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진태원 선배 말씀을 제가 좀 거칠게 축약을 해버려서 오해를 했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

진선배의 아래의 구절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2부 정리 37과 38에서 증명된 것, 곧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과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어떤 독특한 사물의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정리 37)와 “모든 것에 공통적이고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데서 따라 나오는 규정입니다.
따라서 notio communis에서 “공통적”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컨대 실재적인 기초(사물들 또는 물체들에 공통적인 것)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초를 적합하게 인식하는, 표현하는 notio가 notio communis인 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notio communis와 일반적인 notio, 곧 실재적인 기초를 갖지 않는 상상의 양태나 사고의 양태로서 notio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얼렁뚱땅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피노자가 이곳에서 말하는 것은 '모든 사물들에 공통된 것은 그 자신 사물들의 일부인(즉 그 자신도 사물인) 인간에도 있으며 이 공통된 것에 대해서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저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해당부분을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그렇게 읽히는군요. 당연히 인식 대상과 인식하는 자 사이의 공통성이 common notion의 common이 지시하는 것이다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좀 표현이 거칠었긴 하지만 크게 문제로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서 발리바르가 한 말의 앞에 나오는 말을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하죠. 이미 읽어보셨겠지만 함께 읽어보면 또 다른 맛이 나니 말입니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견해들을 표명함 없이, 친구들로 이루어진 회합에서라도 그것들을 교통하지 않고, 전적으로 혼자서 사고할 수는 없다. 사고의 장소는 사적 개인이 아니며, 그것의 철학적 실체(hypostase)인 의식[양심]의 은밀성이 아니다. 사고의 장소는, 그 한계 또는 범위가 무엇이든, 교통 그 자체이다(cf. 󰡔신학-정치론󰡕 20장, pp. 328-329).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저는 여기서 저 마지막 구절을, 인간은 자신의 "통념"이 말하자면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실재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공통통념"이 될 수록 많이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말로 읽을 도리는 없다고 봅니다. 도저히 맥락과 맞질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다른 함의를 이 문장에 실으시려고 하시나 하고 궁금해하다가 진선배가 이번에 주신 질문을 보고, 아!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선배님은, "인간은 사고한다"고 스피노자가 말했는데, common notion없는 사람은 그렇다면 사고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말이냐라는 식의 질문을 주셨지요.

보다 정확히 옮기면, 

"제가 볼 때 최원 형 생각의 난점은 notion은 사적이거나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간주한다는 데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사고한다Homo cogitat”는 {윤리학} 2부의 공리는 common notion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no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적용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은 제 관점에서는 질문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고 따라서 어폐가 있는 질문인데, 그것이 묘하게 선배님의 생각과 저의 생각의 차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고의 장소는 특정한 개인이 아닙니다. 위에서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그것은 교통 그 자체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사고한다"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 개인을 지목하여 이런 사람은 사고를 하냐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은 '의식'을 하겠지요. '사고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notion은 기본적으로 '의식'에 속할 것입니다. universal notion은 원인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효과/결과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의식에 탁월하게 속하겠지요.)

제가 보기에 진태원 선배의 해석의 난점은 "인간은 사고한다"를 "모든 개개의 인간은 사고한다"(each man thinks or everyman thinks)로 은연중에 바꿔 놓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적 개인을 사고의 장소로 보는 데카르트 입장이지 스피노자의 입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개개의 개인들로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항상 이미 교통의 과정 속에 있고 거기에서 관개체적인 사고의 과정은 항상 이미 시작되어 있느니만큼 거기에 참여(?)하는 한에서 어떤 모종의 합리성(이론적인 합리성까지는 아니라도 실천적인 합리성이라면 말입니다)을 항상 이미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 동안 선배님도 토론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장진범님께 책을 맡겨 두는 것은 좀 뭐하군요. 장진범님도 할일도 많을텐데. 나중에 한국에 들어가시면 이메일 한 번 주십시요. 그때 댁으로 보내드리든지 사정이 허락되면 직접 찾아뵙고 드리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좋은 추석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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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2007-09-2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리고 나서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balmas 2007-09-2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최원 형 생각이 뭔지 훨씬 더 분명히 드러나는군요. :-) 그런데 스피노자에 관해서는 더 이야기하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역시 이 정도로 끝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한국에 가서 메일 한 번 드리죠. 수고했습니다. ㅎㅎㅎ
 

 

 

ㅎㅎㅎ 최원 형의 답변을 잘 읽었습니다. 최원 형으로서는 “의념”이라는 번역어에 상당히 애착이 가는가 봅니다. 번역자로서는 당연히 그렇겠죠. :-)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으면 좋겠는데, 이번 답변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일단락 짓는 게 좋겠군요. 이 정도 했으면 최원 형이나 내 생각은 충분히 표현된 거 같고, 사실 더 한다고 해서 얼마나 더 생산적인 이야기가 나올지도 약간 의문이 듭니다. 이쯤에서 논의를 끝내고 사람들이 각자 판단하도록 맡겨두기로 하죠.

그런데 최원 형의 답변에는 제 글에 대한 몇 가지의 오해가 엿보이는 듯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의미에서 그것만 몇 가지 바로 잡아보기로 하죠. puissance에 관한 이야기는 그 정도 했으면 됐다고 봅니다. 

우선 common notion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적은 좀 놀랍더군요. 

“진선배님은 notion이란 명확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common이 그 앞에 붙어 줌으로써 2종의 인식이 되므로, 합리성의 원인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common에서 주어져야 한다.(1-1) notion은 그 자체로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통용되는 것으로 거기서 통용된다는 측면은 common notion의 common과는 상관이 없다고(1-2)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좀 아랫부분에도 다음과 같은 지적이 나오죠.

“저는 스피노자의 common notion이란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2-1)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최원 형이 {윤리학} 2부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를 (1-1)이나 (2-1)처럼 해석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정치론}을 제외한다면) {윤리학}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인 건지요? 저는 지난 번 제 답변이나 제 논문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최원 형 자신이 {윤리학}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 방식인데, 최원 형은 그것을 제 견해라고 말씀하시니 좀 당황스럽더군요.

또 다른 이유는 저는 지난 답변에서 {윤리학}만을 문제 삼았고 {신학정치론}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는데, 최원 형은 제가 {신학정치론}의  common notion의 용법을 간과한 가운데, common이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못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 제가 지난 답변에서 {윤리학}만을 다룬 것은 그 이전에 최원 형이 지난 번 글에서 notion의 번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여기서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면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이 공통통념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진 선배님 번역, 198쪽)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통념은 이미 공통된 관념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통된 관념이 공통된 관념이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곧 최원 형은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notion 자체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듯해서, {윤리학}에 나오는 notion의 용례를 살펴보면서 그 용례에 비추어보면 notion은 결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거나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common notion과 universal notion이 어떻게 다른지 해명하는 차원에서 {윤리학}에서 볼 때 common notions의 “common”은 일반적인 notions과 달리 실재적인 기초를 가진다, 곧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에 공통적인 특성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참되거나 적합하다고 말한 거지요.

제가 볼 때 최원 형 생각의 난점은 notion은 사적이거나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간주한다는 데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사고한다Homo cogitat”는 {윤리학} 2부의 공리는 common notion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no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적용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곧 스피노자가 이 공리에서 데카르트의 “ego cogito” 대신 유적인 인간을 주어로 하는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고는 항상 이미 공동적이다, 사고는 항상 이미 소통을 함축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이 점에는 최원 형도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최원 형이 생각하듯이 notion을 가진 사람은 사적이고 개별적으로 사고하고 common notion을 갖는 사람들만 공통적이고 소통을 한다면, notion만을 가진 사람들은 일종의 인식의 자연 상태 안에서 혼자 고립된 채로 사고하는 원자론적 cogito가 아니겠습니까? 그럴 경우 “인간은 사고한다”는 공리는 공리가 아니게 되겠죠. 더욱이 어떻게 자연 상태 안에 고립된 채 존재하는 개별적인 cogito들이, 말하자면 사회상태, 국가를 설립해서 common notion을 가지게 되는지도 더 의문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점과 관련하여 최원 형은 지난 번 제 글의 핵심 논점은 간과한 듯한데, 다음 구절이 제 글의 핵심 논점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원 형이 인용한 발리바르의 문장도 약간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장 전후의 맥락을 보면 발리바르는 notion은 개별적인 것이고 notion commune은 공통적인 것,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렇지 않죠.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1부 [부록]이나 4부 [서문]에 나오는 notio에 관한 용법은 아주 일관된 셈입니다. 

제가 볼 때 notio나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notio communis에 대한 논의에서 이전까지의 논의와 단절된 면모를 보여주지만, 결코 notio에 대한 발생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더 나아가 notio를 보편자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두 가지 상이한 인간학적, 심지어 정치적인 방식의 문제로 보지는 못했죠.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notio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의 문제는 윤리적, 정치적 개체화의 상이한 양식에 관한 쟁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제가 발리바르의 주장이 모호한 인상을 준다고 말한 것은, 최원 형이 이 말을 ‘notion은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notion으로 사고하는 것보다 common notion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 최원 형이 (번역하고) 해석하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지요. 따라서 발리바르의 진의를 정확히 해명하려면, 곧 그의 말에서 모호함의 인상을 제거하려면, “더 많이 사고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하겠죠.

그런데 최원 형은 답 글의 첫머리에서 “제 판단으로 그 구절에서 common은 여러 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발리바르가 쓴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최원 형의 이 말은, 위에서 말했듯이 제가 common notion에서 “common”을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인 것으로 이해한다고 전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 말 뜻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제가 바로 다음에 덧붙인 구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 제 말은 universal notion을 형성하는 것과 common notion을 형성하는 것은 보편자를 구성하거나 인식하는 상이한 두 가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자를 구성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개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죠. 그것은 항상 어떤 집단적인 사고 양식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의 양식과 결부된 문제입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1부에서 목적론적인 편견에 빠진 사람들, 따라서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그들이 자연을 설명하는 방식을 해명하기 위해 notions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곧 notions 또는 universal notions은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및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집단적인 사고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최원 형이 강조하는 common notions의 “이론(주의)적” 측면과 “실천(주의)적” 측면도 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는 common notions의 용법과 관련하여 이론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반면, {신학정치론}에서 그 실천적인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 더 나아가 수동적인 삶의 양식에서 능동적인 삶의 양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죠.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둔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1종의 인식의 상태에서 벗어나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을 획득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1종의 인식과, 2-3종의 인식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1종의 인식이 부적합한 인식이고 “오류의 유일한 원천”인 반면, 2-3종의 인식은 적합한 인식이라고 말하는 데서 이를 알 수 있겠죠. 요컨대 양자 사이에는 이행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common notions은 이러한 이행을 달성하기 위한 기반이자 동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1종의 인식, 곧 상상이나 의견, 또는 universal notions은 거짓과 오류, 기만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다시 말해 배제하고 제거하고 떠나야 할 영역으로 간주되지요. 따라서 여기서는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무지자, 우중과 자유, 해방, 구원 등을 달성한 현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고, 무지의 상태, 예속과 기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적합한 인식과 자유, 구원을 향해 전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국 현자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우중들과 더불어, 그들과 상상과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이죠. {윤리학} 5부 마지막에 가서 “우중vulgus”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죠. 따라서 {윤리학}의 핵심 주제는 오류와 가상의 원천인 1종의 인식에서 벗어나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전진적인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1종의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 상상과 언어의 사용을 그만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학정치론}이 정치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학정치론}의 주요 주제가 현자와 대중의 공통적인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좀 더 나아가 상이한 notions을 갖고, 상이한 종교, 상이한 세계관, 가치관 등을 갖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었기 때문이겠죠(발리바르가 Sub spicies universalis라는 논문에서 {신학정치론}에 나타나는 “실천적 보편성”의 문제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점이겠죠). 곧 {윤리학} 5부 마지막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우중과 현자의 관계라는 문제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근거를 {신학정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common notions의 문제도 새롭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경우 common notions의 실천적인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우중들의 지니는 notions을 개조하는 것, {윤리학}에서처럼 완전히 notions을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예속 상태에, 곧 신학권력의 지배 아래 있는 우중들의 notions을 개조하는 것이 주요한 문제가 됩니다. 여러 집단들이 각자 자신들의 notions(스피노자에게는 특히 상이한 종교적 notions이 문제일 텐데요)을 고집하는 상태에서는 첨예한 갈등과 폭력,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하여 스피노자의 테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정한 종교의 기초로서 “Credo minimum”이라는 게 있지요. 다시 말해 신에 대한 복종과 경배를 정의 및 박애와 등치시키는 실천적인 교리가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common notions의 한 가지가 됩니다. 둘째는 자유로운 공화국을 위한 부정적인 기초(다시 말해 왜 개인적인 의견과 사고, 발언, 종교 등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는가에 관한 논거)로서 언어의 공통성(또는 사고의 조건으로서 소통 및 그 물질적인 토대로서 언어)이라는 것이 있겠죠. 사실 {윤리학}에서 언어는 상상에,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데 비해,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따라서 우중만이 아니라 지식인까지도)이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이 더 부각되죠. (물론 과연 {윤리학}에서 언어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최근 여러 주석가들이 보여준 것처럼 {윤리학}에서도 기호 및 언어의 자연성, 물질성에 관한 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언어나 기호 또는 notions 일반의 문제에서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을 지나치게 대립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우리는 왜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인간의 notions이 common notions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앞서,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1) 여기서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최원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공유한다”는 의미로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서로 공유한다”는 것은 notions 일반의 특징이지, common notions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2)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더 참되게, 더 적합하게 사고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 참되게, 더 적합하게 사고한다는 것을 가리키죠. 그리고 이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참되게 사고한다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인식의 양식과 삶의 양식, 곧 1종의 인식 및 미신적이고 예속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개조의 투쟁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부적합한 인식과 미신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개조가 없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참되게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그런데 notions 일반 속에 이미 “여러 사람들이 서로 공유한다”는 특징이 들어 있지 않다면, 이런 투쟁의 쟁점, 이런 개조의 쟁점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3)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common”을 최원 형처럼 “서로 공유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common의 의미를 평면화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적이고 개별적으로 사고하던 개인들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러나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공동으로 사고하게 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4) 요컨대, notions 자체 안에 이미 “여러 사람이 공유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common notions은 notions과 다른 어떤 지평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notions 내부에서, 그것들을 개조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 많은 것을 사고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해준다고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common notions이 그런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공통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공통적인 특성”을 표현하는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윤리학}에서 common notions은 notions과 달리 “실재적인 기반을 지닌다”고 말할 때 의미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5) ㅎㅎㅎ 그래서 결국 제 생각으로는, 적어도 스피노자에서 notion은 “통념”이라고 번역하는 게 좋겠다고 봅니다.

어쨌든 최원 형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해줘서, 서관모 선생이나 최원 형의 의도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 듯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됐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로서는 웬만큼 이야기를 한 셈이니까, 특별한 쟁점이 새로 제기되지 않는다면, 다음 번 최원 형의 답글로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은 마칠까 합니다.

타향에서 추석 잘 보내시고, 알라딘 주인장 여러분도 즐거운 한가위 맞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번역본을 한 부 보내주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책은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가 11월 초에

한국에 한 번 들어갈 예정이어서, 들어가서 살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다른 책을 읽을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책을 보내시려면 이곳으로 부치지 마시고 장진범 형에게 맡겨두면, 제가 한국에 들어가서

만나서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힘들게 번역한 책을 당연히 사서 봐야 하는데 그냥 덥석 받자니 염치가

없기는 하지만, 고맙게 받아서 열심히 읽겠습니다. 서관모 선생에게나 최원 형에게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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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avinsky 2007-09-2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 모르겠다. 빙빙@.@ ~~~

balmas 2007-09-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Mravinsky님, 앞으로 스피노자 공부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바쁘실텐데, 이렇게까지 긴 글을 써주시고, 게다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의 notion의 용례를 전부 열거해주시기까지 하니 참 한 편으로 감사하고 선배님의 열정이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저는 열정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도 얼마 없는 처지라서 선배님처럼 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군요. 한가지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관모 선생의 말씀에 관련된 부분은 제가 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점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발리바르의 논문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온 문제의 그 구절에서 d'autant plus que ... davantage 관용구의 번역은 선배님의 번역이 맞습니다. 제가 조금 부주의했군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기 저기 읽으면서 오역이 있는 것들을 모으고 있는데, 그 구절도 정오표에 포함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 지적해주신 것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이런 오역이 있는 것을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전에 이메일을 선배님께 보냈는데(엠파스 쪽) 받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책을 손에 받질 못했지만, 받게되면 한 권 보내드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벌써 주문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주문하지 않으셨으면 말씀해주십시요.^^

어쨌든 관용구 번역은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진선배님께서 그 구절에서 notion과 common notion을 각각 '통념'과 '공통통념'으로 옮긴 것이 저에게는 적절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제 판단으로 그 구절에서 common은 여러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발리바르가 쓴 것이 확실합니다. 선배님께서 발리바르의 말이 얼마간 모호하다고 말씀하신 것과 반대로 저는 발리바르의 말이 거기서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발리바르의 말을 모호하게 여기시는 것이야말로 선배님이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기 때문에, 그리고 common notion의 common을 너무 일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두 가지 정도를 간단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진선배님은 notion이란 명확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common이 그 앞에 붙어 줌으로써 2종의 인식이 되므로, 합리성의 원인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common에서 주어져야 한다. notion은 그 자체로는 여러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통용되는 것으로 거기서 통용된다는 측면은 common notion의 common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조금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진선배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윤리학}은 {지성개선론}보다는 덜 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론(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신학-정치론}은 좀 더 실천(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지요. 최근 '보편의 외양 하에서'라는 글에서도 발리바르가 이 문제를 잠시 다루지요.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반오웰..."의 한 각주에서 이러한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 번역에서 가져옵니다.

"{지성개선론}과 {윤리학} 사이에 있는 단절에 관하여, 들뢰즈의 논증은 {윤리학}에서 “공통의념들”을 제시하는 두 가지 양식(논리적 양식과 실천적 양식)을 잘 절합하게 해 주고, 그리하여 주지주의적 독해에 종지부를 찍게 해 준다. 그러나 p. 270의 주석 6번[국역본, 393쪽 주석 6번]은 {신학-정치론}이 (인식의) “종류들을 혼합”하고 있다는 데에서, 많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느끼는 당혹감을 보여준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신학-정치론}이 인식의 종류를 "혼합"하는 듯이 보이고 이 때문에 많은 이론가들이 당혹감을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윤리학}에서 common notion은 분명 2종의 인식으로 제시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1종의 인식에 속하면서도 어떤 실천적 합리성을 갖는 것으로 논의됩니다. 그리고 더욱이 이는 대중들이 공유하는 '언어'로부터 그러한 합리성의 토대를 발견합니다. 이어서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로서는[발리바르 자신으로서는], 스피노자의 이중성이라는, 또는 그의 상대자인 기독교인들의 편견에 대한 이른바 영합이라는 나태한 논증을 배제하고, 󰡔신학-정치론󰡕의 이러한 비순수성에서 (네그리가 말하는) 체계의 “두 번째 정초(定礎, fondation)”의 원동력만이 아니라, 󰡔윤리학󰡕의 인식론과 부분적으로 모순되는, 그리고 이 인식론의 아포리아들을 비판할 수 있게 해 주는 가능한 또 다른 정초의 실마리를 보고 싶다. 이러한 비순수성은 언어(또는 기호)의 정의를 상상의 일반적 개념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을 물질적 교통, 제도적 이야기(récit), 그리고 역사적 언설(parole)의 요소 안에서 완전히 다시 사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신학-정치론}에서는 적어도 common notion의 common은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의미를 분명히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실천적인 합리적 인식'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 맥락에서의 합리성이란 이론적인 합리성을, 즉 개념의 수준에 도달한 2종의 인식의 합리성을 정확히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윤리학}에서 2종의 인식에 이미 속하는 것으로서의 common notion이라면 그것은 말하자면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개념concept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개념'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배님의 입장에서도 2종의 인식을 '통념'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확실히 어색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common notion이 그렇게 일관되게 이론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즉 common notion 자체가 통념과 개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히 문제입니다. notion 자체도 통념과 개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지요. universal notion의 다른 두 가지와 common notion이 모두 notion인 것도 이런 진동의 폭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스피노자가 notion을 단순히 오류에 가득 찬 무지한 자들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common no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예 concept 또는 다른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혼란을 유발할만한 notion이라는 말을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notion이 {윤리학}에서  상상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무지자들의 잘못된 관념들로서의 상상적 관념으로 정의되는 예가 있다는 것이 저로 하여금 그 말을 '통념'으로 단순히 번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신학-정치론}에 더욱 잘 나타나듯이 notion은 명확히 언어의 사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의미들의 교통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실천적 합리성'을 갖는 것이며(그러고보니 '뜻 의'를 써서 '의념'이라 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군요), {윤리학}이 보여주듯이 모종의 인식론적 단절에 의해 '개념'의 수준으로까지, 즉 notion으로서의 최대의 합리성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notion에도 이를테면 역량의 최대값과 최소값이 존재한다고나 할까요?

 

둘째, 진선배님은 universal notion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스피노자에서 notio는 항상 보편적입니다. 개별적인 notio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상이한 방식, 각자의 기질과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상이한 방식이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universal notion이라는 말을 진선배님이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선배님의 의도를 맞게 읽은 건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여기서 universal을 선배님은 '다수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notion은 그러한 의미에서 universal 하기 때문에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universal은 개체들의 독특성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라는 의미로, 즉 singular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universal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많은 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universal notion에 대해서 주는 사례들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 말, 개" ...이것들은 모두 개체들의 독특성의 추상들의 결과로서의 보편적인 notion이지요. "개라는 관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여기서 함께 떠올리면 더욱 좋겠지요. 즉 저러한 notion들은 개체들의 독특성을 추상함으로써(혼동을 대가로 치루고) 얻어지는 관념이라는 점에서 universal하다는 의미이지, 모든 사람들이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universal하다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notion들이 개개인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 말, 개'와 같은 것에서 모든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말' 또는 '기호'일 것입니다. 같은 말을 가지고 상이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이제,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의 경우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notion이 common notion이 될 수록 더 많이 사고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호함 없이 이해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저는 스피노자의 common notion이란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는 스피노자를 '경험주의자'로 만들기 쉽지요. 스피노자에게는 다른 테제들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그 구절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처음부터 교통 속에서만 사고하며, 말을 가지고 사고하고, 말 속에서, 또는 말을 가지고 형성하는 관념들 속에서, 이를테면 '인식론적 단절'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고하는데, 이러한 맥락 안에서만 대상인 개체와의 공통성이라는 것이 이른바 '단절'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 또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notion들을 공통된 것으로 점점 더 일치시켜 나아가고, 이를 통해 더욱 더 인식할 능력들을 배가시킬 수 있게도 되는 것일테고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인식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어쨌든 이렇게 notion이 그 자체로 다양한 수준의 의미층에 걸쳐있거나 또는 그 사이에서 진동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단순히 통념으로, 또는 단순히 개념으로 옮길 수 없으며 '의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역능에 대해서는 좀 더 간단하게 답변드리고 싶은데, 역능 대신 문맥 따라 여러가지로 옮기자는 입장도 가능할 수 있고, 좀 더 통일성을 부여해서 역능이라고 옮기자는 것도 가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puissance 같이 논란이 되는 단어는 될 수 있으면 통일성을 부여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몇몇 용어를 번역어로 사용해도 최대한 갯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고 보고요. 역능이 어떻게 권력을 표현할 수 있는가는 사실 반복적인 사용이 정당화시켜준다고 말씀드릴 수밖에는 없네요. 이는 그 말이 아직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공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역능은 들뢰즈주의나 네그리주의에서만 사용되어오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윤소영 교수나 서관모 교수가 오래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용법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능동성을 강조해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알튀세르주의자들은 역량과 권력을 그렇게 외재적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역량에 해당하는 역능으로 능동성만 강조하기 위해 사용해오진 않았을테고요.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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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형이 좋은 답변을 해줘서 논의가 좀더 내실 있게 진행될 수 있을 듯합니다. 서관모 선생의 경우는 아마도 이런 논의에 나서기가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 세대 아래의 후배들과 공개적으로 이런 문제에 관해 논의하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죠. 물론 답변을 해주신다면 좋겠지만, 그거야 뭐 서관모 선생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어쨌든 최원 형이 적극적으로 답변을 해줘서 논의가 좀더 진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notion에 관해서 본다면, 최원 형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을 듯합니다.

(1) notion을 “통념”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

(2) notion에 대하여 “의념”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이유

(1)에 대해서도 두 가지 내용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1) 공통 통념이라는 번역어는 중복적이지 않느냐 하는 점

(1-2) notion을 “통념”으로 이해한다면, common notion이 가진 “합리성”의 측면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는 점

(2)의 경우는, notion이 갖는 의미를 지정하기 위해 새로운 기표를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이런 뜻에서 “의념”이라는 신조어를 제안한다는 주장으로 집약되는 것 같군요.

최원 형의 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발리바르 인용문 번역에 대하여

우선 최원 형이 제시한 발리바르 인용문을 한번 검토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스피노자 반오웰]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흥미 있는 것은 제 번역과 최원 형의 번역의 내용이 꽤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최원 형이 처음에 큰 따옴표로 제시한 것은 이번 번역본에 수록된 최원 형 자신의 번역인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의 원문과 함께 두 가지 번역을 한 번 비교해보겠습니다.

원문 

“On comprend pourquoi l'Ethique ne postulait pas que "je pense", mais que "l'homme pense", avant de montrer qu'il pense d'atant plus que ses notions sont davantage des notions communes.”(E. Balibar,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 p. 93)

최원 형의 번역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제 번역

“우리는 왜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인간의 통념들이 공통 통념들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앞서,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세부적인 차이점들은 무시한다면 최원 형의 번역과 제 번역의 주요 차이점은 밑줄 친 부분으로 집약되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차이점은 notion 및 common notion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번역의 차이점은 일단 불어에서 “d'autant plus A que ... avantage(plus) B”라는 숙어와 관련이 있는데, 제가 알기로 이 숙어는 “B일수록 더 A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불어 사전에 나오는 예문을 하나 든다면 이런 게 있습니다. “잘못이 크면 클수록 더 크게 후회하기 마련이다Le regret est d'autant plus vif que la faute est plus grave.” 다시 말해 이 숙어는 B가 커질수록 A도 커진다는, 양적인 증가(또는 moins이라는 부사가 쓰일 경우에는 양적인 감소)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밑줄 친 부분은 “인간의 notions이 common notions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고 번역할 수 있겠죠. 제 번역은 이런 관점에서 나온 번역입니다.

반면 최원 형은 이 숙어를 “B가 A의 (배타적인) 원인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는 듯합니다. “인간”은 “notions이 common notions이 되는 만큼만”(B) “사고한다”(A)는 번역문이 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숙어를 “B하는 만큼만 A한다”는 뜻으로 이해한 셈인데, 제가 보기에 이건 이 숙어의 의미를 좀 잘못 이해하신 듯합니다.

그런데 이 번역은 단지 문법상의 문제이기에 앞서 내용상으로도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최원 형의 번역대로 한다면 사람들은 notions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전혀 사고하지 않는 셈이 됩니다. 최원 형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notions을 “개별적인 것”, “어떤 개인이 혼자서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2. 스피노자에서 notio와 notio communis의 의미

따라서 내용의 측면에서 이 점을 좀더 해명하려면 스피노자가 쓰는 notion과 common notion의 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원 형은 답변을 쓰면서 제가 번역한 {스피노자와 정치} 말미에 수록된 “용어 해설”의 “notion” 항목을 참조하신 듯한데, 용어 해설의 그 항목보다는 제가 지난 번 글에 링크해놓은 “스피노자에서 공통통념 개념 I”이라는 제 논문을 참조해주셨으면 좋겠군요(http://blog.aladin.co.kr/balmas/1059302)). 별로 보잘 것 없긴 합니다만, 어쨌든 그 논문이 이 문제에 관한 제 생각을 제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것인 만큼, 좀 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이 논문에 준거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선 스피노자에서 notio의 용례를 보면, {윤리학}에서 이 단어는 총 24번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래의 목록이 {윤리학}에서 이 단어가 등장하는 곳들입니다. (괄호 안의 숫자는 빈도수를 가리킵니다)

1부 정리 8의 주석 2 (1)

부록 (5)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1)

2부 정리 40의 주석 1 (6)

2부 정리 40의 주석 2 (2)

2부 정리 44의 따름정리 2의 증명 (1)

2부 정리 47의 주석 (1)

2부 정리 48의 주석 (1)

3부 정리 56의 주석 (1)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4부 서문 (3)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4부 정리 37의 주석 2 (1)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4부 정리 64의 따름정리 (1)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이 중에서도 notio communis나 notio universalis 같이 특정한 규정과 더불어 사용되지 않고, notio이라는 용어만 따로 사용되는 곳은 표시해놓은 것처럼 11군데입니다. 우선 이렇게 notio만 따로 쓰이고 있는 곳에서 이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기로 하죠.

먼저 1부 [부록]에 나온 용법과 4부 [서문]에 나온 용법을 한 번 보지요. 4부 [서문]의 용법은 사실 1부 [부록]에 준거하고 있기 때문에 한데 묶어서 보는 게 좋습니다.

1부 [부록]에 나온 notio에 대한 용례는 이렇습니다. 라틴어 원문과 더불어, 다른 분들의 참조의 편의를 위해 영어 번역을 첨부하겠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나온 Elwes의 이 번역은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에, 군데군데 조금 수정을 했습니다(특히 원문의 notio를 어떤 경우는 “abstract notion”으로 어떤 경우에는 “explanation”으로, 어떤 경우에는 “abstraction”으로, 또는 “category”로 번역하고 있어서 수정이 불가피했습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는 더 나은 최신 번역본을 구하기는 어렵더군요.

(I) 

“Postquam homines sibi persuaserunt omnia quæ fiunt propter ipsos fieri, id in unaquaque re præcipuum judicare debuerunt quod ipsis utilissimum et illa omnia præstantissima æstimare a quibus optime afficiebantur. Unde has formare debuerunt notiones quibus rerum naturas explicarent scilicet bonum, malum, ordinem, confusionem, calidum, frigidum, pulchritudinem et deformitatem et quia se liberos existimant, inde hæ notiones ortæ sunt scilicet laus et vituperium, peccatum et meritum sed has infra postquam de natura humana egero, illas autem hic breviter explicabo.”

“After men persuaded themselves, that everything which is created is created for their sake, they were bound to consider as the chief quality in everything that which is most useful to themselves, and to account those things the best of all which have the most beneficial effect on mankind. Further, they were bound to form notions for the explanation of the nature of things, such as goodness, badness, order, confusion, warmth, cold, beauty, deformity, and so on; and from the belief that they are free agents arose the further notions praise and blame, sin and merit. I will speak of these latter hereafter[이게 나중에 4부 서문에 나올 내용입니다], when I treat of human nature; the former I will briefly explain here.”

(II) 

Cæteræ deinde notiones etiam præter imaginandi modos quibus imaginatio diversimode afficitur, nihil sunt et tamen ab ignaris tanquam præcipua rerum attributa considerantur quia ut jam diximus, res omnes propter ipsos factas esse credunt.”

The other notions are nothing but modes of imagining, in which the imagination is differently affected, though they are considered by the ignorant as the chief attributes of things, inasmuch as they believe that everything was created for the sake of themselves.”

(III)

Videmus itaque omnes notiones quibus vulgus solet naturam explicare, modos esse tantummodo imaginandi nec ullius rei naturam sed tantum imaginationis constitutionem indicare et quia nomina habent, quasi essent entium extra imaginationem existentium, eadem entia non rationis sed imaginationis voco atque adeo omnia argumenta quæ contra nos ex similibus notionibus petuntur, facile propulsari possunt.”

We have now perceived, that all the notions commonly given of nature are mere modes of imagining, and do not indicate the true nature of anything, but only the constitution of the imagination; and, although they have names, as though they were entities, existing externally to the imagination, I call them entities imaginary rather than real; and, therefore, all arguments against us drawn from such notions are easily rebutted.”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notio는 "목적론에 빠진 사람들"(I) 내지 "무지한 이들ignari"(II)이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로 드는 것들은 “선, 악, 질서, 혼란, 따뜻함, 차가움, 미, 추, 칭찬과 벌, 죄와 공적”(I) 등이 있죠. 그리고 또 그는 이러한 notiones는 “상상의 양태들”에 불과하며(II, III), 전혀 “사물의 참된 본성”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III)

다음으로 4부 서문에 나오는 용례를 좀더 보기로 하죠.

(I)

“Perfectio igitur et imperfectio revera modi solummodo cogitandi sunt nempe notiones quas fingere solemus ex eo quod ejusdem speciei aut generis individua ad invicem comparamus.”

“Perfection and imperfection, then, are in reality merely modes of thinking, or notions which we form from a comparison among one another of individuals of the same species.” 

(II) 

“solemus enim omnia Naturæ individua ad unum genus quod generalissimum appellatur, revocare nempe ad notionem entis quæ ad omnia absolute Naturæ individua pertinet.”

“For we are wont to refer all the individual things in nature to one genus, which is called the highest genus, namely, to the notion of Being, whereto absolutely all individuals in nature belong.”

(III)

“Bonum et malum quod attinet, nihil etiam positivum in rebus in se scilicet consideratis indicant nec aliud sunt præter cogitandi modos seu notiones quas formamus ex eo quod res ad invicem comparamus.”

“As for the terms good and bad, they indicate no positive quality in things regarded in themselves, but are merely modes of thinking, or notions which we form from the comparison of things one with another.”

보다시피 4부 [서문]에 나오는 notio의 용법은 1부 [부록]과 유사합니다. 두 경우 모두 notio는 “단지 상상의 양태”이거나 “단지 사고의 양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4부 [서문]에서는 이러한 notio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관한 흥미로운 언급들이 있다는 점인데, 스피노자는 이러한 notiones는 사물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된다고 말하고 있죠. 이러한 차이는 2부에서 notiones에 대해 발생적인 원인에 의한 설명이 제시되었다는 데서 생겨나는 차이점입니다.

따라서 notio 및 notio communis에 관한 스피노자의 좀 더 핵심적인 주장을 보기 위해서는 2부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우선 스피노자가 notio communis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보고서, 그 다음 2부 정리 40의 주석 1과 주석 2를 살펴보기로 하죠. 그런데 주석 1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내용만 간추려서 보겠습니다. 전부 다 살펴보고 싶은 분들은 각자 해당 주석을 찾아보시면 되겠죠.

우선 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1에서 notio communis가 다음과 같이 규정됩니다.

“Hinc sequitur dari quasdam ideas sive notiones omnibus hominibus communes. Nam (per lemma 2) omnia corpora in quibusdam conveniunt, quæ (per propositionem præcedentem) ab omnibus debent adæquate sive clare et distincte percipi.”

“Hence it follows that there are certain ideas or notions common to all men; for (by Lemma ii.) all bodies agree in certain respects, which (by the foregoing Prop.) must be adequately or clearly and distinctly perceived by all.”

이러한 규정은 2부 정리 37과 38에서 증명된 것, 곧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과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어떤 독특한 사물의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정리 37)와 “모든 것에 공통적이고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데서 따라 나오는 규정입니다.

따라서 notio communis에서 “공통적”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컨대 실재적인 기초(사물들 또는 물체들에 공통적인 것)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초를 적합하게 인식하는, 표현하는 notio가 notio communis인 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notio communis와 일반적인 notio, 곧 실재적인 기초를 갖지 않는 상상의 양태나 사고의 양태로서 notio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notio는 “개별적인” 것이고, notio communis는 “공통적” 또는 “보편적인” 것일까요? 2부 정리 40의 주석 2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부 정리 40의 주석 2

“Ex omnibus supra dictis clare apparet nos multa percipere et notiones universales formare I° ex singularibus nobis per sensus mutilate, confuse et sine ordine ad intellectum repræsentatis (vide corollarium propositionis 29 hujus) et ideo tales perceptiones cognitionem ab experientia vaga vocare consuevi. II° ex signis exempli gratia ex eo quod auditis aut lectis quibusdam verbis rerum recordemur et earum quasdam ideas formemus similes iis per quas res imaginamur (vide scholium propositionis 18 hujus). Utrumque hunc res contemplandi modum cognitionem primi generis, opinionem vel imaginationem in posterum vocabo. III° denique ex eo quod notiones communes rerumque proprietatum ideas adæquatas habemus (vide corollarium propositionis 38 et propositionem 39 cum ejus corollario et propositionem 40 hujus) atque hunc rationem et secundi generis cognitionem vocabo.”

“From all that has been said above it is clear, that we, in many cases, perceive and form our universal notions:--(1.) From particular things represented to our intellect fragmentarily, confusedly, and without order through our senses (II. xxix. Coroll.); I have settled to call such perceptions by the name of knowledge from the mere suggestions of experience. (2.) From symbols, e.g., from the fact of having read or heard certain words we remember things and form certain ideas concerning them, similar to those through which we imagine things (II. xviii. note). I shall call both these ways of regarding things knowledge of the first kind, opinion, or imagination. (3.) From the fact that we have notions common to all men, and adequate ideas of the properties of things (II. xxxviii. Coroll., xxxix. and Coroll. and xl.); this I call reason and knowledge of the second kind. ”

이 부분을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지각하여 notiones universales[보편 통념들]을 형성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보편 통념들은] (I)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단편적이고 혼동된 방식으로, 그리고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 표상되는 독특한 실재들로부터 [형성된다](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를 보라). 이 때문에 나는 보통 이러한 지각들을 막연한 경험에 의한 인식이라 부른다. (II) [보편 통념들은] 기호들로부터 [형성된다]. 예컨대 어떤 단어들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우리는 실재들을 다시 떠올리고, 이 실재들에 관해, 우리가 실재들을 상상하는 수단들과 유사한 어떤 관념들을 형성함으로써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18의 주석을 보라). 전자와 후자처럼 실재들을 고찰하는 방식을 나는 다음부터 첫 번째 종류의 인식, 억견 또는 상상이라 부를 것이다. (III)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재의 특성들에 대해 notiones communes[공통 통념들] 및 적합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정리 39와 그 따름정리, 정리 40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나는 이성 및 두 번째 종류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notiones는 “universales”하며, 이것들이 형성되는 데는 3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두 가지는 1종의 인식을 이루며, 마지막 3번째는 2종의 인식을 이루죠. 따라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보편적인 인식이냐 아니면 독특한 인식이냐는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 사이의 차이입니다(3종의 인식에 관한 내용은 인용문 뒤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원 형이 인용한 발리바르의 문장도 약간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장 전후의 맥락을 보면 발리바르는 notion은 개별적인 것이고 notion commune은 공통적인 것,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렇지 않죠.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1부 [부록]이나 4부 [서문]에 나오는 notio에 관한 용법은 아주 일관된 셈입니다. 

제가 볼 때 notio나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notio communis에 대한 논의에서 이전까지의 논의와 단절된 면모를 보여주지만, 결코 notio에 대한 발생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더 나아가 notio를 보편자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두 가지 상이한 인간학적, 심지어 정치적인 방식의 문제로 보지는 못했죠.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notio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의 문제는 윤리적, 정치적 개체화의 상이한 양식에 관한 쟁점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가 notio, 특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를 어떻게 발생적으로 설명하는가 하는 것은 2부 정리 40의 주석 1(그리고 그 이전에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스피노자의 설명에 따르면 notio에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quae communes vocantur, quaeque ratiocini nostri fundamenta sunt” notio, 곧 notio communis가 있고, 그 이외에 “또 다른 notiones”도 존재하죠. 그는 그 예로 “이차적이라 불리는 것들[곧 notiones]quas secundas vocant”이나 사람, 말, 고양이 등과 같이 “보편적이라 불리는 notiones”를 제시하죠. 그 다음 스피노자는 “초월적 용어들termini transcendentales”이라고 불리는 것, 곧 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 같은 것들과, 사람, 말, 개 등과 같은 “notiones universales”에 대한 발생적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초월적 용어들은 “인간 신체가 동시에 일정한 숫자의 이미지들만을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곧 만약 이미지들이 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미지들은 혼동되기 시작할 것이며, 만약 신체가 동시에 그 자체로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숫자가 훨씬 더longe excedatur 초과되면 이것들은 서로 완전히inter se plane 혼동되어 버릴 것이다.”(G II 120-21) 다시 말해 만약 신체에서 이미지들이 동시에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된다면 정신도 이 이미지들을 판명하게 상상할 수 있지만, 신체에서 이 이미지들이 완전히 혼동되어 버리면 정신은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물체들을 혼동되게 상상해서, 이 물체들이 “마치 하나의 속성 아래quasi sub uno attributo, 예컨대 존재자, 실재 등과 같은 속성 아래 포괄되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 용어들은 “최고로 혼동된 관념들summo gradu confusas”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설명입니다.

  반면 notiones universales는 전자와 비슷한 원인을 갖고 있지만, 전자와는 달리 “완전히” 혼동될 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신체에서 형성될 경우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정신이 (각각의 사람의 피부색이나 키 등과 같이) 개개의 [사람들의] 적은 차이들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숫자도 상상하지 못하며, 단지 이 차이들이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 모두 합치하는 것만을 판명하게 상상하게 될 정도만큼 상상의 힘을 능가”할 때 생깁니다. 따라서 notiones universales는 초월적 용어들만큼 혼동된 것은 아니지만, 개개의 이미지들 사이의 차이와 실질적인 일치점 또는 대립점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신체와 정신의 무능력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용어들과 공통적이죠.

한 가지 지적하자면 스피노자는 여기서 termini transcendentales(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와 notiones universales(사람, 말, 개)를 구별하고 있지만, 위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4부 [서문]에서는 "존재자ens"를 “notio”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엄밀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notiones universales는 모든 사람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이하게 형성된다고 지적합니다. 곧 “각자는 자신의 신체의 성향에 따라pro dispositione sui corporis” notiones universales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의 직립 자세를 경탄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직립 동물로 이해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웃을 수 있는 동물로, 털 없는 두발 달린 동물로, 이성적 동물로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스피노자의 비판이 얼마나 급진적인 것인지 알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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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스피노자에서 notio는 상상의 양태이거나 사고의 양태입니다. 더욱이 이는 목적론에 빠져 있거나 1종의 삶을 영위하는 무지한 이들이 사물의 본성을 가리킨다고 착각하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스피노자에서 notio는 항상 보편적입니다. 개별적인 notio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상이한 방식, 각자의 기질과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상이한 방식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보편 notio의 한 종류로 스피노자는 notio communis를 제시합니다. notio communis는 다른 notio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지만, 다른 notio와 달리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이 서로 공유하는 특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실재적인 기초를 갖고 있으며, 적합한 인식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저는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는 “통념”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우리말에서 “통념”이라는 말은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지닐뿐더러, 엄밀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관념이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피노자와 관련해서 본다면 “통념”이라는 말이 notio에 대한 번역어로는 상당히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공통 통념"이라는 말이 중복적이라는 것이 최원 형의 지적이었는데,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그건 최원 형이 (1) 스피노자에서는 notio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것 (2) 스피노자가 말하는 “common”은 단지 “공통적”인 게 아니라 “실재적인 기초를 가짐” 따라서 “적합함”, “참됨”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얼마간 간과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컨대 common notion이 참된 인식, 적합한 인식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common”이 “모든 물체들이 공유하는” 또는 몇몇 물체들이 공유하는 특성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발리바르 번역문과 관련해서 제 결론을 내리자면, 최원 형의 번역은 문법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내용상의 측면에서도 좀 문제가 있지 않나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도 notio communis를 가질 때에만 사람들이 사고한다고 볼 수는 없겠죠. 만약 그렇다면 1종의 인식,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겠죠.


3. 의념이라는 번역어에 대하여

제가 보기에는 “의념”이라는 번역어 선택에 대한 최원 형이나 서관모 선생의 해명은 얼마간 차이가 있고, 어떤 점에서는 상반되는 듯합니다. 우선 “용어 해설” 12쪽에서 볼 수 있듯이 서관모 선생은 이 용어가 신조어가 아니라 “기공 수련과 관련된 용어”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는데, 최원 형은 이 단어가 신조어인 것처럼 말하고 있군요.

더 나아가 서관모 선생은 이 역어를 채택한 이유가 notion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국한된 관념을 가리키기 때문에 “통념”이나 “총념”은 적합하지 않고 대신 “의념”이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의 난점 중 하나는 이 용어가 “인지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역어일 수는 없다”(11쪽)고 덧붙이고 있지요. 그런데 최원 형은 오히려 common notion이 지닌 실천적인 “합리성”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 역어를 채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가지 설명은 어떤 점에서는 전혀 상반된 것이어서, 좀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특히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notion이라는 개념에 대해 새로운 기표를 만들고 싶다면, 이런 점이 우선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notion이라는 번역어에 대해 “의념”이라는 새로운 기표가 “통념”이라는 역어보다 어떤 점에서 장점을 지니고 있는지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4. puissance에 대하여

이미 길어졌기 때문에, puissance에 대해서는 간단히 한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최원 형은 “맑스는 자본의 역능이(한계 없어 보이는 그것의 파괴성뿐 아니라 항상 증가하는 그것의 생산성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발리바르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puissance를 역량으로 번역하면, 너무 중립적이거나 너무 긍정적인 뉘앙스로 읽힙니다. 즉 '권력'이라는 뜻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적 맥락과 다른 맥락을 상대적으로 구별해야하는 것은, 스피노자적 맥락에서는 potentia와 potestas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puissance를 “역능”이라고 하면 과연 “권력”이라는 의미가 포함될까 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마 들뢰즈나 네그리를 공부하는 분들은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네그리는 권력과 대비되는 “창발적인 힘” 내지 ”활력”을 표현하기 위해 puissance라는 용어를 발전시키고 있고, 또 그 때문에 국내의 연구자들은 “역능”이라는 용어를 써온 걸로 아는데, puissance에 권력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를 “역능”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건 사실은 “역능”이라는 말에 대한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이해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냥 다음과 같이 말해 두겠습니다.

불어에서 puissance라는 단어는 사실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인용했던 불어 사전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4/showps.exe?p=combi.htm;java=no;

1. “어떤 결과를 생산하는 능력. 이러한 능력에서 생겨나는 힘이나 특성Faculté de produire un effet, capacité; la force ou le caractère qui en résulte.”

2. 철학에서 쓰이는 몇 가지 용법

“형이상학(특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거나 스콜라철학적인). (현실태와 대립하는) 잠재태 MÉTAPHYS. (notamment aristotélicienne ou scolastique). [P. oppos. à acte2] Virtualité.”

“능동적인 능력. 어떤 존재의 형태로 진입할 수 있는 현행적인 능력Puissance active. Capacité ou faculté actuelles d'accéder à une certaine forme d'être`` (FOULQ.-ST-JEAN 1962).

수동적인 능력.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떤 외부의 작인(作因)에 의해 자신이 아닌 것이 되는 단순한 가능성Puissance passive. ,,Simple possibilité de devenir ce qu'on n'est pas (...), non par soi-même, mais grâce à l'intervention d'un agent extérieur`` (FOULQ.-ST-JEAN 1962). Synon. possibilité (ibid.).”

“잠재적으로Virtuellement”

3. “수학. 곱. À la puissance n. Un nombre à la puissance n est le produit de n nombres égaux à lui-même”

4.  “(물리학 용어로) 힘이나 작용력. 특히 단위 시간에 생산되고 소비되는 또는 전달되는 일이나 에너지의 양으로, 이는 보통 와트로 표현된다Force, pouvoir d'action (d'un appareil, d'un mécanisme); en partic., quantité de travail ou d'énergie produite, consommée ou transférée par unité de temps et s'exprimant généralement en watts.”

이 밖에도 뭐 사회과학 분야나 시사 분야에서 “힘”과 등가의 의미로 쓰이는 다양한 사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grands puissances”라고 하면 “열강”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puissance absolu du roi”라고 하면 “왕의 절대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최원 형이 염두에 두는 것이 바로 이런 용법이겠지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다른 단어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puissance라는 단어에도 말하자면 “notion”의 차원이 있고 또 “concept”의 차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일상생활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을 “notion”의 차원이라고 한다면 철학자들이 엄밀한 규정을 붙여서 쓰는 경우는 “concept”의 차원이 되겠지요.

그런데 notion의 차원에서 본다면 puissance라는 단어가 지닌 저 다양한 의미를 모두 충족시켜 줄 만한 우리말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잠재적인”이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옳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힘”이나 “~력”(또는 “n 제곱”)으로 번역하는 게 좋을 때가 있으며 또 어떤 때는 그냥 “능력”으로 번역하는 게 무난한 경우도 있죠. 물론 “권력”이나 “열강” 같은 식으로 번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notion의 차원이라면 puissance에 굳이 한 가지 번역어를 고정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notion”이라는 단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notion”이라는 단어에도 notion의 차원과 concept의 차원이 있겠죠. notion도 어떤 맥락에서는 “용어”로, 어떤 맥락에서는 그냥 “관념”이나 “개념”으로 번역하는 게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원 형이 인용한 발리바르 문장에서도 puissance는 notional한 차원에서 쓰인 거라고 봅니다. 그런 경우는 그냥 “자본의 권력”이라고 하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읽히겠죠. 저는 “역량”이라고 써도 괜찮다고 보는 생각이긴 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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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모 선생이 아마 답변을 해주실 것 같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몇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notion에 대해서, 진선배님이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전에 읽을 때에도 그랬는데, 그 용어해설 항목의 제목은 common no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notion에 대한 설명은 적고 common notion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설명을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common notion이 "모든 사람(또는 다수의 사람)이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서로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합리적인 인식"이라면, 즉 common notion이 일반인들에게 어느정도 공통된 관념이라면, notion도 '통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식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common이라는 말이 따로 붙어 있는 common notion에는 저러한 설명이 적절할 수 있으나 common이라는 수식이 없는 notion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조금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나 합니다. 

왜 진선배님의 설명에서 이 두 가지가, 즉 common notion과 notion의 설명이 뒤섞이고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notion을 진선배님이 '통념'으로 옮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뒤섞임은 common notion의 번역 자체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notion을 '통념'으로 번역할 경우, common notion은 '공통의 통념' 내지 '공통통념'이 되는데, 이는 마치 '역전앞'과 같이 동어반복적인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선배님 말처럼 common notion이 어떤 맥락에서 실천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실천적인 "합리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common notion은 단순한 통념이 아니며 또 그렇다고 개념도 아니지만(특히 {신학-정치론}의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합리적 인식"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common notion은 "공통의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여기서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면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이 공통통념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진선배님 번역, 198쪽)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통념은 이미 공통된 관념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통된 관념이 공통된 관념이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notion이 갖는 가치를 지시해줄 수 있는 '기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어에는 이런 기표가 없기 때문에 '의념'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해보자는 것은 괜찮은 시도일 수 있다고 봅니다.

서관모 선생이 notion을 과거에 '상념'으로 옮겼었는데, 제가 그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음이의어가 되고 원래 사용되는 상념의 뜻과 자신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추측이지만, 과거에도 서관모 선생이 '항상 상'자를 선택
한 것을 보면, 아마 notion이란 어떤 의미의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뜻 의'자를 써서 의념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한결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역량에 대해서는 전에 말씀드린 것 이상을 말씀드리기는 어렵군요. 단 용례를 보자면,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맑스는 자본의 역능이(한계 없어 보이는 그것의 파괴성뿐 아니라 항상 증가하는 그것의 생산성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여기서 puissance를 역량으로 번역하면, 너무 중립적이거나 너무 긍정적인 뉘앙스로 읽힙니다. 즉 '권력'이라는 뜻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적 맥락과 다른 맥락을 상대적으로 구별해야하는 것은, 스피노자적 맥락에서는 potentia(역량)와 potestas(권력)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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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x 2007-09-2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의 역능..', '자본의 역량'이라는 번역 만큼이나 많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번역이군요. potentia-puissance가 어떤 활성으로 행위를 유발케하는 잠재력을 의미하고, potestas-pouvoir가 이미 유발된 힘이 작동하는 행위로서의 현존하는 힘(권력)을 의미한다면, potentia를 '역능'이나 '역량'보다는 '추동력'(계속적으로 행위를 가능케하는 것으로 '잠재력'이라는 번역으로는 불충분한 어감를 보충해주기에)이라고 번역하고, potestas는 '권력'으로, force는 그냥 '힘'으로, dynamique은 '동력'(힘(force)들의 연대하는 작동)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요즘 신문의 정치난을 보자면 그냥 '능력'이라고 해도될 것을 너도나도 굳이 '역량'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것이 몹시 불편하고 그때마다 왠지모르게 얼굴도 모르는 이곳의 주인장이 생각나더군요. 철학용어의 속화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이 철학적 언술을 오독하게하는 부정적 효과로 귀결되지는 않을런지... 그렇다고 서관모 선생처럼 있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힘든 용어를 힘써 만들어내는 것은 더 부정적인 효과를 낳겠지요. 15년전 '이론'지 처음 나올 때 그의 글들은 내용은 백번 쫓고픈데 읽어내기에 심히 짜증나는 것으로, 사람들이 다가가다 도망가게 만드는 역능이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군요. -사족-]

upx 2007-09-2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otion은 '의념'도 '통념'도 아닌 그냥 약한 의미의 '개념'으로 저는 이해하고 표현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balibar 인용문에서 "자신의 개념이 공통개념이 되도록..."이라고 번역을 한다해서 여기서의 개념이 concept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문맥상 충분히 이해 못할 바가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즉, notion은 약한'개념'(엄밀한 철학적 함의가 없는 그냥 '--이라는 말(혹은 개념)')으로, concept는 강한'개념'(엄밀히 철학적으로 정의되는)으로, 모두 '개념'으로 번역하고 그 차이는 문맥 속에서 독자가 판단하기에 지난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물론 꼭 필요한 경우에는 역자가 주석을 달아주면되고요). 또한 우리는 '개념'이라는 말을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만('개념없는 놈'등등), 이 경우의 '개념'이 꼭 concept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짱꿀라 2007-09-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곳에 오면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글들이 참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아서 좋아요. 배우는 기분으로 글들을 잘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원 2007-09-2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px 님/ "자신의 개념이 공통개념이 되도록"에서 그 "개념"은 concept와 문맥상에서 구분이 안됩니다. 자신의 concept가 공통된 concept가 되도록...이라고 충분히 읽을 수 있지요. 그것이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이미 upx님이 공통의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능'이라는 말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미 많이 대중화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느껴지기로는, upx님의 포텐샤, 포테스타스 구분은 너무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보입니다. 즉 잠재성(potentiality, dynamis), 행위(action, activity, energeia)로요. 그리고 이건 뭐 저의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저는 서관모 선생의 글들이 항상 유사한 내용을 다루는 다른 사람들의 글에 비해서 수월하게 읽히고 비교적 의미전달이 잘 되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론지가 나올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워낙 다루는 내용이 낯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이 있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진태원 선배와 같이 용어들과 번역들을 대중들이 사용하기 좋고 의사소통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들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정은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일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번 {대중들의 공포}가 인터넷의 어떤 사람의 말처럼 '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를 자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upx 2007-09-21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자신의개념'이나 '공통개념'에서의 개념이 concept로 이해된다는 것은 저로서는 전혀 불가능한('충분히 읽을 수'가 아니라)일인 것 같습니다. 개념이란 당연히 어떤 대상에 대해 (특정 철학자 마다 달리 규정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특정인에게는) 카테고리적으로 정의된 규정이고(concept de nature, concept d'homme, etc.), '나의개념'이나 '공통개념'이라고 말할 때에는 내가 (혹은 공통으로) 갖는 무엇에 대한 의미,기준,인식,등을 나타내는 약한 규정이므로 당연히 notion 이상으로는 읽히지 않는다고 저는 봅니다. 여기서 notion이란 개념이라고 명명은 되더라도 의미는 전혀 concept가 아니라 직관적이고 불확정적인 준거, 즉 '무엇 무엇이라는 말' 혹은 '어떤 것' 정도가 되리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만...
2. '포텐시아'나 '포테스타스'가 '너무 아리스토테레스적으로' 이해돼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것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스피노자 등 후세인들이 달리 특수하게 사용했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아주 많이 특수하게 사용했다고도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이 특수한 경우를 예외적으로 고려하고 설명하는 것이 옳지않을까 싶군요.
3. 철학이 전혀 대중에게 공포가 아니라 친숙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걸 핑계로 말과 논리를 혼란스럽게 다룬다면 그 또한 철학이 아니겠지요. 근데 저는 그동안 남한의 철학자들 특히 진보계열 철학자들의 글에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더 많이 느꼈고 그래서 그곳으로부터(계열이 아니라 땅에서) 도망쳤습니다. (최원님이나 진태원님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역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몇몇 글에서 충분히 느꼈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 제 입장이니 오해는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최원 2007-09-22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px님/notion de nature, notion d'homme라는 말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말입니다. nature나 homme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concept만 되고 다른 것들은 notion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두 번째 논점에서는 포텐샤/포테스타스가 스피노자에게서는 뜻이 조금 다르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dynamis가 능동/행동에 대립된다는 의미에서의 잠재성의 뜻을 갖지만, 스피노자에게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고 현대 일반 불어 용법에서 puissance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으로도, 또 스피노자의 그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일괄적으로 '역량'으로 옮기거나, 또는 일괄적으로 '추동력'이라고 옮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권력이라는 측면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여러가지 말들로 마구 옮기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무슨말이 무슨말을 가리키는지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말을 활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이 신조어를 남발해서는 안되지만, notion, puissance 등은 그 동안 논란이 매우 오래동안 있어왔고, 그래서 신조어에 대한 요구도 있는만큼, 만들어질 경우 수용력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