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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Demy Retrospective
자크 드미 특별전

2005. 5. 11. Wed. - 5. 19. Thu.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는 5월 11일부터 19일까지 9일 동안, 프랑스 누벨바그 작가 중 가장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영화들을 만들어낸 자크 드미 감독의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트뤼포, 고다르 등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매료되어 있었던 자크 드미는, 누벨바그 감독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매혹을 고스란히 자신의 영화 속에 옮겨놓은 감독입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사랑의 환희와 고통을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그려낸 초기작 <롤라>와 <천사들의 해안>부터 자크 드미만의 고유한 영화세계를 세계적으로 알린 <쉘부르의 우산>, <로슈포르의 숙녀들>, <당나귀 공주> 등의 매혹적인 뮤지컬, 그리고 드미의 독특한 유머감각을 보여주는 <달 착륙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 뮤지컬 제작과정을 통해 영화에 대한 애정과 매혹을 또다시 고백한 유작 <추억의 마르세이유> 등 자크 드미의 대표작 7편을 상영합니다. 또한 <낭트의 자코>, <자크 드미의 세계> 등, 자크 드미의 평생의 동반자였던 누벨바그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가 자크 드미의 삶과 영화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담아 만든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상영합니다. 이번 특별전은 영화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특별강연
일시: 5월 13일(금) 오후 7시 30분
강사: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5월 13일에는 아녜스 바르다의 다큐멘터리 <자크 드미의 세계> 상영(5시 50분)이 끝난 후, 7시 30분부터 영화평론가 김성욱씨가 자크 드미의 삶과 영화에 대하여 소개하는 특별강연이 진행됩니다. 강연에는 선착순 무료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 어린이를 위한 시네마테크
일시: 5월 14일(토) 4시 30분 / 5월 19일(목) 2시 20분
상영작: 당나귀 공주
입장료: 어린이(초등학생) 4,000원 | 어린이를 동반한 어른 무료
가정의 달 5월에 개최되는 자크 드미 특별전 프로그램 중, 샤를 페로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환상적인 뮤지컬 <당나귀 공주> 상영시 어린이를 위해 특별할인 혜택을 드립니다. 가족과 함께 화려하고 낭만적인 뮤지컬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 1회 관람료 일반 | 6,000원 , 회원 | 4,000원
인터넷 예매는 맥스무비(www.maxmovie.com)와 무비OK(www.movieok.co.kr) 등 에서 가능합니다.
현장 예매는 행사 시작일인 5월 11일 1시 30분부터 시작합니다.

▣ 회원 예매
5월 10일부터 회원 전화예매 가능합니다.
전화예매 02-720-9782 / 이메일 예매 theque@dreamwiz.com
회원 예매는 관람 영화 상영 하루 전까지 가능하며(당일 예매는 안 됩니다),
영화시작 30분전까지 매표소에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 문의:
문화학교 서울 02-743-6003
서울아트시네마 02-720-9782, 02-745-3316 www.cinematheque.seoul.kr

▣ 상영작 소개 및 상영시간 (총 10편)

▶ 롤라 Lola 자크 드미 Jacques Demy 1961 90min b&w
출연: 아누크 에메, 마르크 미셸, 자크 아르당, 앨런 스코트, 엘리나 라부르데트, 안니 뒤페루
5.11(수)2:20 5.13(금)8:50 5.15(일)6:40 5.19(목)4:30
낭트의 항구, 카바레 댄서인 롤라는 7년전에 떠난 연인 미셸을 기다리며 아들 이본을 키우고 있다. 그녀는 어린시절 친구 롤랑과 미국인 해병 프랭키의 구애를 받지만 미셸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거부한다. 누벨바그 최고의 로맨티스트라는 평가에 걸맞게 사랑을 찾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적인 삶의 시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자크 드미의 장편데뷔작. 라울 쿠타르의 탁월한 흑백촬영과 애달프면서도 경쾌한 미셸 르그랑의 음악이 인상적이다.


▶ 천사들의 해안 La Baie des anges | Bay of the Angels 자크 드미 Jacques Demy 1963 79min b&w
출연: 잔느 모로, 클로드 만, 폴 게르스, 앙리 나시에, 앙드레 세르트, 니콜 숄레
5.11(수)4:30 5.15(일)12:40 5.17(화)9:00 5.19(목)6:40
은행 직원인 장은 니스의 카지노에서 아름다운 도박광 자키를 만나게 된다. 전 재산을 잃을 위기에 처한 자키에게 장은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 주고, 이때부터 두 사람의 동반관계가 시작된다. 니스의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의 유희. 니스의 해변과 골목들을 더없이 아름답게 담아낸 화면은 장 비고의 <니스에 대하여>를 떠올리게 하며, 우연에 운명을 거는 위험스러운 열정과 확신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사랑의 이야기가 눈부시게 그려진다.


▶ 쉘부르의 우산 Les Parapluies de Cherbourg | The Umbrellas of Cherbourg 자크 드미 Jacques Demy 1964 87min color
출연: 카트린 드뇌브, 니노 카스텔누오보, 안느 베르농, 마르크 미셸, 엘렌 파르네, 미레이유 페레
5.11(수)8:50 5.13(금)1:30 5.15(일)4:50 5.18(수)2:20
쉘부르 우산가게의 딸 쥬느비에브는 이웃의 자동차 정비공 기이와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어머니는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 그러던 중 기이가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어 떠나고,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긴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아름다움의 기원에 슬픔과 고통을 숨기고 있는 매혹적인 뮤지컬. 영화의 대사 전체가 샹송으로 처리되어 있는 독특한 영화로, 미셸 르그랑의 아름다운 음악과 파스텔톤의 화려한 색채가 인상적이다.


▶ 로슈포르의 숙녀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 | The Young Girls of Rochefort 자크 드미 Jacques Demy 1967 125min color
출연: 카트린 드뇌브, 프랑수아즈 도를레악, 진 켈리, 자크 페랭, 미셸 피콜리, 다니엘 다리외
5.12(목)2:20 5.14(토)6:40 5.16(월)4:30 5.18(수)8:50
로슈포르의 쌍둥이 자매 델핀과 솔랑쥬는 무용과 피아노를 가르치며 언젠가 다른 곳에서 멋진 사랑을 하게 되리라 꿈꾸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작곡가 앤디가 친구 시몽을 찾아 로슈포르에 오는데... 실제 자매인 카트린 드뇌브와 프랑수아즈 도를레악이 쌍둥이 자매로 출연하여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뮤지컬 영화. 로슈포르 거리 곳곳에서 펼쳐지는 춤과 노래의 향연 또한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 당나귀 공주 Peau d'ane | Donkey Skin 자크 드미 Jacques Demy 1970 100min color
출연: 카트린 드뇌브, 장 마레, 자크 페랭, 델핀 세리그, 미셸린 프레즐, 페르낭 르두
5.11(수)6:40 5.14(토)4:30 5.17(화)7:00 5.19(목)2:20
먼 옛날 어느 왕국. 상냥하고 아름다운 왕비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국왕은 아내와 꼭 닮은 공주와 결혼하려 한다. 아버지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온갖 어려운 요구들을 하던 공주는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쓰고 궁궐에서 도망치는데... 샤를 페로의 동화를 각색한 환상적인 뮤지컬 영화.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에 경의를 표한 영화로 장 마레가 국왕 역을 맡았으며, 아름다운 음악과 현란한 의상, 화려한 세트 등 볼거리로 가득하다.


▶ 달 착륙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 L'Evenement le plus important depuis que l'homme a marche sur la lune | A Slightly Pregnant Man 자크 드미 Jacques Demy 1973 87min color
출연: 카트린 드뇌브,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미셸린 프레즐, 마리사 파방, 클로드 멜키
5.12(목)8:50 5.16(월)2:20 5.18(수)6:40
파리의 자동차교습소 소장 마르코는 어느 날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정밀검사 후 그가 임신 4개월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의사들과 언론은 이것이 인류에게 달 착륙보다 훨씬 중요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며 흥분하지만 마르코와 그의 연인 이렌느는 도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남자의 임신 소동을 통해 현대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린 독특한 코미디물.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주니어>의 원전 격인 영화다.


▶ 추억의 마르세이유 Trois places pour le 26 | Three Places for the 26th 자크 드미 Jacques Demy 1988 106min color
출연: 이브 몽탕, 마틸다 메이, 프랑수아즈 파비앙, 파트릭 피에리, 카트리오나 맥콜
5.12(목)6:40 5.14(토)2:20 5.16(월)8:50 5.18(수)4:30
마르세이유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이브 몽탕은 자신의 지난날을 그린 뮤지컬 공연을 위해 마르세이유를 방문한다. 공연 연습 도중 그는 아름다운 가수지망생 마리온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인 이브 몽탕을 직접 등장시켜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자크 드미의 유작. 이브 몽탕이 탭댄스를 추며 <사랑은 비를 타고>, <탑햇>, <뜨거운 것이 좋아> 등의 주제가를 부르는 장면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명장면.


▶ 낭트의 자코 Jacquot de Nantes | Jacquot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 1991 118min b&w/color
출연: 필립 마롱, 에두아르 주보, 로랑 모니에, 브리지트 드 빌푸아, 다니엘 뒤블레
5.13(금)3:30 5.15(일)2:20 5.17(화)4:30 5.19(목)8:50
낭트의 어린 소년 자코는 정비소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미용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세상은 전쟁으로 어수선해지지만, 자코에게는 여전히 인형극와 영화를 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다. 자크 드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과 그가 나중에 만든 영화 장면들을 번갈아 보여주며 드미의 영화가 지닌 매혹을 흥미롭게 탐구하고 있는 아름다운 영화. 자크 드미는 이 영화의 제작 도중 세상을 떠났다.


▶ 로슈포르, 25년 후 Les Demoiselles ont eu 25 ans | The Young Girls Turn 25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 1993 64min color documentary
출연: 조르쥬 차키스, 카트린 드뇌브, 자크 드미, 미셸 르그랑,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5.12(목)4:50 5.14(토)9:10 5.16(월)7:00
<쉘부르의 우산>과 함께 자크 드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두 번째 뮤지컬 영화 <로슈포르의 숙녀들> 개봉 25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당시 영화의 배우들과 스탭들, 그리고 엑스트라로 참여했던 로슈포르 주민들이 등장하여 영화의 제작과정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이 영화가 자신들의 삶과 로슈포르라는 작은 항구마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 자크 드미의 세계 L'Univers de Jacques Demy | The World of Jacques Demy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 1995 90min b&w/color documentary
출연: 아누크 에메, 잔느 모로, 카트린 드뇌브, 마티유 드미, 로잘리 드미, 아녜스 바르다
5.13(금)5:50 5.15(일)8:50 5.17(화)2:20
아녜스 바르다가 남편 자크 드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담아 만든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자크 드미의 모든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들과 함께 배우와 스탭, 가족들이 들려주는 각 영화를 둘러싼 뒷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으며, 자크 드미의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고백하는 세 소녀의 이야기 또한 감동적이다. 촬영장을 방문한 짐 모리슨의 모습을 담은 홈무비와 드미의 영화에 출연할 뻔했던 해리슨 포드의 인터뷰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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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5-05-0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어요. 근데요 시간대가 다 오전에 몰려있네요. 잠깐... 오후 겠죠? 새벽에 영화보러 오라 하진 않을거 같고.

balmas 2005-05-09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마도 새벽에 보러오라는 뜻인 것 같은데요?
 

따우님 글에 댓글을 달았는데, 숨은아이님이 답변을 달아주셔서 다시 한번 더 댓글을 달아봤습니다.

 

숨은아이님의 답변

저는 발음 때문인 게 맞다고 보는데요. "율"이나 "률"이나 받침 뒤에선 [뉼]로 발음되는데, 모음 뒤에선

"율"은 [율]로, "률"은 [률]로 발음됩니다.

"율"로 쓰는 걸로 통일하면 "이직률"을 "이직율"로 써야 하는데, 그럼 읽을 때 [이징뉼]이 아니라

[이지귤]이 됩니다. 발음상 아예 다른 말이 됩니다.

"률"로 통일한다고 하면 "이혼율"을 "이혼률"이라고 써야 하는데,

이혼율은 [이혼뉼]이라고 자연스레 발음이 되지만, 이혼률이라고 쓰면 아무래도 률 발음에 힘이

들어가지 않겠어요? 이혼율, 이혼률, 읽어보세요. 증가율을 증가률이라고 쓰면 더욱 그렇고.

 

저의 댓글

하하하, 숨은아이님 말씀이 제일 근거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한 번 더 토를 달자면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율"이냐 "률"이냐를 따질 때 기준이 되는 건 받침이  없는 경우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비율"이나 "배율" 또는 "효율" 같이 앞에 받침이 없는 말이 올 때는 모두 "율"을 쓰잖아요.

그런데 앞에 받침이 있는 음절이 오는 경우에 어떤 경우는 "율"로 쓰고

어떤 경우는 "률"로 쓰니까 도대체 왜 이런 구분이 할까, 그 근거는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 같아요.

숨은아이님  말씀은, “율”로 통일하게 되면, 가령 “이직율” 같은 경우는

[이지귤]이라고 발음하게 되니까 부적절하다, 또 “률”로 통일하게 되면,


“증가률” 같은 경우가 생기니까 역시 부적절하다, 따라서 따우님이 제시한 것처럼


받침이 어떤 게 오느냐에 따라 “율”과 “률”을 구분해서 써주는 게 옳다는 거죠. 


그런데 우선 왜 받침 다음에 나오는 “율”이나 “률”은 꼭 [뉼]이라고 발음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꼭 그걸 [뉼]이라고


발음해야 하는 근거는 없는 거죠. 다만 우리가 말할 때 보통 그걸 [뉼]이라고 발음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이직율을 [이지귤]이라고 발음한다고 해서


그게 틀렸다고 말할 만한 법칙적인 근거는 없다는 거죠. 다만 사람들이 말할 때 그렇게


발음하지 않는다, 곧 그게 관습이다라는 거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뉼]이라고 발음하는 게 하나의 관습이라면,


이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꼭 그렇게 복잡한 근거를 만들어서


어떤 받침이 오는 경우에는 “율”을 쓰고 어떤 받침이 오는 경우에는 “률”을 쓰고 하는


법칙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받침이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율”이라는 단어를 표준으로 삼아서


앞의  음절에 받침이 있는 경우에도 모두 “율”이라고 쓰고, 간혹(혹시 있다면)


“이직율”을 [이지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이징뉼]이라고 가르쳐주면


그걸로 족할 것 같은데요. 또는 학교에서 가르칠 때 “그건 [이징뉼]로 읽는다”라고 가르치면


족하겠죠.  


정리하자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존에 사람들이 말하는 발음이 표준이 된다면,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그렇게 복잡한 기준을 만들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 필요가 뭐가 있을까라는 거죠.


거기에는 혹시 국어학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인?) 욕망이


담겨 있지 않은가, 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표현이 좀 지나쳤나?)


혹시 국어학 전공자 분들이 계신다면, 넓게 이해해주세요. 국어학자들의 노력을 비웃자는


건 아니고, 솔직히 좀 궁금해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다면 물론 그 구분법을 따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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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07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국어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좀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게 아닌가, 그런 염려가 생기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 문제에 정통한
분이 혹시 계시다면 좀 조언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릴케 현상 2005-05-07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생각으로는^^ 근대국가를 만들려는 열정에 차 있을 때, 우리는 하나의 말을 쓰는 한민족이라는 걸 내세우기 위해 표준어와 맞춤법 등을 공들여서 정리하게 되지 않았나 싶네요. 우리민족 중에서 '덜 배운' 사람이 아닌 이상 표준어와 맞춤법을 똑바로 쓴다고 생각하게 만들고요...그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규칙이 필요했고, 그 규칙을 법칙화한 거겠죠. 그 법칙을 만드는 과정에 외국이론도 많이 갖다 썼을 테고^^ 그러면서 교수 되고 정통파 교리 같은 게 됐겠죠... 언젠가 고종석씨는 방언과 외국어의 구분은 언어학적 기준보다 정치적 기준에 많이 의지한다(제주도말이 외국어가 아닌 것은 그런 이유다^^고) 또 어디선가 보니 어떤 표기가 맞다 틀렸다고 법칙화할 수는 없다면서 많은 사람이 쓰는 순으로 사전에 등재하고 사람들이 참조하게 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한민족 한 언어 법칙적인 표기 등의 관념에서 이제 벗어나도 될 것 같아요...

사량 2005-05-0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말과 글말을 비슷하게 만들고자 했던 노력, 즉 '언문일치' 운동은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던 움직임이었습니다. 해당 국가의 구성원을 국민으로 호명하고 이들에 동질감을 불어넣기 위한 근대국가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지요. 표준어의 형성은 여기에 말씀대로 정치적인 문제가 결부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일제를 향한 '저항적' 민족주의가 덧붙여져 있었다는 점이 조금 다릅니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이라는 것이 처음 나왔던 때가 1933년이고 그 주체가 조선어학회였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언문일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근대 동아시아문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최근 흥미로운 연구를 많이 발표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가라타니 고진도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와 비교하여 재미있는 글을 쓴 적이 있구요. 표준어의 정치성에 대해서는 아시다시피 부르디외를 비롯하여 들뢰즈&가타리도 일갈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란 게 늘 변하니까 사전도 개정판이 생기고 맞춤법통일안도 수정을 거듭하는 것이겠지요. 표기법이 헷갈리실 때는 국립국어연구원 홈피(korean.go.kr)에 가면 대부분 답변을 얻으실 수 있긴 합니다만, 그건 결국 잠정적인 정답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늘 하곤 합니다.

릴케 현상 2005-05-0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정통한 분이 나타나셨네요...근데 국립국어연구원도 그다지 못미더울 때가 많아서 좀 고민이지요(^^느낌에... 대학원생정도가 아르바이트식으로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해서)어쨌든 단답식 정답을 제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긴 하니까...

balmas 2005-05-0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재미있는 댓글들을 달아주셨네요.
두 분 말씀하신 대로 민족국가/국민국가의 구성과 국어의 표준화 과정에 대한
좀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숨은아이 2005-05-08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 전 사실 국어에 대한 정규 교육은 고등학교로 끝입니다. 그래서 "이론"은 잘 모르구요. 단순하게 생각해서, 국어는 표음문자이니까 발음에 따라 적는 게 원칙인데,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적으면 그게 같은 말인지 보는 사람이 헷갈리잖아요. 그래서 표준 표기법을 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 한자어 같은 경우엔 발음대로만 쓰면(이를테면 이직률을 이징뉼로 쓰면 ^^) 글자만으로 본래 의미를 알기 어려우니까 글자 하나하나에 음가를 매기게 되었고요.
또 말이 앞서가고 문법이나 어법은 따라가게 되잖아요. 그러니깐 표기법을 정해놓고 그에 따라 발음을 가르치긴 어렵지 않나 합니다.

2005-05-08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05-09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숨은아이님,
몇 마디 더 할 말이 있는데, 바빠서 그냥 잘 읽었다는 표시만 남깁니다. :-)
 

작년에 제 수업을 들은 법대 학생 하나가 요즘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지만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나 해왔네요.

질문한 내용을 보니까 다른 분들도 대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만한 부분이라서

답변을 써서 보내는 김에 페이퍼를 하나 올립니다. 󰡔법의 힘󰡕 읽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는 「스피노자와 정치」 원고 교정 보랴, 용어 해설과 역자 해제 마무리하랴 한창 바쁜 주인데, 또 공교롭게도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해대는 통에 좀 정신이 없네요. 이번 주에만 7-8개의 질문을 이메일로 받았는데, ㅎㅎㅎ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좀 얄밉더라구요. 꼭 바쁜 때를 골라서 질문하구 말이야 ... ^^;;;

 

 

질문:


[법의 힘], 31쪽에 보면

 

하지만 그 원칙과 그 동력을 넘어서 파스칼의 이 단편은 아마도 좀 더 본질적인 구조와 관계하는 듯하다.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a-1)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a-2) 이 경우는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 지배 권력의 유순하고 비굴한, 따라서 외재적인 도구라는 의미(1)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힘 또는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좀 더 내재적이고 좀 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법이라는 의미의 정의는, 이 정의의 외부에 또는 그 이전에 미리 존재하며 이 정의가 유용성에 따라 순응하거나 일치해야 하는 힘이나 사회적 권력, 예컨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단순히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2). 

  더욱이 이것의 정초나 설립의 계기 자체는 결코 어떤 역사의 동질적인 소재 속에 기입되어 있는 한 계기는 아닌데, 왜냐하면 이 계기는 어떤 결정을 통해 이 역사를 절단하기 때문(b-1)이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b-2),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b-3)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부분이 있는데. 법이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단순히 봉사하는 것, 도구가 아니라 좀 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사실 잘 와 닿지가 않네요. 어떤 점을 지적하려고 하는지, 제가 짐작하기론 뭔가 법의 정초에 내재해있는 폭력성 뭐 이런 걸 지적하려는 것 같긴 한데 그 부분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좀 더 자세하게 쉽게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답변: 

사실 이 구절은 일반 독자들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고, 데리다의 핵심 논점 중 하나가 담겨 있는 구절이지.

우선 데리다의 논점을 한 번 정리해보지. (a)에서 알 수 있듯이 데리다는 파스칼의 단편의 핵심은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a-1)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고, 이러한 통찰은 법의 “수행적 힘”(a-2)에 대한 통찰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지.

그리고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a)의 논점은, (1)과 (2)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이 권력에 대한 "외재적 도구"라는 생각, 곧 법이 지배계급의 이러저러한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도구라는 생각과 다른 주장이지.  

그럼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이면서 “법의 설립과 정초”를 낳는 법의 힘, 법의 “수행적 폭력”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b)에서 찾을 수 있지.

(b-1)을 보면, 데리다는 “법의 정초”의 계기는 “역사를 절단한다”고 말하고 있어. 다시 말해 강한 의미에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은 앞선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형성하는 행위라는 거야.

그런데 이렇게 이전의 역사, 또는 이전의 국가나 정치체계와 다른 새로운 역사를 형성하는 이 법은 바로 이처럼 새로움을 형성, 창설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기 이전의 역사나 국가, 정치체계 또는 법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겠지. 그리고 그렇다면 이 법은 자기 이전에 존재하는 역사나 정치체계, 법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의존할 수 없게 되겠지. 또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정의상 이 법은 새로운 법이 아닐 테고, 따라서 자신이 새로운 법을 정초한다, 창설한다고 말할 수 없겠지. 이게 바로 (b-2)의 논점이지.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의문이 생기지. 도대체 법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새로운 어떤 것을 창설할 수 있을까, 법이 지닌 어떤 힘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데리다에 따르면 그건 바로 법이 지니고 있는 “수행적 폭력” 덕분이지. (b-3)

따라서 데리다가 말하는 수행적 폭력이란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법을 창설하는 힘, 폭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c-2), 이처럼 전혀 새로운 것은 이전의 법이나 가치, 질서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지닌 수행적 폭력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는 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c-2).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이해가 좀더 쉬울 거야. 데리다는 이처럼 새로운 법이 창설되는 행위의 사례, 따라서 수행적 폭력이 발휘되는 대표적인 경우로 “민족국가들의 설립, 또는 불어로 법치 국가라 불리는 것을 창설하는 제헌의 행위”(51쪽)를 들고 있지.

왜 민족국가, 또는 법치 국가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까? 사실 모든 국가, 모든 정치 질서의 창설에는 데리다가 말하는 의미에서 수행적 폭력이 작용하지만, 근대 이전의 국가의 창설 또는 재창설에서는 이러한 정초의 행위가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담론에 의해 신비화되어 있기 마련이라서(우리나라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고대 국가의 창설은 항상 신화적 담론과 연계되어 있지) 수행적 폭력이 작용하는 방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지. 또 대부분의 경우는 명시적인 기록과 선언의 행위를 통해 정초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지도 않고.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가 「독립선언들」에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새로운 법의 창설에서 나타나는 수행적 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지. 「독립선언들」은 짧은 글이지만 매우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논점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간단하게 몇 가지 점만 검토해 볼까?


1) 이 선언문은 “수행적 폭력”에서 수행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드러내지. 오스틴이 분석하고 데리다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언어의 수행성이라는 것은 언어의 발화 자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어떤 실제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말하지. 그리고 「독립 선언」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러한 수행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지. 왜냐하면 이러한 선언 이전에 정의상 독립국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는 바로 이러한 선언을 통해 독립국이 되기 때문이야. 「독립선언」이라는 것은 매우 요식적이고 형식적인 행위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선언, “이에 아메리카 연합주의 대표들은 전체 회의에 모여 이 식민지의 선량한 이름과 권능으로써 ... 이 연합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들이라고 엄숙히 발표하고 선언한다”([법의 힘] 174쪽)는 발화 행위, 기록 행위를 통해 비로소 아메리카는 아메리카가 된 셈이지. 내가 강조표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주어인 “연합 식민지”는 바로 이 문장을 다 읽는 그 순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들”로 바뀌게 되는 셈이야. 이게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수행적 폭력, 법의 정초, 창설 행위에서 볼 수 있는 수행적 폭력이지.    


2) 그런데 왜 이게 폭력이냐구? 그건 첫째, 이러한 선언의 행위, 창설의 행위는 기존의 법질서에서 볼 수 없었던 또는 기존의 법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지. 폭력은 (근대법의) 정의상 법 바깥에 있는 것, 법과 대립하는 것이라는 점을 가정한다면 말이야. 둘째, 이러한 선언의 행위, 창설의 행위는 바로 자신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법질서, 정치질서를 창설함으로써, 사실 기존의 모든 법질서, 정치질서는 태초에 있었던 어떤 폭력에서 유래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폭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지. 다시 말하면 어떤 법질서, 정치질서도 객관적이거나 초월적인 정당성의 근거에 따라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건 순수하게 비폭력적이라고, 또는 폭력의 타자라고 할 수 있겠지), 따라서 항상 어떤 종류의 폭력, 곧 억압과 분리, 배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지.


3) 그래서 대부분의 법의 정초 행위, 창설 행위 또는 선언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독립선언」에는 매우 특징적인 근거들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바로 신, “세계의 최고 판관”으로서 신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근대 자연권의 원리지. 다시 말해 영국으로부터 자신들의 독립은 이 두 가지 지고한 원리에 비추어봤을 때 정당하다는 거지. 그리고 이런 절차를 통해 새로운 주체, “아메리카의 선량한 인민”이라는 주체가 탄생하지. 다시 말해 선언 이전까지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의 백성들, 원주민들이 새로운 국가의 국민, 인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게 되는 거야.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앞에서 본 것처럼 법이 이러저러한 권력의 도구라고 보는 것은 법이 원칙적으로는 그래서 안되는데, 편법적으로, 곧 불법적으로 권력의 이익을 옹호하고 돌본다는 것을 뜻하지. 이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 가령 장관이 신호 위반을 했을 때 눈감아준다든가 어떤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음에도 법적 처벌을 면한다든가 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겠지. 또는 마르크스처럼 자유와 평등이라는 부르주아의 법 이데올로기는 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비판하는 것도 사실은 법을 (권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지.  


반면 데리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법이 갖는 힘, 법에 고유한 폭력은 이러한 외재적 비판으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또 충분히 비판되거나 극복될 수도 없다는 거지. 왜냐하면 법의 일차적인 폭력은 바로 새롭게 창설하고 정초하는 힘으로서 수행적 폭력에 있기 때문이지. 


위의 구절에 대한 분석은 이 정도로 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좀 이해가 되었나?



아,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데리다가 “해석의 폭력” 또는 “해석의 힘”이라고 말한 것은 49쪽 이하에 나오는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를 보면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 거기서 데리다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법관(또는 배심원)의 판결에 관한 문제인데, 데리다는 정의로운 판결은 일반적인 법의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되며, 매 순간, 매 경우마다, “마치 지금까지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판사 자신이 매 경우마다 이를 발명한 것처럼, 재창설적인 해석의 행위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정의란 일반적인 규칙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독특한 타자, 독특한 사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그 독특성을 포함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규칙을 변경하거나 또는 적어도 일반적 규칙의 해석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그 독특성을 존중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지.


데리다는 모든 법은 원초적인 수행적 폭력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항상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다시 말해 이러한 원초적인 수행적 폭력 때문에 법은 항상 해체 가능하고, 그래서 정의가 가능하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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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 2005-05-0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balmas 2005-05-0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도움이 됐다니 기분 좋군 ...
 

ㅎㅎㅎ 따우님, 재미있는 지적이네요. 그런데 저는 이런 거 보면 가끔 왜 이렇게 구분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양자를 구분하는 어떤 음성학적 또는 음운론적 규칙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국어학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구분들일까요? 제가 언뜻 보기에는 둘 다 "율"이라고 쓰면 오히려 간편하고 경제적일 것 같은데, 굳이 양자를 구분해야 하는 근거가 뭔지, 저로서는 좀 ... 말한 김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가끔 출판사의 편집자들과 일하다보면 우리말 바로쓰기에 아주 철저한 입장을 보이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존중받을 만한 자세이긴 한데,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국어학자들이 제시해 놓은 우리말 어법이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의미 전달에 장애가 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더라구요. 그 때마다 속으로 참 국어학자들이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구나 푸념을 하게 되죠. 제가 좀 삐딱했나요? ^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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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5-05-06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법칙이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가르쳤었는데... 저 부분이요.
그런데 사실 억지도 많아요. 어떤 법칙들은 그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예외들도 너무 많구요. 암튼, 국어 꽤나 어려워요. 하다보면 더더욱.

balmas 2005-05-0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우주님! 반가워요.
요즘은 통 글도 안올리시고. 바쁘신가 봐요. ^______^
그렇겠죠, 뭔가 규칙이 있긴 있겠죠. 아무 규칙도 없이 저렇게 구분해야 한다고
할 리야 없겠죠.
 

 

정치la politique, 정치적인 것le politique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처음으로 구분해서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다. 메를로-퐁티의 제자이며 저명한 마키아벨리 연구자이기도 한 르포르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등에 기초하여 정치에 관한 매우 독창적인 개념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도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적 구분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치”, 곧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불어로는 “라 폴리티크la politique”에 해당한다. 그런데 클로드 르포르는 이처럼 경험적인 제도적 구분을 전제하는 “라 폴리티크”라는 용어는 정치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핵심적인 의미는 사회의 한 제도적 영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세계 및 자신들 사이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산출함으로써 사회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산출적 원리를 가리킨다. 곧 르포르에 따르면 넓은 의미의 사회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경제, 종교, 문화 등과 같이 사회의 한 제도로서 정치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 자체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게 곧 정치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와 구분하기 위해 르포르는 이런 의미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곧 “르 폴리티크le politique”(영어로 하면 the political)라고 부른다([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19-20세기Essai sur le politique: XIXe-XXe siècles], Seuil, 1986에 수록된 여러 논문 참조). 그리고 르포르는 이런 의미의 “정치적인 것”의 차원(또는 사회의 상징적 차원)을 처음으로 발견한 공적을 마키아벨리에게 돌린다(Claude Lefort, [저작의 노동. 마키아벨리Le travail de l'oeuvre. Machiavel], Gallimard, 1972 참조). 반면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상부구조인 정치의 본질을 하부구조인 경제에서 찾음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상징적 차원을 해명하지 못하고, 당관료제와 경제결정론의 이중적 굴레에 빠지게 된다. 르포르의 이런 구분법은 라클라우와 무페를 비롯한 영미권의 좌파 정치이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2부 세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에서 르포르를 따라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양자를 각각 “타율성”과 “자율성”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의 타율성”이란, 르포르식의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는 모든 정치의 차원은 자기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근원적 타자, 또는 이질적 차원에 의해 규정되어 있음(바로 이 때문에 정치는 타율적이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의 차원을 규정하는 이 타자(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 지위, 곧 최종 심급의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타자는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 논문에서 발리바르가 보여주려는 것은 루소의 업적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발견해낸 데 있는 반면, 마르크스는 경제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근원적인 장소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정치(노동의 정치)의 가능성의 장소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치는 “인민 중의 인민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곧 역사의 주체의 선험적(또는 적어도 실제적)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곧 본질주의와 목적론의 굴레에 빠져들게 된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대중들masses/multitudo이라는 개념을 정치의 중심 문제로 부각시킴으로써, 마르크스식의 정치의 타율성 이론이 지닌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곧 마르크스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정치의 타율성의 또다른 차원을 발견하며, 이는 마르크스 이론이 지닌 본질주의와 목적론의 한계를 정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원천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발견한 경제의 차원을 경험적인 사회영역으로 환원시키는 르포르와는 달리, 발리바르는 경제가 함축하는 “정치의 타율성”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또하나의 정치의 타자, 곧 스피노자의 이데올로기론과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이 양자의 관계는 대립이나 모순이 아닐 뿐만 아니라, 종합이나 접합, 보완 또는 병치나 나열의 관계가 아니다). 발리바르의 이러한 이론적 문제설정은 다시 「정치의 세 가지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 in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 마르크스 전후의 정치와 철학La Crainte des masses: Politique et philosophie avant et après Marx] Galilée, 1997에서는 “시빌리테”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좀더 복합적인 시도로 전개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의 구분은 르포르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인 전유의 시도로 읽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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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5-0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황지우는 시보다는 시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어려븐 말씀을 했더랬는데...에구 어려븐 거

balmas 2005-05-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조금 어렵죠?
르포르 책이 한두 권 번역되어 있다면 그나마 덜 어려울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balmas 2005-05-0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건 웬 외마디 소리란 말인가 ...

krinein 2005-05-03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때 기억을 살려 질문입니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은 르포르가 풀란차스에 앞서는 건가요? 아니면 두 저자가 다 의존하는 프랑스어의 맥락이 있는건가요?

balmas 2005-05-03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한 연대기적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연배로 봐서는 르포르가 먼저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대개 이 구분법의 원조를 르포르에게 돌리는 걸로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NA 2005-05-04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좀 퍼갑니다.^^

2005-05-04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05-0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퍼가신 다음에 코멘트 달아놓은 것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용어해설에서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용법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것 같더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이 용어법을 둘러싼 차이점들을 한번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NA 2005-05-05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군요. 기대가 되는걸요?^^

마리선녀 2024-08-08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본인의 저서, 그러니까 번역서 여러 곳에서 클로드 르포르의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 특히 정치적인 것에 대해 수정ㆍ비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