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말 엠마누엘 파이의 ‘하이데거, 철학에 나치즘의 도입(Heidegger, Introduction du nazism dans la philosophie)’이 출간되면서, 프랑스 지성계는 다시 한번 ‘하이데거 사건’에 휩싸였다.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에 서평과 인터뷰들이 앞다퉈 실렸고, 국영 라디오 France Culture에서는 닷새에 걸쳐 엠마누엘 파이와 하이데거 전문가들과의 인터뷰가 방송됐다. 하이데거가 2006년 아그레가시옹 논술주제로 처음 선정된 것과 맞물려, 파이의 책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에 대해 스테판 자그단스키를 위시한 프랑스 하이데거 연구가들은 전 세계 대학에 ‘프랑스 철학자들의 반격’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파이의 책 및 하이데거 비판에 조직적으로 맞서기 위해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http://parolesdesjours.free.fr/scandale.htm)
뒤이어, 지난 6월 22일 자크 브랑슈빅, 장-볼락, 장-피에르 베르낭을 포함한 각 분야의 인문학자들은 “나치즘과 관계한 하이데거 저작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지속 심화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파이의 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파이는 그의 책에서 불어로 번역되지 않은 1933년과 1934년 겨울의 두 세미나를 검토함으로써, 하이데거가 SS와 SA 제복을 입은, 제 3제국의 ‘新귀족’을 이룰 당원들에게 ‘정치교육’을 했고, 그의 주요 개념인 존재와 존재자를 각기 총통(국가)과 민족에 비교했으며, 민족을 ‘피와 인종의 단위’로 정의했다고 폭로한다. 특히, ‘진리의 본질’이라는 세미나에서 하이데거는 “‘적’은 민족 구성원의 실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며, 적을 찾아내고, 때로는 적에 맞서 (민족이) 일어서기 위해 적을 만들어내기도 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적의 총체적 무화를 겨냥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위 인용부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53,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석이기는 하지만, 그 암묵적 논지는 로제-폴 드루와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사상 범죄’라는 제목의 ‘르몽드’지 서평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법과 총통의 의지는 하나’, ‘정치적인 것의 특정한 구분은 동지와 적의 식별’이라고 말했던 칼 슈미트의 사유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파이는 하이데거가 나치즘의 토대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심지어 히틀러의 일부 담화를 직접 작성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하며, 1933~34년경의 저술들의 경우, 도서관의 철학 코너가 아닌 히틀러 역사 박물관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사실, 파이의 주된 논지와 그가 밝혀낸 하이데거의 나치 행적은 대부분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이며, 이번 논쟁에서도 우리는 하이데거 고발자와 변호자들 사이의 ‘불가능한 대화’가 반복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1933~34년 시기의 저작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프랑수와 페디에의 올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이데거 전문가 스스로가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스스로를 이격시켜 사태를 조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적인 것의 허구’, 자크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 국내 연구로는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나치즘’ 등이 그러한 시도를 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논쟁이 주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사유한 것과 하이데거라는 인간이 행한 것을 분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이 ‘두’ 하이데거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애초부터 구분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혹은 끝나지 않을 대화와 거리를 취하면서, 현재 불붙은 논쟁을 보다 건설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을까.
‘하이데거와 나치즘’은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의 관념과 나치즘이 내포한 관념 사이의 마주침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관념이 나치즘의 관념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니힐리즘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의 혁명적 비판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나치 참여가 “어리석음(Dummheit)”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회고는 자신이 그 가능성을 잘못 보았던 어리석음을 후회한 것이지, 자신의 이념 자체, 나아가 국가-사회주의의 ‘진리’ 자체―나치즘의 현실과는 구분되는―를 폐기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본래적으로 현실의 나치즘이 들어있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념 사이의 일정한 유사성에 있다. 즉, 하이데거는 곧 나치다라는 식의 폭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사유와 나치 ‘이데올로기(논리적 관념)’ 사이의 공통 지평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독일의 정황에서 그 지평을 발견하는 필립-라쿠 라바르트는 다음의 것들을 예로 든다.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유의 신화적, 비극적 구조, 고대 그리스 전통과 독일 정신의 동일시, 유럽 운명의 중심에 선 독일인의 비극적 결단, 그것과 맞물린 ‘새로운 시간, 장래’에 대한 약속.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의 진리가 현시되는 장소로서의 ‘거기’가 바로 ‘여기’, ‘눈앞에’ 있다고 말할 때, ‘도래’할 것이 ‘지금’ 있다고 선언할 때, 모든 존재자들에 공통된 존재가 특정 민족이나 국가, 총통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간주될 때, 대문자 타자가 피와 땅과 결합된 특정한 존재자인 적과 동일시될 때의 위험을 보여준다. 약속의 ‘철학’이 배태한 ‘현실’적 위험에 대한 지적 및 그에 대한 해체적 독해는 나치즘을 사유하기 위해, 그리고 사유 자체를 위해 하이데거를 읽기를 그칠 수 없다는 데리다의 주문이기도 하다.
양창렬 / 프랑스통신원, 파리8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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