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에 대한 언급들

자끄 데리다가 2004년 10월 10일 타계하였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휴머니스트이자 차연이라는 개념을 인류에게 알려준 해체론의 사상적 모험가로서의 생애를 마쳤다. 그가 췌장암에 시달리면서도 테러와의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게 될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했던 것, 맑스주의를 유령으로 규정하면서 새롭게 재구성될 것을 희망했던 것, 동독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던 맑스엥겔스저작선 MEGA 작업이 제정적인 파산상태에 놓이자 전세계의 지성에 호소하며 모금하였던 것들은 데리다가 맑스주의자로서의 생애를 살아가면서도 유령이 된 맑스를 전면에 걸지 못했던 당대의 상황을 알려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괴기한 인기가 미국에 데리다 열풍을 만들었을 때조차 그는 그것을 자신도 무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데리다는 포스트모던이즘과는 사실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오해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제는 데리다를 맑스주의를 상실한 맑스주의 세대의 한 인물로 재조명해야 할 때가 왔다. 그의 죽음이 만들어낸 새로운 철학적 기반은 그의 삶에서도 만들어내지 못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위대한 석학의 죽음 앞에서, 유령이 된 맑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또 하나의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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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교등급제’는 한국사회를 요약한 한마디

[한겨레] [분석] 한국사회에서 고교등급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연세·이화·고려대 등 3개 대학이 고교등급제를 시행해왔다는 교육부 실태조사가 발표된 뒤, 한국사회가 ’고교 등급제’ 후폭풍에 휩싸여 있다. 고교등급제를 둘러싼 논의가 확산되면서 고교등급제는 일부 대학의 문제를 넘어, 지역간- 사회계층간 갈등양상으로 옮아가고 있다. 이런 논의전개에 따라 고교등급제가 가져온 ‘후폭풍’의 갈등 양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고교등급제가 부른 지역간-사회계층간 갈등은 잘못된 것이고, 이를 피해야만 하는가? <한겨레>는 고교등급제가 불러온 사회갈등적 측면을 취재했다. 편집자

계층갈등·사회분열은 안 된다고? 그러나 갈등과 분열은 지속될 것

일부 언론은 말한다. 고교 등급제가 계층갈등으로 비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사회분열을 심화시켜서도 안 된다고. 서울 강남권에 살지 않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고교 등급제에 분개하고 있을 때, 이들은 고교 등급제 자체보다는 고교 등급제를 둘러싼 갈등과 혼란을 무엇보다 근심한다. 하지만 현상유지와 조화를 강조하는 이들 언론의‘우국충정’은 부질없어 보인다. 계층갈등으로 비화되어선 안 되고 사회분열을 심화시켜서도 안 되는 고교 등급제가 정작 그 제도 안에 스스로 계층갈등과 사회분열의 폭약을 품고 있는 탓이다. 차별을 전제로 하는 이 제도로부터 차별받았다고 생각하는 절대다수의 비강남 국민들이 존재하는 한, 일부 주류 언론이 여론시장의 담론을 지배하는 건 역부족이다. 그리하여 논란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고, 갈등과 분열은 비화되고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교 등급제를 건조하게 정의해보면, 대학들이 입시에서 출신 고교에 따라 차등적으로 점수를 가산하는 전형 방식을 일컫는다. 물론 교육관련 법이나 각 대학의 학칙으로 정해진 바 없다. 단지 대학들이 스스로, 짬짜미로 시행해왔을 따름이다. 해당 대학들이 한사코 고교 등급제(制)는 없다고 항변하는 것도, 이 제도의 이런 비공식성에 기대어 부리는 응석이나 애교다. 그러나 문제는 고교 등급제의 본질이 그리 건조하지도 않고, 응석이나 애교로 해결될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많은 정치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교육학자들은 고교 등급제를 지금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라고 입을 모은다. 고교 등급제 안에는 그만큼 인문사회학적 함의가 듬뿍 담겨있다는 얘기다. 다만, 그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많은 사람들에겐 썩 유쾌하지 못한 느낌으로 와닿는다.

고교 등급제는 한국 대학의 게으름…게으름은 서열화 안주 탓

고교 등급제는 무엇보다 한국 대학들의 게으름을 드러내준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과)는 “무릇 대학이라면 학생의 잠재성을 찾아내 제대로 교육을 시켜 내보내야 하는데, 우리 대학들은 미리 교육된 학생들을 뽑아다 방목하고 있다”며 “고교 등급제는 우리 대학들이 손쉽게 성적 우수 학생을 뽑으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봉 ‘학벌없는 사회’ 운영위원도 “고교 등급제는 일부 대학들이 수시전형을 우수학생 입도선매 기회로 삼으면서 나온 편법”이라며 “그들이 말하는 우수학생이란 사교육을 통해 길러진 입시 선수”라고 말했다. 한국 대학들이 게으른 건 왜일까. 홍윤기 교수는 “대학 서열화의 틀 안에서 1등급 대학은 1등급에 안주하고 2등급 대학은 2등급에 안주하기 때문”이라며 “이러다 보니 대학은 교육하는 곳이 아니라 학벌을 만드는 곳이 돼버렸고, 이런 대학들이 고교 등급제를 선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고교 등급제는 대학 등급제 또는 서열 구조의 말없는 반영이거나 확장이라는 얘기다. 대학들의 이런 태도는 고교 등급제 옹호의 논거로 내세우는‘우수학생 선발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나 ‘현실적 학력 격차 인정’이라는 주장을 스스로 무안하게 만든다. 입시에서 단 1, 2점의 점수차를 우수와 비우수의 절대기준으로 삼아온 이들 대학이 이젠 고액 사교육으로 중무장한 학생들을 우수 학생으로 평가하고, 그런 학생들이 몰려사는 강남지역을 우수학생의 텃밭으로 보고 입도선매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학력 격차와 이에 따른 국가경쟁력의 차이는 실체가 있는 것일까. 격차가 있다면 왜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격차는 정당한 것일까. 박거용 상명대 영어교육과 교수(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운영위원장)는 “고등학생의 학력은 결코 국가경쟁력이 아니다”며 “우수 학생 뽑아다 바보 만들어 내보내는 경쟁을 할 게 아니라 고등학생의 학력 격차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뽑아서 잘 교육해서 내보내는 경쟁을 하는 게 국가경쟁력을 생각하는 대학다운 태도 아니냐”고 물었다.

학력격차와 국가경쟁력의 실체는 있나? 격차는 정당한가?

설령 학력 격차가 있고, 그 격차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고 해도, 그 격차가 생겨난 과정이 정당하지 않다고 인문사회학자들은 지적한다. 고교 등급제가 입시제도의 문제만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초(超) 입시제도로서 고교 등급제의 중심에는 한국 사회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강남’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상봉 운영위원은 “강남은 왜 강남이냐”고 반문한다. 우리나라 사교육의 메카로 알려지면서 집값이 뛰고, 이젠 우리나라 최상류 계층이 모여 사는 곳. 최상류 계층과 최고의 교육환경, 이에 따른 최고의 교육성과가 삼박자로 물려돌아가는 곳이 강남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교 등급제가 강남의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 제도화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교양학부)는 “70년대 개발독재 시대 이래 특정지역개발촉진법 등 몰아주기식 성장으로 불로소득의 부를 쌓아올린 곳이 바로 강남”이라며 “고교 등급제는 이미 하나의 신분 코드가 된 강남이 그 이름만으로 교육에서 특별대우를 받게 되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외과)는 고교 등급제를 교육의 계급화로 규정한다. 손 교수는 “고교 등급제를 둘러싼 갈등은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갈등이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지역 등급에 따른 교육기회의 차이를 놓고 벌이는 변형된 형태의 계급투쟁”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교 등급제는 계급을 공식화할 뿐 아니라 계급을 대물림해 한국을 계급상승의 유동성이 없는 ‘닫힌 계급사회’로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사회의 지배구도를 완성하려는 정치행위”

일부에서는 이들 대학의 고교 등급제를 한국 사회의 지배구도를 완성하려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다분히 음모적이라고 지적한다. 홍성태 교수는 “고등학생들의 학력격차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강남 학생들은 무더기로 합격시키면서 강북 학생 단 한 명 붙이기는 것도 그리 인색할 수 있는가”라며 “국내 최고의 사학이고 사학의 모범이라고 자처하며 교수들에게 가장 많은 월급과 명예까지 주는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가 겨우 고교 성적 우수 학생을 좀더 얻자고 학교 전체가 나서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국민 사기 범죄를 저질렀겠느냐”고 되물었다. 홍윤기 교수는 “고교 등급제를 시행한 대학들은 사회적 특권층을 자기 대학의 동문으로 묶어 자기 대학을 특권층 카르텔의 한 부분으로 끼워넣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성태 교수는 더 나아가“이들 대학은 이미 강남의 한 부분이며 그 자체가 강남”이라며 “강남 개발을 통해 부와 기득권을 쌓은 이들이 이제 대학을 통해 학력을 장악한 뒤 기득권을 확대재생산하고 대물림하는 계급의 폐쇄회로를 완성하려 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역 고교등급제’가 시급하다

일부 언론이 고교 등급제 자체보다 이에 따른 갈등을 깊게 근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11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열린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기자회견을 앞두고 한 택시기사가 거리에 차를 세워둔 채 “안병영 장관 나와라. 못 사는 것도 서러운데 차별이 웬말이냐”며 한동안 소동을 벌인 일이 있었다. 강남을 위한 짬짜미 고교 등급제 시행 사실을 안 전국의 비강남 국민들의 심사는 복잡할 겨를조차 없이, 이처럼 직설적이다. 김상봉 ‘학력없는 사회’ 운영위원은 “고교 등급제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병리를 드러냈지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욕심이 지나쳐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며 “입시의 공정성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에 상처를 입은 국민들이 고교 등급제를 통해 대학 서열화가 갖는 계급적 함의를 깨닫기 시작한 지금이 학벌제 사회를 깰 수 있는 분수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정으로 이 사회가 갈등이나 분열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젠 ‘현실적 학력 격차’나 ‘국가경쟁력 강화’를 강변하기 보다 ‘역 고교등급제’를 서두르는 게 어떨까. 계층적으로, 지역적으로 열세에 있는 고교에 파격적으로 국가예산을 지원해 제대로 된 공교육을 받게 하고, 대학들도 이들 지역 학생들을 우대해 정성들여 교육한다면, 적어도 영업을 중단한 채 교육부 건물에 대고 삿대질하는 택시기사는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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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당연한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릴케 현상 2004-10-1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추천하죠

balmas 2004-10-1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자명한 산책님은 추천해주실 줄 알았답니다.

마립간 2004-10-1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 한겨례 신문 기사를 페이퍼에 올리신 것은 (아마) 이 글에 동감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입시 제도의 개선이 사회 계층의 유동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의 페이퍼에 '고교등급제와 학벌'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시간있으시면 의견 부탁합니다.

balmas 2004-10-1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조만간 한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전출처 : urblue >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추측컨대, 당신들은 백만장자인 모양이다.

당신들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 ─ 미래가

당신들 앞에 환히 보인다. 당신들의 부모는

당신들의 발이 돌멩이에 부딪히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

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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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0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프랑스 사회학자가 쓴 책을 읽었는데, 그는 이 책 첫머리에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더 나은 장래를 거부당한 이들에게" 그 책을 바친다고 써놓았다(그 책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대작이었다).
내일을 거부당한 사람들, 내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단순한 정서적 연민을 넘어, 도덕적 책임을 넘어, 심지어 정치적 입장을 넘어,
한 가지 존재론적 관점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만큼 지배와 규율, 포섭과 착취의 그물망은 편재적이고 촘촘하다. 브레히트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

릴케 현상 2004-10-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늘 공부 안하는 애들한테
'죽어 봐야 저승을 알지' 하던 게 생각나네요
 
 전출처 : 딸기 > 기다렸던 책.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야 할 '테러시대'라는 것에 대해 나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조지 W 부시가 선언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됐고, 결국 이라크전이라는 고전적 의미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논란, 김선일씨의 피살 등의 사건들을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테러시대'는 이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9.11 사건 이후로 나의 의식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생겼다. 중동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고 이라크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중동' '이슬람'이라는 단어들이 맴돌았다. 신경과민증 혹은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와 마음으로 중동을 찾아 헤맸다. 중동 내지는 이슬람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다소 안목이 생긴 것도 있지만 언제나 머리가 '고팠다'고 할까,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9.11 이 있은 직후에, 선배 한 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몇년 지나면 이 사건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인 분석들이 쏟아져나오겠지, 이 사건이 세계사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될지 궁금하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런 책이었다. 미국 바싸르대학 교수라는 저자는 9.11 테러가 일어나고 두 달 뒤, 뉴욕에서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책은 두 사람과의 개별 인터뷰와 함께, 두 '석학'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버마스, 데리다. 얼마나 저명한 '철학자들'인가!

하버마스의 이야기는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데리다와의 대화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인터뷰 스타일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하버마스가 간결하게 '신사처럼' 얘기했다면, 데리다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가운데에서 정곡을 찌르는 스타일이랄까. "9.11은 대사건이 되겠지요"라는 질문에, 데리다는 "무엇이 '대' '사건'인가"를 되묻는다. 9.11이라는 숫자들로 '명명'함으로써 이 사건을 반복해서 되뇌이게 만드는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테러/테러시대/테러시대를 불러온 모순들을 마치 '종결된 사건'인 양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데리다,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해체'다. (데리다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무튼) 데리다는 우선 9.11 이라는 '이름'을 해체하고, '테러' 혹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무엇이 공포(terror)인가. 이 '공포'의 원인은, 그것이 미래에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이런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냉전이라는 최소한의 균형조차 깨어진 뒤에 찾아온 '팍스 아메리카나'. 9.11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미국'이라는 안전판을 강타하고 부숴버린 것이었고,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 것임을 지적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자면(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미국이 지목한 '테러리스트'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데리다는 이를 특유의 '자가-면역' 논리로 해석한다. 스스로의 면역체계를 부수면서, 안에서부터 생겨난 병리학적 존재들.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지금의 이라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폭력적인 교조주의에서 근본주의자들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데리다라고 해법을 알까. 철학자에게 '현실적 해법'을 내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문제의식으로 족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관용)'라는 말이 유행을 했던 것 같은데, 재미난 것은 '관용'에 대한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정반대되는 평가다. 하버마스는 비록 '관용'이라는 말이 어떤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민주적인 사회'에서라면 그 한계가 다수의 뜻에 따라 합리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면서 '관용'의 유효성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데리다는 '관용'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기독교적 성격을 지적하는 동시에, 관용은 어디까지나 '문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저러하지만, '너'의 행동도 이러저러한 수준까지는 봐줄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관용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다. '봐줄' 수 있는 한도, 그것이 관용이다. 관용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데리다가 내놓는 것은 '환대'라는 개념이다. 네가 비록 이러저러할 지라도 나는 받아들인다- 보라도리는 데리다가 말한 '환대' 혹은 '초대'의 개념을 '용서'와 연결짓는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책임.
내 집에 누가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손님을 환대한다면-- 반가운 손님이 올 수도 있고,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나를 찌를 수도 있다. 환대는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져다주는 그런 개념이다. 관용을 넘어선 '완전한 환대'는 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데리다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기존의 논리를 해체하고 새롭게 상상하지 않는 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해체주의자의 지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문제의식은 결국 '유럽' '계몽주의'의 문제를 향해 간다. 이성, 합리화, 이런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근대화의 프로젝트를 포기해야할 것인가.
타리크 알리 같은 사람은 "9.11 이후에 변한 것이 과연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9.11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평가절하한다. 과연 9.11은 어떤 사건이었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미-소 양극체제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면, 냉전이 끝나고 10년만에 일어난 9.11은 미국 일극체제를 향해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었다. 빈 라덴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을 '적'으로 명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화에 반기를 들었다. 빈라덴의 선전포고를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반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데리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를 통칭해서 '아브라함적 종교'라 부른다. 하버마스는, 이 아브라함적 종교들 중에서 '구미'의 종교에 해당되는 기독교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일신교 특유의 배타성과 폐쇄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여러가지 역사적, 경제적 원인이 있겠지만) 이같은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모순이 축적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경(근본주의의 발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찾는 것, 합리화와 근대화(표현이 좀 이상하군)는 더더욱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는 데리다 또한 문제의식이 일치한다. 미국에 맞서는 (척하고 있는) 지금의 유럽에 한정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이상'이라는 의미로 '유럽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해 두 사람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선언문'이 실려있다.

9.11의 의미와 계몽주의의 문제-- 이것은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이기에,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던진 짤막한 이야기는 그저 '분석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분석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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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이미도는 누구인가

이미도

영화 번역에 관한 한 국내 1인자.
공군장교 출신에 주민등록번호 1자로 시작하는 엄연한 남자인데 이름 가운데 아름다울 ‘美’자가 있다는 이유로 여자로 오인되곤 한다.
좌우명은 영화인답게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의 명언.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기라)”.
영화와 골프, 등산으로 현재를 즐기느라 아직 미혼

외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막 끝난 극장에 앉아 마지막 여운을 감상하고 있을 즈음, ‘번역 이미도’라는 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가운데 부각된 이 마지막 자막은 대개 화면에 떠오른지 1초도 안 되어 사라지지만 번역가 이미도란 이름은 우리에게 퍽 친숙하다. 그건 이름만 대면 알만한 블록버스터를 포함해서 통상 1년에 40여편 이상을 번역하는 그의 왕성한 작업량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한두 편씩 수입된 애니메이션은 전부 그가 번역했다. 가장 최근의 「글래디에이터」를 비롯하여 「아마겟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인생은 아름다워」, 「러브 오브 시베리아」, 「와호장룡」, 「아메리칸 뷰티」등등 흥행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 한석규가 한국영화의 보증수표라면 이미도는 외화흥행의 보증수표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셈이다.

미국 미, 건널 도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 매니아였다. 「벤허」를 개봉하던 날은 마치 시네마천국의 토토라도 된 듯 극장에서 살았다. 토요일에는 주말의 명화를, 일요일 밤에는 명화극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번역가로서의 끼가 있었는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영화를 보면서 누가 번역했는지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당시 국내에 소개된 외화는 번역 1세대인 김승호 선생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군에서 통역일을 하셨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한 아버지는 유난히 미국을 좋아하셨다. 오죽하면 아들 이름을 미국 美, 건널 道를 합쳐 ‘美道’라고 지으셨을까. 무엇이든 풍요로운 미국에서 살라고 그렇게 지어주셨다. 당시만 해도 그 세대에게 미국은 ‘꿈의 땅’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일찍 영어를 생활화했다. 그러고 보면 90년대에 들어 일기 시작한 ‘영어만이 살길’이란 표어의 선구자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영어 시간이 시시하기만 했다. 철이 들면서 막연히 영화 관련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술을 천하게 여기셨던 아버지에게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말은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결국 대학에서는 스웨덴어를 전공했고 공군 교육장교를 제대하고 광고를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떠났다.
본격적으로 영화일을 시작한 건 서른이 조금 넘어서였다. 94년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후 그는 영화 수입 중개업을 하는 선배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2년간의 미국생활은 그가 영화일을 하기에도 좋은 경험이 됐다.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우수한 작품을 사들이거나, 제작중인 영화 가운데 될성부른 작품들을 골라 배급권을 따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들여온 영화를 직접 번역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마침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발음과 재기 넘친 언어감각을 알아본 주변에서도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때가 정확히 9년 전. 줄리엣 비노쉬가 주인공인 「블루」를 시작으로 그는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첫작품 「블루」는 아트영화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많은 관객을 얻었다. 곧이어 블루의 연작시리즈 「레드」, 「화이트」를 번역해 연달아 히트시키자 헐리우드 직배사들은 앞다퉈 그를 찾기 시작했다.

헐리우드산 활어를 요리하는 남자

그는 자신을 ‘헐리우드산 활어를 요리하는 남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올 여름 펴낼 책 제목으로 물망에 올려놓았다. 이 책에서는 외화번역가라는 직업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번역과정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을 생각이다. 영화 한 편 번역하는 데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1주일 정도가 고작. 우리나라는 개봉일이 임박돼 수입되는 경우가 많아 번역가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최소한이다. 그 짧은 시간에 법조계나 스포츠, 동성애 등 전문분야를 다룬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기란 역부족이다. 이럴 때를 위해 영화계 ‘인맥’보다는 전문분야 종사자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쓰는 편이다. 그 시대의 정보에 어두우면 좋은 번역은 불가능하다. 골프영화 틴컵(Tin Cup)은 가까운 선배중에 골프 전문가가 없었다면 마감에 맞추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깔끔한 번역은 이미 할리우드 직배사들로부터 정평이 나 있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게, 언어의 미묘한 맛을 살린 번역을 그것도 ‘단시간내’에 가장 훌륭하게 번역하기 때문이다. 영화사에서 허락없이 그의 번역에 함부로 손을 댔다간 그와 거래를 끊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큼 완벽을 기한다. 그는 한 달 평균 세 편을 번역한다. 여름이나 명절 ‘성수기’에는 한 달에 네다섯 편씩 처리할 때도 있다. 그 동안 그가 번역한 영화들은, 매년 외화 흥행순위 10위까지를 석권한다.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원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번역한다는 그의 말이 실감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보다 더 영화를 사랑하기에 번역 과정에서 원작이 훼손되는 건 스스로 견딜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가장 좋은 번역은 영화를 보면서도 뭔가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푹 빠지게 하는 것. 그렇게 되려면 대사가 길어선 안 된다. 자막은 2줄 이상을 넘지 않을 것, 길어도 원고지 1줄 분량을 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전후사정으로 이해될만한 대사는 과감히 건너뛴다. 배우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다 옮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는 또 한국식 정서에 맞는 대사를 창출하는 것을 최상의 번역이라 생각한다. 감독이 웃기려는 의도가 열 번 있을 때 번역된 작품을 보고 우리 관객들도 열 번 웃게 해주는 게 가장 힘들다. 나라마다 유머의 코드가 다르고 문화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완벽한 자막을 얻기까지 그는 시사회를 포함해서 일곱 번 정도 영화를 본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번역 때문에 흥행했다는 칭찬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외화번역가의 ‘업’이다. 영화에 감동받고 나온 사람들 중에 만 명에 한 명도 “정말, 훌륭한 번역이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화판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어 추가 개런티로 환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외화를 번역하는 건 공중에 뜬 무수한 말 중에 하나를 잡는 일이다. 관객이 화면 속 배우의 움직임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자막을 보는 세 가지 행위가 동시에 무리 없이 수행될 수 있도록 문장을 압축하고 다듬는 일. 그러나 우리 나라는 선진국들에 비해 아직 ‘번역가’에 대한 인식이나 대접이 터무니없이 낮은데다가,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제 살 깍아먹기식 경쟁을 하고 있다. 그나마 그의 등장 이후 번역가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엔딩 장면에 번역가의 이름을 넣자고 주장해 관철시킨 것도 그이고 비디오에 번역가 이름을 넣게 된 것도 그가 발벗고 나선 일이다.
그는 개봉 첫날 첫회 상영분을 관객과 함께 본다. 자신이 숨겨둔 웃음과 진실의 여정을 찾아가는 관객들 속에서 그는 행복을 느낀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한 재치있는 번역에 관객들이 박장대소할 때 그는 또 해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스텝들의 장구한 행렬 뒤로 낙관처럼 떠오르는 ‘번역 이미도’를 확인하며 극장을 나선다.


(http://www.applebook.co.kr/old_applebook/month/april01/03-4.htm)

일단 다 퍼왔구요..
저도 영상물 번역을 해봤었는데, 거기 설정에 맞게 다 조사를 해야한답니다. 가끔 맞지 않는 번역이라도 올라갈때가 있는데, 이유는 한 스크린에 40자 이상이 한꺼번에 떠서는 안돼기 때문이죠. (다 일고 지나갈수가 없는 양이기때문에) 그리고 각 언어의 비어나 은어등은 그냥 상황에 맞게 저희가 바꾸기도 하지요. 물론 나중에 검수하시는 분이 바꾸는경우도 허다하고요.

 

가장 대표적인 멋대로날림번역의 일례로는 위에도 언급된 '반지의 제왕' 이 있죠. 마지막 장면, "샘, 난 이대로 멈출 수 없어"라는 대사로, 졸지에 프로도를 모험왕으로 만들어 버렸다죠... 보다 자세한 반지의제왕 오역 리스트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세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http://morgoth.egloos.com/201770

  이미도씨의 오역 리스트는, 아래 사이트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계의 악의 축으로 불릴 만도 하군요.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1065/mo1065sp_901.htm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1073/mo1073sp_9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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