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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한 자주파'와 단절, '진보' 재구성하자


[이명박시대 전망](9) - 대선 평가를 둘러싼 몇 가지 숙고와 진보운동



이광일(성공회대)  / 2007년12월24일 16시34분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48.7%를 득표하였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26.2%의 지지율을 얻었다. 진보를 자임한 민주노동당은 3%, 사회당은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의 득표를 기록했다. 이러한 선거결과에 근거하여 권력의 행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다수 언론들과 정치평론가들은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를 전제로 선거 의미에 대한 촌평과 향후 전망을 제출하고 있다. ‘이명박특검법’에 대한 한나라당의 연이은 거부권행사 요구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정 이것이 전부인가. 한나라당의 승리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여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는 있다. 그저 ‘그들의 말’에 휩쓸릴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압도적 승리’에 가려진 것


첫째, 투표율과 득표율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이번 선거의 전체투표율은 62.9%로 37.1%의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았다. 대선 중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다. 이를 고려해 산술적으로 추산해 보면, 이명박 후보는 전체유권자 가운데 약 30.8% 정도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압도적 지지’에 의한 당선이라는 평가는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전망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오히려 투표하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권교체의 열망이 높았던 보수정치세력 지지자들의 결속력은 매우 높았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에 무소속 이회창 후보의 15.1%를 합하면 63.8% 정도가 보수파를 지지하였고 이것은 전체유권자의 40% 정도이다. 투표할 만큼 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추할 때, 기권표에는 항존하는 정치적 무관심층 이외에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인 성향의 표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선거 결과가 진즉에 결정되었기에, 혹은 기존 진보정당들의 퇴영적인 모습과 새로운 의제(agenda)가 빈곤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투표와 연결시키지 않은 층이다. 민주노동당 지지자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반한나라당’이라는 방침 아래 열린우리당 후보를 찍었을 것이고 또 다른 적지 않은 부분은 퇴영적인 민노당에 실망하면서 기권했을 것이다. 사회당의 지지율이 당원수에도 훨씬 못 미쳤다는 점을 감안할 때, 거기에도 다수의 기권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지난 선거에서 “그래도 진보정당인데’라며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었던 진보, 급진지향의 대중 가운데 다수가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비현실적일까.


물론 투표율과 득표율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기권표의 성격을 무시한 채, 이번 선거를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라고 평가하며 향후 정치지형을 점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너무 과잉 평가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이 지니는 한계는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한나라당의 ‘이명박특검 철회요구’가 그것이다. 이러한 압박은 최소한 특검의 행보를 미리 제한하려는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이 침묵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더욱 자극하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진영의 경우, 최소한 내년 총선의 향배와 대책, 그리고 노무현정권보다 더 강한 신자유주의 공세가 예상되는 지금, 이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이들 가운데 최소 10-15% 정도가 어떤 의제를 매개로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이느냐가 향후 정치지형과 관련하여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보정치세력의 재구성 여부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진보의 덕목이 무엇인가. 현상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념과 실용의 대비’, 현실을 가리는 이데올로기


둘째, 대부분의 언론이 합창하는, 이념이 탈각되고 실용이 압도한 선거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러한 평가는 보수의 언어로 현실을 가리고자 하는 반지성적인 평가이다. 지금 지구적, 일국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정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 발상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97년 IMF위기 이후 한국정치의 궤적 또한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번 선거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후보에 대한 20-30대의 지지를 두고 ‘젊은 세대=진보’라는 등식이 깨졌다고 부산을 떨고 그것을 근거로 ‘실용주의’가 승리하였다는 평가가 무반성적으로 제출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사의 기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제고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일부 언론, 시장에 지배받는 여론조사기관과 정치컨설턴트 등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극적 평가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그 근거가 견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실한 것도 아니다. 사실 이들 세대의 거의 다수는 신자유주의 이외에 어떤 이념과 발상, 대안들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어떤 사회관계와 권력관계 위에서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집권 대통합민주신당과 야당인 한나라당이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인지 여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 다수의 일반 대중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렇기에 이들은 내용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이라는 신자유주의정치세력들의 선동적인 말 한마디와 자신의 미래를 기꺼이 바꾸는 대담함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이들 세대에 “당신은 스스로를 진보적 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보수적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 그 응답률로 이들의 진보성 여부를 규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또한 젊은 세대의 특성상 이들 가운데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응답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연구자적 입장에서 말하면, 이런 이유로 인해 ‘양적 조사방법’이 아닌 ‘질적 조사방법’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흔히 평가하듯 ‘이념의 탈각’과 ‘실용주의의 부각, 압도’는 서로 대립시켜 비교,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이념, 발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비대칭적인 현실 때문에 그 안에서 실용주의가 팽배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개혁,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언론들조차 비판 없이 추종하는, 즉 새로이 출범할 이명박정권을 ‘이념을 넘어서는 실용정권’ 등으로 묘사하는 평가는 피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마치 이념과는 관계없는 듯 행세하면서 현실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권력의지에 스스로를 복속시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운명과 활로


셋째, 기존의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향후 위상과 관련된 평가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들이 얻은 득표율은 26.2%로 지난해 5.31지방선거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열린우리당이 얻은 21.2%보다는 높다. 하지만 지자체선거와 달리 이번 선거가 대통령선거라는 점, 투표율이 당시 투표율보다 10% 이상 높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대동소이한 득표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다 이들 세력이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전화한 이후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이 거의 사라진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득표율은 자유주의정치세력이 독자적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득표라 할 수도 있다. 집권을 위해 과거 이들이 3당합당, DJP연합 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이들이 왜 그토록 ‘반한나라당의 단일화’에 목메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들이 다시 살아날 수는 있을까. 곧 다가올 내년 4월의 총선거에서 그것은 가능할까. 다수의 언론과 평론가들은 ‘친노파’와의 단절 실패와 ‘도로 열린당’으로의 회귀 등을 참패의 핵심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른바 ‘노무현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법은 탈노무현이다. 그런데 진정 이들이 탈노무현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을까. 애석하지만 이번 선거 과정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렇다면 왜 불가능할까? 그것은 한마디로 노무현프레임의 핵심이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97년 IMF위기를 계기로 등장한 김대중정권 이후 자유주의정치세력에게 주어진 역할은 신자유주의를 국가사회의 운영원리로 정착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탈노무현프레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을 거치며 심화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동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번 대선에서 나타났듯 자유주의정치세력은 그것에 제동을 걸기보다 오히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신자유주의정책에 더욱 더 밀착하는, 따라서 한나라당과 더욱 유사한 정책을 제출하기 일쑤였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이들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차별성을 이른바 ‘평화.개혁세력’이라는 언술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87년 식 ‘민주 대 반민주’의 구호로 한나라당을 반평화, 전쟁수구세력으로 몰았지만, 대중은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DJ가 ‘한나라당의 집권’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역설하며 이들을 돕고자 하였으나 그것 또한 찻잔 속의 미풍도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신대북정책’으로 맞불을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 이유는 이른바 평화.개혁을 상징하는 개성공단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분업체제에 북한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의 문제 아니었던가. 즉 대북정책은 신자유주의체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하위정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개혁 담론은 대중에게 주변적, 부차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온한 삶을 사는 대중은 그나마 무엇인가 새로운 가치들을 자기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삶 그 자체에 등이 휘어 고통 받는 대중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 고통을 강제한 가시적 정치권력을 가장 중요한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반면, 그 고통을 해소시켜주겠다는 선전과 선동에는 강하게 이끌린다. 더군다나 ‘신자유주의의 길’만이 실현가능한 활로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즉 ‘진보적 대안’이 의미 있는 대중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한 상태이라면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명약관화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다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들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이번 대선과정에서 이미 그들 가운데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줄기에서 차이가 없는 한나라당, 이회창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자기화하면서 그러한 문제를 완화, 해소하는 방향으로 선명히 이동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길은 이번 대선에서 범여권으로 분류된 창조한국당의 정책 내용과 통할 것이다. 기우에서이지만 어떤 정치세력, 어떤 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세우는 내용이 중요하다.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대표되는 현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이 두 가지 길을 중심으로 하여 재구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혹시 그들이 진보정치세력과 연대할 가능성은 없는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이 지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이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그들은 자신들을 개혁주의자, 민주주의자로 포장해 대중에게 소개해 왔다. 어떤 이는 그들이 ‘좌파신자유주의’라고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았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좌파’였고 그것은 단지 개혁,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여전히 다수의 대중은 그것이 신자유주의 개혁,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라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삶에 고통 받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장과 번영을 약속하는 신자유주의’를 ‘좌파의 사슬’로부터, 즉 혐오스러운 ‘개혁주의자, 민주주의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현실의 고통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좌파 아닌 자유주의정치세력이 한편으로 좌파를 조롱, 희화화시키면서 다른 한편 그것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노무현정부가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라는 세간의 평가로부터 진보가 끄집어 내야하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정치적 교훈이다. 이런 그들이 어떻게 진보와 연대할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고 대중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남북관계를 경색시켜 줄 것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어디 그것도 한나라당 마음대로 되겠는가.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그리 간단치 않다.


진보의 완패와 진보정치세력의 재구성


마지막으로 진보정치세력의 현재, 향후 전망과 관련된 것이다. 민주노동당, 사회당에 대한 피판은 이미 많은 것들이 제기되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비판이 전혀 먹히지 않는 화석화된 정당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에 바라는 것은 최소한 진보정당에 부합되는 행보를 걸으라는 것이다. 굳이 “제도정당은 어쩔 수 없어!”라는 낡은 비판에 기대고 싶지 않다. 또 그 제도의 경계를 넘어서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혹은 사회당의 몫이라기보다 ‘더 많은 진보, 더 많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제도/비제도의 경계를 헐어야 하는 ‘운동정치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신대북정책 한방에 끝난 완고한 민족주의, 코리아연방, 그리고 말의 성찬뿐인 환경 및 생태문제에 대한 언급,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무지와 감수성 빈곤 등은 그 지지자들, 우호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을 진보정당으로 호명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비정규직노동자의 당’이라고 외쳤지만, 비정규직법의 통과 과정에서 보인 비일관성과 동요 이후 민주노동당의 그러한 외침은 의구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혹시 민주노동당의 정파들이 과거에 뿌렸던 땀과 눈물로 현재 자신들이 진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굳이 ‘87년 체제’의 종말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민주주의와 진보는 과거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것들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서 있는가를 그 판단의 유일한 준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민주노동당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다른 한편 사회당은 어떤가. 그 대선후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선출되었는가. 그것이 내세운 ‘사회적 공화주의’는 또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가. 그에 대해 대중은 물론 그 당원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 사회에 공화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없다. 문제는 그 ‘사회적’이라는 수식인데,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사회관계들에 내재한 차별과 배제를 제거하자는 ‘급진민주주의’의 또 다른 정치적 판본으로 독해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당이 환호한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가, 그에 근거한 경제정책들이 ‘사회적 공화주의’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사람중심의 진짜경제’에 대해 보였던 공감과 환호는 자유이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간일반이 아니라 분열된 역사적 사회관계들이다. 그 안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이며 정치들이다. ‘사람중심의 진짜경제’가 사회당의 급진민주주의와 무언가 상통한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환호하였다면, 지금 사회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선거가 끝난 지금, 사회당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잠시 접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회당의 몫이 아니다. 지금 사회당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번 대선과정에서 자신들이 보인 정책과 정치적 행보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중은 사회당이 무엇을 하는 정당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의 당원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0.07%의 지지율이 사회당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공당으로서의 사회당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반증하는 증거로서는 충분한 수치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대선의 진짜 패배자는 ‘개혁진보세력’이 아니라 진보정치세력이다. 이번 선거의 판세는 63.8% : 26.2%+3%+0.07%가 아니다. 63.8%+26.2% : 3%+0.07%, 즉 90% : 3.07%인 것이다. 여기에 만일 창조한국당을 친신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규정할 경우, 그 패배의 골은 더욱 깊다. 범신자유주의세력이 투표자의 96%를 획득한 것이다. 이 초라한 3.07%를 가지고 진보정치세력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좌고우면할 일이 남아 있는가. 진정 대중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을 버리는 길밖에 없다.


첫째, 그 방법이 어떠하든 민주노동당은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계급적이지도, 급진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완고한 자주파’들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그 재편의 과정에서 사회당 등과 통합할 필요가 있다. 변화를 전제로 한 민노당과 사회당의 강령은 내용상 서로 함께 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제도정당 외부의 계급적, 급진민주주의적인 정치세력들, 혹은 ‘계급좌파’와 ‘비계급좌파’ 또한 이러한 움직임을 외면하지 말고 직간접적으로 개입, 결합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 같은 ‘제도정치=개량주의’라는 낡은 혐오는 금물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그 한계는 제도/비제도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자 하는 운동정치들의 과제로 계속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현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재검토, 철회되어야 한다. 지금 배타적 지지는 오히려 진보정치의 보수화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러한 변화에 기존 진보정당의 대중적 명망성과 영향력을 지닌 리더들이 동참하도록 최대한 요구할 필요는 있지만, 결코 그들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 ‘낡은 틀’에서 비상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인물보다는 바로 그 낡은 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이 진보정치세력에게 준 기회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시간은 진보정치세력을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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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고한 자주파'와 단절하면 진보는 저절로 재구성되는가?
    from 바람소리 쓸쓸한, 風簫軒 2007-12-26 13:57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고딩 때부터 주변 친구들과 사투를 벌일 때부터 언제나 반NL전선을 구축해온 사람이고, 이번 대선 과정은 물론 이전 대선 과정에서도 NL친구들이 어떻게 활동을 벌였는지 나름 알고 있고, 그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선이 끝난 뒤에는 격분한 나머지 <이제 진보운동은 자주파와 결별할 때다>란 주제로 글을 썼지만 발표는 하지 않고 묻어두고 말았습니다. 평소 자주파의 수령관이나 분단 이후 남한
 
 
 

♣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2008 겨울 신규 대중강좌



 


■ 맑스주의와 환경


1강 : 지구온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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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 다양한 환경이론들

4강 : 환경문제, 마르크스주의적 대안

- 강사:김민정(세미나네트워크 새움 회원, 성공회대 강사) 외

- 일정: 1월 14일 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총 4회



■ 자본주의, 미래는 있는가?



- 정치경제학 원론에서 신자유주의 비판까지

1강 : 상품과 그 가치/ 화폐/ 가격

2강: 자본과 잉여가치, 이윤, 임금

3강 : 공황

4강 : 독점 자본주의

5강: 국가 독점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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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재: 노동자 교양 경제학, 채만수 지음, 노사과연 (교재 구입 가능합니다. 20% 할인)



 ■ 중남미 현대사

1강 : 19세기 말 20세기 초 과두지배 체제의 구축과 멕시코혁명의 파노라마


2강 : 대공황의 여파와 포퓰리즘 체제 // 3강 : 쿠바혁명과 체 게바라, 쿠바를 떠난 자와 남은 자


4강 : 군부독재 체제와 인권유린 문제, 과거사청산 논의


5강 : '잃어버린 10년'과 세계화, 사파티스타 운동과 반세계화


6강 : 우고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바람: 새로운 대안인가?


- 강사: 박구병 (UCLA박사, 서울대, 연세대 강사)


- 일정: 1월 22일 부터 매주 화요일 7시 총 5회(설연휴 휴강)



■ 신규 세미나





◆ 한국 현대사



◆ 맑스주의의 역사



◆ 이데올로기론과 반폭력의 정치



담당자 : 김경수 (새움 회원)



첫모임 : 1월 16일 수요일 2시



담당자 : 한형식 (새움 회원)



첫모임 : 1월 16일 수요일 7시



담당자 : 진태원 (서울대 철학박사)



첫모임 : 1월 15일 화요일 오후 2시






모든 강좌와 세미나는 신촌 [새움] 세미나실에서 열립니다. (문의 : 011-9975-1392)



http://club.cyworld.com/seumnet


 



♣ 새움 세번째 영화 상영회




“라틴 아메리카 영화제”




■ 상영시간표









4:00



7:00



1월 9일 (수)



잊혀진 사람들



(The Young and the Damned, 1950)






감독 : 루이스 부뉴엘 / 85 min



엘 토포 (El Topo, 1971)






감독 :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 124min



1월 10일 (목)



마추카 (Machuca, 2004)






감독 : 안드레스 우드 / 120min



오피셜 스토리



(The Official Story, 1985)






감독 : 루이스 푸엔조 / 112min



1월 11일 (금)



검은 신 하얀 악마



( Black God, White Devil, 1964)






감독 : 글라우버 로샤 / 120min



마꾸나이마 (Macunaima, 1969)






감독 : 조아낑 뻬드로 데 안드라데 /105min



1월 12일 (토)



저개발의 기억



(Memories Of Underdevelopment, 1968)



감독 :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 / 97min



루시아 (Lucia, 1969)






감독 : 움베르토 솔라스 / 160min





■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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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12-2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흥미로운 주제들이군요. 찜했다가 괜찮은 날에 가고 싶네요.
그런데 강좌를 들을 때 비용이라든지, 회원제 같은 것에 납부해야 하는 게 있나요.
그리고 강의들을 다 들을 수는 없고, 몇 개의 강좌를 듣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움말씀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balmas 2007-12-24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오랜만이시네요. ^^
제가 알기로 새움에서는 따로 수강료 같은 건 안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원하는 분들에 한해서 기부금(?)을 좀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회원 가입은 원하시면 하고 안해도 강의 듣는 데는 별 지장이 없는 것 같더군요.
자세한 것은 위에 있는 새움 홈페이지 주소로 가시면 알 수 있습니다. :-)

이재원 2007-12-24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움홈피에 더 자세한 내용이 없던데요 ^^;; 발마스님의 세미나에 참석하려면 그냥 그날 나가면 되나요? ^^

balmas 2007-12-25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재원님/ 반갑습니다. ㅎㅎ 제가 할 세미나는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안 잡혀서 공지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좀더 생각해서 1월 초쯤 구체적인 내용과 일정을 밝힐 생각입니다. 여기 서재에도 공지할 생각이니까
한 번 보시고서 결정하세요. :-)
 

 

재환이에게 

네가 지적한 부분을 검토해보니까, 누락됐다고 말한 것들은, 101쪽 영어 단어에 관한 것만 빼고는 네가 지적한 게 맞더구나. 101쪽 셰익스피어 인용문은, 원문을 찾아보니까 “not”이 없는 게 맞더라. 사실 그래야 말이 되고.

어쨌든 단어나 구절이 누락된 걸 찾으려면 하나하나 대조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네 덕분에 큰 짐 덜었다.

14쪽에서 “한 가지”와 “하나의” 사이에 그런 뉘앙스 차이가 있나? ^^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가지”라고 했는데, 좀더 생각해보고 “하나의”라고 하는 게 낫다면 고치도록 할게.

15쪽의 경우도 “정확히/정당하게”로 고치는 게 나을 것 같다.

36쪽은 영역본의 실수인 것 같아. 데리다 원문이나 셰익스피어 원문 모두 4막 3장이 맞는 것 같다.

37쪽 두 번째 단락의 경우에도 “환영에 대해”보다는 “환영에게”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구나.


44쪽의 경우는 조금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구절의 원문은 이렇게 돼 있어. “(fin de l'Histoire, fin de l'Homme, fin de la Philosophie, Hegel, Marx, Nietzsche, Heidegger, avec leur codicille kojevien et les codicilles de Kojève lui-même).” 원문의 내용은 정확히 말하면 이런 뜻이지.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는 각자 나름대로 역사, 인간, 철학의 종말/죽음을 선언했고, 이 때문에 이들은 종말의 고전가, 곧 사망한 역사와 인간, 철학에 대한 유언을 남긴 사람들이지. 그런데 데리다는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라고 쓴 다음에 “codicile kojevien et les codiciles de Kojève lui-même”라고 적고 있지. 이건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아. 알다시피 코제브는 1947년에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이라는 제목이 붙은 유명한 헤겔 󰡔정신현상학󰡕에 대한 강의록(1933년에서 39년까지 강의했던)을 펴내지. 이 책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루는 책이기는 하지만, 그 관점에는 마르크스와 니체, 하이데거의 철학이 포함돼 있지. 그런데 󰡔마르크스의 유령들󰡕 152쪽에 데리다 자신이 인용하고 있듯이, 코제브는 1959년에 (곧 위의 인용문 앞에서 데리다가 말하듯이 데리다 세대의 사람들에게 일용 양식과 같았던 종말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던 시기) 자신의 책에 각주를 하나 붙이지. 일종의 “부록”으로 말이야. 그 각주의 내용은 정확히, 미국과 소비에트, 일본에서 코제브가 경험한 역사의 종말 이후 인류가 체험하게 될 삶의 양식에 관한 것이지. 따라서 “codicile kojevien”이 뜻하는 것은, 코제브가 이 각주 및 후기를 덧붙임으로써 역사의 종말에 관한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의 “유언을 변경했다”(codicile의 원래가 의미가 이것이지)는 거야. 더욱이 1989년 이후에는 코제브의 영향을 받은 후쿠야마라는 젊은이를 비롯한 자유주의의 예찬자들이 다시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les codiciles de Kojève lui-même”, 곧 후쿠야마 자신의 변경했던 유언이 후쿠야마 등에 의해 다시 변경됐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codicile”은 “유언 변경”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 텐데, 나는 2장에 나오는 코제브가 추가한 각주나 후기와 연결해서 부지불식간에 “부록”이라는 의미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 같아. 어쨌든 좋은 지적이다. 

그리고 44쪽 두 번째 단락에서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의 원문은 “ne se dissimulaient plus”야. 146쪽에서 볼 수 있듯이 “se dissimuler”는 “감추다”는 뜻과 더불어 “인정하지 않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어. 내가 보기에는 “감추다”는 뜻보다는 “인정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그런데 네가 지적하고서 보니까 여기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고치는 게 옳을 것 같다. 다시 말해 “se dissimuler”가 "인정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부정문 형태인 “ne se dissimulaient plus”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해하는 게 옳겠지.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내용이 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것 같다.

45쪽의 경우 “이는 시사적인 질문이다”의 원문은 “Question d'actualité”야. 만약 이게 “Question d'aujourd'hui”였다면, 네가 제안한 것처럼 “이는 오늘/오늘날의 질문이다”라고 해야겠지만, “Question d'actualité”를 그렇게 번역해야 할지는 좀 망설여지는구나.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이것과 관련해서 108쪽에 나오는 “그리고 이는 오늘날,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의 경우는 원문이 “Et c'est aujourd'hui, ce sera peut-être demain notre problème”이니까 네 제안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강연이 이틀에 걸쳐 진행될 것이라는 것만을 함축하는 것 같지는 않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 아마 내일도”라고 하면 중의적인 뜻을 모두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49쪽의 내용에 관한 제안은 그렇게 고치는 게 맞을 것 같다.

52쪽의 원문은 이거야. “L'oeuvre animée devient cette chose, la Chose qui s'ingénie à habiter sans proprement habiter, soit à hanter, tel un insaisissable spectre, et la mémoire et la traduction.”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지. “정신을 부여받은 저작은 이 사물, 고유한 의미에서 거주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거주를 만들어 내는s'ingénier, 곧 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물Chose이 되고,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되며, 기억과 번역이 된다.” 내 생각에는 원문에서 “spectre, et la mémoire et la traduction”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으니까, 이걸 “기억과 번역의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된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elles”이라는 대명사가 “말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요구들”을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는 결정할 수가 없는데, 맥락상으로는 “말들”을 받는 걸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요구들이 분배된다”는 것은 맥락상 좀 어색한 것 같아.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은 원문에 “whither”라고 나와서 그냥 옮긴 건데, 좀 표시를 해둬야 할 것 같다.


57쪽에 관한 지적을 보자. 사실 네가 지적한 문장들은 이 책에서 제일 심오하고 중요한 문장들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깊이도 있고 또 난해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들이야.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Il n'y a de tragédie, il n'y a d'essence du tragique qu'à la condition de cette originarité, plus précisément de cette antériorité pré-originaire et proprement spectrale du crime. Du crime de l'autre, un forfait dont l'événement et la réalité, et la vérité, ne peuvent jamais se présenter en chair et en os, seulement se laisser présumer, reconstruire, fantasmer. On n'en continue pas moins, dès la naissance, de porter une responsabilité, ne serait-ce que pour avoir à réparer un mal au moment même où personne ne saurait l'avouer, sauf à se confesser en confessant l'autre comme si cela revenait au même.

그리고 내 번역은 이렇게 돼 있어.

이러한 범죄의 원초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1)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처럼 범죄가 기원에 앞서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1-1) 비극이, 비극적인 것의 본질이 존재한다. 이러한 타인의 범죄,(2) 타인의 중죄는 결코 그 사건과 실재성, 진리가 생생하게 현재화될 수 없고, 단지 추정되고 재구성되고 환상 속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탄생에서부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책임이,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이 범죄자라는 것―옮긴이]을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옮긴이] 고백하는 것(3)―마치 이러한 두 가지 고백이 똑같은 것으로 귀착된다는 듯이―말고는 달리 누구도 이러한 책임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어떤 악을 바로 잡아야 하는 책임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네 지적은 우선 (2)를 (1) 다음에 넣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글쎄 앞 문장 어딘가에 첨가를 해야 한다면 아마 (1-1)에 넣는 게 좋겠지. “범죄의, 타인의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내가 번역하면서 그걸 넣지 않은 이유는 “범죄의 원초성”이나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말에 사실 그 내용이 이미 함축되어 있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함축된 내용이 명시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야. 사실 데리다의 원문 자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고. 

그 다음 네가 두 번째로 지적한 것은 (3)의 번역이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지. 그 대신 너는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을 고백하는 자기-고백 속에서”라는 번역을 제안하고 있고. 그런데, 이런 번역을 제안하면서 너는 “오히려 반대로, 햄릿이 뒤틀린 세월을 ‘바로 잡으려는’ 자기 고백을 통해서, 그 고백 속에서,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므로, 자기-고백 속에 타자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백이 우선이겠지요”라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네 제안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다. 네가 제시한 이유를 좀더 명시적으로 밝혀주면 아마 더 재미있는 토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용을 좀더 분명히 제시해볼래?

그리고 61쪽의 “배려”의 원어는 “souci”인데, 가령 알다시피 푸코가 󰡔자기에의 배려Souci e soi󰡕라고 할 때 쓴 게 이 단어고, 독일어로는 하이데거가 사용한 Sorge라는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겠지. 그래서 무심히 “배려”라고 옮겼는데, “souci”의 뜻이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고 하는 것이니까, 네가 제안한 것처럼 “관심”이라고 옮기는 게 오히려 의미를 좀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104쪽의 경우는 “spectropoétique”의 중의적인 뜻을 고려해서 일부러 의역을 한 건데, 네 말을 듣고 보니까 “미화”라는 말에 원어 transfigurante를 병기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105쪽의 경우는 네 말처럼 “순교자”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 것 같고, 107쪽의 번역은 좀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111쪽의 제안에 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이야. 데리다가 “마르크스나 다른 사람들의 동일성론,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une tauto-ontologie assez hétérologique과 마찬가지라는 점이다”라고 말했을 때 말하려는 바는, 마르크스나 다른 사람들이 동일성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나름대로 매우 타자론적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결국 동일성-존재론으로 타자론을 포섭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매우 타자론적인”이라는 말은 “타자를 동일자로 포섭하려는”이라는 뜻보다는 “타자를 존중하려고 매우 노력하지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뜻이지. 요컨대 데리다가 “assez”라는 단어를 써서 강조하려는 것은 “결과”(결국 동일성-존재론으로 포섭되고 마는)보다는 “의도”(타자론적이려고 노력하는, 하지만)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거야.  


지금까지 간략하게 네 제안에 대해 답변을 해봤는데, 107쪽에 관한 제안이나 특히 57쪽에 관한 제안은 좀더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어쨌든 아주 꼼꼼하게 읽어줘서, 내가 수고를 덜게 됐고, 다른 분들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좀더 정확히 읽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아주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구나. :-)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음에 좀더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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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 2007-12-2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일이 확인해주시고, 제가 본 가장 친절한 역자네요^^ 그리고 이런 일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여기다니요, (이제는) 좀 더 '격렬한' 선물을 기대하셔야지요~ 그리고 수고는 형이 던 게 아니라 제가 덜었지요, 번역본 아니었으면 몇 달을 고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몇 일 만에 제법 읽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계속 '하드코어' 논리학, 분석철학 책/논문만 읽다가, 형 덕분에 데리다를 읽을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지요.

우선 codicile에 관해서, 처음에 이 단어를 봤을 때 데리다가 왜 이렇게 희한하고 희귀한 단어를 쓰나 했는데, 물론 그의 악취미를 욕하면서, 근데 형의 설명을 듣고 보니 나름대로 복잡한 사연을 가진 단어였군요. 구문적으로도 제가 제안한 것처럼 읽으려면 leur condicile이 복수가 되어야 할 것 같네요.

57쪽에서 제가 ‘타인의 범죄성’을 넣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은, 제가 잘못 본 것 같네요. 형이 써 주신 원문을 보나, 영어번역본을 보나 타인의 범죄성은 다음 문장에만 나오네요.

그리고 제가 ‘타인을 고백하는 자기-고백’이 맞지 않을까 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맥락상 데리다가 햄릿의 저주는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을 향한 것이 아니라, 즉 타자(삼촌)가 지은 범죄 때문에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탄생과 함께, 그러니까 자신의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어긋나 있던 그 시간을 바로 잡기 위해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향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햄릿이 타인이 지은 죄에 대해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태어났다고 자기의 사명mission을 고백함으로써, 타인 혹은 타인의 범죄 때문에 사명에서 벗어난de-mission 시간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구조적으로, 햄릿이 타자를 범죄자로 고발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타인(이 지은 범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고백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고,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렇게 햄릿이 책임을 받아들이는 행위 속에는 타자(의 범죄)에 대한 고백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 타자를 고백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책임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 곧 타자와의 관계의 무한한 비대칭성, 곧 정의를 열어놓게 되는 게 아닐까요? 아무튼 저의 요점은 타자를 먼저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럴 경우 거의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발’하는 게 아닐까요), 자신의 책임을 고백하는 것이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이 구절을 읽은 방식입니다.
그런데 형이 적어 주신 원문을 보니, en confessant l’autre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문장이 진짜 복잡하네요,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형이 번역하신 것처럼, ‘타인을 고백함으로써’ 혹은 ‘타인을 고백하면서’ 정도로 번역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긴 합니다만, 분사처럼 ‘타인을 고백하는’ 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은 ‘assez’가 있으니 형이 말씀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문단만 염두에 두고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이원론적 존재론을 비판한다고 생각했는데, 전체를 요약하는 말인 것 같네요.


이재환 2007-12-2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쓰는 김에 2장을 읽다가 의문나는 부분 몇 가지도.. 바쁜 데 제가 너무 귀찮게 하네요^^ (저도 이제 놀아야해서 더는 못 읽을 듯ㅋ)

113쪽)'이 정식은 독특하게도 이 시간, "바로 이 시간", 바로 이 시간의 시간, 햄릿에게는...' -> '이 정식은 독특하게도 이 시간, "바로 이 시대", 바로 이 시대의 시간, 햄릿에게는..' 이후에 햄릿의 '시대' 혹은 '시대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 어떨지요.
119쪽)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 다루고, 이로써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이 도식들과 더불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을 가지고 이 문제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다루고..' 이 문장에서 우리가 (마르크스의 도식들을 가지고) 다루고 변화시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이 아니라 앞 문장에 나오는 문제들인 것 같습니다.
122쪽)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무엇보다도' ->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리고 우리고 알든 모르든 간에, 무엇보다도'
124쪽) '니체와 벤야민은 우리가 각자 나름대로' -> '니체와 벤야민은 그들 각자의 방식대로'
129쪽) '하지만 결코 자본 그 자체...유령적인 힘들과 연결되어 있는 자본주의들만이' -> '하지만 결코 단수로서의 자본 그 자체..연결되어 있는 복수적인 자본주의들만이' 영역본은 '단수로서의 자본주의'와 '복수로서의 자본주의들'을 구분하고 있는데 원문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130쪽) '반면 과학의 기획 또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기획' -> '마르크스주의적 학문의 기획 또는..'
134쪽) '국가는 "경제와 인정이라는 두 기능"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제 괄호를..' -> '국가는 ...세워져야 한다. <<공산당 선언>>의 시대에서처럼 유럽의 동맹은 그것이 배제하고 투쟁하고 혹은 억압하는 것에 의해서 신들여져 있다. 이제 괄호를..'
138쪽) 오랫동안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 '..남게 될 것이다. 왜 영원히가 아니라 오랫동안인가? 우리는 분명히..'
140쪽) '항상 지켜질 수 없는 약속, 왜냐하면 적어도 이 약속 익명적인 독특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요구하기 때문이다.) -> 이 부분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순서를 바꾸는 것이 맥락에 맞을 듯 합니다. '무한한 약속'은 '익명적인 독특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평등에 대한 존중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지켜질 수 없는 약속...'으로요.
143쪽) '선과 악을 평가할 수 있게 해 주는 초역사적 기준들의 본성을..' -> 앞에서는 '자연'으로 번역하신 것 같던데 여기서도 '초역사적 기준들의 자연' 혹은 '초역사적 기준들의 본성/자연'이라고 하는 게 어떨지요.
144쪽) '후설이나 하이데거' -> '후설(침묵 속에서 넘어간다)이나 하이데거..

아, 그리고 데리다의 벤야민에 관한 긴 각주(343쪽)에, 괄호 속에 벤야민이 강조했다고 된 곳에 강조된 단어가 없어요~

balmas 2007-12-25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환아/ 내가 지금 마르크스의 유령들 원서가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살펴봐야 하는데, 며칠 있어야 되겠다.
어쨌든 대조해가며 읽느라고 고생이 많다. :-)
 

형, 잘 지내시죠? (짧은) 방학이라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다가, 혹 2쇄나 3쇄에 반영되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사소한 제안들 몇 가지와 형이 한 번 확인해 주십사하는 몇 구절에 대해서 몇 자 적습니다. (메일 주소를 몰라서, 어디다 적을까 고민하다가 여기에다가 적습니다. 토론하자는 건 아니구요^^ 제가 불어본을 한국에 두고 와서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그래서 저도 긴가민가하는 부분을 적었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14쪽) ‘질문의 가능성은 아마도 더 이상 한 가지 질문은 아닐 것이며…’ -> 이건 사소한 제안입니다만, ‘한 가지 질문’이라고 하면 ‘한 가지 질문, 두 가지 질문…’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듯 하게 들립니다. 여기서 ‘질문의 가능성’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타자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질문’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질문의 가능성은 아마도 더 이상 하나의 질문은 아닐 것이며…’라고 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15쪽) ‘칸트가 정확히’ -> ‘칸트가 정확히/정당하게’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하신 것 같은데, 특히 이 부분은 칸트의 Wuerdigkeit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두 가지 뜻을 병기하는 게 어떨지요.

36쪽) ‘4막 3장’ -> 영어본에는 ‘4막 2장’으로 나와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37쪽) ‘그 자체로, 진실로 유령을 다루는 학자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 영어본에 따르면, 여기에 한 문장이 누락된 듯 합니다. ‘그 자체로, 진실로 유령을 다루는 학자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학자는 유령을 믿지 않았고, 유령성의 잠재적 공간/장소라고 불리는 것 역시 믿지 않았다.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아마도 마셀러스는 고전적인 학자는 환영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만한..’ -> ‘아마도 마셀러스는 고전적인 학자는 환영에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만한..’ 불어 전치사 a의 애매성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마셀러스가 학자인 호레이쇼에게, 유령에게 말을 걸어 보라고 말하는 부분이 아래에 나오는 걸 봐서는 ‘환영에게’라고 번역하는 게 맥락에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44쪽) ‘대문자 철학의 종말,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및 코제브가 덧붙인 부록들, 그리고 또한 코제브 자신에 대한 부록들’ ->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의 코제브적 유언, 그리고 또한 코제브 자신의 유언’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코제브의 사망선고를 헤겔…하이데거의 철학(형이상학)의 종언 선언과 유비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헤겔..하이데거가 한 유언은 코제브적인 유언이고 또 코제브 자신의 유언도 있을 듯 합니다. ‘유언’은 본인들이 죽을 때 남기는 것이므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사망선고’ 정도로 의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 또는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이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것’ ->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 또는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이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던 것’  영어본이 의역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맥락상, 공산주의 국가의 만행을 우리들이 알고 있었고, 그것을 감출 수도 혹은 숨길 수도 없었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긴 합니다.

45쪽) ‘이는 시사적인 질문이다.’ -> ‘이는 오늘/오늘날의 질문이다.’  아마 ‘역사의 종말에 늦을 수 있는가’는 데리다가 발표하던 그 날의 질문이기도 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108쪽에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질문이기도 하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김에, ‘지진아’는 너무 강한 표현인 것 같아서 그냥 ‘지각생’정도면 어떨지.. 막차가 지난 뒤에 막차를 타려고 하는 사람을 ‘지진아’로 부를 것 까지야…

49쪽) ‘어떤 장-래 못지 않게 어떤 과거, 어떤 고유 명사의 과거를 명명한다면’ -> ‘어떤 과거, 어떤 고유 명사의 과거 못지 않게 어떤 장-래를 명명한다면’ ‘depuis Marx’가 과거를 넘어서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게 자연스러울 듯… 그래야 ‘고유 명사의 고유명사는 항상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 듯 합니다.

52쪽) ‘곧 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물이 되고,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되며, 기억과 번역이 된다.’ -> ‘…기억과 번역의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된다.’ 영어번역은 유령이 기억과 번역의 유령이기도 한데, 맥락상 이게 말이 되는 듯 합니다. 한 가지 번역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령이라는 의미에서요.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이 말들은 여기서 몇 가지 주요 가능성들 주위로..’ -> ‘이 요구들은 여기서 ...’ 저도 자신은 없는데, 여기서 지시대명사가 받는 게 ‘요구들’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부패하고 있는whither’ -> ‘그것이 부패하고 있는wither’  오타네요^^

54쪽) ‘이러한 이중적 기입이야말로 ‘the time is out of joint’라는 햄릿의 말의 수수께끼를 응축하는 것이고’ -> ‘…라는 햄릿의 말의 수수께끼를 정확히/정당하게 응축하는 것이고’  요건 justment이 들어가면 문장이 살 것 같네요.

57쪽) ‘이러한 범죄의 원초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 ‘이러한 범죄의 원초성, 즉 타자/타인의 범죄의 원초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구조상, 관계절을 앞으로 빼신 것 같은데, 뒤의 문장의 주어가 ‘타인/타자의 범죄성’인데다가, 내용상, 범죄 일반의 원초성이 아니라, 타자가 저지른 범죄의 원초성을 말하는 부분이니까 넣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이 범죄자라는 것-옮긴이]을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 –옮긴이] 고백하는 것 – ’ ->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을 고백하는 자기-고백 속에서’ 우선 타인을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고백하는 것은 내용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햄릿이 뒤틀린 세월을 ‘바로 잡으려는’ 자기 고백을 통해서, 그 고백 속에서,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므로, 자기-고백 속에 타자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백이 우선이겠지요. 그리고 형이 주를 다신 것처럼 그 자기 고백은 ‘타인이 범죄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책임의 고백을 함으로써 ‘타자 자체’를 고백한다고 하는 것이 맥락상 더 맞지 않을까 합니다.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을 왜곡/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으로, 법과 마찬가지로…’ ->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을 왜곡/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으로, 정확히/정당하게, 법과 마찬가지로..’

58쪽) ‘오히려 유령으로서 깃들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 ‘오히려 유령으로서 깃들어 있었던 게 될 곳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미래시제인 것 같네요.

61쪽)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배려가 복수나..’ ->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복수나..’ 영어본은 concern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햄릿의 to be or not to be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자연스러울 듯 합니다.
68쪽) ‘채무 없고 유죄 없는 이러한 선사’ -> ‘채무 없고 유죄 없는 이러한 선사의 역설’

85쪽) ‘곧 오늘날 어떠한 특수한 과학도 그것을 환원시킬 수 없는’ -> ‘곧 오늘날 어떠한 특수한 과학도, 그것이 인문학이든 아니든, 그것을 환원시킬 수 없는’  요 부분이 누락된 듯...

91쪽) ‘이러한 경계의 실존을 계속 믿었을 것이며’ -> ‘이러한 경계의 실존을 계속 믿었던 게 될 것이며’  전미래시제이긴 한데, ‘계속’이란 말이 있어서 굳이 전미래로 번역 안해도 될 것 같지만. 그냥 지나가는 김에…

97쪽) ‘(이는 보충적인, …이점이다.) 위대한 시인의 천재/정령…’ -> ‘(… 이점이다.) 우리가 살펴보게 되겠지만, 종교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여러 다른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결코 아니었다. 위대한 시인…’ 한 문장이 누락된 것 같습니다.

101쪽) 셰익스피어 영어 인용문의 단어가 누락된 듯… ‘but perform non’ -> ‘but perform none’ / ‘if thou dost perform’ -> ‘if thou dost not perform’ 근데, ‘not’을 추가하면 번역이, ‘만약 약속을 실행한다면 파멸할 것이다’ -> ‘만약 약속을 실행하지 않으면 파멸할 것이다’가 되어야 할까요?


104쪽) ‘미화하는 이념화의 과정이었다.’ -> ‘변용(變容)하는 이념화의 과정이었다.’ transfiguration은, 형이 옮긴이 주에서도 ‘미화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의 모습이 변화산에서 인간의 모습에서 신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을 말하는 단어이고, 여기서는 물질인 화폐가 유령의 모습으로 변화는 이념화의 과정을 의미하므로 ‘미화’보다는 ‘변용’이 이러한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105쪽) ‘구두쇠, 수전노, 투기꾼은 교환가치의 성자가 된다.’ -> ‘...교환가치의 순교자가 된다.’ 영어본에는 ‘성자’ 부분이 martyr로 되어 있는데, 불어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환가치를 죽임으로써 순수한 교환가치를 얻기 때문에 ‘순교자’가 어떨지요.

107쪽) ‘그는 <<공산당 선언>>이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로서의 환영을 푸닥거리하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유럽의 모의자들과 같이 환영을 불러오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 -> ‘그는 <<공산당 선언>>이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처럼 환영을 푸닥거리하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공산당 선언>>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형이 옮긴이 주에서 쓰신 거처럼 1의 b처럼 해석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의 b 부분은 대부분 셰익스피어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미상, 92-93쪽에 나오는 것처럼,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것에 대항에서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이 그 유령을 푸닥거리하기 위해서 모의한 것처럼 마르크스 역시 그들처럼 역설적으로 유령을 푸닥거리한다고 번역하는 게 옳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옮긴이 주 87은, 제가 보기엔, 좀 과도한 해석 같습니다. (유럽의 모의자들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축출하려고 동맹을 결성했지 그 환영을 불러오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108쪽) ‘그리고 이는 오늘날,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 ‘그리고 이는 오늘,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콜로퀴움이 열리는 이틀 동안, 그러니가 발표하는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111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질적인 것을 같게 만드는 존재론’ -> tauto라는 접두사가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접두사이고,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토톨로지는 죽음 및 타자의 타자성 같은 생명과 이질적인 것을 동일한 것으로 귀착시키는 존재론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 주면 좋을 듯 싶습니다.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은 왠지 타자 중심적인 동일성 같은 느낌을 주네요.

 p.s. 쓰고 나니, (좀) 사소하네요^^ 아직 1장까지밖에 못 읽었는데, 나머지는 내년 여름방학전에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을수록 중요하고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대선날 멀리서 답답한 마음에 (답답하게) 몇 자 적었습니다. 그럼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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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7-12-20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환아, 아주 꼼꼼히 읽었구나. ㅎㅎ
내가 좀 읽어보고 내일쯤 답변해줄게. :-)
수고했다.
 

 

1. 방제복 안에 입을 겉옷은 가급적 낡은 운동복 같은거 입으세요.
    이건 빨아도 소용 없으므로 기름에 노출되면 그냥 버려야 합니다.

2. 고무장화는 반장화말고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긴장화 신으세요.
    짙은 코발트 색으로 안에 면섬유가 부착되어 있는 것으로 시중에서 한 만원 내욉니다.

3. 고무장갑은 공업용으로 사시고요,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긴 거)
    구하시기 어려우면 김장할 때 끼는 빨간고무장갑 끼셔도 됩니다.(이것도 긴 거 착용)
    반드시 안에 얇은 면장갑을(결혼식장에서 신랑이 끼는)끼세요.
    손 시럽거나 오염의 위험도가 있습니다.

4. 도시락을 지참하시면 만약에 식사가 배급되지 않을 경우 요기 할 수 있습니다.

5. 마스크는 좀 두툼한 걸 착용하세요. 답답해도 이거 하셔야지 나중에 속 울렁거리지 않아요.
6. 미리 화장실 용변을 다 보셔야 합니다. 몇 시간 동안 화장실 못 간다 생각하세요.

7. 가실 때 직접 헌 옷 가지를 챙겨 가시면 좋습니다.

예전에는 제목이 저리 되었으면
빨간 비키니 하고요, 알록달록 튜브하고, 썬텐 오일, 근육질의 남자친구를 준비하세요.
했을텐데...마음이 찢어집니다. 뉴스에서는 태안반도만 보도 되지만 태안 인근 도서지역은 그냥 방치되었습니다. 배타고 일부러 들어 가시기 힘들다면 잘 알려지지 않은 곳도 가시면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환경연합이나 태안군청 홈페이지 가 보시면 작은 어촌 마을들 가시는 안내가 나옵니다.

*추가*
어떤 분의 문의가 있어 올립니다. 일당 준다는 질문인데요, 일당은 없습니다. 자원봉사자 명단을 적을 때 하루 일하시면 소득공제정산에서 5만원씩 준다는 말이 와전된 듯 하군요. 이건 정부에서 지급됩니다. 그런거 없어도 일 하실 분들은 다 하십니다만 정부에서 독려차원에서 만든 시스템입니다. 덧붙여, 만리포나, 학암포, 신두리, 천리포 같은 유명한 곳은 봉사자들이 많이 몰려 작업상황이 괜찮지만 의항이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어촌 마을은 여전히 노인네들이 어렵습니다. 그쪽으로 작업방향을 전환하심 더 큰 힘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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