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향한 한국의 ‘오만과 편견’
교수논평

2006년 05월 27일   고명철 광운대 이메일 보내기

지난 5월 20일 한낮, 서울의 대학로에서는 한 집회가 열렸다.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 노동자, 여성들이 모여 베트남 여성을 국제결혼이라는 미명 아래 상품화하는 반인권적 실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우리 정부와 사회를 향해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 집회에 참석한 한 베트남 여성의 격앙된 육성이 이명(耳鳴)으로 남아 있다:

“한국인 여러분! 만일 일본이나 미국 구석구석에 ‘한국 처녀랑 결혼하세요. 장애인, 재혼, 노총각…’ 같은 광고가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사람은 사고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상품화하지 마세요. 국제결혼 중계업체들은 베트남 여성들을 상품처럼 묘사하며 베트남의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아내가 집안 일을 시키거나 성적 욕구만 충족시키는 도구인가요? 우리는 팔려온 노예가 아니랍니다. 더 이상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지 마세요.”


국제결혼 중계업체들이 베트남 여성을 ‘성의 상품화’하고 심지어 ‘성의 노예화’하고 있다는 문제를 우리는 그동안 두루뭉실히 지나쳐왔다. 도심의 외곽 지역이나 시골에서 흔히 목도하게 되는, 국제결혼 중계업체들의 무분별한 상식 이하의 반인권적 상업 문구를 그저 또다른 상품 광고의 하나로만 지나쳐왔다. 자본주의의 숱한 상품이 사고팔리는 시장의 한 풍경으로만 심드렁히 지나쳐왔다. 무서운 일이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시장 만능주의에 붙잡혀 있어, ‘돈’이면 시장에서 무엇이든지 거래할 수 있다는, ‘돈’을 향한 숭배를 넘어, ‘돈’의 노예화를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 게다가 ‘돈’의 권력화가 풍기는 마력에 합리적 이성이 마비돼 있다.


사실, 이번 집회의 발단은 ‘베트남 처녀들, 희망의 땅 코리아로’라는 2006년 4월 21일자 호치민발 ‘조선일보’의 기사로 촉발된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이른바 ‘4 · 21 조선일보 사태’로 규정하면서 ‘조선일보’의 기사가 베트남 여성들뿐만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 모두에게 심한 굴욕감을 안겨다준 데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 기사는 국제결혼 중계업체들의 베트남 여성에 대해 갖는 배타적 시선을 드러내고 있는바, 아무리 사실 위주의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기사의 밑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베트남 여성에 대한 ‘오만과 편견’을 간과할 수 없다.

그 기사는 베트남 여성을 베트남의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고자 코리아 드림에 매달리는, 속물화된 여성으로 읽히기를 은연중 유도한다. 베트남 여성에 대한 ‘조선일보’의 인권적 시각은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이러한 국제결혼 중계업체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시각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보여지고 있는 것은 베트남 여성을 상대로 한 국제결혼 중계업체들의 상행위의 선정적 풍경일 뿐이다. 과연, ‘조선일보’는 이 기사를 버젓이 게재함으로써 어떠한 보도 효과를 노렸던 것일까. 아직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결혼 생활에 실패한 한국 남자들에게 실망하지 말고 국제결혼 중계업체의 도움을 받아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베트남 여성과 손쉽게 결혼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베트남에서 국제결혼 중계업체들의 활약상(?)을 고취하기 위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코리아 드림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어떻게 보면, 이번 사건은 ‘조선일보’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반성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우선, ‘돈’이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천박한 인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뼈저린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아시아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겉으로 볼 때, 베트남 여성에 대한 국제결혼 중계업체의 반인권적 작태에 대한 각성을 한국 정부에게 직접적으로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듯, 경제적 약자라고 판단되는 아시아의 존재를 깔보는, 한국의 ‘오만과 편견’을 향한 아시아의 준엄한 비판이 놓여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아시아의 존재와 가치가 중요하게 인식되는 시기다. 베트남만 하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세계 초강국인 미국과의 전쟁에서 베트남은 승리한 저력을 갖고 있다. 비록 우리보다 경제적 약자의 입장에 있지만, 베트남은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우리가 존중해야 할 아시아의 소중한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해서 안 된다.


이번 ‘조선일보’의 보도 파문을 계기로, 우리는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를 향해 좀더 성숙한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아시아는 우리와 함께 아시아의 가치를 공유해야 할 이웃이자 친구다. 여기서 베트남어의 ‘떰 로옴’, 즉 ‘마음가짐’의 참뜻을 되새겨보면 어떨까.

“뭐 별것 아냐. 친구를 만나면, 먼저 어떻게 하면 이 친구와 즐겁게 지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가짐, 함께 지낼 때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헤어질 때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뭐 그런 마음가짐…….”(방현석의 단편소설 ‘존재의 형식’ 중에서)

고명철/광운대·문학비평


©2006 Kyosu.net
Updated: 2006-05-2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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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y avait, du temps de grand-maman,
Des fleurs qui poussaient dans son jardin.
Le temps a passé. Seules restent les pensées
Et dans tes mains ne reste plus rien.

Qui a tué grand maman ?
Est-ce le temps ou les hommes
Qui n'ont plus le temps de passer le temps ?
La la la...

Il y avait, du temps de grand-maman,
Du silence à écouter,
Des branches sur des arbres, des feuilles sur des arbres,
Des oiseaux sur les feuilles et qui chantaient.

Qui a tué grand maman ?
Est-ce le temps ou les hommes
Qui n'ont plus le temps de passer le temps ?
La la la...

Le bulldozer a tué grand-maman
Et changé ses fleurs en marteaux-piqueurs.
Les oiseaux, pour chanter, ne trouvent que des chantiers.
Est-ce pour cela que l'on vous pleure ?

Qui a tué grand maman ?
Est-ce le temps ou les hommes
Qui n'ont plus le temps de passer le temps ?
La la la...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80년대 5월에 부르던 이 운동가요는
미셸 뽈나레프가 부른 샹송의 번안이지요.

------------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우리 할머니가 살던 시절이 있었다네.
정원에는 꽃들이 피고 있던 시절...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만 남았네.
그리고 너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네.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시대가 죽인건가, 인간이 죽인건가?
더 이상 흘려보낼 시간을
갖지 못한 시대와 인간들. 라- 라- 라-

우리 할머니가 살던 시절이 있었다네.
들어보아야 할 침묵의 시대가 있었다네.
나무 위에 가지들이 있고, 가지 위에는 잎새들,
잎새들 위에는 새들이... 그리고 새들은
노래하고 있었다네.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시대가 죽인건가, 인간이 죽인건가?
더 이상 흘려보낼 시간을
갖지 못한 시대와 인간들. 라- 라- 라-

불도저가 할머니를 밀어버렸다네.
그리고 꽃들은 망치를 든 노동자로 변했다네.
새들이 노래할 곳은 작업장밖에 없었다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울고 있는가?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시대가 죽인건가, 인간이 죽인건가?
더 이상 흘려보낼 시간을
갖지 못한 시대와 인간들. 라- 라-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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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Polnareff



미셀 폴라레프는 대표적인 프렌치 팝 가수로 삶의 꿈과
희망을 소재로 한 노래를 불러 팝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44년 파리에서 태어나 아버지인 유명한 작곡가 레오 폴의
영향을 받으며 5세부터 정식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군복무 후 한동안 보헤미안이 되어 방랑 생활을 하다가
'66년에 우연히 친구의 도움으로 내놓은 싱글들이 잇달아
히트하면서 인기가수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지만 인기에
아랑곳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노래와 독특한 패션으로
표현하면서 음악 생활을 해 나갔다.

그의 음성은 남성임에도 고운 미성에 노래 또한 아름답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표곡 "Qui A Tue Grand'
Maman"(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은 몇 해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피아노 삽입곡으로 익숙해졌다.

Love Me, Please Love Me는 1966년 첫 싱글 후 발매된
미쉘의 대표곡 중 하나. 오케스트레이션에 치중하던 전통
샹송과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피아노 연주와 함께
현악의 첨가는 곡의 애절함을 더욱 증가시키고 가성을
이용한 미쉘의 특이한 창법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나타나는 곡이다.




 

오월의 노래는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을 주제로 한 민중가요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현재 그리 많이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을 현재 진행형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노래가 프랑스 샹송을 원곡으로 하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월의 노래'는 Michel Polnareff라는 가수가 부른 "Qui a tue grand maman"이라는

노래가 원곡이다.

노래 제목을 한글로 옮기면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가 된다.

지금 배경 노래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그것이다.

 

원곡 또한 그리 범상치 않은 제목과 내용을 담고 있다.

원곡의 주인공인 할머니는 프랑스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이다.

Lucien Morrisse는 재개발 지역에 속한 자신의 정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

결국 희생을 당하게 된다.

1971년 그녀를 추모하며 만들어진 곡이 바로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라는 곡이다.

피아니스트인 이루마씨가 "When The Love Falls"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옮기기도 했다.

 

원곡은 매우 서정적인데 비해 번안곡인 '오월의 노래'는 행진곡풍으로 리듬이 많이 바뀌어 있다. 또한 많은 노래패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연주되었다. 영화 속에도 가끔 인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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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출처: 산하를 찾아서  http://blog.daum.net/philsailer/828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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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5-28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이 다 가기 전에 함께 들어봅시다 ...

조선인 2006-05-2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몰랐어요. @.@ 추천하고 퍼갑니다.

Koni 2006-05-2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느 카페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와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죠.
그때 '오월의 노래'가 번안곡이란 걸 알았어요.
샹송이라고 라디오에서도 종종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원곡도 가사는 의외로 과격한데...^^)

balmas 2006-05-2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추천 감사. ^^;

냐오님/ 저도 첨 알았어요. ^^; 배경이 된 사건이 사건인 만큼 그렇겠죠.

그리고 퍼 가신 분들 참고하세요. 번역 가사 중 세번째 줄 번역을 약간 고쳤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상만 남았네."

===>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만 남았네."

 

사회화와노동
2006.05.26 |312호

최저임금투쟁, 임금 인상 요구를 넘어 저임금-불안정노동 철폐투쟁으로
2006년 최저임금투쟁 어떻게 할 것인가?


관성화 되고 있는 최저임금투쟁의 질적 변화를 위해, 올해 최저임금투쟁이 구체적으로 목적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몇 가지 정리해보자. 첫째, 최저임금투쟁은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이 노동자 내부의 분절화와 '바닥을 향한 경쟁'을 극복하고, 최저임금을 매개로 연대를 활성화하여 노동자운동의 주체로 성장하는 주요한 경로와 계기가 되어야 한다. 둘째, 최저임금투쟁은 최저임금의 문제를 직접적인 적용 대상인 저임금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의 문제임을 부각시키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연대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업장 내부로만 집중되었던 노동자운동의 역량을 의식적으로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셋째, 최저임금투쟁은 투쟁의 요구를 임금인상폭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의 중단과 민중생존권의 사회적-국가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투쟁으로 전선을 끊임없이 확대해야 한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저임금을 확대재생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노동자의 비정규직화와 여성노동의 불안정? ??의제로 만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최저임금투쟁의 핵심대오 역할을 해온 여성연맹 소속 도시철도 청소용역노동자들이 최근 도시철도공사의 구조조정 계획에 맞서 ‘전원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연일 투쟁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번 투쟁은 도시철도공사가 청소용역업체들의 3년 계약기간이 만료됨을 악용해 경비 절감을 목적으로 인력 감축과 파트타임 전환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고, 노동자의 저임금을 구조화하는 다중적 착취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이 투쟁은 최저임금투쟁이 투쟁의제를 다양화하고 전선을 확장하는 데 유의미한 정세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올해 최저임금투쟁은 그동안 최저임금제도와 최저임금위원회 협상구조에 의존해왔던 기존의 관성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간접고용의 저임금 구조, 여성 직종/직무 분리의 문제 등에 대해 적극 폭로하면서 이 투쟁에 적극 연대할 필요가 있다.


5/27(토)~28(일) 평택 농활 및 솔부엉이 도서관 개관식

평택 평화 농활

이번 농활에서는 평택 대추리 평화마을을 재건하는 활동을 합니다.

*일시 : 5월 27일(토)~28일(일)
*장소 : 평택 대추리 평화마을 일대

대추리 솔부엉이 도서관 재개관식

*일시 : 5월 28일(일) 늦은 3시
*장소 : 평택 대추리 평화마을 솔부엉이 도서관 앞마당

[자세히]




공무원노조탄압 백서

'공무원·교수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서 진상조사한 내용을 백서로 만든 것입니다.


사회진보연대
http://www.pssp.org | pssp@jinbo.net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02-778-4001~2 | FAX: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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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담아갑니다- ^^ 고맙습니다.

balmas 2006-05-28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셈~ ^^
 

 

“다시 문혁이 필요한 시점”

문혁을 둘러싼 중국 지식인 논쟁2- ‘신좌파’ 쾅신넨 칭화대 교수 인터뷰…“종교개혁 같은 자발적 사상해방운동 없었다면 소련처럼 해체됐을 수도”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쾅신녠 칭화대 중문과 교수는 이른바 ‘신좌파’로 불린다. 1963년 후난성에서 태어난 그는 우한대학교 중문과를 거쳐 베이징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학자로, 지난 1999년부터 명문 칭화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쾅 교수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문예부흥의 시작이었듯, 문화대혁명은 중국에서 종교개혁의 역할을 했다”며 “자발적인 사상해방 운동이라는 점에서 6·4 톈안먼 사태는 또 다른 문혁”이라고 말했다.

수단은 나빴지만 목적은 좋았다

문혁의 원인은 뭔가.

=마오쩌둥은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면서 몇 가지 문제를 간파했다. 소련은 흐루시쵸프 시대에 수정주의로 돌아섰고, 마오는 중국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걱정했다. 국내적 요인으로는 마오와 류샤오치 사이에 발생한 의견 대립을 들 수 있다. 당시 류샤오치는 신민주주의 질서를 공고화하고 싶어했으나, 마오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 (사진/박현숙 기자)

두 사람 사이의 의견 대립은 소련의 변화와 함께 마오에게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져왔다. 개인적으로 문혁은 ‘중국의 종교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종교개혁이 문예부흥의 시작이었고 현재 유럽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시초가 됐던 것처럼, 문혁도 중국에서는 그런 종교개혁의 역할을 했다. 당시 유럽의 종교개혁은 종교전쟁을 불러왔는데, 문혁도 중국 내부의 전면적인 내전을 초래했다.

마오가 문혁을 통해 목적을 이뤘다고 보나.

=문혁의 효과는 목적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하지만 마오는 부분적인 목표를 이뤘다. 바로 사상해방이다. 비록 문혁 이후 시장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개방 사상, 즉 우파적인 사상해방을 가져왔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사상해방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1989년 6·4 톈안먼 사태도 실은 또 다른 문혁이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사상해방 운동이었으며, 운동의 방식 역시 자발적이고 대중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마오가 문혁을 일으킨 목적을 권력투쟁으로 보기도 한다.

=권력만을 위해 문혁을 일으켰다면 군중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군중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기 때문에 참여했다. 지난해 류샤오치의 아들 류위안은 <류샤오치의 신중국>이라는 책 서문에서 마오와 자신의 부친이 꿈꾸던 이상은 현재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인민들이 다시 피억업자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또 문혁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당시 마오의 수단은 나빴지만 본래 목적은 좋은 것이었다고 했는데 나 역시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 마오의 실수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 인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는 폭력이나 조반(造反) 등의 방법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문혁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대부분 문혁을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이라고 말한다.

=문혁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계층과 입장에 따라 충돌하고 있다. 주요 피해자였던 관료와 지식인들은 당연히 문혁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일 것이다. 그들이 문혁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상처만을 기억할 뿐 다른 계급의 상처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관료와 지식인들은 문혁의 주요 피해자이기는 해도 그들의 임금은 기본적으로 보장받았다. 문혁 이후 그들은 샤강(下崗·준실업상태)이나 실업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혁 이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수천만 명이 샤강을 당했고, 매년 평균 20만 명의 사람들이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자살을 하고 있다. 그들의 자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문혁은 사회주의 환상을 파괴

문혁은 중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많은 사람들의 환상을 파괴했다. 특히 노간부와 지식청년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파괴했다. 하지만 마오의 원래 생각은 그들을 단련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대장정과 같은 과정이다.


△ ‘마오는 나의 힘!’ 문혁 당시 농촌으로 하방된 이들이 단체로 마오어록을 읽고 있다. 문혁은 많은 사람들의 사회주에 대한 ‘환상’을 파괴했다.(사진/연합)

대장정 초기에는 30만 명이었지만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불과 3만 명이었다. 문혁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과 신념을 상실한 그들은 다시는 공산주의를 믿지 않았다. 문혁 이전에 그들은 그래도 정의를 믿었고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믿었다. 문혁은 이런 믿음을 붕괴시켰다. 사실 문혁이 이 노간부들에게 가한 충격은 분명히 잘못되고 불공평한 것이기는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문혁의 수단을 긍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이상과 신념을 상실한 결과는 바로 관료 부패로 나타났다. 관료 부패의 시작은 개혁·개방 이후라기보다는 문혁이 끝난 직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문혁은 중국 민족의 비극인 셈이다.

문혁이 중국 사회 발전을 20~30년 후퇴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개혁·개방 이후에 중국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일정 기간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화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문혁 당시 교육·의료 등 많은 부분에서 자신들만의 체제를 만들었다. 문혁이 없었다면 중국은 소련처럼 해체됐을지도 모른다. 문혁은 비록 우파적인 것이긴 하지만 개혁·개방이라는 사상해방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시장이 생겨났다. 소련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보나.

=노동자, 농민이 권리를 끊임없이 박탈당하고 있다. 농민들은 개혁·개방 초기에는 많은 혜택을 받아서 덩샤오핑에게 감사를 했지만, 나중에는 반대로 농민들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이어서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권력계층은 각종 수단을 통해 부패를 저질렀다. 개혁·개방 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들 권력계급 문제다. 중국의 권력계급은 자산계급 및 상층 지식계층과 결탁돼 있으며, 이들은 거대한 이익집단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언론매체, 관료, 지식인들이 함께 결탁돼 있는 구조로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관학상(官學商)이 결합돼 있는 셈이다. 극소수 사람들의 손에 부가 집중됐다. 이것을 빗대서 어떤 사람들은 ‘겁빈집부’(劫貧集富·가난한 사람들을 갈취해 부를 축적함) 사회라고도 말한다. 나는 지금 중국은 가장 원시적 자본주의 국가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했던 영국의 18세기 원시 자본주의 사회와 비슷하다.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생활이 아주 비참했던 것처럼 중국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개혁·개방의 방향을 점검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개혁·개방 이후 각 계층 간 이익 충돌이 심각하기 때문에 이런 논쟁은 불가피하다. 개혁논쟁이 격화하면서 <인민일보> 전 논설위원 황푸핑 같은 개혁파 주류들은 개혁은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개혁의 함의는 도대체 뭐냐? 그들은 개혁을 신화화·권위화하면서 개혁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실 개혁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견해는 달라야 한다. 예를 들면,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개혁에 대한 소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현재 개혁은 지식계층과 권력계층에 의해 도둑맞았다. 이들이 고려하는 개혁의 방향은 권력계층의 이익이다. 이러한 개혁은 불공평하다. 그동안 중국은 개혁 과정에서 자유와 민주, 공평과 효율을 대립된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대립된 것이 아니라 상통한다고 본다. 공평한 정치일수록 더 공평한 경제적 효율을 낳고, 한 사회가 공평할수록 사회적 창조력과 생산력도 그만큼 높아진다. 북유럽의 스웨덴과 핀란드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문혁 같은 대비판 필요

문혁은 극복해야 할 문제인가, 계승돼야 할 정신적 유산인가.

=문혁은 마오가 현대사회를 대상으로 행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문혁을 통해 나타난 마오사상은 유럽의 60년대 학생운동과 미국, 일본 등에도 영향을 끼친 세계적인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모든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문혁은 극복되거나 회피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문혁이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매일매일 대면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마오가 문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좋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문혁 당시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대비판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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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7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퍼가요^^

balmas 2006-05-27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예 ...

에로이카 2006-05-27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앞의 시각과는 반대군요. 그리고 좋은 표현을 배웠습니다. ‘겁빈집부’(劫貧集富)!

balmas 2006-05-27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젊은 지식인이네요. *^^*

저는 특히 다음과 같은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문혁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계층과 입장에 따라 충돌하고 있다. 주요 피해자였던

관료와 지식인들은 당연히 문혁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일 것이다. 그들이 문혁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상처만을 기억할 뿐 다른 계급의 상처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관료와 지식인들은 문혁의 주요 피해자이기는

해도 그들의 임금은 기본적으로 보장받았다. 문혁 이후 그들은 샤강(下崗·준실업상태)이나

실업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혁 이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수천만 명이

샤강을 당했고, 매년 평균 20만 명의 사람들이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자살을

하고 있다. 그들의 자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


에로이카 2006-05-27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은 알 수 없는 다른 계급의 상처... 그런 것들이 individuality로 소급할 수 없는 singularity 아닐런지요... (잘 모르면서.. 아는척.. ^^)

balmas 2006-05-2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에로이카님,
아주 그럴 듯한 해석이네요. 철학 전공하셔도 될 듯 ... ^^;
 

 

“당시 중국은 완전히 미쳤다”

문혁을 둘러싼 중국 지식인 논쟁1- 쉬유위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인터뷰…“끝내 공개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면 일본 역사왜곡 비판할 자격 없어”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쉬유위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은 “중국 정부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과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1947년 쓰촨성 청두에서 태어난 쉬 연구원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6년 문혁의 발발과 함께 조반파(造反派)로 문혁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3년여에 걸쳐 농촌 하방생활을 했으며, 1979년까지 6년여 동안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생 과정을 졸업한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방문학자를 거친 뒤 현직에서 일하고 있다.

류사오치를 타도하려면 군중운동이 필요했다

문혁 당시 홍위병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홍위병으로 활동했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조반파’라고 해야 정확하다. 문혁이 시작됐을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출신 성분이 나쁜 흑오류(黑五類·지주·부자·반혁명 분자·범죄자·우파 분자)였기 때문에, 문혁 초기에는 홍위병이 될 자격이 없었다. 나중에 마오쩌둥은 이런 노선을 바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이용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조반파 활동은 자원해서 참여한 것인가.


=당시 모든 학생들이 문혁에 참가하기를 원했지만 나에게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나쁜 출신 성분으로 분류돼 오랫동안 혁명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마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했다. 때문에 문혁에 참가해 마오에 대한 애정과 충성 그리고 그 누구보다 혁명을 원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마오의 말처럼 ‘인민들 속에서’ 사상이 단련된다는 느낌이 들었나. =농촌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노동이 너무 고되고 힘들 뿐 아니라 때로는 먹을 식량조차 없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문혁 전에 우리가 받았던 교육은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며, 중국의 사회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도라는 것이었다. 하방생활은 나에게 그동안 받았던 교육과는 완전히 상반된 현실에 대한 충격이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사건은 린뱌오가 소련으로 도망을 가려고 하다가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린뱌오는 마오 주석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이자, 마오사상의 붉은 깃발을 가장 높이 치켜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반당활동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마오에 의해 죽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하방생활을 하면서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지하에서 ‘미국의 소리’라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것을 알았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들은 원시사회의 노동과 똑같았는데, 미국의 우주선은 이미 달에 도착해 있었다. 당시 받은 사상적 충격은 엄청났다. 문혁은 왜 일어나게 됐다고 보나.

=지금으로선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과 서양 학자들 중에는 문혁을 마오가 추구한 이상적인 사회 실현과 중국을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일으켰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관점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마오가 문혁을 일으킨 가장 주요한 원인은 권력투쟁이다. 사실상 마오가 타도하려는 사람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류사오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류사오치 뒤에는 그를 지지하는 수천수만 명의 공산당 간부가 있었다. 마오는 그들까지도 타도하고 싶어했다. 마오가 문혁을 발발한 이유는 전통적인 당내 투쟁 방식으로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군중운동, 천하대란(天下大亂)의 국면을 만들어야만 했다.

마오를 그리워한다? 신좌파의 착각! 문혁 시기에는 아래로부터의 비판과 언론출판의 자유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민주적’이지 않았나? =마오는 군중에게 발언권을 주었고 대자보를 붙이게 하여 관료들을 비판할 수 있게 했다. 조직을 만들어도 되고, 신문을 출판해도 되며, 어떤 말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오가 사람들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대민주’는 류사오치를 타도하기 위해 준 것이었다. 당시 중앙정부 공안부가 내놓은 ‘공안 6조’라는 문건에는 다음과 같이 아주 정확하게 명시돼 있다.


△ ‘30 대 70?’ 쉬여우위 연구원은 마오가 권력투쟁을 위해 천하대란의 국면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문혁은 ‘광기의 시대’다.

“마오쩌둥과 린뱌오를 공격하거나 혹은 중앙영도소조, 즉 장칭을 공격하는 자는 반혁명 분자이며 신속히 체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유의 ‘대민주’는 가짜다.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마오 시절의 평등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지금의 중국인들이 마오를 그리워하고 심지어는 문혁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심리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인민들은 현재 벌어지는 권력의 타락에 염증을 느끼면서 현실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들은 지금 마오가 살아 있어서 다시 한 번 문혁을 일으킨다면 기꺼이 참여해서 이 타락한 현실을 뒤엎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원인은 마오에 대한 상업화다. 1990년대 이후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상인들은 일반 서민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교묘히 이용해 마오를 상업화했다. 마오는 그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상징마크가 되었다. 신좌파들은 이러한 현실을 잘 모르고 중국인들이 정말로 다시 마오를 그리워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절 중국 정부는 마오에 대해 30% 정도의 잘못은 있지만 70%는 여전히 공이 크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 논법은 마오가 스탈린을 평가할 때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소련의 흐루시쵸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스탈린은 악인이고 폭군이라고 비판했다. 마오도 마음속으로는 스탈린을 엄청나게 증오하고 싫어했지만,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탈린이 공산주의의 상징임을 알았다. 때문에 마오는 스탈린을 평가할 때 “단지 30%만 나빴다”고 말했다. 나중에 중국 공산당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마오식 해석 방법을 이용했다. 심지어 덩샤오핑도 나중에 자신을 평가할 때 이 논법을 사용한 일이 있다. 개인적으로 마오는 부정적인 면이 긍정적인 면보다 훨씬 많다고 평가한다. 문혁 40주년을 맞은 올해도 여전히 중국 정부는 문혁에 대한 논쟁을 금기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문혁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과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문혁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과 평가를 꺼려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문혁을 파고들면 중국 정치제도의 여러 문제점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도대체 누구의 죄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렇게 묻는 과정에서 결국 그 추궁이 마오에게까지 갈 수밖에 없다. 현재 당국은 (이러한 추궁에서) 마오를 보호하고 싶어한다. 이렇게 거대한 비극이 중국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치 제도상의 문제 때문이다. (현 정부가) 공개적으로 문혁을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 현재의 정치제도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도덕의 타락도 문혁에서 연유문혁이 결과적으로 중국인들에게 남긴 상처는 뭔가.

=첫 번째 상처는 도덕의 상실이다. 중국인들은 예전만 해도 순수했고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는 문혁을 통해 이 사람들을 기만했다. 중국인들은 이상과 순수함, 진실, 신뢰감 등을 잃어버렸다. 문혁은 모든 아들과 딸들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판하게 했으며, 학생들은 자신의 선생님을 비판하고 그들과 싸워야 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인성을 잃어버렸다. 서로를 불신하게 됐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도덕의 타락은 사실 문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의 문혁 세대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신앙도 이상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신뢰를 잃었으며 매일 서로 투쟁하고 싸우는 것에 습관이 들어버렸다. 한마디로 문혁은 ‘광기의 시대, 어리석음의 시대’였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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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다. 계속 퍼다주세요. 퍼갑니다~^^

balmas 2006-05-27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겠죠?
요번 [한겨레 21]은 특집이 풍성하네요. :-)
이런 건 한 권 사줘야지~

waits 2006-05-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가만히 앉아있어도 님들이 다 퍼다주셔서...^^;;
그리구 지금 보니 카테고리 몇 개가 늘어났네요.
제가 준비하는 논문;; 주제가 '이주노동자 인권' 관련된 건데... 앞으로 도움 많이 받을께요..^^

balmas 2006-05-27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보기 쉽게 정리하기 쉽게 좀 바꿨답니다. :-)
오, 아주 중요한 주제네요. 기대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