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과학에 관한 담론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책 한 권 소개하고 싶어서 페이퍼를 씁니다.

지난 주에 나온 책인데요,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제목이 붙은 책입이니다. 바로 요 놈!







제목만 봐서는 “또 한 권의 교양과학서군”라기 십상일 텐데, 사실은 그것과는 성격이 좀 다른 책이죠.


부제를 볼까요?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바로 이게 이 책의 부제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 책의 성격을 아주 정확하게 축약하고 있는 부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최신 과학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거나 요약해 놓은 대중과학서가 아니라, 신문이나 방송 같은 언론 매체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과학에 관한 담론이 믿을 만한 것인가, 타당한 것인가를 꼼꼼하게 따져보는 책입니다


사실 가히 과학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요즘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과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죠. 수만원이 넘는 교양과학서들이 좋은 판매실적을 올리고 있고, 초등학생을 위한 교양과학 시리즈도 수십종씩 나와 있고, 신문이나 TV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과학에 관한 기사나 특집 다큐멘터리를 싣고 있죠.


물론 이런 과학 이야기, 과학에 관한 담론의 절정은 최근 있었던 황우석 교수에 관한 이야기이겠죠. “산업 혁명”에 비견할 만한 세계사적인 과학 업적을 한국인이 해냈다는 자부심, 이 업적이 앞으로 낳을 수 있는 엄청난 경제적 효과에 대한 기대, 앞으로 이 연구가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구해내리라는 인류애적인 감동이 뒤섞여 언론은 앞다투어 “황우석찬가”를 쏟아냈고, 정부는 황교수를 연간 3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제 1호 최고과학자”로 선정함으로써 여기에 화답했죠.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반응도 대단했구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계나 시민단체에서 이처럼 대단한 황교수의 업적에 대해 “감히”(많은 네티즌들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더군요)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판을 제기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물론 일간신문이나 TV 등에서 이런 비판을 접하기는 어려웠고(MBC 100분 토론에서는 이 문제를 토론 주제로 다룬 적이 있기는 합니다), 일부 인터넷 신문 등이나 시민단체 사이트에 이런 비판이 실렸죠.


그래서 도대체 황우석 교수를 어떻게 봐야 할지, 좀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던 분들이 많았을 텐데, 이 책은 이 궁금증에 대해 적어도 조금은 해결을 해줍니다. 어떻게 해결해 주냐구요? 그건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알게 될 테고, 저는 그저 저자의 말을 약간 인용하는 걸로 그치겠습니다. 


“뇌가 구멍이 숭숭 뚫려 스펀지처럼 된다는 괴질이 광풍처럼, 때론 유령처럼, 유럽과 미국을 떠돌다 이웃 일본에까지 이르렀을 때, 황우석 교수팀이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 소를 세계 최초로 생산해 냈다는 보도가 대부분의 방송과 신문의 주요 뉴스와 1면을 장식했다. 광우병과 경제 침체로 시끄럽고도 우울했던 그해, 2003년의 마지막 달은 광우병에 대한 극적인 ‘반전’을 전하는 뉴스로 마감하는 듯했다.”


“프리온prion[광우병을 유발하는 인자]이라는 것의 실체와 ‘광우병’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쾌거’가 나왔다는 건 여러모로 어리둥절한 일이다. 그렇게 ‘생산’한 소가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와 관련한 부분에 대해선 이상할 만큼 침묵했다. 그리고, 한국을 먹여살릴 그 소가 정말 먹을 수 있는 소인지, 혹은 세계인이 그 소를 기꺼이 먹어줄 것인가라는, ‘유치한’ 의문 또한 ‘당연히’ 품지 않았다.”


결국 광우병 내성소에 대한 보도를 다른 방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광우병과 프리온이 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런데 광우병에 안 걸릴지도 모르는 소를 생산했다. 어떤 이론에 따르면 그럴 수도 있단다. 그 소가 정말 광우병에 안 걸릴지 어떨지는 아직 실험 전이라 모르겠다.>”([광우병 안 걸리는 소, 기묘한 이야기의 시작] 중에서 인용)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광우병 안 걸리는 소’는 황우석 교수를 확실한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 그러나 의심이 더 깊어지기 전에, 황우석 교수팀은 더욱 놀라운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 ‘영향력 지수’에서 최정상급이라 할 만한 저널에 논문이 실린 것이다. ... “복제한 (인간의)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했다”는 내용이다. 언론은 2개월 전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열광’했다.”


“이 연구는 “사람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 후 사람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배아 줄기세포를 얻은 것으로서, 처음부터 없던 개념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증거를 남겼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황우석 교수팀은, 기술적인 면에서 본다면, 난자의 핵을 제거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진전을 보았다.”


“황 교수 스스로, 인간 복제는 해서도 안 되는 일이며 현재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수시로 말해 왔지만, {사이언스}가 “올해의 10대 연구”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면서 밝힌 이유 안에는 그가 공개적으로 밝혀 온 ‘의도’와는 다른 것이 있었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가 “동물들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복제가 인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처음 입증했다”({조선일보} 2004년 12월 16일)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팀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인 제럴드 섀튼 박사는 여러 해 전부터 ‘원숭이 복제연구’에 매달려 왔으며, 그렇게 실험한 결과를 {사이언스} 등에 발표해 국제적 ‘뉴스’와 ‘이슈’를 제공해 온 사람이다. ... 그러나 원숭이의 체세포를 이용해 복제 배아를 만드는 연구는 난자의 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때문에 실패를 거듭했고, 결국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영장류의 복제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사이언스}에 발표한다.”


“황우석 교수는 섀튼과 같은 {사이언스} 단골 게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영장류 ... 복제불가라는 일종의 ‘항복 선언’을 취하하게 한 연구를 함으로써, “10대 연구”라는 것에도 선정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사람들이 인간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믿기를 바란다. 한편으로는 원숭이 복제 성공을 낙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최근의 원숭이 개체 복제 실패를 통해 사람들이 인간 복제가 불가능하다고 믿기를 바란다. 그렇게 “인간 복제에 대한 논란이 불식”되길 원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성공은, 기술적 혁신 이외에도, 242개의 건강한 난자를 얻을 수 있는 환경에 힘입은 바 크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목적으로 하는 ‘치료’라는 것이,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점을 얘기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 ‘흑백시대’로의 회귀] 중에서 인용)


“한국에서의 문제는, 난자 채취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든가 치료용이라고 말하고 연구용으로만 난자를 사용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가 “난치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것”이고, 거기서 한국의 경제와 자존심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세계가 얼마나 ‘찬사’를 보내고 있느냐 등을 전달하는 게 한국 언론의 주 업무가 된 듯하다. 한국인이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탓이기도 하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 지지자들의 주장은 현대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과학,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과학”의 이미지와 쉽게 결합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으로부터, 지지자들을 확산시키는 데 이미 성공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국가주의적 응원”이 덧붙는다. 한국인에게 지난 백 년의 역사는, 스스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외국에서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일이야말로 지고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정황’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단하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억압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심리적 분출구를 만들어 냈다.”

([‘치료용’ 줄기세포 연구’, 희망은 애드벌룬처럼]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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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6-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감사합니다, 새벽별님. ^_____________________^

알고싶다 2005-07-0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발마스님이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저 인형때문에?

클리오 2005-07-0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개군요.. 정말. 관심있어요... ^^

balmas 2005-07-0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암만 해도 이미지 덕을 많이 보는 듯 ...

balmas 2005-07-01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 사이에 클리오님이 ...

nemuko 2005-07-0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네요. 땡스투 두번째는 아마도 저일거예요^^

MANN 2005-07-0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balmas 2005-07-02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네무코님 감사합니다. 땡스투꺼정!!!
재미있게 읽으시기를 ...
MANN, 음, 재미있고 유익하더라구, 한번 꼭 읽어봐.
 
 전출처 : 인간아 > 책소개 [문화의 오역] - 이재호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오역을 꼼꼼하게 짚어냈다고 하는군요. 신화를 좋아하고 이윤기 선생 저서도 읽었지만 오역을 짚어내지 못한 눈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네요. 아래 링크는 한겨레 신문의 책 소개 기사입니다. 신화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한번 짚어보시길.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5/06/0090000002005062818180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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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6-3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옙~~~~~~~
 

 

 

게으르게 사는 방법, 게을러야 할 이유

 

'게으름뱅이' 톰 호지킨슨이 건네는 조언

 

 

지오리포트 <georeport@georeport.net>

          
지난해 첫 도입된 주5일 근무제가 오는 7월부터 일반 공무원과 종업원 30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확대 실시된다. 언론들은 앞 다퉈, 매주 이틀의 연휴로 인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전망하고 있다. 최근 한 일간지에 게재된 관련 기사의 제목이 도드라져 보인다. ‘48시간의 자유, 삶이 확 바뀐다’

48시간의 자유? 삶이 확 바뀐다?
주변을 둘러보면 적어도 '시간의 속도'는 늦춰지지 않을 듯하다. 새롭게 주5일 근무제의 적용을 받게 될 노동자에겐 벌써부터, "그 시간에 뭘 하지?"란 조바심이 앞선다. "뭘 안 하지?"라는 생각은 스며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어떤 이는 토요일 아침이면 도로가 막힐세라 ‘서둘러’ 짐을 챙겨 ‘바쁜’ 일정의 여행길에 나설 듯도 하고, 주머니 사정이 별로인 이들은 레저와 여행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처지를 초조하게 받아들일 듯도 하다.

휴일이 하루 늘어난 만큼, 나머지 5일의 업무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일주일에 이틀 쉰다고 해서 경쟁사회가 다소나마 느슨해질 것 같지도 않다. 그러기에 연휴를 ‘자기 계발’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으로 삼겠다는 이들도 눈에 띈다.

쉬는 시간임에도 그냥 쉬는 건 찜찜하고, 한갓진 '지금' 속에 몸을 내맡기는 것도 불안한지라,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재충전’ 하겠단다.
휴대폰도 아닌, 사람이건만.

휴일이 늘어도 시간의 체감 속도는 여전할 듯하다. 어떤 이들은 서둘러 행락의 대열에 끼느라, 자기계발을 위해 ‘재충전’하느라 몸이 바쁠 것이다. 그러지도 못하는 이들은 마음이 바쁠 것이다.

늘어날 휴일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늘어날 시간에 대한 강박증 또한 엿보이는 때다. 이럴 때 스스로 게으름뱅이임을 '자랑'하고, 게으름의 미덕을 일깨우는 어떤 이의 말에 귀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톰 호지킨슨(Tom Hodgkinson).
잡지 <아이들러(Idler, 게으름뱅이)>의 발행인이며, <게으름뱅이의 동반자: 게으른 문학 선집(The Idler's Companion: An Anthology of Lazy Literature)> <게으르게 사는 법(How To Be Idle)> 등 저서를 통해 강요된 ’노동윤리‘를 비판하고 여유로운 삶의 방식을 주창해 온 영국 작가이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조련‘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것이라고 을러대는 ’아침형 인간‘의 전도사들에겐 대책없는 한량으로 비칠 지도 모를 인물이다.

대안언론 Alternet(www.alternet.org)은 지난 25일자에 '게으름뱅이의 삶(An Idler's Life)'란 제목으로 톰 호지킨슨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인터뷰에서 호지킨슨은‘일을 덜 할수록, 더 많은 일을 한다’는 역설을 내세우면서, 창조적 삶을 위해선 게으름을 피우라고 권유하고 있다.

호지킨슨이 말하는 게으름은 무엇인지, 또 게으르게 사는 법은 무엇인지 소개한다. (물론 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진 영국에 발을 딛고 있는 작가의 눈높이와, 우리의 팍팍한 실정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편집자>



제목에 걸맞게 <아이들러>는 1년에 두 번만 '느긋하게' 발간된다

▲ 톰 호지킨슨이 발행하는 잡지 <아이들러(Idler, 게으름뱅이)> 최신호. '일에 대한 전쟁(War on work)'를 주제로 꾸몄다.  ⓒ The Idler
만약 일주일에 나흘만 일하거나,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전 10시까지 잠을 자고, 오후 3시엔 낮잠을 잔다(또는 티타임에 상쾌하게 걷거나).

그리고 하루 중 처음으로 한잔 하고 한가롭게 산책을 한다. 밤 10시가 되면 주점에서 맥주 몇 잔 기울이고, 자정에는 하늘을 바라본다. 새벽 4시에는 명상.

도대체 누가 이렇게 살고 있단 말인가?

톰 호지킨슨(Tom Hodgkinson)이 그런 사람이다. 미국에서 발간된 그의 저서 <게으르게 사는 법(How to be Idle)>은 여유로운 삶에 관한 보고서이며, 서구 특히 미국의 일중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지난해 사용하지 않은 휴가일이 모두 합쳐 4억1천500만 일이나 되며, 자신의 직업에 불만을 느끼는 비율이 53%에 달하는 이 사람들은 ‘성공적인 게으름’에 관한 호지킨슨의 조언에 귀기울여볼 만하다.

20대 초반, 호지킨슨은 대학졸업 이후 직업의 세계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잡지를 발간하고, 밴드 활동을 하고, 훌륭한 강의를 듣던 때를 떠올리며 “대학시절에 나는 어느 정도는 내 시간의 주인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직업에 대해 전적으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직업은 내 자유를 박탈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그 생활을 하면서 잠자리에서 일찍 못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됐다.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으며,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어요."

나태한 생활에 대해 죄스러운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그는 휴식의 미덕, 그리고 게으름과 창의성 간의 중요한 관계에 대해 조명한 새뮤얼 존슨의 평론집들을 접하게 됐다.

호지킨슨은 영국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갑자기 깨달았어요. 이봐요, 나는 게으른 바보가 아니라, (자발적인)게으름뱅이라고요. 게으름은 열망의 대상이며, 창조적 과정의 일부분이랍니다! 굉장히 멋진 거예요!”

‘무노동(un-labor)'의 결실은 지난 1993년 잡지 <아이들러(Idler, 게으름뱅이)>의 발행으로 나타났다.

이 잡지는 ‘게으름이 현대 사회에서 부당하게 비판받아왔으며, 이제는 정당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출범했다. 제목에 걸맞게 <아이들러>는 1년에 두 번만 '느긋하게' 발간된다.

<아이들러>의 평론과 기사들은 ‘허접한 일거리들(crap jobs)'에서부터, 직업을 갖지 않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점들, 그리고 점심시간에 대한 찬사에 이르기까지 게으름에 대한 모든 것들을 탐구하고 있다. 최근호의 표제 역시 ’일에 대한 전쟁(War on Work)'이다.

호지킨슨은 만약 일주일에 나흘만 일하거나,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라고 묻는다. <아이들러>의 황금률은 한 가지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즉, ‘사람이 창조하는 것은 그가 일에 쏟은 시간에 반비례 한다’는 것이다.

호지킨슨은 오후에 영국 데번에 있는 그의 농장에서 ‘빈둥거린’ 후 <마더 존스(Mother Jones: 미국의 한 대안언론)>와 인터뷰를 가졌다.

"궁극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는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

마더 존스: 우리는 늦게까지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휴가를 잘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들, 그리고 관심사를 소홀히 합니다. 뭐가 잘못된 건가요?

호지킨슨: 의외의 사실은 경제적인 산출의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일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혁신과 발전, 그리고 금융의 놀라운 기법으로 인해 사람들이 일을 덜 해도 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특히 미국의 경우 벤자민 프랭클린, 그리고 ‘시간은 곧 돈이다’라는, 돈에 관한 새로운 신념 탓인 듯합니다. 그 전에는 시간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죄악시했습니다.

▲ 톰 호지킨슨의 저서 <게으르게 사는 법(How To Be Idle)>.  ⓒ HarperCollins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모든 게 변했습니다.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시대에 이르자 사람들은 자급자족의 삶을 빼앗겼으며, 임금에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상층부는 일과 관련해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주입시키며 선전구호를 퍼뜨립니다. ‘당신들은 기대와는 달리 사회에 기여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그리고 일자리를 잃는 데 대한 공포감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지요. 가장 바람직한 일은 해고당하거나, 잉여노동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난 산송장처럼 되는 걸 원하지 않아.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어. 이제 나는 내 스스로의 꿈을 추구할 수 있단 말이야.”

마더 존스: 당신은 저서에서, 1760년까지는 권태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쓴 적이 있는데요.

호지킨슨 : 산업혁명, 즉 거대한 기계의 시대를 말한 거지요. 기계의 본질은, 기계가 하게 된 일을 사람들이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기계를 가동시키는 일을 해야 했고, 그 일에 진정한 기술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에릭 슐로서(Eric Schlosser)가 그의 저서 <패스트푸드의 제국(Fast Food Nation)>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는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지적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기계를 작동시키는 일을 더욱 쉽게 만들어, 임금을 최대한 낮추려는 것이지요.

"비틀즈의 노래들 중 대부분은 약 5분 내에 작곡됐을 것입니다"

과거 우리의 생활은 훨씬 다양했습니다. 천을 짜기도 하고, 마당도 가꾸고…모든 활동 반경에 '사람'이 있었지요. 멕시코 시골 마을에 가면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일은 여가와 함께 섞여있었고, 하루의 일과는 다채로웠기 때문에 권태롭지 않았던 겁니다.

19세기 문학작품을 보세요.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은 근본적으로 권태와 소외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관계 맺었던 중요한 것들을 상실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기는 일, 마당, 자연, 그리고 가족과 친구 말입니다.

마더 존스: ‘일을 덜 할수록, 더 많은 일을 한다’라는 역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호지킨슨 : 프랑스 사람들과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Travailler moins, produire plus”라고 말하더군요. “일을 덜 할수록, 더 많이 생산한다”라는 뜻입니다. 내 경험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아주 좋은 일자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 근무 중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일하는 척하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여자친구와 전화하는데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루에 두세 시간 열심히 일하고-정말 일하는 시간은 그 정도밖에 안되니까-나머지 시간은 공원 같은 데서 어슬렁거리면서 때우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투입한 시간과 산출된 결과의 질 사이에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비틀즈의 노래들 중 대부분은 약 5분 내에 작곡됐을 것입니다. 흔히 많은 업무가 투입된 것들이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과잉업무’가 원인인 거죠.

마더 존스: 우리가 끊임없이 일을 한다면, 정치에 덜 활동적이 되고 결국 투표할 시간조차 갖기 힘듭니다. 과잉업무는 민주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호지킨슨: 일을 적게 한다면 현실 정치와 조금 더 관련을 맺을 것입니다. 즉,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정치와 말입니다. 또한 임금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재미가 있어서 일을 하게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게으름뱅이’는 위험요소’로 간주됩니다.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돈을 벌거나 그 돈을 쓰는 일이 아니라면,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을 덜 한다면, 실제로는 사회에 더 많은 것을 주게 됩니다.

지배자의 희망은 규율 바르고, 기꺼이 말을 듣는, 그리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근로집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게으름뱅이’는 잠재적 ‘위험요소’로 간주됩니다. 그들은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존스: 과잉업무는 창의성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까?

호지킨슨: 우리들 대부분은 창조적이 될 기회를 양극단으로부터 압박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 모든 일들을 다 했으니 이제 펑펑 쓰면서 보상을 받아야지.”

시간이 돈이었고, 돈과 기계가 그토록 지배적인 것이 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원하기만 하면 남는 시간을 취미를 즐기는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옷을 만들거나, 빵을 굽거나, 요리를 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새를 관찰하든지, 꽃을 그리든지, 집에서 기타를 치는 것처럼 별 쓸데없는 일들을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 그런 시간들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가진 시간은 무엇일까요? 너무나 지쳤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TV라는 도피처로 빨려들기를 자청합니다. 나는 오로지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딱 한 가지 분야에 ‘아주’ 능숙한 것보다, 여러 가지 일들에 (적당하게) 익숙하게 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기타도, 피아노도 그런대로 칠 수 있고, 요리도 알맞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또는 나 스스로 자동차를 고칠 수 있고, 초보적인 목수일도 할 수 있고, 잡다한 글들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한정된 분야의 달인이 되는 것보다, 두루두루 조금씩은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보다 즐거운, 그리고 완전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 쓰는 것은 게으름뱅이에게는 더 할 바 없이 이상적인 일입니다"

마더 존스: 만약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책을 읽고, 당신의 조언을 따른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보다 덜 바쁘게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요?

호지킨슨: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며, 휘파람을 불고, 서로서로 모자 들며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 차겠지요. 한참을 걸어 시골에도 가보고, 매일매일 어슬렁거리며 지내겠지요.

그렇게 되기 위해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냐고요? 나도 모릅니다.
우울한 사실은, 이미 지난 수천 년 동안 여러 훌륭한 사람들이 내가 지금 책과 에세이들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말들을 해왔지만 세상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당신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운영해나갈 것인가”라고 묻지, “우리는 자본주의와 다른 체제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우리는 자본주의와 다른 체제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물론 나도 할 수 있고요.

<게으르게 사는 법>은 사람들에게 ‘자기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라’는 영감을 주기 위해 쓴 책입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돈은 얼마인가? 내게 필요한 신발은 몇 켤레인가?

마더 존스: 처음 <게으르게 사는 법>을 집어 들었을 땐, 이 책이 ‘자기수양서’ 같다는- 어떤 점에서는 그렇기도 하지만-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는 사회적 비평, 그리고 ‘과잉업무’의 역사에 대한 견해를 담고 있더군요.

호지킨슨: 나는 ‘게으르게 사는 법(How To Be Idle)'이란 제목을 붙일 때 신중을 기했습니다. 상업적인 느낌을 풍길 수 있다는 우려를 했습니다. 하지만 책 제목을 ’게으름의 혜택에 관한 논고(A Disquisition on the Benefits of Idleness)' 따위로 부르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게으르게 사는 법’이란 제목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수양서’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풍자가 담긴 ‘자기수양’입니다. ‘자기수양’의 뉘앙스는 ‘효율을 높이기 위한 10가지 방법’처럼 우울하게 느껴집니다. 나도 시도는 해봤지만 10가지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방법들은 부담만 줄 뿐이지요. 잊지 않고 실천할 총체적인 원칙들이 있습니다.

마더 존스: 게으르게 살기 위한 실질적인 첫 단계를 제시해 줄 수 있나요?

호지킨슨: 나 홀로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히거거나, 신이 부여한 시간 내내 일하지 않으면 죄진 듯한 기분에 빠지는 것은 이기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시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죄진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내 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버트란드 러셀 또는 오스카 와일드가 쓴 책들 말입니다.(철학자이며 수학자인 버트란드 러셀은 저서<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ness)> 등을 통해 게으름의 미덕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 역자)
그들은 ‘노동의 윤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게으름의 철학에 관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루라는 시간을 조금 더 늘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주일에 일하는 시간을 40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50시간, 60시간, 70시간 일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왜 당신의 가족보다 고용주의 이윤이 더 중요해야만 하는 거죠? 당신은 그래봐야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얻는 게 있다면 해고당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건 아주 소극적인(negative) 방식입니다.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어떤 스케줄에 따라 일해야 할까, 그리고 내 삶에서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게 가능할까?’
그래야 당신의 열망에 충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야심’이기도 한데, 그 야심은 당신이 스스로의 상사(boss)가 되는 것입니다.

마더 존스: 하지만 이 책을 쓴 당신이 어떻게 게으르다고 할 수 있는 거죠?

호지킨슨: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당신 스스로 게으름뱅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쓴 책에는 많은 노력이 담겨 있잖아요”라고요. 물론 공을 들인 책입니다.

작가로서, 검은 장막이 바로 앞에 드리운 듯한 절망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책을 쓴다는 것은 멋진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책은 완성하고 나면 끝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작업을 더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수입이 생길 수 있지요.

책 쓰는 것은 게으름뱅이에게는 더 할 바 없이 이상적인 일입니다. 음악가가 되는 것과 같은 거지요. 아마 폴 매카트니는 ‘예스터데이(Yesterday)'를 5분 내에 작곡했을 겁니다. 그 후 그가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노래로 수백만 파운드는 벌었을 것이고요.

마더 존스: 그렇다면 게으름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게 아니며, 열심히 일하는 것에도 보다 균형 있는 방법이 있을 거란 말씀인가요?

호지킨슨: 네 맞습니다. 나는 일을 시작할 때부터 그 원칙에 따릅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하루 일과 중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몸과 마음의 건강에도, 인간관계에도 도움이 되지요.

그 원칙은 또한 임금에 예속된 상태로부터 풀려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스스로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적인 측면이 있지요.
사람들은 나더러 “그럼, 아예 과거로 돌아가지 그래요? 당신은 러다이트(영국의 산업혁명에 저항해 기계파괴 운동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역자)군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되새겨보고, 그 시절의 문화에서 가장 좋았던 점들을 현재 자신의 삶에 접목시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Katie Renz, 대안언론 Mother Jones의 전직 기자 / 번역 유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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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5-06-29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결국은 집중적인 삶을 살라는 말 같아요. 매순간에 최선을 다하는...최선이란게...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말함이겠죠..

balmas 2005-06-2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과 여가의 문제는 매우 형이상학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쟁점이기도 하죠. 그 때문에 때로는 안이한 공상이나 유토피아주의로 빠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 사람은 나름대로 이 문제의 사회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는 듯합니다.

줄리 2005-06-3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듣고 확 땡겨서 들어왔네요. 저처럼 게으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나 해서요^^ 처음 댓글 쓰네요. 좀 길어서 스크랩 한뒤에 다시 읽겠습니다.

balmas 2005-06-3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님, 반가워요.^-^
사실은 저도 게으르답니다. ㅋㅋ

로쟈 2005-06-3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쓰는 것은 게으름뱅이에게는 더 할 바 없이 이상적인 일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책을 쓰다 마는 일'인 것 같지만, 듣기 좋은 소리군요. 하지만, 게으름이 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한 가족, 한 공동체, 한 국가, 전인류의 선택이 될 수 있는지는 더 따져봐야겠습니다. 그의 제안은 "하루 근무 중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일하는 척하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여자친구와 전화하는데 허비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인 듯하니까요(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사실 아무리 바쁜 척해도 본질적으론 '게으른' 이들이 아닐는지. 왜? 질문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책을 쓰지 않으니까).

balmas 2005-06-3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렇겠죠.
 

 

The Ambiguous French ’No’ to the European Constitution
Mise en ligne :15 juin 2005
par WALLERSTEIN Immanuel

Fernand Braudel Center, Binghamton University. Commentary No. 163, June 15, 2005



On May 29, 2005, the French voted in a referendum not to ratify the proposed European constitution. Three days later, Dutch voters did the same. In both cases, the margin was solid. Since then, the world press has been filled with discussion about the future of Europe as a vision and as an institution. But the consequences of these votes is in fact extremely ambiguous.

Take the French vote. There were three groups which hailed the vote as a victory : the neo-cons in the United States, large segments of the French left (and particularly the alterglobalists), and rightwing Euroskeptics throughout Europe. In the U.S., William Kristol, editor of the leading journal of the neo-cons, the Weekly Standard, ended his editorial on "A New Europe ?" with "Vive la France." The proponents of the "no" on the French left celebrated in the streets of Paris. And rightwing Euroskeptics were delighted at last to win a round in their efforts to derail Europe.

Could they all have been right ? Let us see what they were celebrating. For the U.S. neo-cons, the French "no" (and the Dutch "no") were defeats for arrogant, anti-American European elites, and no doubt particularly for the current prime nemesis of the neo-cons, Jacques Chirac. "This is a moment of hope - for the prospects of a strong pro-American, pro-liberty, more or less free-market and free-trade, socially and morally and reinvigorated Europe," said Kristol.

For French alterglobalists, the "no" vote represented quite the opposite - both a rebuff to Anglosaxon conservative values and a rejection of neoliberalism as a program, as incarnated in the proposed Constitution, and as represented by the members of the European Commission and the bureaucracy in Brussels (and represented for them as well by Chirac’s government in France). And for the rightwing Euroskeptics, the vote represented a blow against this same Commission and this same Brussels bureaucracy, which stood in their eyes for imposing socialism on Europe. There was also a strong xenophobic element in the French "no" (and even more in the Dutch "no") - a rejection of the possible future admission of Turkey into the European Union, and an attack on the policies that had admitted so many Moslem immigrants into Europe.

Obviously, as in all referenda, the "no" vote put together very different groups with very different objectives. What seems to have provided the additional "no" votes to previous referenda in France were an increased percentage of Socialist and Green voters who were angry about the state of the economy and fearful of further "globalization" - a view they expressed by defeating the treaty. And what seems to have provided the additional "no" votes in the Netherlands is an upsurge of fears about Muslim immigrants in their country caused by recent very notable acts of violence.

Whatever the explanation of the votes, what are the consequences ? The "no" votes mean the definitive end of the proposed Constitution, since it required unanimous ratification, and there is zero likelihood that France or the Netherlands will have a second vote to undo the first. This does not, of course, mean the end of institutional Europe. The EU is left with the structure it has. The problem is that the existing structure was considered by most people to be inadequate to the needs of an expanded Europe, and the Constitution was supposed to improve the situation by reducing the need for unanimity in a number of areas, and by creating two central posts (a president and a minister of foreign affairs) to increase political solidity. It may be some time before European governments try again to improve the present institutional structures.

Since one of the main problems that led both to the attempt to write a new Constitution and to the rejection of this very Constitution was the expansion of Europe from 15 to 25 members, further expansion may well be on hold. Bulgaria and Romania were scheduled to join the EU in 2007. The German Christian Democratic Union, presently expected to win the 2006 elections, has already announced that, once in power, they may veto or hold up these adhesions. The chances of Croatia, Macedonia, Ukraine, and of course Turkey to be allowed to join seem even thinner for the moment.

There are those who are quietly happy. One of them is Tony Blair. The French "no" has various positive consequences for him. It saves the United Kingdom from holding its own referendum in 2006 as promised, and therefore a probable public defeat for him. Blair can now contend that he was in favor of the defeated Constitution but that a British referendum is now irrelevant. Furthermore, Blair cannot be unhappy about the rebuff to Chirac (as well as to Schröder in the separate and earlier German regional elections). It is welcome relief from his difficulties at home because of his Iraq policy. Blair may now try to put himself forward now as the leader of Europe.

Kristol’s editorial no doubt reflects the mood of the Bush regime. They have been trying for four years to throw a monkey-wrench into a stronger Europe. The rejection of the Constitution and the confusion that it is causing is the first good news they have had in two years on that front. In the long run, Europe will no doubt continue to pull away from U.S. domination but Bush at this point is more concerned with the short run, and in the short run the French "no" is definitely helpful to him.

As for the French alterglobalists, what have they gained ? They have demonstrated an increased strength within the family of all those left of center in France. Indeed, the French Socialist party and the Green party are both in turmoil as a result of the vote. There may be important realignments and it is not at all sure that the French rainbow coalition of the left can reconstitute itself in a way that will enable it to win the 2007 presidential elections, especially if the center-right coalition manages to get its act together better than the center-left coalition.

Have the alterglobalists made a major impact on the struggle against neoliberalism in the world-economy ? They were already doing well due to the rise of protectionist sentiment throughout the countries of the North (North America, western Europe, east Asia). The vote in France is a reflection of this. But will this vote accelerate the movement ? That depends on two things. One is whether the alterglobalists can separate in the popular mind the fight against neoliberalism from the xenophobic, anti-Islamic sentiments that are overtaking much of Europe. And the second is the degree to which the position of the Bush regime continues to erode in the geopolitical arena, and it is therefore unable to capitalize on the setback to European political integration.

Many people in Europe are saying that now is the moment to "start over" in the whole exercise of European unity. The problem from the beginning has been that a more social Europe is not possible unless it is a more federal Europe. But significant segments of the European left (and not only the left in France) have always been afraid that a more federal Europe meant an undermining of the social achievements in their own country. Until the European left is ready to test its strength and fight its fight within a more federal European structure, it is going to go from confused referendum to confused refendum, find itself weakened internally in the struggle to maintain national social achievements, and find Europe unable to play the world geopolitical role vis-à-vis the United States that the European left wishes it to play.

by Immanuel Wallerstein, june 15th, 2005. Article paru sur le site du Fernand Braudel Center

[Copyright by Immanuel Wallerstein. All rights reserved. Permission is granted to download, forward electronically or e-mail to others and to post this text on non-commercial community Internet sites, provided the essay remains intact and the copyright note is displayed. To translate this text, publish it in printed and/or other forms, including commercial Internet sites and excerpts, contact the author at immanuel.wallerstein@yale.edu ; fax : 1-203-432-6976.

These commentaries, published twice monthly, are intended to be reflections on the contemporary world scene, as seen from the perspective not of the immediate headlines but of the long te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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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ter rue Voltaire 75011 Paris -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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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6-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오랜만에 제게는 복잡한 글이네요. 발마스님, 좋은 글 올려주셔서 잘 읽고 갑니다. 결국 유럽좌파의 두려움은 그들이 이룩한 사민주의 시스템에 대한 불안이었나요. 어쩌다가 그런데 블레어가 이 기회에 유럽의 지도자로 등극할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되는지는 ㅠ.ㅠ 정세에 어두운 저로서는 갸우뚱했답니다 :)

balmas 2005-06-26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이 글은 월러스틴의 관점에서 쓴 글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으시면 될 것
같아요. 유럽 좌파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개별 국민국가가 이룩한 성과(복지국가라고 해도 좋고 사회국가라고 해도 좋고, 또는 사민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죠)가 오히려 유럽의 구성에서 후퇴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는 월러스틴의 지적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를 민족주의적, 곧 보수주의적 반발로 해석해서는 곤란하고, 더욱이 유럽 헌법안에 반대하는 좌파의 문제제기를 거기로 모두 환원시킬 수는 없겠죠. 다른 글들을 좀더 읽어보시면 이 점이 분명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블레어에 관한 지적은, 블레어 정부는 유럽 구성에 반대하거나 적어도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는데, 이제 유럽 구성을 주도해온 프랑스에서 유럽 헌법안이 부결되었으니, 블레어의 정치적 입장이 더 공고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것을 곧바로 블레어가 유럽의 지도자로 등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좀 무리라고 봅니다.
 

 

* 반대파들이 대체적으로 전개하는 전형적인 주장을 보여주기 때문에 옮겨보았다. 불어 텍스트가 다소 모호할 경우, 이 글의 영어판을 참조해서 다소 수정했다.

http://econon.free.fr/appel.html


[유럽 헌법안에] 반대하는 경제학자, 연구원, 교원들.

우리 경제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본질적인 이유 때문에, 유럽 헌법안의 기획에 '반대'하여 투표할 것이며, 그럴 것을 호소한다.
그것은 사실상 자유주의적인 정치에 대한 모든 대안을 금지한다. 그것은 사회적 권리들을 경쟁 원리에 종속시킨다.

국민 투표에 부쳐진 텍스트의 3부 (연합의 정책들)은 이전 안들의 재탕에 불과하다. '찬성'에 투표할 경우, 시민들은 20년 동안 유럽을 이끈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의 손익 계산서는 끔찍하다. 그 정책은 경제 성장이나 고용을 뒷받침하는데 무기력했으며, 지속적인 사회 보장의 후퇴를 이끌었다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 사회 보장 시스템의 파괴, 불평등과 빈곤의 증가).

이번 안에 기본 권리 헌장 (2부)을 집어넣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의 전진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흔히 할인 판매로 정의되는 사회적 권리들은 3부의 구속적인 규정들의 틀에 끼워맞쳐져 있다. 조화를 주장하는 모든 의지주의적인 논리는 명백히 배제되며, 헌법안은 뿌리깊은 자유주의 논리를 따라, 그러한 조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결국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 그것을 내맡긴다. 사실상, 유럽 헌법안은 사회 시스템의 경쟁을 조심스럽게 조직하고 있다. 사회 시스템의 기준이 각 나라별로 너무 다를 때 - 이것은 현재의 확장된 유럽의 상황인데-, 사회적 조직화를 상위의 수준에서 서로 조화시키려는 의지가 부재하다는 것은 결국, 그 기준을 하향 조정하면서 조화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법안은] 유럽의 모든 구축에 있어서 오로지 일반화된 경쟁만이 주민들의 안녕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가설에 기초한다 ! 하지만 이러한 가설은 거짓이다. 지나간 역사, 그리고 몇몇 유럽 국가들의 성공은 경쟁을 제한하고 틀지울 수 있는 다양한 경제 배열 양식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유럽 헌법안이 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주의적 원리에 대한 청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 정의를 결합하는 길을 새롭게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유럽 건설 구조는 우리가 주장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사실, 공동체의 수준에서, 모든 제도적 장치들, 그리고 특히 자격 요건을 갖춘 다수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국가 구성원들의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자들 사이의 경쟁 영역의 배치는 유럽 건설이 계속 게걸음(옆걸음) 치도록, 즉 자유주의적인 정통 교리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사회적인 것을 위해서는 간신히 조금 신경써주는 방식으로 구상된다.

요컨대, 이 헌법안의 기획은,
반-경제적이다 : 그것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적어도 20년 동안이나 그에 대해 끔찍한 경험을 해왔던 정책들을 절대적인 규범의 지위로 승격시킨다.
반-사회적이다 : 그것은 사회적 권리들을 경쟁이라는 더 상위의 원리에 종속시킨다.
반-민주적이다 : 그것은 자유주의와는 다른 정치를 도입할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다.
마지막으로, 이 기획은 반-유럽적이다 : 그것은 사회적 조직망을 발기발기 찢어버릴 뿐 아니라, 인민들을 온통 경쟁이라는 힘으로 서로 서로 대치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이 유럽이라는 관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끝날 격분의 상태로 이끈다.

진정한 유럽인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

<유럽 헌법 기획에 반대하는 12명의 경제학자들>의 저자들인, Bruno Amable, Jean Gadrey, Liêm Hoang-Ngoc, Michel Husson, Frédéric Lordon, Jacques Mazier, Stefano Palombarini, Christophe Ramaux, Gilles Raveaud, Aurélien Saïdi, Damien Sauze, Bruno Théret의 제안에 따른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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