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학술동향 : 다시 불붙은 하이데거와 나치즘 논쟁
"불가피하게도, 하이데거는 두명이다"

2005년 09월 13일   양창렬 해외통신원 이메일 보내기

지난 3월말 엠마누엘 파이의 ‘하이데거, 철학에 나치즘의 도입(Heidegger, Introduction du nazism dans la philosophie)’이 출간되면서, 프랑스 지성계는 다시 한번 ‘하이데거 사건’에 휩싸였다.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에 서평과 인터뷰들이 앞다퉈 실렸고, 국영 라디오 France Culture에서는 닷새에 걸쳐 엠마누엘 파이와 하이데거 전문가들과의 인터뷰가 방송됐다. 하이데거가 2006년 아그레가시옹 논술주제로 처음 선정된 것과 맞물려, 파이의 책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에 대해 스테판 자그단스키를 위시한 프랑스 하이데거 연구가들은 전 세계 대학에 ‘프랑스 철학자들의 반격’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파이의 책 및 하이데거 비판에 조직적으로 맞서기 위해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http://parolesdesjours.free.fr/scandale.htm)

뒤이어, 지난 6월 22일 자크 브랑슈빅, 장-볼락, 장-피에르 베르낭을 포함한 각 분야의 인문학자들은 “나치즘과 관계한 하이데거 저작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지속 심화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파이의 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파이는 그의 책에서 불어로 번역되지 않은 1933년과 1934년 겨울의 두 세미나를 검토함으로써, 하이데거가 SS와 SA 제복을 입은, 제 3제국의 ‘新귀족’을 이룰 당원들에게 ‘정치교육’을 했고, 그의 주요 개념인 존재와 존재자를 각기 총통(국가)과 민족에 비교했으며, 민족을 ‘피와 인종의 단위’로 정의했다고 폭로한다. 특히, ‘진리의 본질’이라는 세미나에서 하이데거는 “‘적’은 민족 구성원의 실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며, 적을 찾아내고, 때로는 적에 맞서 (민족이) 일어서기 위해 적을 만들어내기도 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적의 총체적 무화를 겨냥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위 인용부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53,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석이기는 하지만, 그 암묵적 논지는 로제-폴 드루와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사상 범죄’라는 제목의 ‘르몽드’지 서평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법과 총통의 의지는 하나’, ‘정치적인 것의 특정한 구분은 동지와 적의 식별’이라고 말했던 칼 슈미트의 사유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파이는 하이데거가 나치즘의 토대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심지어 히틀러의 일부 담화를 직접 작성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하며, 1933~34년경의 저술들의 경우, 도서관의 철학 코너가 아닌 히틀러 역사 박물관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사실, 파이의 주된 논지와 그가 밝혀낸 하이데거의 나치 행적은 대부분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이며, 이번 논쟁에서도 우리는 하이데거 고발자와 변호자들 사이의 ‘불가능한 대화’가 반복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1933~34년 시기의 저작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프랑수와 페디에의 올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이데거 전문가 스스로가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스스로를 이격시켜 사태를 조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적인 것의 허구’, 자크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 국내 연구로는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나치즘’ 등이 그러한 시도를 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논쟁이 주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사유한 것과 하이데거라는 인간이 행한 것을 분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이 ‘두’ 하이데거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애초부터 구분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혹은 끝나지 않을 대화와 거리를 취하면서, 현재 불붙은 논쟁을 보다 건설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을까.


‘하이데거와 나치즘’은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의 관념과 나치즘이 내포한 관념 사이의 마주침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관념이 나치즘의 관념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니힐리즘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의 혁명적 비판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나치 참여가 “어리석음(Dummheit)”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회고는 자신이 그 가능성을 잘못 보았던 어리석음을 후회한 것이지, 자신의 이념 자체, 나아가 국가-사회주의의 ‘진리’ 자체―나치즘의 현실과는 구분되는―를 폐기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본래적으로 현실의 나치즘이 들어있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념 사이의 일정한 유사성에 있다. 즉, 하이데거는 곧 나치다라는 식의 폭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사유와 나치 ‘이데올로기(논리적 관념)’ 사이의 공통 지평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독일의 정황에서 그 지평을 발견하는 필립-라쿠 라바르트는 다음의 것들을 예로 든다.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유의 신화적, 비극적 구조, 고대 그리스 전통과 독일 정신의 동일시, 유럽 운명의 중심에 선 독일인의 비극적 결단, 그것과 맞물린 ‘새로운 시간, 장래’에 대한 약속.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의 진리가 현시되는 장소로서의 ‘거기’가 바로 ‘여기’, ‘눈앞에’ 있다고 말할 때, ‘도래’할 것이 ‘지금’ 있다고 선언할 때, 모든 존재자들에 공통된 존재가 특정 민족이나 국가, 총통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간주될 때, 대문자 타자가 피와 땅과 결합된 특정한 존재자인 적과 동일시될 때의 위험을 보여준다. 약속의 ‘철학’이 배태한 ‘현실’적 위험에 대한 지적 및 그에 대한 해체적 독해는 나치즘을 사유하기 위해, 그리고 사유 자체를 위해 하이데거를 읽기를 그칠 수 없다는 데리다의 주문이기도 하다.

양창렬 / 프랑스통신원, 파리8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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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05-09-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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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9-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좀 바깥나들이를 하시려나

balmas 2005-09-25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조금씩 ...

yoonta 2005-09-2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의 나치연루가 그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데.. 왜 또다시 이슈가 되는지 모르겠네요.-_-a 제 생각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이 가지는 반기술주의적 성격과 독일민족의 특수성으로부터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기획에서 그의 나치연루는 비롯되는거 같은데요. 1933년의 나치와 하이데거가 총장직을 사퇴한 이후의 나치를 동일한 것으로 보아선 안될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34년이후의 나치는 독일민족의 우수성 즉 아리안민족의 우수성을 배타적으로 우상화하였고 그로부터 극단적인 반유태주의, 인종주의적 정책을 전개해나간 반면 33년까지의 나치는 1차대전이후 30년대초까지의 피폐한 독일의 상황에 대한 대안이 될수있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형태로 하이데거에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지식인들도 이와같은 가능성을 보고 나치를 지지했던 것이고요..

하이데거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민주주의와 국가권력에 대한 소박한 이해였다고 봅니다. 당시의 바이마르공화국이 가졌던 친자본주의적/친미적 성격에 대한 반발로 하이데거는 민주주의라는 정치형태을 하나의 혼돈으로만 보았던 것 같고...그것의 대안으로 초기의 나치즘이 표방했던 독일민족 특유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정치구호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balmas 2005-09-27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아마도 하이데거가 그만큼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였기 때문이고, 또 하이데거 핵심 사상과 나치즘에 대한 그의 관여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겠죠.

yoonta 2005-09-27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접한 관련이 있죠..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이 극단적 인종주의로 변질되기 전의 나치즘과 연관되고 그 연관을 통해 독일 민족을 변혁시킬수 있을것으로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하이데거사상을 나치즘 그자체와 동일시하거나 혼돈하는 것은 잘못이란 거죠.. 만약 빅터파리아스나 엠마누엘 파이가 주장하는 것처럼(파이의 책은 아직 못봐서 정확히 모르겠지만 파리아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네요) 34년이후의 나치즘과도 하이데거가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면 34년에 총장직을 그만두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38년까지도 히틀러에 대해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것 같지는 않은데요..그런점이 파리아스나 파이같은 하이데거고발자의 눈에는 중요하게 보이는 것같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자체는 비록 하이데거 스스로 초기의 나치즘에 연관되는 것으로 평가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독일민족공동체라는 시대적 과업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였던 것같고요..36년부터 행한 니체의 강의를 통해서 나치즘 역시 서구문명의 극단에서 나타난 니힐리즘의 하나라고 보고 극복해야만 될 근대적 기술주의의 정점으로서 나치즘을 비판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때문에 초기에 나치에 부역하였던 그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하이데거사상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짓이라고나 할까요..그런 오류를 반복하는 것 같다는 거지요.

balmas 2005-09-2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yoonta님 말씀대로라면 하이데거의 나치즘 연루는 초기의 우연적
실수겠지만, 비판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것 같군요.
사실 하이데거 같은 대가가 우연히 실수로 그랬다고 보는 건 어떻게 보면
하이데거의 사상적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걸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저는 비판가들이 하이데거를 매도하기 위해 나치즘과의 연루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오히려 진지한 비판가들은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연루에서 서양 철학 또는 서양 형이상학에 내재한 근본적인 난점의
한 가지 징후를 보는 것 같더군요. 하이데거처럼 서양의 형이상학의 핵심의
한 측면을 정확히 꿰뚫어본 철학자가 나치즘을 선택했다는 건 우연적인 사실도
아니고, 단지 하이데거 한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스캔들도 아니라는 거죠.
사실 제가 보기에 yoonta님의 판단에는 이미,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우연적인 스캔들, 조금 신중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던 일시적인 실수로
축소하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yoonta님이 하이데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하이데거주의자들의 그런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자기 방어의 표현일 수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소하는 게 과연 철학적,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또는 생산적인 태도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yoonta 2005-09-2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의 이야기는 알겠는데..그렇다면 그 서양철학의 난점(하이데거철학의 난점)이 뭐냐는 거죠..그리고 또 기술문명을 비판(나치즘에 대한 비판)한 하이데거의 철학과 나치부역은 또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는 문제도 남는거구요. 자기방어일뿐이라고 말씀하시는데..님의 답변에는 그것이 왜 자기방어일뿐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군요..

balmas 2005-09-2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저는 여기서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연루에 관해 님과 논란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비판가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시면, 국내에도 관련 문헌들이 제법 번역되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령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의 하이데거에 관한 장을 보시거나
얼마전에 번역된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 같은 글을 읽어보시면 되겠죠.

yoonta 2005-09-2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버마스의 그 책에서의 비판이 얼마나 공정한 것인지는 물음표를 달아야 될것 같던데요..소위 <주체철학>으로 하이데거를 분류하는 하버마스의 합리성 혹은 계몽적 이성의 기준으로는 나치와의 차별성보다는 친화성이 더 크게 보일테니까요..그런데 그 책에서조차 하이데거가 존재사론적 개념을 전개한 후기에 가서는 나치와 거리를 두었다고 판단했던 걸로 압니다. 어쨋든 하이데거의 이번 논란과 관련에 간단하게나마 balmas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마음에 몇자 적어봤는데요..괜한 헛수고만 한거 같네요..(무슨 책을 읽어보라는 정도의 덧글을 기대했던 건 아닌데..-_-)

balmas 2005-09-29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제가 보기에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계라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빅토르 파리아스나 다른 몇몇 저자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데거가 얼마나 나치즘에 관여했고, 또 그의 사상의 실제 전개과정에서 나치즘이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라는 주제가 있겠죠. 그러니까 좀더 역사적/전기적이고 고발적인 성향을 띠는 측면이겠죠. 그래서 실제로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평생 나치 당원증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고발하기도 하죠.

반대로 하버마스나 데리다, 레비나스 또는 부르디외 같은 사람들 및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 같은 경우는, 이런 역사적/전기적인 측면보다는, 좀더 일반적인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의 경우는 하이데거 개인이나 역사적인 정치적 운동으로서 나치즘(말하자면 1930년대 초에서 시작해서 1945년에 종말을 고한)보다는,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표현되는 서양 형이상학의 어떤 특성이나 적어도 서양 근대 사상 내지는 독일 사상의 어떤 측면과 파시즘 일반의 사상적 연관성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라면 실제로 하이데거가 1934년 내지 1935년 이후에 더 이상 나치즘 운동에 관여했는지 아닌지 여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죠.

제가 yoonta님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건 바로 이 두 번째 측면을 중시하는 비판가들이 있더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버마스나 데리다의 저작을 지적했던 거구요. yoonta님이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yoonta님의 자유입니다. 저는 yoonta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 yoonta님과 논란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하이데거의 사상의 전개과정 여부에 대해서도 그렇게 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가 뭐 이 문제에 관해서 하버마스나 데리다, 레비나스와 다른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구요. 그러니 제 생각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실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yoonta님이 "헛수고만 했다"고 하시니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yoonta님이 좀 오바한 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이 기사를 쓴 것도 아니고, 하이데거를 고발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yoonta 2005-09-2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이 이야기하신 두 번째의 하이데거비판이 님이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였다는건 위의 님의 덧글에서 이미 알고있었던 내용이고요..어쨋든 바로 위 덧글에서 님의 의견은 충분히 개진된 것 같네요. 바쁘신데.. 괜히 관심없는 내용으로 귀찮게 해드린 것 같네요. (뭐 오바랄거까진..걍 간단하게나마 님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것 뿐인데..그럴려고 이런 블로그 있는거 아닙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