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넘게 지속된 낡아빠진 우상을 땅에 묻을 시간인가?
해외논쟁_ 프랑스, 정신분석학이냐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냐

2005년 10월 02일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이메일 보내기

프랑스의 정신의학자는 대략 1만3천7백50명 정도(70%가 정신분석학적 경향)이고, 그밖에 심리학자나 정신요법의사는 8천2백50명에서 1만4천명에 이른다. 전자만 따질 경우, 프랑스에는 주민 7천5백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가 있으며, 후자를 포함할 경우, 4천1백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가 있게 된다. 4만5천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를 가진 미국과 비교한다면, 프랑스에서의 정신분석학의 위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종주국이라 할 만한 프랑스에는 그것을 비판하는 담론들도 끊이지 않았다. 사르트르,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등은 대표적인 예다.

지난 9월 1일, "프로이트 없이 살고, 사유하고, 건강해지자"라는 부제를 단 ‘정신분석학 흑서’가 프랑스내 정신분석학 경향에 대한 대대적 비판을 감행하며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8백30쪽에 이르는 이 두꺼운 책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인식론적, 철학적, 정신요법적 비판들 뿐 아니라, 정신분석치료 과정에서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 환자나 주변인들의 증언들까지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의 중심에는 미국에서 발전된 행동주의적 -일정한 환경에서의 자극과 그에 대한 관찰 가능한 반응에 주목- 이고 인지적인- 인간의 마음을 정보 처리하는 인지체계로 간주, 인지과정에 대한 단계적 분석- 정신치료 경향의 정신의학자들이 있다.


‘르 푸앙’(Le Point)지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정신분석학자 자크-알랭 밀레르는 본 논쟁의 쟁점이 '정신적인 것을 매매'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논박했다. 지난 2003년에는 정신치료사 자격증에 대한 대대적인 조정을 위한 아쿠와예법이 통과됐으나, 아직 시행안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이며, 2004년 6월 프랑스 국립 보건 의학 연구소(INSERM)의 보고서는 행동-인지 치료가 '관계주의적인 심리치료'(곧, 정신분석학)보다 효과적이라고 발표했다. 이처럼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학술적인 차원에 국한되기 보다는, 의료보험체계의 위기에 봉착한 프랑스 정부의 대책 마련과 맞물려 있다. 즉, 어떤 치료 방식이 '효율적'이고, '저렴한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쟁점은 정신분석학과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 경향 사이의 학술적 쟁점 및 토론을 저해하는 형국이다. "정신치료가 전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되어버렸으며, 순전히 '의학적'으로 되돌아가며 행동주의에 복속되고 있는 중"이라는 엘리자베스 루디네스코의 지적과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는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중시하는 학습과 조절의 기술이지 정신 치료가 아니다"라는 자크-알랭 밀레르의 지적은, ‘정신분석학 흑서’의 저자들이 보기엔 행동-인지주의 경향에 대한 선험적인 비판일 뿐, 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빠져있다.


다시 한번 불가능한 대화로 치닫고 있는 현 논쟁은 사실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숨'에 비유됐던, 정신(psuche)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였다.

사람들마다 그것을 가슴이나 심장에, 때로는 머리에, 때로는 온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으로 간주하고자 했으나, 정신 자체는 언제나 비록 인간 '안에' 존속하기는 하나, '비가시적이고', '지정 불가능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원리'이자, 신체를 통해 '징후'로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분석대상 자체, 즉 '정신'을 지정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과학을 비단 칼 포퍼처럼 반증가능성을 통해 정의하지 않고, 그 단어의 원래적인 의미에서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을 배제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더라도,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범위에 넣을 수는 없게 되는 셈이다.

또한 정신을 '분석'한다고 할 때, 분할은 언제나 무한히 가능하며, 징후 역시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측면에서 그 분석은 '종결될 수 없는' 것이자 그 치료는 '끝날 수 없다'는 아포리가 존재한다. 정신분석의는 인간의 마음을 치료함에 있어서 시시포스가 되기를 자처하지만, 극도의 우울증이나 정신질환, 각종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그 증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여기에 치료 과정이라는 시간을 감내하기 위한 심적 고통 및 치료비 부담이라는 경제적 고통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반면, 정신치료는 정신에 대한 iatros적(의사 혹은 의학적) 접근을 주장한다. 정신분석이 과정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정신치료는 무엇보다 치료 및 결과가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정신치료는 해석자의 입장에 서지 않고 조건을 부여해 유리한 결과를 유도해내는 한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도 '정신'의 아포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인지심리학에서 하는 것처럼 두뇌(가정된 정신의 위치)에 대한 생물, 생리학적 연구 혹은 정보처리 메커니즘 추적을 통해 모든 것이 밝혀질 수는 없다.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한계에 위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 흑서’ 혹은 미국에서 주류적인 행동주의-인지주의 정신치료가 은밀히 제기하는 '빠른' 치료와 '저렴함'이라는 경제적 논리가 정신분석학이라는 다른 접근 방식의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해야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의 민주주의를 깨트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아버지의 이름'에 기대온 정신분석학은 미셸 또르가 지적하듯 아버지의 지위의 쇠락 및 새로운 父性 관계의 조직화에 대해 답해야 하며, 디디에 에리봉이 지적하듯 동성애를 비롯한 사랑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할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이냐 정신치료냐라는 이접적인 질문은 정신분석과 치료라는 연접적인 실천으로 바뀌어야 한다.

양창렬 / 프랑스 통신원·파리 8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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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10-05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글이네요!

balmas 2005-10-05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죠? 우리나라에서는 정신분석이 주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통해
수용되고 있기 때문에, 저런 문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정신분석의 본산이라 할 만한 프랑스에서 앞으로 정신분석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내심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답니다. ^0^

가을산 2005-10-0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내일 제대로 읽어볼래요....... 쫌만 기다려주세요.........
 

 

10월 반딧불 : 무지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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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10년을 넘긴 동성애 인권운동의 결실로, 지극히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성애라는 말은 조금씩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호모'와 '변태'는 동성애를 지칭하는 익숙한 표현이고, 동성애를 정치적으로 '인정'하는 다수의 이성애자들 역시 직접 대면하는 동성애자에게 슬쩍 낙인의 딱지를 붙이는 경우가 다반수이다. 심지어 가부장적 시각이 노골화된 포르노물에서, 대상으로 재현되는 일조차 비일비재한 레즈비언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더욱 크다. 최근에는 이에 대항하여 레즈비언들이 직접 공동체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영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침묵을 깨고>의 스틸사진 [출처] 인권영화제


이성과의 결혼, 혈연관계로 맺어진 이른바 정상 가족을 삶의 근간으로 여기는 이스라엘. <침묵을 깨고>는 유대교 사회의 휘장 아래 감춰진 레즈비언들의 고통스러운 혹은 환희에 찬 고백을 담았다. 영화는 이성애 질서에 편입하기 위하여 정체성을 부정해야 했던 기혼 여성의 경험을 통해,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머나먼 자아 찾기의 여정을 떠나야 했던 기혼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시에 부모님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지 못한, 결혼을 앞둔 한 레즈비언의 토로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얻기 위해 잃어야 하는' 레즈비언의 현주소를 은밀하게 시사한다.

작품이 비추는 현실은 유대교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천주교, 개신교 등의 일각에서 종교의 교리를 내세우며 동성애를 탄압하는 것은 그다지 생소하지 않다. 이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억압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마저 허용치 않는다.

이번 10월 반딧불은 침묵을 강요하는 견고한 사회의 틀을 깨는 무지개빛 외침이 계속되길 염원하는 마음에서 준비했다.

△ 때와 곳 : 10월 8일(토) 늦은 7시, 미디액트 대강의실
△ 상영작 : <침묵을 깨고>
△ 부대행사 : 한국레즈비언상담소 김김찬영(나루)과 함께하는 동성애 바로알기
인권하루소식 제 2906 호 [입력] 2005년10월01일 5: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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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서 달려왔습니다. 잘 지내시죠?^^

balmas 2005-10-05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너무 반가워요. ^-^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런데 아직 논문이 다 안 끝나서 조금 더 바빠야 할 것 같아요.
주하랑, 책장수님이랑 모두 다 안녕하시죠? :-)
 

 

 

 

해외학술동향 : 다시 불붙은 하이데거와 나치즘 논쟁
"불가피하게도, 하이데거는 두명이다"

2005년 09월 13일   양창렬 해외통신원 이메일 보내기

지난 3월말 엠마누엘 파이의 ‘하이데거, 철학에 나치즘의 도입(Heidegger, Introduction du nazism dans la philosophie)’이 출간되면서, 프랑스 지성계는 다시 한번 ‘하이데거 사건’에 휩싸였다.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에 서평과 인터뷰들이 앞다퉈 실렸고, 국영 라디오 France Culture에서는 닷새에 걸쳐 엠마누엘 파이와 하이데거 전문가들과의 인터뷰가 방송됐다. 하이데거가 2006년 아그레가시옹 논술주제로 처음 선정된 것과 맞물려, 파이의 책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에 대해 스테판 자그단스키를 위시한 프랑스 하이데거 연구가들은 전 세계 대학에 ‘프랑스 철학자들의 반격’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파이의 책 및 하이데거 비판에 조직적으로 맞서기 위해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http://parolesdesjours.free.fr/scandale.htm)

뒤이어, 지난 6월 22일 자크 브랑슈빅, 장-볼락, 장-피에르 베르낭을 포함한 각 분야의 인문학자들은 “나치즘과 관계한 하이데거 저작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지속 심화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파이의 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파이는 그의 책에서 불어로 번역되지 않은 1933년과 1934년 겨울의 두 세미나를 검토함으로써, 하이데거가 SS와 SA 제복을 입은, 제 3제국의 ‘新귀족’을 이룰 당원들에게 ‘정치교육’을 했고, 그의 주요 개념인 존재와 존재자를 각기 총통(국가)과 민족에 비교했으며, 민족을 ‘피와 인종의 단위’로 정의했다고 폭로한다. 특히, ‘진리의 본질’이라는 세미나에서 하이데거는 “‘적’은 민족 구성원의 실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며, 적을 찾아내고, 때로는 적에 맞서 (민족이) 일어서기 위해 적을 만들어내기도 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적의 총체적 무화를 겨냥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위 인용부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53,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석이기는 하지만, 그 암묵적 논지는 로제-폴 드루와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사상 범죄’라는 제목의 ‘르몽드’지 서평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법과 총통의 의지는 하나’, ‘정치적인 것의 특정한 구분은 동지와 적의 식별’이라고 말했던 칼 슈미트의 사유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파이는 하이데거가 나치즘의 토대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심지어 히틀러의 일부 담화를 직접 작성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하며, 1933~34년경의 저술들의 경우, 도서관의 철학 코너가 아닌 히틀러 역사 박물관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사실, 파이의 주된 논지와 그가 밝혀낸 하이데거의 나치 행적은 대부분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이며, 이번 논쟁에서도 우리는 하이데거 고발자와 변호자들 사이의 ‘불가능한 대화’가 반복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1933~34년 시기의 저작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프랑수와 페디에의 올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이데거 전문가 스스로가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스스로를 이격시켜 사태를 조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적인 것의 허구’, 자크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 국내 연구로는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나치즘’ 등이 그러한 시도를 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논쟁이 주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사유한 것과 하이데거라는 인간이 행한 것을 분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이 ‘두’ 하이데거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애초부터 구분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혹은 끝나지 않을 대화와 거리를 취하면서, 현재 불붙은 논쟁을 보다 건설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을까.


‘하이데거와 나치즘’은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의 관념과 나치즘이 내포한 관념 사이의 마주침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관념이 나치즘의 관념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니힐리즘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의 혁명적 비판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나치 참여가 “어리석음(Dummheit)”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회고는 자신이 그 가능성을 잘못 보았던 어리석음을 후회한 것이지, 자신의 이념 자체, 나아가 국가-사회주의의 ‘진리’ 자체―나치즘의 현실과는 구분되는―를 폐기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본래적으로 현실의 나치즘이 들어있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념 사이의 일정한 유사성에 있다. 즉, 하이데거는 곧 나치다라는 식의 폭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사유와 나치 ‘이데올로기(논리적 관념)’ 사이의 공통 지평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독일의 정황에서 그 지평을 발견하는 필립-라쿠 라바르트는 다음의 것들을 예로 든다.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유의 신화적, 비극적 구조, 고대 그리스 전통과 독일 정신의 동일시, 유럽 운명의 중심에 선 독일인의 비극적 결단, 그것과 맞물린 ‘새로운 시간, 장래’에 대한 약속.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의 진리가 현시되는 장소로서의 ‘거기’가 바로 ‘여기’, ‘눈앞에’ 있다고 말할 때, ‘도래’할 것이 ‘지금’ 있다고 선언할 때, 모든 존재자들에 공통된 존재가 특정 민족이나 국가, 총통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간주될 때, 대문자 타자가 피와 땅과 결합된 특정한 존재자인 적과 동일시될 때의 위험을 보여준다. 약속의 ‘철학’이 배태한 ‘현실’적 위험에 대한 지적 및 그에 대한 해체적 독해는 나치즘을 사유하기 위해, 그리고 사유 자체를 위해 하이데거를 읽기를 그칠 수 없다는 데리다의 주문이기도 하다.

양창렬 / 프랑스통신원, 파리8대학 박사과정


©2005 Kyosu.net
Updated: 2005-09-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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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9-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좀 바깥나들이를 하시려나

balmas 2005-09-25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조금씩 ...

yoonta 2005-09-2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의 나치연루가 그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데.. 왜 또다시 이슈가 되는지 모르겠네요.-_-a 제 생각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이 가지는 반기술주의적 성격과 독일민족의 특수성으로부터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기획에서 그의 나치연루는 비롯되는거 같은데요. 1933년의 나치와 하이데거가 총장직을 사퇴한 이후의 나치를 동일한 것으로 보아선 안될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34년이후의 나치는 독일민족의 우수성 즉 아리안민족의 우수성을 배타적으로 우상화하였고 그로부터 극단적인 반유태주의, 인종주의적 정책을 전개해나간 반면 33년까지의 나치는 1차대전이후 30년대초까지의 피폐한 독일의 상황에 대한 대안이 될수있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형태로 하이데거에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지식인들도 이와같은 가능성을 보고 나치를 지지했던 것이고요..

하이데거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민주주의와 국가권력에 대한 소박한 이해였다고 봅니다. 당시의 바이마르공화국이 가졌던 친자본주의적/친미적 성격에 대한 반발로 하이데거는 민주주의라는 정치형태을 하나의 혼돈으로만 보았던 것 같고...그것의 대안으로 초기의 나치즘이 표방했던 독일민족 특유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정치구호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balmas 2005-09-27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아마도 하이데거가 그만큼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였기 때문이고, 또 하이데거 핵심 사상과 나치즘에 대한 그의 관여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겠죠.

yoonta 2005-09-27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접한 관련이 있죠..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이 극단적 인종주의로 변질되기 전의 나치즘과 연관되고 그 연관을 통해 독일 민족을 변혁시킬수 있을것으로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하이데거사상을 나치즘 그자체와 동일시하거나 혼돈하는 것은 잘못이란 거죠.. 만약 빅터파리아스나 엠마누엘 파이가 주장하는 것처럼(파이의 책은 아직 못봐서 정확히 모르겠지만 파리아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네요) 34년이후의 나치즘과도 하이데거가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면 34년에 총장직을 그만두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38년까지도 히틀러에 대해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것 같지는 않은데요..그런점이 파리아스나 파이같은 하이데거고발자의 눈에는 중요하게 보이는 것같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자체는 비록 하이데거 스스로 초기의 나치즘에 연관되는 것으로 평가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독일민족공동체라는 시대적 과업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였던 것같고요..36년부터 행한 니체의 강의를 통해서 나치즘 역시 서구문명의 극단에서 나타난 니힐리즘의 하나라고 보고 극복해야만 될 근대적 기술주의의 정점으로서 나치즘을 비판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때문에 초기에 나치에 부역하였던 그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하이데거사상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짓이라고나 할까요..그런 오류를 반복하는 것 같다는 거지요.

balmas 2005-09-2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yoonta님 말씀대로라면 하이데거의 나치즘 연루는 초기의 우연적
실수겠지만, 비판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것 같군요.
사실 하이데거 같은 대가가 우연히 실수로 그랬다고 보는 건 어떻게 보면
하이데거의 사상적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걸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저는 비판가들이 하이데거를 매도하기 위해 나치즘과의 연루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오히려 진지한 비판가들은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연루에서 서양 철학 또는 서양 형이상학에 내재한 근본적인 난점의
한 가지 징후를 보는 것 같더군요. 하이데거처럼 서양의 형이상학의 핵심의
한 측면을 정확히 꿰뚫어본 철학자가 나치즘을 선택했다는 건 우연적인 사실도
아니고, 단지 하이데거 한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스캔들도 아니라는 거죠.
사실 제가 보기에 yoonta님의 판단에는 이미,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우연적인 스캔들, 조금 신중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던 일시적인 실수로
축소하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yoonta님이 하이데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하이데거주의자들의 그런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자기 방어의 표현일 수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소하는 게 과연 철학적,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또는 생산적인 태도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yoonta 2005-09-2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의 이야기는 알겠는데..그렇다면 그 서양철학의 난점(하이데거철학의 난점)이 뭐냐는 거죠..그리고 또 기술문명을 비판(나치즘에 대한 비판)한 하이데거의 철학과 나치부역은 또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는 문제도 남는거구요. 자기방어일뿐이라고 말씀하시는데..님의 답변에는 그것이 왜 자기방어일뿐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군요..

balmas 2005-09-2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저는 여기서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연루에 관해 님과 논란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비판가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시면, 국내에도 관련 문헌들이 제법 번역되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령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의 하이데거에 관한 장을 보시거나
얼마전에 번역된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 같은 글을 읽어보시면 되겠죠.

yoonta 2005-09-2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버마스의 그 책에서의 비판이 얼마나 공정한 것인지는 물음표를 달아야 될것 같던데요..소위 <주체철학>으로 하이데거를 분류하는 하버마스의 합리성 혹은 계몽적 이성의 기준으로는 나치와의 차별성보다는 친화성이 더 크게 보일테니까요..그런데 그 책에서조차 하이데거가 존재사론적 개념을 전개한 후기에 가서는 나치와 거리를 두었다고 판단했던 걸로 압니다. 어쨋든 하이데거의 이번 논란과 관련에 간단하게나마 balmas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마음에 몇자 적어봤는데요..괜한 헛수고만 한거 같네요..(무슨 책을 읽어보라는 정도의 덧글을 기대했던 건 아닌데..-_-)

balmas 2005-09-29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제가 보기에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계라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빅토르 파리아스나 다른 몇몇 저자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데거가 얼마나 나치즘에 관여했고, 또 그의 사상의 실제 전개과정에서 나치즘이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라는 주제가 있겠죠. 그러니까 좀더 역사적/전기적이고 고발적인 성향을 띠는 측면이겠죠. 그래서 실제로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평생 나치 당원증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고발하기도 하죠.

반대로 하버마스나 데리다, 레비나스 또는 부르디외 같은 사람들 및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 같은 경우는, 이런 역사적/전기적인 측면보다는, 좀더 일반적인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의 경우는 하이데거 개인이나 역사적인 정치적 운동으로서 나치즘(말하자면 1930년대 초에서 시작해서 1945년에 종말을 고한)보다는,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표현되는 서양 형이상학의 어떤 특성이나 적어도 서양 근대 사상 내지는 독일 사상의 어떤 측면과 파시즘 일반의 사상적 연관성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라면 실제로 하이데거가 1934년 내지 1935년 이후에 더 이상 나치즘 운동에 관여했는지 아닌지 여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죠.

제가 yoonta님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건 바로 이 두 번째 측면을 중시하는 비판가들이 있더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버마스나 데리다의 저작을 지적했던 거구요. yoonta님이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yoonta님의 자유입니다. 저는 yoonta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 yoonta님과 논란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하이데거의 사상의 전개과정 여부에 대해서도 그렇게 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가 뭐 이 문제에 관해서 하버마스나 데리다, 레비나스와 다른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구요. 그러니 제 생각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실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yoonta님이 "헛수고만 했다"고 하시니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yoonta님이 좀 오바한 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이 기사를 쓴 것도 아니고, 하이데거를 고발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yoonta 2005-09-2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이 이야기하신 두 번째의 하이데거비판이 님이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였다는건 위의 님의 덧글에서 이미 알고있었던 내용이고요..어쨋든 바로 위 덧글에서 님의 의견은 충분히 개진된 것 같네요. 바쁘신데.. 괜히 관심없는 내용으로 귀찮게 해드린 것 같네요. (뭐 오바랄거까진..걍 간단하게나마 님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것 뿐인데..그럴려고 이런 블로그 있는거 아닙니까? )
 

* 좋은 자료가 있어서 하나 소개 드립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구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하나 주문했습니다. :-)

 



■ 교육활동의 예
▷ 다양한 직업카드를 갖고 노동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보는 <동그라미의 비밀>
▷ 채용과정을 직접 체험해 보는 <제자리인가?>
▷ 그림판에서 산업재해 상황을 가려내는 <숨은 그림 찾기>
▷ 인권침해 상황을 직접 상황극으로 재현해보고 권리카드를 찾아가는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서>
▷ 모의노동위원회를 열어 부당해고 여부를 따져보는 <노 컷(No Cut!)>
▷ 상황만화를 보며 성희롱을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해보는 <성희롱이 뭐야>
▷ 불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입사지원서를 다시 만들어보는 <정보 먹는 하마, 입사지원서>
▷ 보드게임을 통해 단결의 중요성을 직접 알아가는 <다같이 돌자, 일터 한 바퀴!>
▷ 우리가 바라는 대안적 노동현실을 그려내는 <보고 싶은 인권뉴스>


■ 지은이 소개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2004년 이 책의 발간을 목적으로 민주노동당, 인권운동사랑방, 전교조 실업교육위원회,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등 5개 단체가 모여 만든 네트워크입니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책의 집필뿐 아니라 청소년 노동인권학교(2004.11), 교사·교육활동가를 위한 노동인권교육 워크숍(2005.8.19~20), 실업계고 현장실습 실태조사(2005.8~ ) 등의 활동을 함께 전개해오고 있습니다.

■ 구입 방법
: 대형서점, 사회과학서점, 인터넷서점(알라딘 등)에서 구입 가능
: 인권운동사랑방을 통해 구입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① 직접 방문해서 구입하시거나
② 책값+등기우송료 = 18,000원을 우리은행 112-08-100870(예금주 배경내)로 입금하신 뒤, 사랑방으로 전화해서 입금자명, 받으실 곳 주소, 이름 등을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 문의 : 인권운동사랑방 배경내 (02-741-5363)

 

* 바로 요 놈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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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9-2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학교에서 직업 교육할 때 진짜 이런 걸 가르쳐야 하는데 말이에요.

balmas 2005-09-2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죠?
 

* 제 친구가 방명록에 올린 글입니다.

뜻 있는 분들은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후원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중학교 2학년인데도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체격에 항상 기침을 달고 사는 아이. 물론 공부는 최하수준. 영어 알파벳도 다 외우지 못하지만 단어시험이라도 치면 열심히 외워서 뭔가를 그려내기는 한다. 읽을 줄도 모르고 뜻은 더욱 모르는 단어를, 마치 우리가 이집트 상형문자 시험을 치른다면 그렇게 할 것처럼. 그 아이가 몸이 아프다며 교무실로 찾아온다. 담임 선생님은 항상 약하던 아이가 걱정이 되어 병원에 데려간다. 생활 보호대상자라 진료비는 천원.약값은 다른 건강보험환자와 같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 간 담임 선생님은 놀라운 걸 알았다.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병원에 와본 것이었다. 이유는 돈도 보살핌도 그 아이는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큰 병은 아니란다.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다는 게 뭐냐 하면 위염이다.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것 같다고..열다섯 나이에 열 살의 체격을 가진 아이의 몸 속에 생긴 위염. 내 마음 속에 돌덩이가 들어찬 듯하다. 그렇다고 그 아이의 삶이 나아질까마는 ... 바로 오늘 내가 사는 곳에서 시내버스로 삼십분만 가면 있는 서울 시내의 어느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가 전에 올린 글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바로 이 아이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 아이가 학교에 지각을 했다. 더러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뭘 물어도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이 없어서 왜 지각을 했는지도 모르고 지나왔던 담임선생님은 오늘은 좀 더 얘기를 시켜 보았다. 겁먹은 얼굴로 횡설수설하던 아이는 답답한지 그림을 그리겠단다. 아이는 종이 위에 칼과 이상한 얼룩을 그리고는 그게 자기가 지금까지 흘린 피라고 했다. 겨우 알게 된 사정은 이런 거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한 번씩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서는 밤새 행패를 부리고 아이가 잠도 자지 못하게 한다. 어머니는 일을 다닌다는데 집에 거의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런 날 아침이면 지각을 하는 것이었다. 약한 아이를 걱정하던 어느 선생님이 가끔 빵과 우유같은것을 주면서 아침을 챙겨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침을 왜 먹어야해요?" 그 아이는 아침을 먹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거다. 담임선생님에게 물어보니 학교급식으로 먹는 점심이 아마 아이의 유일한 식사같다고 한다.


처음엔 아이가 매일 아침이라도 먹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학교 앞 가게에 돈을 주고 아침마다 우유라도 먹게 할까 아니면 하교길에 밥을 먹게 분식점 같은 곳을 알아 볼까.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걸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민감한 나이에 아이에게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술주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가 어려서부터 느꼈을 그 두려움과 놀람은 어떻게 해야 지워질까?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고 그래서 공부라곤 전혀 모르는 이 아이의 앞으로의 삶은 어떨까?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 지난 밤 한 숨도 못자고 지금 이 글을 올립니다. 지금 생각엔 부근의 저소득층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공부방을 알아볼까 합니다. 급식도 해주고 공부와 다른 활동의 기회도 주는 곳이 있더군요. 당장은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우리 사회엔 이런 아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항상 느끼지만 소외되고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마치 유령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만 그들의 모습과 절박한 목소리가 보이고 들리니 말입니다. 정부의 정책과 주류 언론과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나요? 아니 우리는 그들과 대면하기를 원하나요?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번 가보시길 바랍니다.

http://www.gongbubang.org/besupport.htm 서울지역공부방연합회입니다. 후원을 할 수 있는 방법도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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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9-2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동학대 수준인 것 같은데요. 국번 없이 1391로 전화하시면 아동학대 상담센터가 나옵니다. 거기 신고하셔서 적절한 보호를 받도록 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balmas 2005-09-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도움말 고맙습니다.

chika 2005-09-24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저는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다른 지역의 공부방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몇년동안 다달이 오는 소식지를 보면서 우리 성당 아이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내는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후원금 자동이체가 기간때문에 요며칠 공부방 후원을 끝내도 되는거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한달에 밥 한끼만큼의 후원금 갖고 고민한 내가 엄청 부끄럽습니다. 에잇! 정말 챙피합니다. ㅠ.ㅠ

balmas 2005-09-2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이 부끄러워 하실 이유가 없죠.
적은 돈이라도 정기적으로 후원한다는 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어쨌든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도움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