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에 대한 언급들

자끄 데리다가 2004년 10월 10일 타계하였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휴머니스트이자 차연이라는 개념을 인류에게 알려준 해체론의 사상적 모험가로서의 생애를 마쳤다. 그가 췌장암에 시달리면서도 테러와의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게 될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했던 것, 맑스주의를 유령으로 규정하면서 새롭게 재구성될 것을 희망했던 것, 동독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던 맑스엥겔스저작선 MEGA 작업이 제정적인 파산상태에 놓이자 전세계의 지성에 호소하며 모금하였던 것들은 데리다가 맑스주의자로서의 생애를 살아가면서도 유령이 된 맑스를 전면에 걸지 못했던 당대의 상황을 알려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괴기한 인기가 미국에 데리다 열풍을 만들었을 때조차 그는 그것을 자신도 무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데리다는 포스트모던이즘과는 사실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오해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제는 데리다를 맑스주의를 상실한 맑스주의 세대의 한 인물로 재조명해야 할 때가 왔다. 그의 죽음이 만들어낸 새로운 철학적 기반은 그의 삶에서도 만들어내지 못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위대한 석학의 죽음 앞에서, 유령이 된 맑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또 하나의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언가?

 

노동자의 책(http://www.laborsbook.org) 홈피로 가셔서 회원가입하시면 [데리다에 대한 언급들] 영어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pdf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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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가 사망하고 난 후 외국의 몇 군데 신문기사들을 읽어봤는데, 프랑스에서는 역시 좌파 신문들이 대대적인 추모특집을 실었더군요. 프랑스 공산당에서 내는 [뤼마니테]도 그렇고 [누벨 옵세르바퇴르]도 여러 사람의 추모글을 싣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발리바르가 [뤼마니테]에 기고한 10월 11일치 추모글의 번역본입니다. 번역은 최원님이 해주셨습니다.

 

 

최원 번역

고 자크 데리다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 갑작스런 죽음에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이제껏 아무말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어떤 분이 고맙게도 저에게 발리바르 선생의 추모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원래 글은 l'humanité에 실려 있습니다(http://www.radio-universfm.com/lapens%C3%A9e.htm 에는 또 다른 추모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급하게 대충 번역해 봤습니다. 혹시 오역을 찾으시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처음 게시한 후에 약간 수정을 했습니다.)


À bientôt, Jacques Derrida
곧 만납시다, 자크 데리다.

par Étienne Balibar
philosphe.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Quelques heures après la disparition de Jacques Derrida, je ne veux pas tenter de caractériser son oeuvre en quelques mots. Je veux encore moins l’enfermer dans une étiquette. Seulement me remémorer quelques moments d’une vie et d’une pensée que j’ai eu la chance de rencontrer comme élève, collègue et ami.

자크 데리다가 사라진지 몇 시간이 안된 지금 나는 그의 작업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명칭 안에 가두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학생으로, 동료로, 친구로서 만날 수 있었던 삶과 생각의 몇몇 순간들을 회상하고 싶을 뿐입니다.

Je me souviens de son arrivé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ù nous préparions l’agrégation. Précédé de sa réputation de « meilleur phénoménologue de France », Derrida était surtout, pour nous, l’auteur d’un essai éblouissant sur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Husserl, dans lequel la question de l’historicité de la vérité était arrachée aux débats entre le sociologisme et le psychologisme. Il y allait d’emblée au plus difficile : la question d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la démonstration, en la faisant passer d’un problème de garantie formelle à un problème de reproduction dans le temps, anticipant sa grande thématique de la « trace », ou de la connexion entre l’activité de la pensée et la matérialité de l’écriture. Ses cours étaient - éloquents, mais surtout rigoureux dans l’établissement des concepts et la lecture des textes (comme ils le resteront toujours, il suffit de lire Politiques de l’amitié). Je découvris des années plus tard que j’en avais mémorisé des développements entiers grâce à la clarté et à la force de ses interprétations.

저는 그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더 나은 현상학자”라는 그의 명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눈부신 에세이의 저자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역사성과 진리의 질문을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빼앗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강의들은 웅변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개념들의 성립과 텍스트 읽기에 있어 엄격했습니다(이 강의들이 항상 참으로 그렇게 남아있으리라는 것은 <우정의 정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년 후 저는, 그의 해석의 힘과 명쾌함 덕분에 제가 강의들의 모든 전개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À cette pratique de grand enseignant, je veux rattacher une leçon plus générale. Derrida qui, dans le monde entier, est devenu une figure très médiatique, n’a jamais cessé de travailler dans l’université et d’y voir le lieu fondamental de l’activité philosophique (même si, dans son pays du moins, elle ne lui a concédé que chichement la reconnaissance). Par des initiatives telles que les états généraux de la philosophie de 1979, ou la création du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n 1983, il a tenté de l’aider à sortir de son carcan hiérarchique, de son exclusivisme disciplinaire et de son nationalisme (d’autant plus stérilisant lorsque, comme en France, il se croit assuré de porter les valeurs « universelles »). Il est vrai que l’université dont il s’agit là est ce que, dans une conférence à Stanford de 1998, il appelle une université sans condition, s’assignant par-delà les frontières et les contrôles du pouvoir, la tâche de repenser tous les travaux humains et d’énoncer le possible (et même l’impossible) à l’époque de la mécanisation et de la mondialisation.

위대한 가르침의 이러한 실천에 저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을 관련시키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상당히 미디어적인 인물이 되어온 데리다는 대학에서 작업하길 결코 멈추지 않았고 철학적 활동의 근본적인 장소를 대학 안에서 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비록 대학은 그를 단지 초라하게만 인정해 주었을 뿐이며 자기 나라의 대학은 그나마 인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79년 철학의회 혹은 1983년 국제철학대의 창설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그는 대학이 자신의 위계제적인 굴레와 분과들 사이의 배타주의와 민족주의(이는, 프랑스에서처럼, 스스로 “보편적”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민족주의堅?때문에 더더욱 [대학을] 불모로 만드는 민족주의입니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학이 그가 1998년 스탠포드 컨퍼런스에서 조건 없는 대학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권력의 경계선들과 통제들을 넘어 인간의 모든 노동들을 다시 사고하고 기계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가능한 것을 (그리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을) 발언하는 과제를 떠맡는 대학 말입니다.

Je me souviens de la publication en 1967 des trois manifestes de cette nouvelle méthode qu’on appellerait plus tard la « déconstruction » : la Voix et le Phénomène, De la grammatologi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et de leurs subtils croisements entre philosophie et littérature. Je me souviens des grandes controverses avec Lévi-Strauss sur la lecture de Rousseau, avec Foucault sur celle de Descartes, qu’on peut relire aujourd’hui comme autant de « querelles » fondatrices du structuralisme philosophique, où se joue sa démarcation avec la métaphysique et, déjà, la virtualité de sa transformation en un « post-structuralisme ». C’est-à-dire en une critique interne de l’idée de structure (en particulier de sa prétention à représenter des « totalités »). Cette critique, toutefois, ne se fait pas du point de vue de l’humanisme ou de la liberté du sujet, mais du point de vue des différences qui compliquent notre idée de l’homme (donc des « fins de l’homme » et de ses droits), et en soulignent l’ambivalence : la conscience et l’inconscient, le corps et la lettre, le masculin et le féminin (et le neutre). Car, elles comportent toutes un excédent irréductible aux oppositions binaires, formelles. Un tel excédent de sens (qu’il appelle le « supplément d’origine ») ouvre aussi bien à la violence des mécanismes identitaires et des stratégies d’appropriation du monde qu’au recommencement et à la multiplication des interprétations. On trouvera là le germe des grands thèmes de sa maturité, en particulier sa conception de l’événement comme un « à venir » incalculable, dans lequel la responsabilité individuelle ou collective est portée à l’extrême, non parce que nous serions capables de maîtriser « performativement » les conséquences de nos actes et de nos paroles, mais parce que nous savons déjà qu’ils entraîneront à l’infini la relance et la reformulation du problème du droit et de la justice.

저는 사람들이 이후 “해체”라고 부를 이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세 가지 선언인 <목소리와 현상>, <기록학에 관하여>, <기록과 차이>의 1967년 출판 및 이들의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의 미묘한 교차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가 행한] 루소의 독해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와의 논쟁, 데카르트에 관한 푸코와의 논쟁 같은 대논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를 오늘 다시 그만큼의 철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논쟁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철학적 구조주의는 형이상학과 자신의 구별을 행하고, 따라서 이미 자신을 “후기-구조주의”로 전화시킬 잠재성, 즉 자신을 구조라는 관념(특히 구조가 “총체성”들을 표상한다는 주장/오만)의 내적인 비판으로 전화시킬 잠재성을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나 주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행해지지 않고 인간에 관한(따라서 “인간의 목적들”과 권리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것의 양가성(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차이들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차이들은 모두 이원론적 대립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이 같은 초과(데리다가 “기원적 보충-대체”라고 부르는)는 해석의 재개와 증식 뿐 아니라 동일성의 기계주의의 폭력과 세계 전유의 전술들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성숙기의 위대한 테마들, 특히 계산 불가능한 “도래할 것”으로서의 사건이라는 인식의 맹아를 봅니다—이 사건이라는 인식 안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책임성이 극단화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발언의 결과들을 “수행적으로” 지배/제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와 발언이 무한히 권리와 정의라는 문제의 재활성화 및 재정식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nfin je me souviens de toutes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 depuis le secours aux intellectuels « dissidents » de Tchécoslovaquie au sein de l’association Jan Hus jusqu’aux prises de position pour les droits du peuple palestinien et la réconciliation entre les adversaires dans le conflit israélo-palestinien, en passant par la défense du droit d’asile en Europe contre les politiques sécuritaires et la stigmatisation des « étrangers », j’en passe évidemment - nous avons tenté de contribuer, en tant qu’intellectuels sans attaches sinon sans engagements, à l’émergence de ce qu’il a appelé un « nouvel internationalisme ». Non pas que nous ayons toujours été entièrement d’accord dans nos analyses et dans nos références historiques. Mais, là encore avec beaucoup d’autres, et souvent à son initiative, nous avons partagé la conviction que les intellectuels et les artistes ont un rôle propre à jouer dans la constitution d’une résistance multiforme et multipolaire à l’emprise des souverainetés d’État ou de marché qui engendrent la violence de masse et s’en nourrissent en retour. Ce qui passe par la déconstruction de leurs discours et par le dialogue constructif entre leurs adversaires (comme il venait d’en donner l’exemple en joignant ses forces avec celles de son vieil « ennemi » Habermas pour démonter la machine de propagande de la guerre sans fin contre le terrorisme et les « États voyous »).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저는 이에 관해 대충 지나가고 있습니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담론들의 해체와, 그리고 자신들의 적들/경쟁자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과합니다(데리다는 얼마전에 테러리즘과 “불량배 국가들”에 대한 항구적 전쟁을 선동하는 기계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적”인 하버마스와 힘을 합침으로써, 여기에 실례를 제공했습니다)

Tout cela, qu’il s’agisse de l’avenir de l’université ou de la philosophie de l’« à venir », de la responsabilité des intellectuels et de leur place dans le monde des communications globales, est plus difficile à réfléchir sans sa contribution, mais ne cessera pas de sitôt de chercher des ressources de pensée dans son exemple et ses écrits. Adieu, cher Jacques, ou plutôt à demain.

대학의 도래 혹은 “도래할” 철학, 지성인들의 책임, 지구적 교통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의 문제인 이 모든 것은 데리다의 기여 없이는 반성하기 한층 어려운 것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범과 글 안에서 사유의 원천들을 구하길 그리 빨리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잘 가요 자크. 아니 차라리, 곧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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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라는 유령의 죽음

 

  자크 데리다가 10월 8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는 국내외의 신문보도를 접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언제 살아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는 늘, 적어도 우리에게는, 유령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던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는 유령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는 매우 당혹스러운, 거의 모순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은 유령의 죽음, 결코 살아 있는 존재인 적이 없었던 한 유령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이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기는 한 것일까?

  사실 유령이라는 주제는 그의 초기 저작부터 일관되게 지속된 주제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글쓰기”라고 다소 부적절하게 번역되곤 하는)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소쉬르,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였으며, 따라서 기록은 현전의 형이상학의 유령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모든 기록은 항상 “나”라고 말하는 주체의 부재, 주체의 죽음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곧 내가 어떤 것을 쓸 때, 내가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무언가를 기록할 때, 나는 항상 부재하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생각, 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대체보충”의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기록하는 순간, 원칙적으로 나는 이미 나의 부재의 가능성, 나 자신의 유령화의 가능성을 기록 안에 구현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주체는 항상 자신의 유령 속에서, 또는 유령으로서 실존하는 것이다.

  80년대 말 이후 이 유령에 대해 해체 불가능한 정의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데리다는 윤리ㆍ정치적인 주제로 유령론을 확대했다. 유령은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전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현전의 형이상학의 범주들을 초과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자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으로 출몰한다. 데리다에게 이 타자들은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과 다르지 않은데, 그는 이러한 타자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데리다는 또다른 유령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라는 환영으로 기억되고 있다. 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남긴 외상을 치유하기 위해, 또는 오히려 은폐하기 위해 홀연히 등장한 실체 없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사실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데리다는 경탄과 찬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불신과 의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때로는 경박한 유희꾼으로, 또 때로는 유사파시스트로 그를 의심했고, 좌파쪽 사람들은 우유부단한 자유주의의 변호론자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를 요약하는 명칭이 다름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하지만 자기미화나 자기변호에 서툴렀던 그가 결연히 반대한 호칭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점에서, 이 모든 비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이런 류의 비판들은 이러저러한 이데올로기적 알리바이로 봉사해왔을 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하나의 사건은 오직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기존의 관습, 기존의 제도를 초과하는 "도착적인 수행적 행위"(perverformatif)의 위험을 무릅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행위, 따라서 모든 결정(décision)에 깃들어 있으며, 타자들에 대한 환대, 타자들의 부름에 대한 절대적 호응만이 결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엊그제 전해진 그의 부음은 실은 아직 하나의 사건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데리다라는 유령을 환대한 적이 없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그의 유령들의 부름에 귀기울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라는 사건, 아마도 결코 현재화하지 않을 그 사건은 장래의 사건으로, 도래할 사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을 사건화해야 하는 과제,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애도의 과제, 환대의 법칙이 명령하는 무한한 책임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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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사망 소식 이후 이런저런 매체에서 원고를 부탁해왔는데, [교수신문]에 실을 원고를 하나 올립니다. 이런 것도 추모의 글이 될지 좀 걱정스럽긴 한데,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버렸군요.^^

쎈연필 2004-10-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글 고맙게 잘 보고 있습니다. 퍼갑니다...

balmas 2004-10-1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aporia 2004-10-1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바쁘시겠지만 선생님 같은 분들의 글이 최대한 많이 보이는 게 데리다를 애도하는 올바른 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최원님의 게시판에 들르니까 발리바르가 쓴 추도사를 번역하셨더군요. 이렇게 그에 관한 글들을 보니까 서서히 그가 정말 떠났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하네요. 하지만 슬퍼하고 애도하는 건 이제 막 시작된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봅니다.

릴케 현상 2004-10-1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프린트해서 읽어야겠다^^

balmas 2004-10-13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시님, [우정의 정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낸 다음 번역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기다려보세요.
아포리아님, 인터넷을 통해 대략 훑어본 인상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역시 좌파쪽에서 진지한 애도의 표시들을 하더군요. 발리바르 번역글은 최원님 게시판에서 퍼왔습니다.
자명한 산책님, 추천 감사.^^
 

데리다에 관한 기사들을 살펴보다 보니까 좀 뜬금없는 기사들이 보입니다.

 데리다가 미국 신문에서 토끼 스튜 요리를 "해체된 토끼"(deconstructed rabbit)라고 표현한 걸 보고서 경악했던 적이 있는데,

데리다 사망 이후  갑작스런 데리다 유행이 그런 걸 닮아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기자의 눈] 갈등의 시대와 데리다의 '입장 바꾸기'
[서울경제 2004-10-11 16:36]
#상황1.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고교등급제와 행정수도 이전 등을 둘러싸고 사회갈등이 확산되고 있고 국가보안법ㆍ과거사진상규명법ㆍ언론관계법ㆍ사립학교법 등 4대 개혁법안의 입법을 앞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상황2. 하루에 200곳이 넘는 단체가 서울시내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한다.

진보와 보수, 수도권과 지방, 강남과 비강남,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서로 다른 쌍들은 갈등을 풀기보다는 각자의 몫을 챙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툼의 뿌리는 갈등에 있지만 갈등의 씨앗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에 있다.

한 입장만 고수하면 사고가 경직되고 사회제도도 경직된다.

그 끝은 사회적 폭력으로 분출된다.

이라크 전쟁도 그렇고 집회가 폭력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그렇다.

오늘도 400쌍의 부부는 나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풀기보다는 관계를 끊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프랑스가 배출한 사상계의 거목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지난 9일(현지시간)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평생 동안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는 말로 ‘입장 바꾸기’를 주장해왔다.

자기 입장만을 강요하는 동일성보다는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한번 더 생각해보는 입장 바꾸기를 실천해야만 인류의 평화와 개인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이는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달라도 이를 인정해주는 프랑스의 보편적 가치인 이른바 ‘톨레랑스’와 맥락이 닿아 있다.

데리다는 노무현 대통령 같은 지도자에게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맞게 각각의 차이를 포용하고 조화해나가는 노력과 통솔력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우리 선조들도 생활 속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천해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잊고 살았다.

‘상대방을 한번 더 생각하자’는 데리다의 외침이 절실하게 와닿는 것은 기자만의 간절함일까.

 

<이승재기자의 보험플러스>車보험 대물보상한도 올릴 필요있나
[문화일보 2004-10-12 15:23]

 

한글날이었던 지난 9일 실천의 철학을 몸소 행했던 프랑스의 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숨졌습니다.

‘난해하고 도발적’인 그의 철학세계는 서양 철학의 흐름을 거 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주장하며 행동에 옮겼던 ‘해체 주의’는 수천년간 내려온 서양 중심의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서양 중심의 철학은 ‘텍스 트(글의 형식)’라는 함정에 빠져 그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겁니 다.

갑자기 죽은 ‘반골 철학자’의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자동차보 험의 최근 추세 중 ‘반기’를 들고 싶은게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동차보험을 들 때 대물보상한도를 5000만원, 많게는 1억 원까지 올리라는 권고를 받으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보험사 대부분은 “외제차가 많이 늘어났는데, 자칫 고가 외제차 와 접촉사고가 날 경우 수천만원을 자기 돈으로 낼 수 있으니까 대물보상 한도를 올리시죠. 1만~2만원만 더 내면 안심이죠”라고 권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타는 시가 7억2000만원짜리 ‘마이바흐 62’에 흠집을 낸 ‘대형 사고’의 예를 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를 내고 보험금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국회 국정감사에서 박영선 열린우리당 의원이 손해보험사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03회계년도(2003년4월~2004년3월)에 500 0만원 이상 대물 보험에 가입한 운전자는 205만9000명으로, 2002 년 96만9000명에 비해 무려 112.5% 증가했습니다. 올해 1·4분기 에만 92만4000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정작 보험사가 5000만원 이상의 보험금을 지급한 사례는 2002년과 2003년에 각각 10건, 올해에는 겨우 2건입니다. 잘 판 단하셔서 1만~2만원이라도 아끼시기 바랍니다.

이승재기자 lee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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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음이 나와야 정상이죠.
어이가 없어서, 참내 ...

릴케 현상 2004-10-1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얼떨떨하기만 하고 웃음은 안 나오네요

aporia 2004-10-1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해체된 토끼"를 보고 데리다가 경악하는 장면이 떠올라서, 그리고 아마 이 글들을 보고 데리다가 보일 비슷한 반응이 떠올라서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저도 퍼갑니다.

숨은아이 2004-10-1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balmas 2004-10-13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황당하죠???

MANN 2004-10-16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원... -_-;;;
황당하다는 말 밖에는.......
 

한겨레

 

‘고교등급제’는 한국사회를 요약한 한마디

[한겨레] [분석] 한국사회에서 고교등급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연세·이화·고려대 등 3개 대학이 고교등급제를 시행해왔다는 교육부 실태조사가 발표된 뒤, 한국사회가 ’고교 등급제’ 후폭풍에 휩싸여 있다. 고교등급제를 둘러싼 논의가 확산되면서 고교등급제는 일부 대학의 문제를 넘어, 지역간- 사회계층간 갈등양상으로 옮아가고 있다. 이런 논의전개에 따라 고교등급제가 가져온 ‘후폭풍’의 갈등 양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고교등급제가 부른 지역간-사회계층간 갈등은 잘못된 것이고, 이를 피해야만 하는가? <한겨레>는 고교등급제가 불러온 사회갈등적 측면을 취재했다. 편집자

계층갈등·사회분열은 안 된다고? 그러나 갈등과 분열은 지속될 것

일부 언론은 말한다. 고교 등급제가 계층갈등으로 비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사회분열을 심화시켜서도 안 된다고. 서울 강남권에 살지 않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고교 등급제에 분개하고 있을 때, 이들은 고교 등급제 자체보다는 고교 등급제를 둘러싼 갈등과 혼란을 무엇보다 근심한다. 하지만 현상유지와 조화를 강조하는 이들 언론의‘우국충정’은 부질없어 보인다. 계층갈등으로 비화되어선 안 되고 사회분열을 심화시켜서도 안 되는 고교 등급제가 정작 그 제도 안에 스스로 계층갈등과 사회분열의 폭약을 품고 있는 탓이다. 차별을 전제로 하는 이 제도로부터 차별받았다고 생각하는 절대다수의 비강남 국민들이 존재하는 한, 일부 주류 언론이 여론시장의 담론을 지배하는 건 역부족이다. 그리하여 논란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고, 갈등과 분열은 비화되고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교 등급제를 건조하게 정의해보면, 대학들이 입시에서 출신 고교에 따라 차등적으로 점수를 가산하는 전형 방식을 일컫는다. 물론 교육관련 법이나 각 대학의 학칙으로 정해진 바 없다. 단지 대학들이 스스로, 짬짜미로 시행해왔을 따름이다. 해당 대학들이 한사코 고교 등급제(制)는 없다고 항변하는 것도, 이 제도의 이런 비공식성에 기대어 부리는 응석이나 애교다. 그러나 문제는 고교 등급제의 본질이 그리 건조하지도 않고, 응석이나 애교로 해결될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많은 정치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교육학자들은 고교 등급제를 지금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라고 입을 모은다. 고교 등급제 안에는 그만큼 인문사회학적 함의가 듬뿍 담겨있다는 얘기다. 다만, 그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많은 사람들에겐 썩 유쾌하지 못한 느낌으로 와닿는다.

고교 등급제는 한국 대학의 게으름…게으름은 서열화 안주 탓

고교 등급제는 무엇보다 한국 대학들의 게으름을 드러내준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과)는 “무릇 대학이라면 학생의 잠재성을 찾아내 제대로 교육을 시켜 내보내야 하는데, 우리 대학들은 미리 교육된 학생들을 뽑아다 방목하고 있다”며 “고교 등급제는 우리 대학들이 손쉽게 성적 우수 학생을 뽑으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봉 ‘학벌없는 사회’ 운영위원도 “고교 등급제는 일부 대학들이 수시전형을 우수학생 입도선매 기회로 삼으면서 나온 편법”이라며 “그들이 말하는 우수학생이란 사교육을 통해 길러진 입시 선수”라고 말했다. 한국 대학들이 게으른 건 왜일까. 홍윤기 교수는 “대학 서열화의 틀 안에서 1등급 대학은 1등급에 안주하고 2등급 대학은 2등급에 안주하기 때문”이라며 “이러다 보니 대학은 교육하는 곳이 아니라 학벌을 만드는 곳이 돼버렸고, 이런 대학들이 고교 등급제를 선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고교 등급제는 대학 등급제 또는 서열 구조의 말없는 반영이거나 확장이라는 얘기다. 대학들의 이런 태도는 고교 등급제 옹호의 논거로 내세우는‘우수학생 선발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나 ‘현실적 학력 격차 인정’이라는 주장을 스스로 무안하게 만든다. 입시에서 단 1, 2점의 점수차를 우수와 비우수의 절대기준으로 삼아온 이들 대학이 이젠 고액 사교육으로 중무장한 학생들을 우수 학생으로 평가하고, 그런 학생들이 몰려사는 강남지역을 우수학생의 텃밭으로 보고 입도선매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학력 격차와 이에 따른 국가경쟁력의 차이는 실체가 있는 것일까. 격차가 있다면 왜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격차는 정당한 것일까. 박거용 상명대 영어교육과 교수(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운영위원장)는 “고등학생의 학력은 결코 국가경쟁력이 아니다”며 “우수 학생 뽑아다 바보 만들어 내보내는 경쟁을 할 게 아니라 고등학생의 학력 격차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뽑아서 잘 교육해서 내보내는 경쟁을 하는 게 국가경쟁력을 생각하는 대학다운 태도 아니냐”고 물었다.

학력격차와 국가경쟁력의 실체는 있나? 격차는 정당한가?

설령 학력 격차가 있고, 그 격차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고 해도, 그 격차가 생겨난 과정이 정당하지 않다고 인문사회학자들은 지적한다. 고교 등급제가 입시제도의 문제만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초(超) 입시제도로서 고교 등급제의 중심에는 한국 사회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강남’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상봉 운영위원은 “강남은 왜 강남이냐”고 반문한다. 우리나라 사교육의 메카로 알려지면서 집값이 뛰고, 이젠 우리나라 최상류 계층이 모여 사는 곳. 최상류 계층과 최고의 교육환경, 이에 따른 최고의 교육성과가 삼박자로 물려돌아가는 곳이 강남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교 등급제가 강남의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 제도화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교양학부)는 “70년대 개발독재 시대 이래 특정지역개발촉진법 등 몰아주기식 성장으로 불로소득의 부를 쌓아올린 곳이 바로 강남”이라며 “고교 등급제는 이미 하나의 신분 코드가 된 강남이 그 이름만으로 교육에서 특별대우를 받게 되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외과)는 고교 등급제를 교육의 계급화로 규정한다. 손 교수는 “고교 등급제를 둘러싼 갈등은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갈등이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지역 등급에 따른 교육기회의 차이를 놓고 벌이는 변형된 형태의 계급투쟁”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교 등급제는 계급을 공식화할 뿐 아니라 계급을 대물림해 한국을 계급상승의 유동성이 없는 ‘닫힌 계급사회’로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사회의 지배구도를 완성하려는 정치행위”

일부에서는 이들 대학의 고교 등급제를 한국 사회의 지배구도를 완성하려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다분히 음모적이라고 지적한다. 홍성태 교수는 “고등학생들의 학력격차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강남 학생들은 무더기로 합격시키면서 강북 학생 단 한 명 붙이기는 것도 그리 인색할 수 있는가”라며 “국내 최고의 사학이고 사학의 모범이라고 자처하며 교수들에게 가장 많은 월급과 명예까지 주는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가 겨우 고교 성적 우수 학생을 좀더 얻자고 학교 전체가 나서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국민 사기 범죄를 저질렀겠느냐”고 되물었다. 홍윤기 교수는 “고교 등급제를 시행한 대학들은 사회적 특권층을 자기 대학의 동문으로 묶어 자기 대학을 특권층 카르텔의 한 부분으로 끼워넣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성태 교수는 더 나아가“이들 대학은 이미 강남의 한 부분이며 그 자체가 강남”이라며 “강남 개발을 통해 부와 기득권을 쌓은 이들이 이제 대학을 통해 학력을 장악한 뒤 기득권을 확대재생산하고 대물림하는 계급의 폐쇄회로를 완성하려 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역 고교등급제’가 시급하다

일부 언론이 고교 등급제 자체보다 이에 따른 갈등을 깊게 근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11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열린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기자회견을 앞두고 한 택시기사가 거리에 차를 세워둔 채 “안병영 장관 나와라. 못 사는 것도 서러운데 차별이 웬말이냐”며 한동안 소동을 벌인 일이 있었다. 강남을 위한 짬짜미 고교 등급제 시행 사실을 안 전국의 비강남 국민들의 심사는 복잡할 겨를조차 없이, 이처럼 직설적이다. 김상봉 ‘학력없는 사회’ 운영위원은 “고교 등급제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병리를 드러냈지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욕심이 지나쳐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며 “입시의 공정성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에 상처를 입은 국민들이 고교 등급제를 통해 대학 서열화가 갖는 계급적 함의를 깨닫기 시작한 지금이 학벌제 사회를 깰 수 있는 분수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정으로 이 사회가 갈등이나 분열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젠 ‘현실적 학력 격차’나 ‘국가경쟁력 강화’를 강변하기 보다 ‘역 고교등급제’를 서두르는 게 어떨까. 계층적으로, 지역적으로 열세에 있는 고교에 파격적으로 국가예산을 지원해 제대로 된 공교육을 받게 하고, 대학들도 이들 지역 학생들을 우대해 정성들여 교육한다면, 적어도 영업을 중단한 채 교육부 건물에 대고 삿대질하는 택시기사는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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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당연한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릴케 현상 2004-10-1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추천하죠

balmas 2004-10-1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자명한 산책님은 추천해주실 줄 알았답니다.

마립간 2004-10-1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 한겨례 신문 기사를 페이퍼에 올리신 것은 (아마) 이 글에 동감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입시 제도의 개선이 사회 계층의 유동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의 페이퍼에 '고교등급제와 학벌'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시간있으시면 의견 부탁합니다.

balmas 2004-10-1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조만간 한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