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la politique, 정치적인 것le politique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처음으로 구분해서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다. 메를로-퐁티의 제자이며 저명한 마키아벨리 연구자이기도 한 르포르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등에 기초하여 정치에 관한 매우 독창적인 개념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도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적 구분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치”, 곧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불어로는 “라 폴리티크la politique”에 해당한다. 그런데 클로드 르포르는 이처럼 경험적인 제도적 구분을 전제하는 “라 폴리티크”라는 용어는 정치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핵심적인 의미는 사회의 한 제도적 영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세계 및 자신들 사이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산출함으로써 사회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산출적 원리를 가리킨다. 곧 르포르에 따르면 넓은 의미의 사회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경제, 종교, 문화 등과 같이 사회의 한 제도로서 정치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 자체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게 곧 정치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와 구분하기 위해 르포르는 이런 의미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곧 “르 폴리티크le politique”(영어로 하면 the political)라고 부른다([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19-20세기Essai sur le politique: XIXe-XXe siècles], Seuil, 1986에 수록된 여러 논문 참조). 그리고 르포르는 이런 의미의 “정치적인 것”의 차원(또는 사회의 상징적 차원)을 처음으로 발견한 공적을 마키아벨리에게 돌린다(Claude Lefort, [저작의 노동. 마키아벨리Le travail de l'oeuvre. Machiavel], Gallimard, 1972 참조). 반면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상부구조인 정치의 본질을 하부구조인 경제에서 찾음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상징적 차원을 해명하지 못하고, 당관료제와 경제결정론의 이중적 굴레에 빠지게 된다. 르포르의 이런 구분법은 라클라우와 무페를 비롯한 영미권의 좌파 정치이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2부 세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에서 르포르를 따라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양자를 각각 “타율성”과 “자율성”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의 타율성”이란, 르포르식의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는 모든 정치의 차원은 자기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근원적 타자, 또는 이질적 차원에 의해 규정되어 있음(바로 이 때문에 정치는 타율적이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의 차원을 규정하는 이 타자(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 지위, 곧 최종 심급의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타자는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 논문에서 발리바르가 보여주려는 것은 루소의 업적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발견해낸 데 있는 반면, 마르크스는 경제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근원적인 장소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정치(노동의 정치)의 가능성의 장소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치는 “인민 중의 인민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곧 역사의 주체의 선험적(또는 적어도 실제적)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곧 본질주의와 목적론의 굴레에 빠져들게 된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대중들masses/multitudo이라는 개념을 정치의 중심 문제로 부각시킴으로써, 마르크스식의 정치의 타율성 이론이 지닌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곧 마르크스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정치의 타율성의 또다른 차원을 발견하며, 이는 마르크스 이론이 지닌 본질주의와 목적론의 한계를 정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원천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발견한 경제의 차원을 경험적인 사회영역으로 환원시키는 르포르와는 달리, 발리바르는 경제가 함축하는 “정치의 타율성”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또하나의 정치의 타자, 곧 스피노자의 이데올로기론과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이 양자의 관계는 대립이나 모순이 아닐 뿐만 아니라, 종합이나 접합, 보완 또는 병치나 나열의 관계가 아니다). 발리바르의 이러한 이론적 문제설정은 다시 「정치의 세 가지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 in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 마르크스 전후의 정치와 철학La Crainte des masses: Politique et philosophie avant et après Marx] Galilée, 1997에서는 “시빌리테”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좀더 복합적인 시도로 전개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의 구분은 르포르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인 전유의 시도로 읽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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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5-0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황지우는 시보다는 시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어려븐 말씀을 했더랬는데...에구 어려븐 거

balmas 2005-05-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조금 어렵죠?
르포르 책이 한두 권 번역되어 있다면 그나마 덜 어려울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balmas 2005-05-0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건 웬 외마디 소리란 말인가 ...

krinein 2005-05-03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때 기억을 살려 질문입니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은 르포르가 풀란차스에 앞서는 건가요? 아니면 두 저자가 다 의존하는 프랑스어의 맥락이 있는건가요?

balmas 2005-05-03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한 연대기적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연배로 봐서는 르포르가 먼저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대개 이 구분법의 원조를 르포르에게 돌리는 걸로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NA 2005-05-04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좀 퍼갑니다.^^

2005-05-04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05-0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퍼가신 다음에 코멘트 달아놓은 것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용어해설에서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용법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것 같더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이 용어법을 둘러싼 차이점들을 한번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NA 2005-05-05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군요. 기대가 되는걸요?^^

마리선녀 2024-08-08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본인의 저서, 그러니까 번역서 여러 곳에서 클로드 르포르의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 특히 정치적인 것에 대해 수정ㆍ비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