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에 대하여-2



그래서 이렇게 유럽의 [서문]이나 [후기]와 미국의 [서문]이나 [후기]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모든 유럽의 인문학자들이 다 유럽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은 아니며 모든 미국의 인문학자들이 미국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이념형”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 그런 의문이 든다. 왜 대개의 유럽 학자들은 [서문]이나 [후기]를 거의 쓰지 않든가, 또는 쓴다 하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흔적이 담긴 내용은 거의 싣지 않는 걸까? 또 왜 미국 학자들은 대개 [서문]이나 [후기]에 즐겨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담는 것일까?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떠오르는데, 미국의 저명한 분석철학자 중에 콰인이라는 사람이 있다(아니, 사망한 지 꽤 됐으니까, 있었다). 그 사람의 대표적인 저서 중에 󰡔논리적 관점에서󰡕라는 책이 있다. 여러 논문을 모은 논문 모음집인데, 그 책에 수록된 논문들 하나하나는 영미 분석철학의 전개과정에 정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글들이다(실은 상당히 난해한 논문들이다. 이렇게 영향력이 큰 글들은 대개 난해한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이 재미있다. 이 양반, [서문]에서 왜 자기 책의 제목을 “논리적 관점에서”라고 정했는지 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양반이 논리학에 매우 조예가 깊은 사람이고 책에 수록된 논문들도 대개 논리학에 관한 배경 지식을 가정하고 있는 것들이다(형식 언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분석철학자들의 글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 뭔가 거창한 이론적 배경이 나올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사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할 때에는 ‘논리학자니까 역시 책의 제목도 그렇게 다는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양반 왈, 자기가 언젠가 저녁 때 친구하고 동부인해서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마침 해리 벨라폰테가 즉흥곡으로 노래를 하나 연주하더란다. 그런데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 “논리적 관점에서”였다고. 제목을 얻은 단서도 재미있거니와, 유럽의 학자였다면 그런 에피소드를 천연덕스럽게 책의 [서문]에서 썼을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유럽 학자들하고 미국의 학자들하고 이렇게 [서문]이나 [후기]에서 차이가 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도 있을 듯하다. 말하자면 유럽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를 따로 잘 쓰지 않고, 또 쓰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건, 그 나름대로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기 때문이 아닐까? 곧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것은 공적인 일인데, 거기에 자신의 신변과 관련된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언급하는 건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활동 자체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생각 말이다. 반대로 미국의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에 사생활에 관한 흔적들을 담는다면, 그건 책의 저술이나 출판이라는 활동이 공적인 활동이긴 하되, 동시에 개인적인 삶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가령 유럽의 철학자는 자신이 철학자로서(위대한 철학자든 사소한 철학자든 간에) 쓴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의 철학자는 철학교수로서 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건 물론 유럽 철학자들은 독창적인 철학자고, 미국의 철학자는 한낱 교수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 미국 학자들이 보기에는 칸트도 철학교수였고, 하이데거도 철학교수였고, 콰인도 그랬고 등등이었을 것 같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자’로 존재하기 전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는 치과 의사나 택시 운전수나 야채 장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인 것이다. 철학을 가르쳐서 밥벌어먹고 산다는 게 다를 뿐 ...


더 나아가 여기에는 책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담겨 있는 듯하다. 유럽 학자들이 보기에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겉표지의 제목부터 뒷표지의 책소개글에 이르기까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공적인 사물 자체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책이라는 것은, 그것이 출판되는 순간부터, 그 책을 저술한 저자 자신도 마음대로 어찌 할 수가 없는 어떤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니 책의 한 부분을 슬쩍 떼어내어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집어넣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반면 미국 학자들에게도 역시 책이라는 것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고 공적으로 중요한 것이긴 한데, 단 [서문]이나 [후기]는 좀 예외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서문]이나 [후기]는 책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치외법권이어서, 거기에서는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한, 책을 지배하고 있는 공적인 규칙과 무관한, 자신의 사생활이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셈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 (주절주절 떠들고 보니까 좀 우스운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좀 재미있는 느낌도 들어서 올려본다. 그런데 이렇게 페이퍼를 올리는 행위는 사적인 것일까 공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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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5-2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즐거운 서재질 하시네요^^

balmas 2005-05-20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예, 간만에 "즐거운 서재질" ... ^^;;

menwchen 2005-05-2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즐거움은 전염되는가 봅니다.. ^^

balmas 2005-05-20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드무비 2005-05-2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인 거 아닌가요?
사적이어야 재밌고요.^^

클리오 2005-05-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후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밌게 읽고 갑니다~ 페이퍼는 사적인 거지요? 그거에 대해 책임지고 논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하니까요...

숨은아이 2005-05-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이면서 공적이지요. ^^ 그런데 "역자 후기에 대한 단상-1"에서 한 여자 선배님이 지적하셨다는 거요, 제가 아는 번역가가 늘 하는 말이거든요. 역자 후기는 그 책에서 역자가 유일하게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한 역자의 관점과 해석을 독자에게 설득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런 공간을 누구나 다 하는 말-남편에게 고맙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등등-로 채우다니! 하면서요. 사실 전 그때까지 역자 후기란 공간을 그냥 형식적인 걸로 치부했는데,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또 발마스님 글 덕분에, 책의 성격에 따라 그 책의 출판 과정을 말랑말랑하게 보여주는 것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

숨은아이 2005-05-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글 두 편 퍼가요.

balmas 2005-05-2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ㅎㅎㅎ 그럴까요?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면 재밌죠.
마치 훔쳐보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죠. ^^;;
클리오님/ 글쎄요, 딱 부러지게 사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숨은아이님 말씀처럼 <사적이면서 공적>이라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죠.
숨은아이님/ ㅎㅎ 독자들에 따라 선호가 좀 다른 것 같더라구요. 어떤 독자들은
역자 후기나 저자 후기에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독자들은 아예 그런 거에 질색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ㅎㅎ 퍼가세요. ^^

stella.K 2005-05-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재를 한번 밖에 들어와 보질 못해 발마스님 글을 이제야 보는군요. 재밌습니다. 이 페이퍼는 약속대로 추천해야겠죠?^^

마냐 2005-05-2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알게모르게, 제가 미국적인 구석이 많군여. 생활인으로서의 직업의식 같은거..ㅋㅋㅋ 것참 재밌는 분석임다.

balmas 2005-05-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고마워요. 이제 보니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연세도 많으신데 ... ㅋㅋ
따우님도 고마워요. ^^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마냐님, ㅎㅎ 재미있으셨나요?
미국식이야 대세죠, 뭐. ^^

stella.K 2005-05-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있으면 발마스님을 잊게 될지도...사실은 저 메멘토거든요. ㅋㅋ.

balmas 2005-05-2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혹시 벌써 잊으신 건 아닌지 ...

stella.K 2005-05-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의 팔에 '잊지 말자 발마스!'이렇게 써놨다는...ㅋㅋ.

balmas 2005-05-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써놓은 김에 다른 글에도 추천해 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