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네무코님을 위한 중동/이슬람 책소개

어차피 저는 일 때문에 이쪽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고, 네무코님이야 일 때문에 공부를 하셔야 하는 입장은 아니니까 그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들, 제가 본 것 중에서 일러드릴께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

★ 이슬람에 대한 개설서들

1001개의 거짓말 - 문학동네 세계문학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한 책은 아닙니다. 그냥 소설입니다.
하지만 중동 쪽에 관심이 전혀 없으시더라도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술탄 살라딘을 읽으셨으니, 다음엔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
라픽 사미는 시리아 작가인데, 이 소설 증말증말 재미있습니다!


중동의 새로운 이해 - 국가안보정책연구소 기획총서 1
손주영 외 엮음 / 오름

저는 이 책을 읽었지만 이게 좀 옛날 책이예요.
아무튼 이슬람에 대한 개괄서를 한권 읽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이슬람'이라는 제목으로 이희수 교수의 책과 손주영 교수의 책이 나와있는데,
둘 다 안 읽어봤습니다만-- 저라면 손교수 책을 읽겠습니다. 
국내에는 저명한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책도 몇권 나와 있지만,
사실 루이스의 책은 '재미'는 별로 없습니다. 굳이 공부하실 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해요.


이슬람문명
정수일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이 책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고졸한 문체에, 글 읽는 맛이 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
위의 이슬람 책이나 이 책, 둘 중에서 골라서 읽으셔도 무방할 듯.

★ 조금 더 나아가고 싶으시다면


이슬람 1400년
버나드 루이스 엮음, 김호동 옮김 / 까치글방

루이스의 책으로는 '중동의 역사'와 '무엇이 잘못되었나'도 나와 있는데요,
'중동의 역사'나 이 책 중에 한권 골라보시면 될 듯.
둘 중에선 이 책이 더 쉽게 읽힐 것 같아요.


근본주의의 충돌 - 아메리코필리아와 옥시덴털리즘을 넘어
타리크 알리 지음, 정철수 옮김 / 미토

'술탄 살라딘'의 그 작가, 타리크 알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장병옥.이윤섭 옮김 / 창해

아무래도 이쪽 책을 읽다보면 (맘에 안 드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프리드먼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은 쓰여진 시기가 좀 오래되긴 했고,
이후 프리드먼의 관점도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고나면
중동 뉴스가 좀 달리 보일 거예요 ^^
프리드먼의 또다른 책 '경도와 태도'를 읽으셔도 좋고요.


★ 더 세분화된 주제들을 다룬 책으로는


추악한 전쟁 - 아프가니스탄, 미국 그리고 국제 테러리즘
존 K. 쿨리 지음, 소병일 옮김 / 이지북

9.11과 빈라덴, 아프간, 그리고 이른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에 대해
이 책만큼 잘 서술한 책은 못 봤습니다.
문제는... 번역이 개판 x 50000000000000000000000 이어서요... ㅠ.ㅠ


예루살렘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지음, 이동진 옮김 / 그린비

네무코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예루살렘에 대한 책입니다.
작가가 그리스정교 쪽 사람인지라 아무래도 편견이 없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지역 르포를 만화로 담은 건데요,
이걸로 그 동네 사정을 알기는 사실 힘듭니다만. 우선은 이걸 보시면
'선입견' 같은 것은 많이 없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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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0)

 

 

 

 

원래는 지난 주말에 작성되어야 하는 글이었는데, 사정상 며칠 늦어졌다. 그 런 사정을 반영하여, 제일 처음에 꼽고자 하는 것은 새로 나온 <단테>와 그 해설서이다. 이건 오늘 아침에 한국일보에서 <신곡>을 완역한 한국외대 한형곤 교수와 그 해설서 <신곡 - 단테, 신의 나라로 여행을 시작하다>(서해문집)를 쓴 부산외대 박상진 교수의 대화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다시 검색해 보니까 한형곤 교수의 이탈리어어 완역본은 지난 78년에 삼성출판사(세계문학전집)에서 나왔었고, 2003년에 개역본이 한국외대출판부에서 <풀어 쓴 단테의 신곡>으로 다시 나왔다. 이후에 새로운 판본이 다시 나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요즘 <신곡>보다 더 많이 팔려나가는 것은 <단테 클럽>이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같이 단테의 이름을 '참칭'한 책들이지만,  교양있는 독자라면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세계 3대 문호로까지 꼽히는 단테의 <신곡>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혹은 읽은 척이라고 할 필요가 있고, 적어도 책이라도 서가에 꽂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말 역자나 해설자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커녕 끝까지 다 읽은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나부터도 그렇지만). 그건 원작 자체가 완벽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시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번역도 까다롭거니와 원작의 맛을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 이 '숭고한' 책에 대해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건 읽어보려고 노력하거나, 읽은 척하는 것이다. 다시 나온 번역본이나 새로 나온 해설서가 요긴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적어도 읽은 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정말로 '읽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게 '읽은' 한국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나로서도 단테는 (페트라르카 등과 함께) 하나의 콤플렉스 거리이다. 푸슈킨도 이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해서 여러 모로 참조하고 있지만("푸슈킨과 단테"라는 게 "푸슈킨과 셰익스피어"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연구주제이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고골의 <죽은 혼>이 그 3부작 구성에 있어서 이 <신곡>의 구성을 의도했었다는 점. 그러니, <죽은 혼>을 (강의에서건 어디에서건) 얘기할 때마다 단테의 <신곡>도 덩달아 언급하게 되지만, '정보' 이상의 내용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강의'에 걸맞는 얘기를 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하지만, '언어장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여건상 그간에는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이번에 나온 해설서는 그런 의미에서 반갑다. 물론 영어권에서 나온 해설서들도 참조할 수 있겠지만, <신곡>을 영역본으로 읽는 건 또 만만하겠는가?(나는 러시아어본도 구하긴 했다.)  

지난 2월에는 단테의 <새로운 인생>(민음사)도 우리말 번역본을 얻은바 있으니 언제 짬을 내서 단테의 세계로 한번 잠수해볼 일이다(이 책은 이탈리어 역이 아니라, 단테 로세티의 영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T. S. 엘리엇에 의하면,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 그 사이에 제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괴테가 들으면 섭섭해 할 일이지만, 하여간에 사정들이 그러하다고도 하니 우리의 얄팍한 교양에 (헛)바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라도 단테를 좀 읽어보도록 하자(중2 때 단테의 <신곡>을 들고 다니던 한 친구 때문에 나도 덩달아 얄팍한 번역서 한 권을 들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번역이 제대로 읽혔을 리 없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해설에서 읽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뿐).  

 

 

 

 

두번째 책은, 역시나 우리의 교양과 관련된, 그리고 단테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첫손가락에 꼽았을 책인바,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문학동네)이다.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의 형이기도 이탈리아 출신의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는(우리의 경우 그런 형을 둔 영화감독으로 봉준호가 있다) 동생만큼 유명한 건 아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영문학 '연구자'의 한 사람이다(그에게 걸맞는 칭호는 '이론가'나 '비평가'가 아니라 '연구자'이다. 실제로 그는 스탠포드대학의 소설연구센터를 지휘하고 있는 연구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이미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로 우리에게 소개된바 있고 몇 년전에는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지만, 겸손하게도 고작 '연구자'인 탓인지 주변에서 생각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모레티는 중요하다(적어도 재미있다). 그러니 읽을 필요가 있다. 중요해서건, 재미있어서건.(모레티는 페터 지마만큼 이론 지향적이지만, 테리 이글턴만큼 재미있다.) 

모레티는 문학연구에 통계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등을 도입하는 걸로 유명한데, 기본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제한다면, 그의 프로젝트는 '(러시아)형식주의 + 다위니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의 형식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그는 텍스트사회학의 창시자 페터 지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지마가 문학사회학의 상관항으로서 '텍스트성'을 파고든다면, 모레티는 대범하게 그러한 형식이나 텍스트성의 진화에 대해 고찰하고 기록한다(거기서 중요한 건 진화의 '단위'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아예 <유럽소설의 지도 1800-1900> 같은 걸 만들어보기도 한다. 비록 재미있다 하더라도 문학연구의 '핵심'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는 그의 작업 스타일은 내가 보기엔 역사학 연구에서 인구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인구변동의 통계나 다룰 듯하지만, 인구학적 접근은 역사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걸 얘기해주는데(가령 인구학자 토드의 <유럽의 발견> 같은 책), 모레티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 문학사를 '문학의 도살장'으로 보는 그의 시각은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참신한 것인지!

지난 1987년에 처음 나온 <세상의 이치>는 모레티의 비교적 초기 저작이다(나는 Verso에서 나온 이 1판을 갖고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얼마전 개정판이 나왔다. 확인해 보니까 2000년에 'New Edition'이 나온 것).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이란 부제에 걸맞게 책은 '상징적 형식으로서 교양소설'이 근대사회사의 전개 속에서 갖는 의미맥락을 추적하고 재구성한다. 그런데, 결코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면, "모레티의 저작에는 페이지마다 순수한 지성이 살아숨쉰다." 읽어볼 도리밖에.

참고로, 러시아문학과 관련해서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1831)과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1840)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러시아문학 작품(곧 교양소설)이다. 주로 스탕달을 다루고 있는 장에서. 이 때문에, 나는 이전에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었었다. 이들과 더불어 거명되고 있는 유일한 러시아인은 미하일 바흐친이다. 한가지, 사실주의(리얼리즘)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달한 문학형식이라는 게 모레티의 대전제인데,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게 러시아문학이며, 모레티 자신이 그 점을 시인하고 있다. 한 대담에서 루카치가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로 꼽은 톨스토이와 당대 러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모레티는 이렇게 답한다. "톨스토이는 제게 골치아픈 적수죠. 제 주장과 어긋나는 작가거든요. 이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안과밖>, 제12호, 273쪽) 모레티는 솔직한 사람이다.

 

 

 

 

세번째 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신제국주의>(한울). 아마도 현대 지리학자 중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학자이자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이가 하비일 것이다(그의 책은 최소한 7권이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번에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나무)라는 묵직한 책이 나온바 있는데, 이번엔 2003년에 나온 그의 최신간이다. 역자는 하비의 책을 번역한바 있는 최병두 교수. 하비에 대해선 영국 옥스포드의 좌파(맑시스트) 지리학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책 몇 권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고 있다), 이번 저자 소개를 보니까 뉴욕시립대학의 인류학과 교수로 돼 있다. 지리학자에서 인류학자로 변신? 한편으론, 그가 지리학의 외연을 거의 인류학 수준으로 확장했다는 걸 떠올려볼 수 있다(이 경우는 문화인류학의 하위범주로서 '도시인류학'이 될 것이다). 한편, 지난번에 나온 책과 관련하여 갖는 바람. 또 다른 '맑시스트' 마샬 버만에 따르면, 모더니티의 또다른 수도는 파리 외에 페테르부르크와 뉴욕이 있다. 하비급의 학자가 나서서 이 '두 도시 이야기'마저 파리 이야기만큼 써주었으면 좋겠다. 근대의 세 도시, 혹은 근대의 세 가지 유형학에 대하여. 

                    

 

 

 

 

네번째 책은 프랑스쪽의 '행동하는 지성'들에 관한 것. 거물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실천이성>(동문선)이 불쑥 나왔고, 드레퓌스 사건을 촉발했던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하다>(책세상)가 책세상문고의 한권으로 선보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유익한 책은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자인, 2002)인바,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 부르디외의 신간은 동문선의 간판 번역자 김웅권의 작품인데, 그가 번역한 <파스칼적 명상>에 대한 평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기에 나로선 유보적이다. <순진함의 유혹> 같은 좋은 번역서도 있는 반면에, <구조주의의 역사2-4> 같은 어수룩한 번역서도 내놓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는 다른 분들이 먼저 읽고 판별해 주었으면 한다(책값이 싼 것도 아니고). 여하튼, 부르디외의 거의 모든 책들이 번역되었다. 해서, 부르디외식 사회학이 한국에서도 꽃필 수 있을까? 기대는 해보지만, 판돈을 걸지는 않겠다. 부르디외 '전공자'가 태연하게 조선일보에도 글을 쓰는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 사회이기에.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꼽는 시집, 조정권의 <떠도는 몸들>(창비). <산정묘지>(민음사, 1991), <신성한 숲>(문학과지성사, 1994) 이후에 10여년만에 나온 신작 시집인데(정말이다!), 그런 만큼 기대해봄 직한 시집(적어놓고 보니 시인은 출판사들도 떠돌고 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때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산정묘지1')라고 선언했던 '조로한' 시인의 '후일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헌 누더기'의 행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서평들을 보니 시집의 컨셉은 여행인 듯하다. 동아일보 서평에 따르면,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자취가 깃든 여행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저자 자신은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일상에 발목을 잡히는 모습은 예술가로서 저자의 고민을 공감하게 한다. '어디로 가도 지상의 오줌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스스로를 망명자로 자처한다'(국내 망명자)는 이 같은 시인의 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망명시인의 명단을 하나 더 늘여야 할 모양이다...

05. 05. 18.

 

 

 

 

P.S. 알고 보니까 연초에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새로운 장정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표지만 바뀌었을 뿐,  편제나 내용 자체는 그닥 달라진 것 같지 않다(이젠 칼라화보라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얼마전 <씨네21>의 창간 10주년도 맞고 해서 영화관련 글들을 제법 읽게 되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있다. 조만간 영화와 영화비평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되기를(이렇게 적어놓으면, '의무감'에서라도 몇 자 적게 되지 않을까? 이런 게 화행, 곧 'speech act'이다)...   

 

 

 

 

 

P.S.2. 부르디외 사회학의 한국적 적용과 관련하여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책은 <문화와 계급>(동문선, 2002)이다. 그 중 문화자본에 대한 장미혜 박사의 (실증적인)연구가 나로선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장박사는 짐작에 "소비양식에 미치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상대적 효과" 같은 주제의 학위논문을 썼는데,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더듬어보자면, '경제자본'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문화자본'이라는 게 있고, 이 두 변수(돈과 눈높이)에 따라 네 가지 사회적 계층이 분류될 수 있다(이 경우 사회계층이란 게 이분법적이지 않다). (1)돈도 많고 눈도 높은 경우, (2)돈은 많지만 눈은 없는 경우, (3)돈은 없는데, 눈만 높은 경우, (4)돈도 없고 눈도 없는, 속편한 경우. 거기서 가장 '문제적인' 계층은 (3)이다. 책 살 돈은 없으면서 즐겨 책타령을 늘어놓는 어떤 이도 분류하자면 거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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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2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런데 단테의 [신곡]이 300쪽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축약본인가?
 
 전출처 : 숨은아이 > 서울아트시네마 소식/2005 제9회 인권영화제

2005 제9회 인권영화제
9th Seoul Human Rights Film Festival

2005. 5. 20. fri. ~ 5. 26. thu.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005년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인권운동사랑방 주최로 ‘제9회 인권영화제’를 진행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 ' 을 주제로 한 2005 제9회 인권영화제는 개막작-신자유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두 만담가의 행보를 쫓은 영화 ‘예스맨’ 을 시작으로 7일간 총 32여편 영화를 소개합니다. 모든 상영작은 무료 관람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섹션
‘먼지, 사북을 묻다’로 인권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미영 감독이 네팔 현지에서 제작한 ‘사레가마 송’이 눈에 띈다. 짧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카트만투 근교의 농촌 지역, 바네빠 아이들이 처한 고된 노동과, 카스트 차별을 노래로 풀어낸 작품. 여성영상집단 ‘움’이 제작한 ‘이반검열’ 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폭력과 피해를 당한 청소녀들의 증언을 통해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소녀 동성애자 인권침해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또한 사립학교의 파행적 운영과 부당한 인권 침해를 맞서 자발적 행동을 조직하는 청소녀들의 건강한 움직임을 담은 ‘학교이야기’,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과 착취를 고발하며 이를 국제적으로 알려내는 운동에 앞장섰던 소녀 이크발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 ‘한 노예 소년의 죽음’ 등도 상영된다.

○국내 작품
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에서 발생했던 부정선거, 폭력 시위 진압 등의 사건을 파헤친 ‘돌 속에 갇힌 말’(나루),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다룬 ‘진실의 문 '(김희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그린 ‘유언 '(박세연) 등이 선보인다.

○해외 작품
소비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잉여사회’(에릭 간디니), 동북아 패권주의적 재건축을 꿈꾸는 일본의 야심을 고발하는 ‘일본평화헌법’, 미국 미디어 그룹 폭스사의 우파적 성향을 분석한 ‘안티폭스: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전쟁 '(로버트 그린월드) 등이 주목할 만하다.

※ 문의:
인권영화제 사무국 02-741-2407 http://www.sarangbang.or.kr/hrfilm/2005hrfilm
서울아트시네마 02-720-9782, 02-745-3316 www.cinematheque.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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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에 대하여-2



그래서 이렇게 유럽의 [서문]이나 [후기]와 미국의 [서문]이나 [후기]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모든 유럽의 인문학자들이 다 유럽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은 아니며 모든 미국의 인문학자들이 미국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이념형”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 그런 의문이 든다. 왜 대개의 유럽 학자들은 [서문]이나 [후기]를 거의 쓰지 않든가, 또는 쓴다 하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흔적이 담긴 내용은 거의 싣지 않는 걸까? 또 왜 미국 학자들은 대개 [서문]이나 [후기]에 즐겨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담는 것일까?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떠오르는데, 미국의 저명한 분석철학자 중에 콰인이라는 사람이 있다(아니, 사망한 지 꽤 됐으니까, 있었다). 그 사람의 대표적인 저서 중에 󰡔논리적 관점에서󰡕라는 책이 있다. 여러 논문을 모은 논문 모음집인데, 그 책에 수록된 논문들 하나하나는 영미 분석철학의 전개과정에 정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글들이다(실은 상당히 난해한 논문들이다. 이렇게 영향력이 큰 글들은 대개 난해한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이 재미있다. 이 양반, [서문]에서 왜 자기 책의 제목을 “논리적 관점에서”라고 정했는지 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양반이 논리학에 매우 조예가 깊은 사람이고 책에 수록된 논문들도 대개 논리학에 관한 배경 지식을 가정하고 있는 것들이다(형식 언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분석철학자들의 글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 뭔가 거창한 이론적 배경이 나올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사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할 때에는 ‘논리학자니까 역시 책의 제목도 그렇게 다는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양반 왈, 자기가 언젠가 저녁 때 친구하고 동부인해서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마침 해리 벨라폰테가 즉흥곡으로 노래를 하나 연주하더란다. 그런데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 “논리적 관점에서”였다고. 제목을 얻은 단서도 재미있거니와, 유럽의 학자였다면 그런 에피소드를 천연덕스럽게 책의 [서문]에서 썼을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유럽 학자들하고 미국의 학자들하고 이렇게 [서문]이나 [후기]에서 차이가 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도 있을 듯하다. 말하자면 유럽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를 따로 잘 쓰지 않고, 또 쓰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건, 그 나름대로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기 때문이 아닐까? 곧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것은 공적인 일인데, 거기에 자신의 신변과 관련된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언급하는 건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활동 자체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생각 말이다. 반대로 미국의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에 사생활에 관한 흔적들을 담는다면, 그건 책의 저술이나 출판이라는 활동이 공적인 활동이긴 하되, 동시에 개인적인 삶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가령 유럽의 철학자는 자신이 철학자로서(위대한 철학자든 사소한 철학자든 간에) 쓴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의 철학자는 철학교수로서 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건 물론 유럽 철학자들은 독창적인 철학자고, 미국의 철학자는 한낱 교수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 미국 학자들이 보기에는 칸트도 철학교수였고, 하이데거도 철학교수였고, 콰인도 그랬고 등등이었을 것 같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자’로 존재하기 전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는 치과 의사나 택시 운전수나 야채 장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인 것이다. 철학을 가르쳐서 밥벌어먹고 산다는 게 다를 뿐 ...


더 나아가 여기에는 책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담겨 있는 듯하다. 유럽 학자들이 보기에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겉표지의 제목부터 뒷표지의 책소개글에 이르기까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공적인 사물 자체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책이라는 것은, 그것이 출판되는 순간부터, 그 책을 저술한 저자 자신도 마음대로 어찌 할 수가 없는 어떤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니 책의 한 부분을 슬쩍 떼어내어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집어넣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반면 미국 학자들에게도 역시 책이라는 것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고 공적으로 중요한 것이긴 한데, 단 [서문]이나 [후기]는 좀 예외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서문]이나 [후기]는 책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치외법권이어서, 거기에서는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한, 책을 지배하고 있는 공적인 규칙과 무관한, 자신의 사생활이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셈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 (주절주절 떠들고 보니까 좀 우스운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좀 재미있는 느낌도 들어서 올려본다. 그런데 이렇게 페이퍼를 올리는 행위는 사적인 것일까 공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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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5-2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즐거운 서재질 하시네요^^

balmas 2005-05-20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예, 간만에 "즐거운 서재질" ... ^^;;

menwchen 2005-05-2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즐거움은 전염되는가 봅니다.. ^^

balmas 2005-05-20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드무비 2005-05-2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인 거 아닌가요?
사적이어야 재밌고요.^^

클리오 2005-05-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후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밌게 읽고 갑니다~ 페이퍼는 사적인 거지요? 그거에 대해 책임지고 논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하니까요...

숨은아이 2005-05-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이면서 공적이지요. ^^ 그런데 "역자 후기에 대한 단상-1"에서 한 여자 선배님이 지적하셨다는 거요, 제가 아는 번역가가 늘 하는 말이거든요. 역자 후기는 그 책에서 역자가 유일하게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한 역자의 관점과 해석을 독자에게 설득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런 공간을 누구나 다 하는 말-남편에게 고맙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등등-로 채우다니! 하면서요. 사실 전 그때까지 역자 후기란 공간을 그냥 형식적인 걸로 치부했는데,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또 발마스님 글 덕분에, 책의 성격에 따라 그 책의 출판 과정을 말랑말랑하게 보여주는 것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

숨은아이 2005-05-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글 두 편 퍼가요.

balmas 2005-05-2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ㅎㅎㅎ 그럴까요?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면 재밌죠.
마치 훔쳐보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죠. ^^;;
클리오님/ 글쎄요, 딱 부러지게 사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숨은아이님 말씀처럼 <사적이면서 공적>이라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죠.
숨은아이님/ ㅎㅎ 독자들에 따라 선호가 좀 다른 것 같더라구요. 어떤 독자들은
역자 후기나 저자 후기에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독자들은 아예 그런 거에 질색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ㅎㅎ 퍼가세요. ^^

stella.K 2005-05-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재를 한번 밖에 들어와 보질 못해 발마스님 글을 이제야 보는군요. 재밌습니다. 이 페이퍼는 약속대로 추천해야겠죠?^^

마냐 2005-05-2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알게모르게, 제가 미국적인 구석이 많군여. 생활인으로서의 직업의식 같은거..ㅋㅋㅋ 것참 재밌는 분석임다.

balmas 2005-05-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고마워요. 이제 보니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연세도 많으신데 ... ㅋㅋ
따우님도 고마워요. ^^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마냐님, ㅎㅎ 재미있으셨나요?
미국식이야 대세죠, 뭐. ^^

stella.K 2005-05-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있으면 발마스님을 잊게 될지도...사실은 저 메멘토거든요. ㅋㅋ.

balmas 2005-05-2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혹시 벌써 잊으신 건 아닌지 ...

stella.K 2005-05-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의 팔에 '잊지 말자 발마스!'이렇게 써놨다는...ㅋㅋ.

balmas 2005-05-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써놓은 김에 다른 글에도 추천해 주셔야죠~~
 

 

관개체성의 “존재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스피노자의 정치학, 또는 그것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자기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야말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현대의 민주주의 일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아포리아가 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또는 대중들의 자기 통치 역량의 부족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근본 요인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경고하듯이 국가 형태 자체의 도착을 낳을 수 있는 근본 요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곧 전제정치가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모로판, 61-63)하게 만들 수 있는 근본 요인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들의 역량이 어떤 특정한 정치체가 아니라 모든 정치체, 모든 국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한에서 이러한 도착의 위험은 모든 국가에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더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발리바르가 관개체성 개념에 입각하여 스피노자 존재론을 재구성한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반오웰」에서 들뢰즈를 따라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인간학적 테제 중 하나는 모든 개체들 안에는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은 단지 자연적인 개체, 그리고 개인들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국가 자체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바로 이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근원적인 반오웰의 철학자로 만드는 점이다. 왜냐하면 반오웰 식의 전체주의적 상상력에 고유한 가정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사고를 하고 동일한 욕망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요컨대 어떤 (초월적) 타자와 완전한 동일시/정체화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데 있지만,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이라는 원리는 이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로 표현된다. 

(1) 환원할 수 없는 개인들의 고유한 기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기질의 차이를 제거하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사고하고 동일한 것을 욕망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2)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지나치면서 “언어가 우중과 지식인들 양자에 의해 동시에 보존되기 때문에”, 언어에는 적어도 신학자들의 조작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단어들의 의미―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신학정치론} 7장 9절, 모로판, 296). 이는 “지식인들”과 “무지자들”이 서로 교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언어의 공통적 사용에 의해 단어들의 의미가 규정됨을 의미한다.”(이 책, 144-145쪽) 이처럼 언어의 공통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는 고립된 개인의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항상 한 개인의 사고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 내지는 교통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상관적인 윤리적 실천의 쟁점이 된다. 다시 말해 각자의 독특성이 줄어들수록, 다시 말해 각자가 상상적인 유사성에 따라 동일시/정체화될수록, 각각의 개인 사이에 합리적으로 교통될 수 있는 여지는 축소된다. 반대로 각각의 개인들의 독특성이 증대하고 개인들이 서로를 상상적으로 덜 동일시/정체화할수록, 합리적 교통 가능성은 더욱 증가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존재론적 핵심을 “고전적인 개인주의와 대립하는 개체성의 최소의 원리 또는 개체의 최대한의 압축 가능성의 원리”(이 책, 204쪽)라고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상적이지만 암시의 수준에 머물렀던 이 명제를 좀더 명시적이고 좀더 풍부한 이론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논문이다. 이 논문은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였던 질베르 시몽동의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é” 개념을 빌려와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인과관계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매우 풍부한 이 논문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1) 이 논문은 우선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관개체성의 개념, 곧 관계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스피노자는 대개 실체의 철학자, 더 나아가 유일실체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런데 전통적인 규정에 따라 실체를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신만이 실체, 그것도 유일한 실체가 되기 때문에, 다른 나머지 자연 실재들은 실재성을 박탈당하게 된다. 곧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 철학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우선 실체 개념의 애매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전통적인 실체 개념을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해 그대로 적용한 데서 나오는 결과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의 실체가 유일하다면, 이는 실체가 하나뿐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실체로 표현되는 자연 이외의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연은 내재적인 실존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며 초월적인 근거나 목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실체의 자립성을 매우 엄격하게 강조한다면(존재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인식의 측면에서도. “나는 실체를 자기 안에 있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으로 [...] 이해한다”({윤리학} 1부 정의 3)), 이는 실체 이외의 다른 실재들, 특히 유한 양태들의 실재성을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곧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처럼 다른 개체들과 독립해서 실존할 수 없으며,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실체만이 자립성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개체들의 실재성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개체들의 실존 형식, 곧 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원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발리바르가 세 가지 관념, 곧 개체성은 실재적인 실존 형식이고(반범신론), 개체는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반원자론), 그리고 “개체들의 구성과 활동은 원초적으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함축한다는 사실”(반기계론)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 하지만 이 논문에서 좀더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론을 “변조modulation”(시몽동의 어휘를 따르자면)의 관점에서, 또는 스피노자 자신의 어휘를 사용하면 “변용affectio”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사이의 외재적 관계가 불식될 수 있으며, 관계를 통한 개체들의 구성과 재생산이라는 의미가 좀더 엄밀하게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론을 변조나 변용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형적인 기계론이나 목적론과 다른 인과관계 도식을 제시해야 하는데, 발리바르는 󰡔윤리학󰡕 1부 정리 28에 의거하여 이런 도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도식은 우선 다수의 항들이 어떤 기원적인 항에서 파생되지 않고 항상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더 나아가 이 도식은 A의 인과작용 자체가 B의 인과작용에 의해 변용되고, 다시 B의 인과작용은 C에 의해 변용되고 하는 식으로 제시함으로써, 목적론의 은폐된 원리인 필연적인 경향이나 성향이라는 관점을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변용의 인과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개체란 변용시키는 한에서 변용되는 것들이고(왜냐하면 개체에게 활동한다는 것, 곧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으로서 작업한다는 것은 바로 다른 개체의 활동방식을 변용시키는 것이고, 이러한 변용작용 자체에서 또 다른 개체에 의해 변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용의 활동 자체, 곧 타자들과의 관계가 각각의 개체의 실존을 구성한다. 

  발리바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위의 개체와 상위의 개체 사이의 관계, 따라서 개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이 개체의 통일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변화시키는지, 또 이 개체는 자신보다 상위의 개체의 형성에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차 수준의 복잡성에 관해 적합한 인식을 얻을 때에만,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부터 “우주 전체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 소산적 자연이라는 관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발리바르는 두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 곧 “개체가 개체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개체는 자신의 부분들을 다른 개체들과 교환해야 한다”는 테제와, “개체들의 상호합치를 수단으로 한 다양성의 통합은 개체들 각자가 자신의 자율성(개체화) 및 독특성(개성화)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테제가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두 가지 테제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테제는 개체는 통일체, 더 나아가 동역학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통일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부분들을 다른 개체들과 교환함으로써만 개체로서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개체가 자율성을 얻고 하나의 개체로서 실존하게 되면, 개체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개체들과의 갈등, 적대관계를 겪게 된다. 왜냐하면 자율성 자체는 이미 독특성의 최소(곧 다른 개체들과의 구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들은 공통의 본성을 지닌 다른 개체들과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 및 독특성을 유지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결합체 또는 상위의 개체의 역량의 정도는 다양성의 통합의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에, 어떤 결합체가 자신의 하위 개체들의 자율성과 독특성을 더 잘 보존하면서 더 많은 다양한 개체들을 통합할 때, 그 결합체의 실존 역량은 증대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파악되면 소산적 자연은 더 이상 위계적 순서에 따라 인식되지 않고, 각각의 유형의 개체가 하위 수준으로 후퇴하면서 동시에 상위 수준으로 전진하는 복잡한 통합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관계는 내재적으로 인식된다.  

  (3)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이러한 관개체론적 해석은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해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먼저 이러한 해석은 개체를 기원이 아니라 개체화/개성화 과정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곧 관개체론의 관점에 따르면 개체는 타자들과의 관계 바깥에서 미리 구성되어 실존하는 원자와 같은 항이 아니라,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변화하는 실재인 것이다. 이처럼 개체 또는 개인을 관계의 결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갖는 독창성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비판은 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이라는 관점을 거부하고, 오히려 개인의 실존 및 권리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성립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1).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정치학의 진정한 과제는 계약의 타당한 절차를 형식화함으로써 주권의 정당성을 근거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다. 이는 푸코가 제안하듯이 권력 또는 정치를 분석하는 데서 법적 모델이 아니라 관계의 모델을 채택함을 의미한다2).   

  둘째, 관개체론의 관점은 역량 개념을 관계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다시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먼저 이는 개체를 모델로 하여 행위 및 행위 역량을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현대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대체로 스피노자가 역량의 철학자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주체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힘/능력potestas이라는 개념을 비판하고, 그 대신 필연적으로 실행될 수밖에 없는 힘/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존재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용어 해설” 참조).

  그런데 스피노자의 이러한 역량 개념은 그 자체만으로는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량 개념을 주체의 역량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긍정적인 힘으로 이해할 소지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역량은 다시 한번 주체가 지닌 일종의 소유물로, 따라서 주체에게 부여된 가치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힘으로 파악된다. 정치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관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관점이 대중들의 역량이 폭력으로 전도되는 것, 곧 대중들의 역량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위해 활용되는 것(다시 말하면 파시즘)을 하나의 문제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역량 개념이 주체의 역량으로, 주체의 소유물로 이해되면, 원칙적으로 역량은 주체의 자율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정치적인 역량(가령 노동자 계급 또는 다중)이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으면 부여받을수록, 그것의 도착 가능성은 점점 더 인식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파시즘과 같은 정치적 현상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세계화가 산출하는 구조적 폭력(심지어 초객관적-초주체적 폭력)을 하나의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량 개념을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역량은 항상 수동성과 능동성의 차이(또는 오히려 차이의 차이)로 나타나고, 수동성은 정의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들뢰즈), 곧 이러저러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량이 전유되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역량의 전도, 역량의 도착에 대한 비판과 퇴치의 노력은 정치의 가장 본원적인 목표 중 하나가 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반폭력의 정치 또는 시빌리테의 정치로 부르는 것은 역량에 대한 이러한 관계론적 관점을 요구하고, 또 역으로 이 후자는 반폭력의 정치를 정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부과한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


  지금까지 우리가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발리바르의 이 책은 스피노자의 정치학, 더 나아가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 매우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 데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귀중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종의 만능열쇠는 아니며, 발리바르가 세 번째 논문에서 지적하듯이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발리바르는 특히 “하나의 국가“장치”나 국가장치 전체 속에 조직되어 있는 지배(또는 소외)와 차별(또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모든 봉기가 함축하는 부정성의 측면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그리고 우리가 그를 뒤따를 때, 우리의 무능력)”(이 책 238쪽)을 지적하고 있다3). 사실 이러한 부정성은 “근대 정치의 보편성이 전제하는” 것인 만큼 이 점에 관한 스피노자의 무능력은 중요한 이론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정치에서 이러한 부정성이 항상 주체의 관념론과 결부되어 표상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피노자의 무능력은 그의 철학적 비타협성,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엄밀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사회적 관계, 국가의 형태의 전복을 꾀하는 모든 종류의 혁명들에 대해 커다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이러한 전복이나 혁명이 대중들의 공포라는 정념적인 요인에 기초를 두고 있고, 따라서 지배권력의 보유자들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지배 관계 자체는 그대로 남겨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의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주체를 전제하지 않은 가운데, 자기만족적인 해방의 주체의 가상에 굴복하지 않은 가운데 어떻게 정치적 부정성을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시빌리테의 정치는 어떻게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와 접합될 수 있는가? 이는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비껴가지 못할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흔치 않은 독서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번역에 관해 한 마디 간단히 해두고 싶다. 이미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옮긴이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에는 스피노자 전공자가 극히 드문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와 들뢰즈, 발리바르나 네그리 같은 현대의 주요 이론가들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신들의 이론적 원천을 얻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동안 비전공자들이 스피노자 철학을 소개하고 또 스피노자에 관한 현대의 중요한 연구 성과들을 번역하다보니까,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이런저런 이론적인 오해들이 생겨나고 스피노자의 용어들에 대한 부적절한 번역어들이 널리 사용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 책에서는 번역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 및 정치학의 용어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스피노자의 원전이 아닌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서로서는 다소 많은 분량의 용어 해설을 싣게 되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그릇된 번역어들을 교정하고 앞으로 이루어질 스피노자 원전 번역을 대비하려는 한 가지 자세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제시한 번역어나 그에 대한 해설은 말 그대로 하나의 제안일 뿐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런저런 주제들만이 아니라 그의 여러 용어들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며, 앞으로 더 적절한 번역어가 제시된다면 얼마든지 그 용어들을 수용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분들에게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우선 2004년 여름/가을 동안 이 책과 관련된 공부 모임에 참여해서 부지런히 관련 글들을 발제해주고, 발리바르 및 기타 이론가들에 관한 논의에도 열심히 참여해준 000, aaa, bbb, ccc, ☆☆☆,  ○○○ 선배, ◇◇◇ 선배, ♤♤♤, ♧♧♧, ♨♨♨, ☺☺☺ 등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혼자서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점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출판을 맡아주시고 이 책이 무사히 출간될 수 있도록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이제이북스 사장님에게는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고가 인쇄소에 넘어가기 직전까지 역자에게 계속 시달림을 당한 편집부 직원분들에게는 위로와 감사의 말을 함께 전하고 싶다. 그들의 꼼꼼한 눈과 섬세한 손길 덕택에 거친 원고가 제법 모양을 갖추게 된 것 같다.

  책을 오래 기다려주고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여러 독자분들 덕분에 부족한 능력이지만 번역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분들에게 이 책이 유익한 독서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05. 5. 17


역자


1) 이 문제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2005 참조.

2) Macherey 1988; Remaud 1997 참조.

3) 그 외에 「스피노자, 반오웰」의 한 각주에서는 “여성들의/여성들에 대한 공포”를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의 환유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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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liee 2005-05-1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을 잡고 데려가서 보여주는것"처럼 잘 정리된 역자해제인거 같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샘솟게도 하지만 게으름피고 있다가 진선생이 정리해주는거 보면되는데 공부는 뭐하러하나 라는 유혹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는 역시 양가적인 글인게야 ㅎㅎ 아무튼 정말 고생했다. 좋은 결과들이 생겨날거라 믿어.

philliee 2005-05-1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도 한방 날렸어 ㅋㅋ

balmas 2005-05-19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까마귀 2005-05-1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출판 b에서 보유한 도서 판권의 무단 사용을 강행하겠다는 이제이북스(출판사)와 진태원씨에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용하라는 허락을 내린다. 단지 명분만이 아닌 이익을 내고자하는 사업자의 입장에서 무모한 행태를 자행하는 ‘삼류깡패를 닮은 녀석들’에게 ‘법의 힘’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린다.

충분히 잘 풀 수도 있을 일에 물색 모르고 까불어서 문제가 복잡해지도록 만든 진태원씨나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책을 발간하고도 서점에서 전혀 유통할 수 없게 된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제이북스나 둘 다 자신들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용감하게 돌파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측은지심이 들어서 내린 결단은 아니다.

이러한 결단은 도서출판 b에서 올해 하반기에 출간 계획을 가지고 있는 [대중의 공포]의 역자인 최원씨의 뜻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애초에 [대중의 공포]는 최원씨의 제안으로 도서출판 b에서 번역 출간하기로 계획된 것이며 그러한 최원씨가 도서출판 b에 더는 문제가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이제이북스나 진태원씨가 마치 자신들의 무지한 용맹이 자신들을 위기에서 건진 것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나는 그들 둘에게 두 가지 당부를 한다. 물론 이 당부는 판권 사용의 허락 조건은 아니다. 최원씨의 깊고 넓은 배려에 감사하라. 그리고 최원씨의 번역본보다 더 뛰어난 번역본을 내라. -도서출판 b 대표

paniked-83 2005-05-1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 즐'~이란 말 밖에는 안 나오는 군요. 오랜만에 잘 웃었습니다. ㅋ

menwchen 2005-05-1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마귀님 정말 무례하시네요. 오랬만에 귀담에 들을 만한 학식과 식견을 가진 분들의 번역본이 나온다기에 출판사에 까지 감사하고픈 마음을 가진 독자로서 또한 열정만(!) 가진 젊은 연구자로서 실망을 금할 길 없습니다.

원저자와 그의 글을 애타게 기다리며 그의 사상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왜 이런 수모를 감수해야하는 건지, 왜 이토록 무언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례한 것인지, 왜 그들은 그토록 (자본주의적)시장의 도덕에 기대어 자신이 출판하고 있는 글들의 내용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삼가하지 않는지 심히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쪼록 자중 자애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balmas 2005-05-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까마귀님 또 오셨군요.
저는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별로 할 말도 없고 더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군요.
그러니 까마귀님도 이 문제를 용건으로 오시려거든
앞으로 서재 방문을 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네요.
^_________^

NA 2005-05-2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nwchen님.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처음 뵈면서 이렇게 무례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의 "자본주의"적인 이권을 실제로 포기하고 있는 분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조기조님입니다. 판권을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서 피땀 같은 돈을 지불하고 사신 분도 조기조님이시고, 그것을 지금 포기하고 계신 분도 조기조님이시죠. 사실 따지고 보면, 궁극적인 책임은 저작권 문제를 전혀 챙기지 않은 이제이 북스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추어 티를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조기조님이 자신의 판권, 자신의 노동을 타협하면서, 약간의 볼맨 소리를 낸 것에 "자중자애" 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게다가 소유권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현재의 문제에 한정해서는, 조기조님께 일방적인 비난을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조기조님의 어려운 결정 덕택에 법정까지 문제가 가는 안좋은 풍경 없이 문제가 잘 처리되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행스럽게 문제가 잘 처리되었으니만큼, 모두들 행복해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즐통되시길!

넝마주이 2005-05-2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이북스 편집장 서영심이라고 합니다. 그간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대중들의 공포"의 저작권 문제와 관련해 이곳에 저희 역자인 진태원 선생님을 비롯해 도서출판 b의 조기조 대표님, 최원 선생님 등의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도 저희는 한번도 여기에 댓글을 달지 않았습니다. 역자분의 개인 서재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출판사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올라온 조기조 대표님의 글과 최원 선생님의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이제이북스는 2003년 3월 말에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발리바르의 책을 정식 계약하면서, 한국어판에 덧붙인 "대중들의 공포"를 비롯한 세 편의 논문에 대해서도 계약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에이전시 쪽에서 원저자인 발리바르에게 물어 본 결과 세 편의 논문은 인세를 주지 않고 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저희는 그 이메일 상의 "허가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정치>의 정식 계약서 말미에도 "발리바르의 다른 글들과 같이 출판된다"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저희는 "아마추어"처럼 계약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이 일은 프랑스 에이전시 쪽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저희에게 사용허락을 먼저 한 뒤에, 그 논문이 실린 책을 도서출판 b와 계약했으니까요. 프랑스 에이전시 쪽에서 <대중들의 공포>를 도서출판 b와 계약할 때 저희에게 사용허가한 사실을 미리 말했어야 하는 거지요.

저희가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이 실린 <대중들의 공포>라는 책이 올해 도서출판 b와  계약됐다는 사실을 안 것은 편집 작업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습니다. 저희는 분명 사용 허락을 받았지만, 도서출판 b에 이 문제를 말씀 드렸습니다. 도서출판 b에서는 그렇다면, b에서 써라 쓰지마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이건 최종 통화에서 들은 말씀입니다. 몇 번의 통화에서 오간 얘기들은 생략하겠습니다.)  저희로서는 책의 완성도도 고려해야 했고, 오랫동안 공들여 작업하신 역자분의 노고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공부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두 번역본을 비교해 가며 읽는 것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계약의 문제에서 볼 때 저희가 포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도서출판 b보다 먼저 이 논문의 번역 수록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얻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로 국내 저작권법 전문가들에 두 차례 조언을 구한 결과, 저희가 이 논문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하는 답변도 들었습니다.

이 일은 원칙적으로 프랑스 에이전시와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도서출판 b에서 이제이북스에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조기조 대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일은 도서출판 b에도 이제이북스에도 상당히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운 일입니다. 저희가 연락을 드린 건, 나중에라도 별 잡음 없이, 서로 책을 내길 바라서였을 뿐입니다. 저희는 알아볼 만큼 알아보고 저희에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판단 아래, 그리고 그 논문 한 편을 저희 책에 포함시키는 일이 도서출판 b에서 나올 책의 판매에 지장이 없을 거라는 양심적 판단 아래(여러 출판계 선배들이 모두 지장 없다고, 오히려 홍보해 주니 좋은 일 아니냐라고 하더군요) 출간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에 올리신 조기조 대표님의 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조기조 대표님의 말씀처럼 논문을 "무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조기조 대표님께서 "법의 힘"을 빌리시더라도,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그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그 과정이 필경 소모전일 뿐이기 때문이지(민사 소송을 해 본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저희가 정당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조기조 대표님께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더라도 승인받으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었다면 저희는 "배 째라" 하는 식으로 책을 출간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는 "삼류깡패'  아니거든요. 솔직히, 천 부 팔까 말까 하는 책을 내면서, 소송 비용까지 부담해 가며 출간을 진행할 만큼, 이제이북스는 무모하게 출판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이 비록 개인서재이기는 하지만, 한 출판사를 "삼류깡패"니 하는 말들이 올라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이제이북스의 무응답이 조기조 대표님의 글로 오도된 상황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입니다. 저희는 "원만하게" 출판하지는 못했지만, "정당하게" 출판했음을 말씀드립니다.

 


balmas 2005-05-2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제 관련 당사자 분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으니까 좀 공평해진 것 같네요.
저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발언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분들 모두 한 마디씩 하셨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 서재에서 더 이상 이 문제로 댓글을 달거나 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입니다. 제 서재에 달린 불쾌한 댓글들 때문에 신경쓰고 싶지는 않군요.
이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시든 어떻게 하시든 그건 이제 출판사 분들이
알아서 하실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로 댓글은 달아주지 마세요.

NA 2005-05-2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문제는 프랑스쪽에 있었군요. 역시 내부의 모순을 국경으로 투사 함으로써 해결하는 것만한 묘수는 없지요. 어쨌든 공은 프랑스쪽으로 넘어갔으니 우리 국내인들은 모두 헤벌쭉 행복해야 여전히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비난하는 것 그만두고 말이죠. 이제이북스 편집장님 말씀대로라면, 국내인 가운데 아무에게도 잘못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는데 서로 얼굴 찌푸릴 이유가 없지요. 이제이북스 편집장님께서 좀 미리, 처음부터 자세한 상황을 정리해서 알려주셨으면 더 쉽게 풀릴 수 있었을 것 같군요. 다 이러면서 배우는 거겠지요. 진선배께서 답글을 달지 말라고 했는데, (아둔한 프랑스 에이전시는 빼고) 모두 행복하자는 말을 쓰는 것은 괜찮을 듯 싶어서 씁니다. 괜찮죠?^^ 마지막으로 이제이북스가 일을 "아마추어"적으로 했었다고 말한 것에 관해서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이제 정말 합죽이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