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개체성의 “존재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스피노자의 정치학, 또는 그것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자기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야말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현대의 민주주의 일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아포리아가 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또는 대중들의 자기 통치 역량의 부족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근본 요인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경고하듯이 국가 형태 자체의 도착을 낳을 수 있는 근본 요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곧 전제정치가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모로판, 61-63)하게 만들 수 있는 근본 요인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들의 역량이 어떤 특정한 정치체가 아니라 모든 정치체, 모든 국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한에서 이러한 도착의 위험은 모든 국가에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더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발리바르가 관개체성 개념에 입각하여 스피노자 존재론을 재구성한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반오웰」에서 들뢰즈를 따라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인간학적 테제 중 하나는 모든 개체들 안에는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은 단지 자연적인 개체, 그리고 개인들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국가 자체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바로 이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근원적인 반오웰의 철학자로 만드는 점이다. 왜냐하면 반오웰 식의 전체주의적 상상력에 고유한 가정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사고를 하고 동일한 욕망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요컨대 어떤 (초월적) 타자와 완전한 동일시/정체화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데 있지만,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이라는 원리는 이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로 표현된다.
(1) 환원할 수 없는 개인들의 고유한 기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기질의 차이를 제거하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사고하고 동일한 것을 욕망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2)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지나치면서 “언어가 우중과 지식인들 양자에 의해 동시에 보존되기 때문에”, 언어에는 적어도 신학자들의 조작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단어들의 의미―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신학정치론} 7장 9절, 모로판, 296). 이는 “지식인들”과 “무지자들”이 서로 교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언어의 공통적 사용에 의해 단어들의 의미가 규정됨을 의미한다.”(이 책, 144-145쪽) 이처럼 언어의 공통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는 고립된 개인의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항상 한 개인의 사고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 내지는 교통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상관적인 윤리적 실천의 쟁점이 된다. 다시 말해 각자의 독특성이 줄어들수록, 다시 말해 각자가 상상적인 유사성에 따라 동일시/정체화될수록, 각각의 개인 사이에 합리적으로 교통될 수 있는 여지는 축소된다. 반대로 각각의 개인들의 독특성이 증대하고 개인들이 서로를 상상적으로 덜 동일시/정체화할수록, 합리적 교통 가능성은 더욱 증가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존재론적 핵심을 “고전적인 개인주의와 대립하는 개체성의 최소의 원리 또는 개체의 최대한의 압축 가능성의 원리”(이 책, 204쪽)라고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상적이지만 암시의 수준에 머물렀던 이 명제를 좀더 명시적이고 좀더 풍부한 이론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논문이다. 이 논문은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였던 질베르 시몽동의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é” 개념을 빌려와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인과관계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매우 풍부한 이 논문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1) 이 논문은 우선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관개체성의 개념, 곧 관계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스피노자는 대개 실체의 철학자, 더 나아가 유일실체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런데 전통적인 규정에 따라 실체를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신만이 실체, 그것도 유일한 실체가 되기 때문에, 다른 나머지 자연 실재들은 실재성을 박탈당하게 된다. 곧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 철학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우선 실체 개념의 애매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전통적인 실체 개념을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해 그대로 적용한 데서 나오는 결과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의 실체가 유일하다면, 이는 실체가 하나뿐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실체로 표현되는 자연 이외의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연은 내재적인 실존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며 초월적인 근거나 목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실체의 자립성을 매우 엄격하게 강조한다면(존재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인식의 측면에서도. “나는 실체를 자기 안에 있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으로 [...] 이해한다”({윤리학} 1부 정의 3)), 이는 실체 이외의 다른 실재들, 특히 유한 양태들의 실재성을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곧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처럼 다른 개체들과 독립해서 실존할 수 없으며,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실체만이 자립성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개체들의 실재성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개체들의 실존 형식, 곧 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원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발리바르가 세 가지 관념, 곧 개체성은 실재적인 실존 형식이고(반범신론), 개체는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반원자론), 그리고 “개체들의 구성과 활동은 원초적으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함축한다는 사실”(반기계론)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 하지만 이 논문에서 좀더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론을 “변조modulation”(시몽동의 어휘를 따르자면)의 관점에서, 또는 스피노자 자신의 어휘를 사용하면 “변용affectio”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사이의 외재적 관계가 불식될 수 있으며, 관계를 통한 개체들의 구성과 재생산이라는 의미가 좀더 엄밀하게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론을 변조나 변용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형적인 기계론이나 목적론과 다른 인과관계 도식을 제시해야 하는데, 발리바르는 윤리학 1부 정리 28에 의거하여 이런 도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도식은 우선 다수의 항들이 어떤 기원적인 항에서 파생되지 않고 항상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더 나아가 이 도식은 A의 인과작용 자체가 B의 인과작용에 의해 변용되고, 다시 B의 인과작용은 C에 의해 변용되고 하는 식으로 제시함으로써, 목적론의 은폐된 원리인 필연적인 경향이나 성향이라는 관점을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변용의 인과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개체란 변용시키는 한에서 변용되는 것들이고(왜냐하면 개체에게 활동한다는 것, 곧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으로서 작업한다는 것은 바로 다른 개체의 활동방식을 변용시키는 것이고, 이러한 변용작용 자체에서 또 다른 개체에 의해 변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용의 활동 자체, 곧 타자들과의 관계가 각각의 개체의 실존을 구성한다.
발리바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위의 개체와 상위의 개체 사이의 관계, 따라서 개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이 개체의 통일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변화시키는지, 또 이 개체는 자신보다 상위의 개체의 형성에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차 수준의 복잡성에 관해 적합한 인식을 얻을 때에만,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부터 “우주 전체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 소산적 자연이라는 관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발리바르는 두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 곧 “개체가 개체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개체는 자신의 부분들을 다른 개체들과 교환해야 한다”는 테제와, “개체들의 상호합치를 수단으로 한 다양성의 통합은 개체들 각자가 자신의 자율성(개체화) 및 독특성(개성화)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테제가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두 가지 테제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테제는 개체는 통일체, 더 나아가 동역학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통일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부분들을 다른 개체들과 교환함으로써만 개체로서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개체가 자율성을 얻고 하나의 개체로서 실존하게 되면, 개체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개체들과의 갈등, 적대관계를 겪게 된다. 왜냐하면 자율성 자체는 이미 독특성의 최소(곧 다른 개체들과의 구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들은 공통의 본성을 지닌 다른 개체들과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 및 독특성을 유지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결합체 또는 상위의 개체의 역량의 정도는 다양성의 통합의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에, 어떤 결합체가 자신의 하위 개체들의 자율성과 독특성을 더 잘 보존하면서 더 많은 다양한 개체들을 통합할 때, 그 결합체의 실존 역량은 증대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파악되면 소산적 자연은 더 이상 위계적 순서에 따라 인식되지 않고, 각각의 유형의 개체가 하위 수준으로 후퇴하면서 동시에 상위 수준으로 전진하는 복잡한 통합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관계는 내재적으로 인식된다.
(3)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이러한 관개체론적 해석은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해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먼저 이러한 해석은 개체를 기원이 아니라 개체화/개성화 과정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곧 관개체론의 관점에 따르면 개체는 타자들과의 관계 바깥에서 미리 구성되어 실존하는 원자와 같은 항이 아니라,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변화하는 실재인 것이다. 이처럼 개체 또는 개인을 관계의 결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갖는 독창성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비판은 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이라는 관점을 거부하고, 오히려 개인의 실존 및 권리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성립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1).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정치학의 진정한 과제는 계약의 타당한 절차를 형식화함으로써 주권의 정당성을 근거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다. 이는 푸코가 제안하듯이 권력 또는 정치를 분석하는 데서 법적 모델이 아니라 관계의 모델을 채택함을 의미한다2).
둘째, 관개체론의 관점은 역량 개념을 관계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다시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먼저 이는 개체를 모델로 하여 행위 및 행위 역량을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현대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대체로 스피노자가 역량의 철학자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주체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힘/능력potestas이라는 개념을 비판하고, 그 대신 필연적으로 실행될 수밖에 없는 힘/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존재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용어 해설” 참조).
그런데 스피노자의 이러한 역량 개념은 그 자체만으로는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량 개념을 주체의 역량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긍정적인 힘으로 이해할 소지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역량은 다시 한번 주체가 지닌 일종의 소유물로, 따라서 주체에게 부여된 가치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힘으로 파악된다. 정치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관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관점이 대중들의 역량이 폭력으로 전도되는 것, 곧 대중들의 역량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위해 활용되는 것(다시 말하면 파시즘)을 하나의 문제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역량 개념이 주체의 역량으로, 주체의 소유물로 이해되면, 원칙적으로 역량은 주체의 자율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정치적인 역량(가령 노동자 계급 또는 다중)이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으면 부여받을수록, 그것의 도착 가능성은 점점 더 인식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파시즘과 같은 정치적 현상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세계화가 산출하는 구조적 폭력(심지어 초객관적-초주체적 폭력)을 하나의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량 개념을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역량은 항상 수동성과 능동성의 차이(또는 오히려 차이의 차이)로 나타나고, 수동성은 정의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들뢰즈), 곧 이러저러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량이 전유되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역량의 전도, 역량의 도착에 대한 비판과 퇴치의 노력은 정치의 가장 본원적인 목표 중 하나가 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반폭력의 정치 또는 시빌리테의 정치로 부르는 것은 역량에 대한 이러한 관계론적 관점을 요구하고, 또 역으로 이 후자는 반폭력의 정치를 정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부과한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
지금까지 우리가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발리바르의 이 책은 스피노자의 정치학, 더 나아가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 매우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 데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귀중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종의 만능열쇠는 아니며, 발리바르가 세 번째 논문에서 지적하듯이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발리바르는 특히 “하나의 국가“장치”나 국가장치 전체 속에 조직되어 있는 지배(또는 소외)와 차별(또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모든 봉기가 함축하는 부정성의 측면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그리고 우리가 그를 뒤따를 때, 우리의 무능력)”(이 책 238쪽)을 지적하고 있다3). 사실 이러한 부정성은 “근대 정치의 보편성이 전제하는” 것인 만큼 이 점에 관한 스피노자의 무능력은 중요한 이론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정치에서 이러한 부정성이 항상 주체의 관념론과 결부되어 표상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피노자의 무능력은 그의 철학적 비타협성,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엄밀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사회적 관계, 국가의 형태의 전복을 꾀하는 모든 종류의 혁명들에 대해 커다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이러한 전복이나 혁명이 대중들의 공포라는 정념적인 요인에 기초를 두고 있고, 따라서 지배권력의 보유자들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지배 관계 자체는 그대로 남겨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의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주체를 전제하지 않은 가운데, 자기만족적인 해방의 주체의 가상에 굴복하지 않은 가운데 어떻게 정치적 부정성을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시빌리테의 정치는 어떻게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와 접합될 수 있는가? 이는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비껴가지 못할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흔치 않은 독서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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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관해 한 마디 간단히 해두고 싶다. 이미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옮긴이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에는 스피노자 전공자가 극히 드문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와 들뢰즈, 발리바르나 네그리 같은 현대의 주요 이론가들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신들의 이론적 원천을 얻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동안 비전공자들이 스피노자 철학을 소개하고 또 스피노자에 관한 현대의 중요한 연구 성과들을 번역하다보니까,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이런저런 이론적인 오해들이 생겨나고 스피노자의 용어들에 대한 부적절한 번역어들이 널리 사용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 책에서는 번역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 및 정치학의 용어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스피노자의 원전이 아닌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서로서는 다소 많은 분량의 용어 해설을 싣게 되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그릇된 번역어들을 교정하고 앞으로 이루어질 스피노자 원전 번역을 대비하려는 한 가지 자세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제시한 번역어나 그에 대한 해설은 말 그대로 하나의 제안일 뿐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런저런 주제들만이 아니라 그의 여러 용어들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며, 앞으로 더 적절한 번역어가 제시된다면 얼마든지 그 용어들을 수용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분들에게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우선 2004년 여름/가을 동안 이 책과 관련된 공부 모임에 참여해서 부지런히 관련 글들을 발제해주고, 발리바르 및 기타 이론가들에 관한 논의에도 열심히 참여해준 000, aaa, bbb, ccc, ☆☆☆, ○○○ 선배, ◇◇◇ 선배, ♤♤♤, ♧♧♧, ♨♨♨, ☺☺☺ 등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혼자서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점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출판을 맡아주시고 이 책이 무사히 출간될 수 있도록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이제이북스 사장님에게는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고가 인쇄소에 넘어가기 직전까지 역자에게 계속 시달림을 당한 편집부 직원분들에게는 위로와 감사의 말을 함께 전하고 싶다. 그들의 꼼꼼한 눈과 섬세한 손길 덕택에 거친 원고가 제법 모양을 갖추게 된 것 같다.
책을 오래 기다려주고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여러 독자분들 덕분에 부족한 능력이지만 번역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분들에게 이 책이 유익한 독서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05. 5. 17
역자
1) 이 문제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2005 참조.
2) Macherey 1988; Remaud 1997 참조.
3) 그 외에 「스피노자, 반오웰」의 한 각주에서는 “여성들의/여성들에 대한 공포”를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의 환유로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