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팽개친…문학은 끝장났다”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말’선언

‘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오래 전에 확인된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학의 의연한 생존을 확신하는 이들에게 그런 선언은 양치기 소년의 되풀이되는 거짓말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문학의 죽음에 관한 풍문이야말로 거꾸로 문학의 생존 근거이자 양식이라는 주장조차 나오는 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살아 있는가. 여기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글이 있다.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일본의 문학평론가 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3)의 <근대문학의 종말>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을 풀어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논리는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에서 출발한다. 쉽게 말하자면 정치가 감당하지 못하는 혁명의 핵심을 문학이 담당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체적 비평과 포스트모던 문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근대문학’은 이런 혁명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경우에 ‘1980년대에 끝났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미국은 더 일러서 1950년대로 시점이 올라간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 2000년 서울에서 열린 한 문학행사에 참석해 ‘일본에서 문학은 죽었다’고 발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는 문학평론가인 자신이 평론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국에서만은 문학의 역할이 점점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해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그는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끝장이 났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문학이 사소해졌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가라타니는 문학은 자신에게 부여되는 지적·도덕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존립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면, 문학은 단지 오락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문학’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나아가 일본 만화처럼 세계적인 상품으로 팔리는 문학을 권장하기조차 한다. 다만, 거기에다 본디 의미의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본디 의미의 문학에 충실한 사례로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문학을 그만둔’ 두 사람의 사례를 든다. 부커상 수상작인 <작은 것들의 신>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리고 <녹색평론> 발행인인 ‘전직’ 평론가 김종철씨가 그들이다.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는 로이,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문학이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게 되었”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는 김종철씨야말로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반대로, “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밖에는 읽히지 못할 통속적인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나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는 문학의 생존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그는 일갈한다.

그는 “역사적 이념도 지적·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일본적 스노비즘’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고 결론 삼아 제안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모 2004-11-27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선 고진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고 그의 이름만 몇 번 들어보았을 뿐인데, 이 주장은 동의의 여부를 떠나서 매우 감동적이군요. 고작 신경숙 -- 내가 읽은 건 한권뿐이지만 그게 워낙 어이없어서.. -- 같은 작가가 한 세대를 대표하는 상황이라는 게 참.. 물론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웅변하는 게 아닌, 그저 사소함 속에서 안주하고 그것을 변명하는, 그런 태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윤리와 정치를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을지.. (문단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 신경숙 등을 띄워주는 데 앞장섰던 <문학동네>에 이 글이 실렸다는 게 재밌군요. 어떤 생각을 하고 실었을까..) 어쨌든 이것저것 고민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지금 컴퓨터 상태가 이상해서 제 블로그에 글이 씌어지질 않는데, 블로그가 정상화되는 대로 이 글을 퍼가겠습니다. 미리 양해 =)

balmas 2004-11-27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모모님이 딱 꼬집어서 말씀하시는군요. [문학동네]도 식성이 참 다양하죠. 그만큼 고진이 만만하다는 뜻인지도 ...
 


 


의료 붕괴로 가는 지름길













세계에서 의료 수준이 제일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언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면 노벨의학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1901년의 베링부터 올해의 액설과 버크까지 179명의 의학자가 노벨의학상을 차지하였는데 미국인이 91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의료비 역시 미국이 국내총생산(GDP)의 15% 가량을 지출하여 압도적인 1등이다. 프랑스, 영국, 일본 등과 우리나라는 대체로 6~7%를 의료비로 지출하여 미국의 절반 이하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의 건강 상태도 미국이 으뜸일까? 영아 사망률, 이환율, 평균수명 등 여러 건강지표를 살펴보면 미국은 1등은커녕 선진국들 가운데 뒤쪽에 처져 있다. 노벨의학상 수상자는 1명도 없고, 의료비 지출액수가 미국의 1/30도 안 되는 쿠바 국민들의 건강 수준보다 별로 나을 바가 없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체로 의료의 공공성이 확립된 나라일수록 국민들의 건강 수준이 높고, 반대로 의료를 시장에 의존하여 양극화가 뚜렷한 나라일수록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 역사와 현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45%에 머물고 있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0%까지 확대할 것과 8%에 지나지 않는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을 30%로(OECD 나라들은 평균 75%이다) 높일 것을 보건의료 분야의 핵심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출범 2년이 다 되도록 실현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방향키를 거꾸로 잡은 듯하다.

그러한 우려를 낳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 가지만 살펴보자.

지난 16일 국무회의는 〈경제자유구역법〉의 ‘외국인 전용의료기관’ 유치의 어려움을 핑계로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외국병원은 국내병원과 동일한 환자를 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병원보다 5~6배 비싼 진료비, 건강보험 제외, 영리법인 허용, 세제 및 자금지원 혜택, 환경 및 고용조건 규제완화 등 각종 특혜를 받게 된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의료시장이 개방되는 것인데, 정부의 왜곡과는 달리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의료의 공공재적 특성 때문에 의료시장 개방에 부정적이다.

이러한 외국병원이 누리게 될 특혜에 대해 국내병원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지금보다 획기적인 수준의 의료수가 인상과 규제완화를 요구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나아가 국내병원의 영리법인화와 건강보험 제외를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만족스럽지만 그나마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던 건강보험제도의 기반이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민간의료보험의 등장이 필연적이다. 일각에서는 영리병원과 민간의료보험의 장점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의 선도국인 미국의 몇가지 실례를 보더라도 그것이 허구임은 명백하다. 영리병원의 진료비는 비영리병원보다 3~11% 비싸다.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보다 의료진에 대한 인건비 지출이 적은데, 그만큼 의료진의 노동조건이 더 열악하며 그 결과는 환자들에게 전가된다. 그에 따라 중증 환자의 영리병원 사망률은 비영리병원보다 7~25% 높다. 우리나라 어느 생명보험회사는 지난해 2조원의 수입을 올렸는데, 보험가입자에게 지출한 돈은 6천억원뿐이다. 나머지는 회사와 투자자의 몫으로 돌아간 것이다. 원리적으로나 실제로나 민간의료보험이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해외원정진료를 흡수하리라는 점도 원정진료의 70% 가까이가 외국(특히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한 원정출산인 현실에서 설득력이 없다.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은 경제자유구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의료제도를 완전히 붕괴시켜 국민의 건강 수준을 더욱 악화시킬 최악의 조치다.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정규직 이데올로기와 한판승부!





‘피할 수 없는, 조직의 명운을 건’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언…비정규직 법안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정규직의 ‘배부른 파업’은 없다. 민주노총은 조직의 명운을 걸고 비정규직 싸움에 나선다. 총파업을 지휘하는 이수호 위원장의 인터뷰도 준비했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이번 총파업은 노동운동의 조직적 힘과 건강성을 보여주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11월14일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사진 / 김진수 기자)





“내 손에 최소한 50만표를 쥐어달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11월26일로 예정된 비정규직 법안 관련 총파업을 앞두고 전국 사업장을 돌며 파업 찬반투표를 독려할 때 줄곧 이렇게 외쳤다. 민주노총이 그동안 대의원대회에서 통과시켰던 총파업을 전체 조합원(59만5천명)이 직접 참여하는 투표를 거쳐 결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찬반투표 결과 30만5천명이 참가해 20만7천명(67.9%)이 총파업에 동참하겠다고 찬성표를 던졌다.

비록 50만표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68%에 달한 총파업 찬성률은 ‘뜻밖의’ 높은 수치라는 게 노동계의 반응이다. 올 상반기 투쟁에 따른 조직적 피로감이 누적된데다 외환위기 이후 해마다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에 동원돼온 만큼 ‘파업 피로감’이 클 수밖에 없는데, 이를 감안할 때 찬성 20만표는 현장의 총파업 열기가 갈수록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민주노총 단위노조 가운데 자체 사업장 문제로 파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노조가 수두룩하다”며 “이를 고려할 때 이번 투표 참가율과 찬성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법안(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은 국회에 이미 제출돼 조만간 상임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로 넘겨질 예정이다. 노동계는 정부가 △기간제 근로자를 3년 이내에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고 △파견 대상 업무를 전면 자유화해 비정규직 확산을 조장하는 최악의 개악안을 강행하고 있다며 “비정규직 정부 법안 폐기 및 대화를 통한 새로운 법안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노동부는 “법안은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고 남용을 규제하되 노동 유연성을 훼손하지 않는 데에 기본 방향을 두고 마련됐다”면서 노동계가 총파업으로 맞서더라도 연내에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법안이 상임위에 상정되는 순간, 정부가 법안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찬성’20만표가 말하는 것은…



민주노총이 사상 처음으로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찬반 여부를 묻고, 또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는 건 이번 총파업이 ‘비정규직 법안 싸움’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민주노총은, 해마다 총파업 선언을 되풀이했지만 별다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판판이 깨지고 말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금껏 총파업 이슈는 임단협 투쟁이거나 ‘일방적 구조조정 반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번 총파업은 성격이 다르다. 정규직 대공장 노조의 이른바 ‘배부른 파업’이 아니라 조직 노동자들 스스로 비정규직 싸움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수호 위원장은 “정부가 이번 개악 법안을 밀어붙인다면 민주노조 운동의 정통성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민주노총으로서는 어느 때보다 비장한 각오로 이번 싸움을 맞고 있다.

사실 민주노총으로서는 비정규직 법안 총파업을 대의원(870여명)한테 묻지 않고 60만 전체 조합원 찬반투표에 부치는 것이 모험이기도 했다. 이수호 위원장의 말마따나 총파업이 부결된다면 민주노조 운동은 정통성에서 일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는 현 노동운동에 대해 “대기업 정규직 노조 중심의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된 운동”이라고 늘 비판해왔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최근 “대기업 노조의 경우 노력에 비해 과도한 과실을 따먹고 있다”고 또다시 노동계를 자극하기도 했다. 결국 총파업이 부결되거나, 총파업에 돌입하더라도 동원부족으로 패배한다면 ‘정규직의 배부른 운동’이라는 정부 논리를 노동계가 입증해주는 셈이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싸움은 ‘대기업 정규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면승부 성격도 띠고 있다.



정부 “여기서 노동계에 밀리면 끝장”



특히 이번 총파업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흐름 속에서 수세에 몰려 있는 노동운동의 조직적 힘이 과연 얼마나 살아 있는지, 또 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는 ‘건강성’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정부는 “정규직 대공장 이기주의에 젖어 있는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을 위한 총파업을 한다고? 그래 어디 한번 보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단지 ‘구호’로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 민주노총은 “그렇다면 우리의 실력을 이번에 제대로 한번 보여주겠다. 정부의 생각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주환 국장은 “정규직 노동자 20만명이 비정규직을 위해 총파업을 선언했다는 건, 그동안 말로만 비정규직 투쟁을 외쳐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정규직 노동조합이 무언가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 이번 총파업은 노-정 대립의 분수령이 돌 것으로 보인다. 올초 김대환 노동부 장관(왼쪽)과 이수호 민주노총위원장이 만나고 있다. (사진 / 박승화 기자)





물론 법안이 통과되면 노동시장이 비정규직 중심으로 재편돼 정규직도 비정규직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에 예상외로 높은 총파업 찬성률이 나왔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번 비정규직 법안을 막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정규직의 씨가 마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운동 조직이 취약해질 뿐만 아니라 이수호 집행부가 ‘비정규직 확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집행부’라는 역사적 평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런 위기감도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싸움은 1998년 2월 노사정 대타협 당시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했던 상황과 비슷한 수준의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총파업이 노-정 대립의 분수령이 될 공산도 크다. 물리적 힘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노-정 관계가 파국에 이른다면 현 정부가 줄곧 표방해온 ‘사회적 대화’는 이제 노무현 정부 임기 내내 말도 꺼내기 어렵게 된다. 김유선 소장은 “비정규직 법안을 밀어붙인다면 정부가 대화 의지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법안 처리 강행은 노사정위원회 대화 틀조차 공식적으로 폐기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지금 상황은 1996년 말∼97년 초 노동법 날치기 처리 때의 총파업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번 총파업 국면이 향후 노사 관계를 판가름짓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정부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정은 국가보안법 등 4대 법안뿐 아니라 비정규직 법안을 포함해 갈등을 겪고 있는 법안들을 연내에 한꺼번에 털어버리겠다는 구상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노동부쪽은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비정규직 법안은 그동안 충분히 논의된 사안이다. 재논의를 한다 해도 합의가 이뤄질 문제가 아니고, 손질해봤자 별로 달라질 건 없다. 내년부터는 노동법·제도 선진화 방안 등 다른 과제를 풀어야 한다”며 “총파업을 피해간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노동계 관계자는 “이번에 끝내지 못하면 비정규직 법안이 노-정 관계를 악화시킬 최대 이슈로 계속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 정부도 피할 수 없는 싸움으로 보는 것 같다”며 “김대환 노동부 장관도 여기서 노동계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 대대적 가세, 판이 커진다



한편, 열린우리당에서는 노동계의 저항이 의외로 강한 만큼 연말 총파업 소나기 국면을 일단 피해가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환경노동위원회)은 “열린우리당 환노위 소속 의원들 사이에 이번 국회에서 비정규직 법안을 꼭 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며 “법안 내용도 더 토론해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법안 처리가 연기되더라도 앞으로 국회가 열릴 때마다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긴장은 지속되겠지만, 열린우리당은 이럴 경우 노동계도 지쳐 파업 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 11월22일 총파업을 앞두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해 정부에 노-정교섭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 김진수 기자)





이번 총파업 국면이 정부와 이수호 집행부의 첫 대규모 정면대결이기도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는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제도’를 둘러싼 최초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각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차별 해소 등을 놓고 산발적인 싸움이 계속됐지만 법과 제도라는 측면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법안을 “이미 노동시장에서 불법·탈법적으로 횡행해온 비정규직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합법화해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까지 이번 싸움에 가세해 판이 커지고 있는 양상은 주목할 만하다. 양대노총·한국비정규노동센터·참여연대·한국여성단체연합·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103개 노동·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비정규노동법 공동대책위원회’는 법안 철회를 촉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또 학계·법조계·예술단체·시민단체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그동안 기존 노동운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참여연대까지 비정규직 법안 투쟁을 사업의 전면에 배치하면서 연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참여연대쪽은 “비정규노동법 개악은 단순히 노동 문제에 국한된 이슈가 아니라, 소득 불평등과 경제 양극화 등 사회 불평등의 근본 문제”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총파업은 노동운동만의 고립된 싸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주변부로 밀려난 절대 다수 노동인구의 삶의 조건을 결정하기 위한 ‘사회세력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올 초 취임 당시 “내가 대화와 교섭을 중시하는 건 맞지만, 차근차근 준비해서 노무현 정부 임기 안에 신자유주의 시장 흐름에 맞서는 제대로 된 한판 싸움을 벌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총파업은 비정규직 법안이란 긴박한 변수로 인해 그 싸움이 생각보다 일찍 닥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노동계에서는 “피할 수 없고, 조직의 명운을 건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과연 총파업에서 노동자들의 함성이 얼마나 크게 터져나올 수 있을까? 일부에서는 이번 총파업이 노동법 날치기로 촉발됐던 96년 말∼97년 초의 총파업처럼 커질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물론 당시에는 새벽 날치기라는 극적 사태가 있었고 정리해고 도입이라는 ‘충격적 이슈’가 있었지만 비정규직 급증은 이미 시장의 대세로 굳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당시 법외단체였던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거쳐 노동운동 세력으로서 실체와 지위를 인정받고 국민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만약 민주노총이 이번 비정규직 법안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조직적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이래저래 이번 싸움은 민주노총에게 하나의 도전이자 기회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4-11-2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는 판이 크군요

balmas 2004-11-2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이 커질지는, 글쎄요 ...
 
 전출처 : nrim > [퍼온글] 브레송 사진집 구입하실 분,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석달 전 사망소식을 알렸던 사진가 브레송을 기억하시는지요? 브레송을 아시는 분이라면 아마도 한번쯤 그의 사진집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를 소장하고 싶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정가 80,000 원, 알라딘 할인가 68,000 원이라는 높은 가격 때문에 선뜻 구입하시지는 않았을텐데요, 만약 꼭 이 사진집을 갖고 싶으시다면 서두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출판사에서 가지고 있는 재고가 채 100 부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렇게 책이 떨어지면 곧 다시 찍기 때문에 별 걱정이 없는데요, 이 책의 경우는 전량 해외주문제작방식인데다, 거기에 필요한 비용이 워낙에나 크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곧바로 다시 찍어낼 수가 없다네요.

제 입장에서는 "아니 아니 그래도 책이 떨어지면 곧바로 다시 찍으셔야죠!"라고 말하고 싶긴 합니다만, 사실 이렇게 비싼 책의 경우는 출판사에서도 적지 않이 부담이 되리라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재고가 떨어지면 한동안은 구하기 어려울 거라는 소식, 미리 알려드립니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렵다는데 이런 소식을 날리다니, 제가 곱지만은 않으실 거라 생각하지만 ^^:; 그래도 떨어지고 나면 서운하실 것 같아서요. 자, 그럼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봐 주세요! ^^  -- 알라딘 이예린(yerin@aladin.co.kr)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almas 2004-11-2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모르겠군 ... ^^;;;

그런데, 정진국 씨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정진국 씨 번역을 믿기가 어려워서(중요한 책들을 골라서 번역해주는 건 고마운데, 번역은 그다지 성의가 없고 오역들도 여럿 보인다) 책을 안사고 있는데, 책 읽어본 분들 중에서 누가 번역이 어떤지 좀 이야기해주시면 좋겠군요.

瑚璉 2004-11-2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입해서 보기는 했는데 번역의 질에 대해서 평할 만한 재간이 없는 관계로 결국 별 도움이 못되어 드리는군요 (-.-;).

balmas 2004-11-22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련님, 잘 읽히면 번역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별 막힘없이 잘 읽히던가요?

바람구두 2004-11-25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책 저도 사서 읽었는데, 워낙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의 책을 읽는다는 일만으로도 흥분한 나머지 그런 부분엔 거의 주목하지 못했거든요. 사진 보는 재미에서만이라도 구입하심이 가한 줄 아뢰오.

balmas 2004-11-26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

비싸기는 하지만.^^
 

* 지난 수요일에 오랜만에 아는 후배를 만났는데, 존 버거 책을 한 권 번역했다고 줘서 틈틈이 읽고 있다. 교육방송 PD로 일하고 있는 친구인데, 바쁜 와중에도 책을 번역한 게 용하다. 존 버거를 좋아하는 나로서야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선물인데,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라고(장 모르의 사진들도 좋다^^) 권하는 의미에서 몇 구절을 적어보겠다.

 

행운아 - 어느 시골 의사 이야기

존 버거 (지은이), 김현우 (옮긴이), 장 모르 (사진) | 눈빛


정   가 : 9,000원
판매가 : 8,100원(10%off, 900원 할인)
마일리지 : 243원(3%)
2004-11-11 | ISBN 8974092085
반양장본 | 184쪽 | 188*128mm (B6)
알라딘 Sales Point : 360
예술/대중문화 주간베스트 56위

  



부커상 수상작가로 폭넓은 저작활동을 해오고 있는 존 버거가 쓴 글과 장 모르가 찍은 사진을 함께 담았다. 점점 더 궁핍해지는 후미진 시골, 의사 존 사샬은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한 현대사회에서 '행운아'인 한 의사의 삶을 통해 인간 삶의 가치를 돌아본다.



존 버거 (John Berger) - 1926년 런던 태생으로 미술비평가, 소설가, 극작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 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술평론으로 활동을 시작해 사유의 영역을 확대해 왔으며 역사에 대한 통찰과 감각도 탁월하다. 1962년 영국을 떠나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 은거해 글을 쓰고 있다.

대표적인 소설로는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 상(Booker Prize)을 수상한 <G>, 농민을 노래한 3부작 <그들의 노동에 함께하였느니라 Into Their Labours>가 있고, 평론으로는 <랑데부 Keeping a Rendezvous>, <시각 The Sense of Sight>, <보는 방법 Ways of Seeing> 등이 있다.

김현우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옮긴 책으로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 <웬디 수녀의 나를 사로잡은 그림들>, <두첸의 세계명화비밀탐사> 등이 있다.

장 모르 (Jean Mohr) - 지난 20년 동안 유네스코,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적십자사의 사진가로 일해 왔다. 2004년 현재 스위스 제네바에 살고 있다.

한겨레신문 : 세계 문화예술계 최고의 팔방미인을 꼽자면 빠질 수 없는 이가 영국 출신의 작가이자 극작가, 비평가인 존 버거다. 화가이기도 한 존 버거는 미술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이미지-시각과 미디어>란 책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다큐멘터리 작가와 방송인으로도 활동해왔고, 사회비평가로서도 좌파 진영의 손꼽히는 논객으로 자리매김했다. <결혼을 위하여> 등을 쓴 소설가로도 널리 알려져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며, 인간소외와 현대인의 고독감을 잘 포착해내는 수필가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중년 이후 존 버거는 프랑스 알프스산맥 기슭 농촌에 들어가 글 쓰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 걸쳐있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은 역시 시각 이미지 쪽이다. 사진작가 장 모르가 사진을 찍고 그가 글을 쓴 일련의 연작 가운데 하나인 <행운아>가 최근 출간됐다. 존 버거는 환자들과 진실한 인간적 교감을 시도하며 마을주민들의 보살피려는 영국의 한 시골마을 의사 존 사샬의 일상을 통해 삶의 가치란 무엇인지 묻는다.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총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이 의사가 바로 '행운아'이며 역설적으로 현대인 대다수는 불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역시 존 버거와 장 모르의 공동작업물인 <제7의 인간>과 <말하기의 다른 방법>도 각각 같은 출판사에서 10여년 만에 재출간됐다. <제7의 인간>(차미례 옮김)은 <행운아>처럼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을 통해 현대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으로 1970년대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삶을 그린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이희재 옮김)은 산악지방 농촌마을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사진의 미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독특한 에세이풍의 사진이론서다. 7년에 걸쳐 찍은 농부들의 사진 자체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풍성하며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사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존 버거 나름의 답변을 구하는 작업이다. - 구본준 기자 ( 2004-11-13 )

 

69-70쪽

사람들은 사샬이 솔직하고,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기에 편하며, 가까이 있고, 다정하고 이해력이 있으며, 남의 말을 경청하고, 언제라도 필요할 때는 달려와서는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사람들은 그가 분위기 있고, 성과 같은 주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가끔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의사로서 그가 어떻게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 주는지는 위에서 말한 것들처럼 복잡한 것은 아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의사-환자 관계에 고유한 특질과 깊이를 생각해야 한다.

성직자나 무당 혹은 판관을 겸하기도 했던 원시시대의 의사들은 종족을 위해 식량을 생산해야 할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어다. 이러한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특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의사가 해결해 주는 인간의 욕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몸이 아픈 것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알아 가는 과정에서 최초로 지불해야 하는, 어쩌면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불하고 있는 대가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고통이나 불편함을 배가시킨다. 그런데 그러한 인식의 결과로 생겨나는 자의식은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이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자의식에서 치료의 가능성, 약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원시시대 부족민들이 의사의 치료에 대해서 취했던 주관적인 태도를 지금 상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문화에서 우리 자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자신의 몸을 의사에게 맡기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신뢰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우리는 의사들이 우리의 몸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런 접근은 연인에게만 허락되는 것인데-심지어 연인에게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의사는 완전히 낯선 사람 아닌가?

(장 모르의 사진들 몇 장이 중간에 나온다)

74쪽-75쪽

의사들의 윤리지침은 의사로서의 역할과 연인으로서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 의사와 환자 관계에서의 친밀감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 구분은 의사들이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원하는 곳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칫 환자와 자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라는 염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상상력이 결여된 철없는 상상일 뿐인데, 의사들이 환자들을 접하게 되는 상황은 성욕을 감퇴시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사항을 의사의 윤리지침에 넣은 것은 의사들을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일종의 약속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들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주는 그런 약속 말이다. 그것은 성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육체적인 친밀감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약속이다. 그렇다면 그 친밀감이 의미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어린 시절의 경험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의사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은 스스로 어린이의 상태로 돌아가서, 그 의사를 가족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에 의사는 가족과 동등해지는 것이다.

환자의 심리가 부모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경우에, 의사는 그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관계에서 성적인 생각들은 진료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몸이 아플 때 사람들은 의사를 큰형이나 언니 정도로 가정한다.

비슷한 일이 죽음에서도 일어난다. 의사는 죽음과 친숙한 사람이다. 의사를 부를 때, 우리는 그가 우리를 치료해 주고, 우리의 고통을 덜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할 때는 그가 우리의 죽음을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지켜보는 행위의 가치는 그가 다른 죽음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가치는 한때 성직자들이 기도나 의식을 진행하는 것 이외에 가졌던 진정한 가치였다)이다. 의사는 우리와 갖가지 죽음 사이의 살아 있는 중재자인 셈이다. 그는 우리에게 속하기도 하지만, 그 죽음들에 속하기도 한다. 다른 죽음들이 의사의 중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그 힘들지만 실제적인 위안 역시 형제애에서 오는 위안이다. ... 

 

*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논의가 뒤에 시작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레져 2004-11-2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의 이미지를 재밌게 읽었어요. 유익하고, 재밌고~ ! 일단 보관함에 넣어놓을게요 ^^

balmas 2004-11-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미지] 재미있죠??^^

저는 존 버거 책 중에서는 예전에 열화당에서 나온(맞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를 처음으로 읽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존 버거의 팬이 됐는데,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정말 훌륭한 작가죠.^^

로드무비 2004-11-22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참, 그리고 열화당이 아니고 아트북스예요.^^

balmas 2004-11-2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드무비님, 제가 말한 건 84년에 나온 책인데요.

그런데 확인해보니까 열화당이 아니라 미진사더군요. 아트북스에서는 작년인가 다시 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