 더불어 거명되고 있는 유일한 러시아인은 미하일 바흐친이다. 한가지, 사실주의(리얼리즘)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달한 문학형식이라는 게 모레티의 대전제인데,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게 러시아문학이며, 모레티 자신이 그 점을 시인하고 있다. 한 대담에서 루카치가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로 꼽은 톨스토이와 당대 러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모레티는 이렇게 답한다. "톨스토이는 제게 골치아픈 적수죠. 제 주장과 어긋나는 작가거든요. 이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안과밖>, 제12호, 273쪽) 모레티는 솔직한 사람이다.

 

 

 

 

세번째 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신제국주의>(한울). 아마도 현대 지리학자 중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학자이자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이가 하비일 것이다(그의 책은 최소한 7권이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번에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나무)라는 묵직한 책이 나온바 있는데, 이번엔 2003년에 나온 그의 최신간이다. 역자는 하비의 책을 번역한바 있는 최병두 교수. 하비에 대해선 영국 옥스포드의 좌파(맑시스트) 지리학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책 몇 권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고 있다), 이번 저자 소개를 보니까 뉴욕시립대학의 인류학과 교수로 돼 있다. 지리학자에서 인류학자로 변신? 한편으론, 그가 지리학의 외연을 거의 인류학 수준으로 확장했다는 걸 떠올려볼 수 있다(이 경우는 문화인류학의 하위범주로서 '도시인류학'이 될 것이다). 한편, 지난번에 나온 책과 관련하여 갖는 바람. 또 다른 '맑시스트' 마샬 버만에 따르면, 모더니티의 또다른 수도는 파리 외에 페테르부르크와 뉴욕이 있다. 하비급의 학자가 나서서 이 '두 도시 이야기'마저 파리 이야기만큼 써주었으면 좋겠다. 근대의 세 도시, 혹은 근대의 세 가지 유형학에 대하여. 

                    

 

 

 

 

네번째 책은 프랑스쪽의 '행동하는 지성'들에 관한 것. 거물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실천이성>(동문선)이 불쑥 나왔고, 드레퓌스 사건을 촉발했던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하다>(책세상)가 책세상문고의 한권으로 선보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유익한 책은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자인, 2002)인바,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 부르디외의 신간은 동문선의 간판 번역자 김웅권의 작품인데, 그가 번역한 <파스칼적 명상>에 대한 평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기에 나로선 유보적이다. <순진함의 유혹> 같은 좋은 번역서도 있는 반면에, <구조주의의 역사2-4> 같은 어수룩한 번역서도 내놓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는 다른 분들이 먼저 읽고 판별해 주었으면 한다(책값이 싼 것도 아니고). 여하튼, 부르디외의 거의 모든 책들이 번역되었다. 해서, 부르디외식 사회학이 한국에서도 꽃필 수 있을까? 기대는 해보지만, 판돈을 걸지는 않겠다. 부르디외 '전공자'가 태연하게 조선일보에도 글을 쓰는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 사회이기에.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꼽는 시집, 조정권의 <떠도는 몸들>(창비). <산정묘지>(민음사, 1991), <신성한 숲>(문학과지성사, 1994) 이후에 10여년만에 나온 신작 시집인데(정말이다!), 그런 만큼 기대해봄 직한 시집(적어놓고 보니 시인은 출판사들도 떠돌고 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때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산정묘지1')라고 선언했던 '조로한' 시인의 '후일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헌 누더기'의 행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서평들을 보니 시집의 컨셉은 여행인 듯하다. 동아일보 서평에 따르면,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자취가 깃든 여행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저자 자신은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일상에 발목을 잡히는 모습은 예술가로서 저자의 고민을 공감하게 한다. '어디로 가도 지상의 오줌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스스로를 망명자로 자처한다'(국내 망명자)는 이 같은 시인의 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망명시인의 명단을 하나 더 늘여야 할 모양이다...

05. 05. 18.

 

 

 

 

P.S. 알고 보니까 연초에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새로운 장정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표지만 바뀌었을 뿐,  편제나 내용 자체는 그닥 달라진 것 같지 않다(이젠 칼라화보라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얼마전 <씨네21>의 창간 10주년도 맞고 해서 영화관련 글들을 제법 읽게 되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있다. 조만간 영화와 영화비평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되기를(이렇게 적어놓으면, '의무감'에서라도 몇 자 적게 되지 않을까? 이런 게 화행, 곧 'speech act'이다)...   

 

 

 

 

 

P.S.2. 부르디외 사회학의 한국적 적용과 관련하여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책은 <문화와 계급>(동문선, 2002)이다. 그 중 문화자본에 대한 장미혜 박사의 (실증적인)연구가 나로선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장박사는 짐작에 "소비양식에 미치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상대적 효과" 같은 주제의 학위논문을 썼는데,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더듬어보자면, '경제자본'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문화자본'이라는 게 있고, 이 두 변수(돈과 눈높이)에 따라 네 가지 사회적 계층이 분류될 수 있다(이 경우 사회계층이란 게 이분법적이지 않다). (1)돈도 많고 눈도 높은 경우, (2)돈은 많지만 눈은 없는 경우, (3)돈은 없는데, 눈만 높은 경우, (4)돈도 없고 눈도 없는, 속편한 경우. 거기서 가장 '문제적인' 계층은 (3)이다. 책 살 돈은 없으면서 즐겨 책타령을 늘어놓는 어떤 이도 분류하자면 거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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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2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런데 단테의 [신곡]이 300쪽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축약본인가?
 
 전출처 : 숨은아이 > 서울아트시네마 소식/2005 제9회 인권영화제

2005 제9회 인권영화제
9th Seoul Human Rights Film Festival

2005. 5. 20. fri. ~ 5. 26. thu.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005년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인권운동사랑방 주최로 ‘제9회 인권영화제’를 진행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 ' 을 주제로 한 2005 제9회 인권영화제는 개막작-신자유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두 만담가의 행보를 쫓은 영화 ‘예스맨’ 을 시작으로 7일간 총 32여편 영화를 소개합니다. 모든 상영작은 무료 관람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섹션
‘먼지, 사북을 묻다’로 인권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미영 감독이 네팔 현지에서 제작한 ‘사레가마 송’이 눈에 띈다. 짧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카트만투 근교의 농촌 지역, 바네빠 아이들이 처한 고된 노동과, 카스트 차별을 노래로 풀어낸 작품. 여성영상집단 ‘움’이 제작한 ‘이반검열’ 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폭력과 피해를 당한 청소녀들의 증언을 통해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소녀 동성애자 인권침해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또한 사립학교의 파행적 운영과 부당한 인권 침해를 맞서 자발적 행동을 조직하는 청소녀들의 건강한 움직임을 담은 ‘학교이야기’,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과 착취를 고발하며 이를 국제적으로 알려내는 운동에 앞장섰던 소녀 이크발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 ‘한 노예 소년의 죽음’ 등도 상영된다.

○국내 작품
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에서 발생했던 부정선거, 폭력 시위 진압 등의 사건을 파헤친 ‘돌 속에 갇힌 말’(나루),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다룬 ‘진실의 문 '(김희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그린 ‘유언 '(박세연) 등이 선보인다.

○해외 작품
소비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잉여사회’(에릭 간디니), 동북아 패권주의적 재건축을 꿈꾸는 일본의 야심을 고발하는 ‘일본평화헌법’, 미국 미디어 그룹 폭스사의 우파적 성향을 분석한 ‘안티폭스: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전쟁 '(로버트 그린월드) 등이 주목할 만하다.

※ 문의:
인권영화제 사무국 02-741-2407 http://www.sarangbang.or.kr/hrfilm/2005hrfilm
서울아트시네마 02-720-9782, 02-745-3316 www.cinematheque.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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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에 대하여-2



그래서 이렇게 유럽의 [서문]이나 [후기]와 미국의 [서문]이나 [후기]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모든 유럽의 인문학자들이 다 유럽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은 아니며 모든 미국의 인문학자들이 미국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이념형”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 그런 의문이 든다. 왜 대개의 유럽 학자들은 [서문]이나 [후기]를 거의 쓰지 않든가, 또는 쓴다 하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흔적이 담긴 내용은 거의 싣지 않는 걸까? 또 왜 미국 학자들은 대개 [서문]이나 [후기]에 즐겨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담는 것일까?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떠오르는데, 미국의 저명한 분석철학자 중에 콰인이라는 사람이 있다(아니, 사망한 지 꽤 됐으니까, 있었다). 그 사람의 대표적인 저서 중에 󰡔논리적 관점에서󰡕라는 책이 있다. 여러 논문을 모은 논문 모음집인데, 그 책에 수록된 논문들 하나하나는 영미 분석철학의 전개과정에 정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글들이다(실은 상당히 난해한 논문들이다. 이렇게 영향력이 큰 글들은 대개 난해한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이 재미있다. 이 양반, [서문]에서 왜 자기 책의 제목을 “논리적 관점에서”라고 정했는지 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양반이 논리학에 매우 조예가 깊은 사람이고 책에 수록된 논문들도 대개 논리학에 관한 배경 지식을 가정하고 있는 것들이다(형식 언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분석철학자들의 글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 뭔가 거창한 이론적 배경이 나올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사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할 때에는 ‘논리학자니까 역시 책의 제목도 그렇게 다는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양반 왈, 자기가 언젠가 저녁 때 친구하고 동부인해서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마침 해리 벨라폰테가 즉흥곡으로 노래를 하나 연주하더란다. 그런데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 “논리적 관점에서”였다고. 제목을 얻은 단서도 재미있거니와, 유럽의 학자였다면 그런 에피소드를 천연덕스럽게 책의 [서문]에서 썼을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유럽 학자들하고 미국의 학자들하고 이렇게 [서문]이나 [후기]에서 차이가 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도 있을 듯하다. 말하자면 유럽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를 따로 잘 쓰지 않고, 또 쓰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건, 그 나름대로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기 때문이 아닐까? 곧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것은 공적인 일인데, 거기에 자신의 신변과 관련된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언급하는 건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활동 자체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생각 말이다. 반대로 미국의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에 사생활에 관한 흔적들을 담는다면, 그건 책의 저술이나 출판이라는 활동이 공적인 활동이긴 하되, 동시에 개인적인 삶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가령 유럽의 철학자는 자신이 철학자로서(위대한 철학자든 사소한 철학자든 간에) 쓴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의 철학자는 철학교수로서 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건 물론 유럽 철학자들은 독창적인 철학자고, 미국의 철학자는 한낱 교수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 미국 학자들이 보기에는 칸트도 철학교수였고, 하이데거도 철학교수였고, 콰인도 그랬고 등등이었을 것 같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자’로 존재하기 전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는 치과 의사나 택시 운전수나 야채 장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인 것이다. 철학을 가르쳐서 밥벌어먹고 산다는 게 다를 뿐 ...


더 나아가 여기에는 책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담겨 있는 듯하다. 유럽 학자들이 보기에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겉표지의 제목부터 뒷표지의 책소개글에 이르기까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공적인 사물 자체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책이라는 것은, 그것이 출판되는 순간부터, 그 책을 저술한 저자 자신도 마음대로 어찌 할 수가 없는 어떤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니 책의 한 부분을 슬쩍 떼어내어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집어넣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반면 미국 학자들에게도 역시 책이라는 것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고 공적으로 중요한 것이긴 한데, 단 [서문]이나 [후기]는 좀 예외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서문]이나 [후기]는 책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치외법권이어서, 거기에서는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한, 책을 지배하고 있는 공적인 규칙과 무관한, 자신의 사생활이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셈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 (주절주절 떠들고 보니까 좀 우스운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좀 재미있는 느낌도 들어서 올려본다. 그런데 이렇게 페이퍼를 올리는 행위는 사적인 것일까 공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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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5-2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즐거운 서재질 하시네요^^

balmas 2005-05-20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예, 간만에 "즐거운 서재질" ... ^^;;

menwchen 2005-05-2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즐거움은 전염되는가 봅니다.. ^^

balmas 2005-05-20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드무비 2005-05-2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인 거 아닌가요?
사적이어야 재밌고요.^^

클리오 2005-05-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후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밌게 읽고 갑니다~ 페이퍼는 사적인 거지요? 그거에 대해 책임지고 논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하니까요...

숨은아이 2005-05-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이면서 공적이지요. ^^ 그런데 "역자 후기에 대한 단상-1"에서 한 여자 선배님이 지적하셨다는 거요, 제가 아는 번역가가 늘 하는 말이거든요. 역자 후기는 그 책에서 역자가 유일하게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한 역자의 관점과 해석을 독자에게 설득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런 공간을 누구나 다 하는 말-남편에게 고맙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등등-로 채우다니! 하면서요. 사실 전 그때까지 역자 후기란 공간을 그냥 형식적인 걸로 치부했는데,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또 발마스님 글 덕분에, 책의 성격에 따라 그 책의 출판 과정을 말랑말랑하게 보여주는 것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

숨은아이 2005-05-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글 두 편 퍼가요.

balmas 2005-05-2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ㅎㅎㅎ 그럴까요?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면 재밌죠.
마치 훔쳐보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죠. ^^;;
클리오님/ 글쎄요, 딱 부러지게 사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숨은아이님 말씀처럼 <사적이면서 공적>이라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죠.
숨은아이님/ ㅎㅎ 독자들에 따라 선호가 좀 다른 것 같더라구요. 어떤 독자들은
역자 후기나 저자 후기에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독자들은 아예 그런 거에 질색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ㅎㅎ 퍼가세요. ^^

stella.K 2005-05-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재를 한번 밖에 들어와 보질 못해 발마스님 글을 이제야 보는군요. 재밌습니다. 이 페이퍼는 약속대로 추천해야겠죠?^^

마냐 2005-05-2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알게모르게, 제가 미국적인 구석이 많군여. 생활인으로서의 직업의식 같은거..ㅋㅋㅋ 것참 재밌는 분석임다.

balmas 2005-05-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고마워요. 이제 보니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연세도 많으신데 ... ㅋㅋ
따우님도 고마워요. ^^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마냐님, ㅎㅎ 재미있으셨나요?
미국식이야 대세죠, 뭐. ^^

stella.K 2005-05-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있으면 발마스님을 잊게 될지도...사실은 저 메멘토거든요. ㅋㅋ.

balmas 2005-05-2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혹시 벌써 잊으신 건 아닌지 ...

stella.K 2005-05-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의 팔에 '잊지 말자 발마스!'이렇게 써놨다는...ㅋㅋ.

balmas 2005-05-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써놓은 김에 다른 글에도 추천해 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