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가레 글의 두번째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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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정신의 생성에 필수적인 계기이며―하지만 헤겔은 이 이행 안에서/이행에 대해 거의 우울증적인 애석함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의 누이/누이 자체[역주: “그의 누이/누이 자체”의 원문은 “la/sa soeur”이다.]에 대한 (피들이) 뒤섞이지 않은(불순하지 않은, san mélange) 애착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이다. 종과 성별(젠더, genre)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 통일체, 이 개인성, 아직 살아있는 이 피의 주체가 단순하게[곧 종이나 성별 없이―역자] 발생했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행의 향수 속에서 그는, 분명히 성차화된sexué 관계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만expose, 성적 욕망의 현실화를 통해 이 욕망을 이행시키지는 않고 있다. 성적 욕망은 피의 주기 안에 통합되어 있는 조화를 깨뜨리게 될 텐데, 이러한 조화 안에서 오빠와 누이 사이의 구별은 피의 순환의 각 국면들phases, 곧 들숨/날숨, 유동적임/딱딱함,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역주: apprehension은 “파악”이나 “포착” 같은 의미 이외에도, “근심”이나 “두려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들은 “흡수résorption”와 달리, 바깥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로 번역했다.]/바깥의 흡수―이들이 아직 동물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국면들은 거의 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하나(그/녀)가 내쉴 때 타자는 들이마시기 시작하고, 그/녀가 붉은 피가 될 때 타자는 자신의/자신들의 정맥(들)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미 되돌아가고, 그/녀가 혈구(들)의 원자적 개체성으로 긍정될 때 타자는 림프로 남아 있고, 그/녀가 재가 되어 대지로 돌아갈 때, 타자는 이제 겨우 휴지 상태에서 빠져나와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등등. 하지만 이들은 소화digestion 과정에서는 이미 치유할 수 없게 분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하나가 [남성적인] 하나 안에서 자신을 재인지reconnaître할 수 있을지 몰라도―따라서 이 경우 [남성적인] 하나는 [여성적인] 하나를 이미 동화시켰을 것이다―그 반대의 경우는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안티고네가, 이 외부, 그녀에게는 도시 바로 그것인 이 외부를 향해/외부에 맞서 자율적인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용기와 마음씨coeur[역주: 여기서 “coeur”는 “심장”, “마음”, “마음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리가레가 글의 서두에 제사로 인용한 헤겔의 『자연철학』에 나오는 “중추”를 뜻하기도 한다.], 분노를 입증해주고 있다면, 이는 바로 그녀가 남성적인 것을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적어도 한 순간은. 하지만 아마도 이는 그녀가 오빠를 애도할 때에만, [여성적인] 죽음la mort으로 인해 상실한 남성성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그의 영혼에 다시 양분을 제공해주는, 그리고 그가 죽을 수 있게 해주는d'en mourir 시간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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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미 피의 균형은 와해되고 변질되고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소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유동성을 부여하는,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자기 자신의 운동 중에 자신을 동요시키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데서 느낄 수 있는 불순함이 뒤섞이지 않은 [남성적] 행복le bonheur은 동등하게 분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살아있는 통일성 안에서 존립하고 있는 한에서 누이는, 오빠가 자기로 복귀하기 위해 동화시키는 이러한 실체―피―의 자기-표상적인 지주(支柱)가 될 수 있다. 아들이 그를 낳은 부부로부터 독립해서 대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보증(담보, gage)인 그녀는 살아 있는 거울, 곧 그녀의 반사를 통해 [오빠의] 자기[역주: 여기에서 “자기”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헤겔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의 자율성이 확립되는 원천이다. 붉은 피와 그것의 외관상 유사물이 서로 안에서 조화롭게 (혼)융되는 특권적 장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혼)융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타자 안에서 자기를 비추기auto-spéculation에 관해 도시가 오빠와 누이 각각에게 부여한 상이한 재인지[인정]의 권리는 항상 이미 그들의 결합을 도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비록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공개적인pubblique 재-표시를 기다려야 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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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여성[아내]-어머니는 양분을 전달하고 유동화하는[용해시키는] 림프쪽에 전념하게 되고, 주기적인 출혈로 인해 피를 상실함으로써 거의 백색에 가까워지며, 사회의 다양한 성원들 및 기관들이 체화하여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중성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남자(아버지)는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외부의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체화를 진전시키고, 이렇게 해서 자신의 활력, 성마름, 활동성을 강화하게 된다. 자신의 체내에 타자를 흡수하는 순간에 특별한 승리감을 맛보는 것이다. 아버지-왕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살아 있는) 교환의 단절을 자신의 담론 속으로 지양함으로써 반복한다. 법의 텍스트의 기록 속에서 피를 잿더미로 만듦으로써, 그는 동시에 이 텍스트(자신)를 분신(으로서)―하지만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그의 부인 안에서 각각 상이하게―생산하며, 외관상 유사한 것들, 상이한 방식으로 피를 잃어버린 개별적 자아들의 원자들을 점점 더 많이 산출함으로써 피의 색깔을 더욱 더 퇴색시킨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실체가 상실된다. 곧 자신을 살아 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함으로써 피가 상실된다.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역주: hypochondria와 melancholia는 둘 다 우울증의 증상이다.]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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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어떤 담론도 간단히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역주: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의 원어는 “re(n)fermée”이다. “renfermée”라면 “봉합하지”의 의미이고, “refermée”라면 “다시 메우지”의 의미이다.] 못할 상처를 낳는 이러한 타격, 가격이 불가피하게 가해지는 윤리적 계기로 되돌아가봐야 한다. 오빠와 누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소위) 평등한 인정[재인지] 안에, 두 본질들 사이의 비폭력적인 상호 삼투 안에 존재하며, 이러한 인정과 상호 삼투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각각]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안에서 자신들의 보편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일치는, 아직 청춘들인 전자와 후자가 행위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집 안의 수호신들의 축복 속에 전쟁에서 벗어나 있는 유년 시절이 마치 낙원처럼 계속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가적이고 오염되지 않은immaculées―또는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가적인―유아적 사랑은 어떤 시기 동안에만 존속될 수 있다 ... 그리고 각자는 곧바로, 동등한 자신의 맞짝 안에는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자신의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와 타자가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공정하게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공동의 분유départage 속에서는 법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양심, conscience)은 자신의 단순성 그대로, 의무에 대한 파토스라는 온전한 성격 그대로 재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양심]은 자신에게 드러난 윤리적 본질의 이 부분, 하나의 성에게 자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상응하는 부분에 따라 행위하도록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의식[양심]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강간을 범하게 만들지만, 이러한 사실은 이 편파적인 작용에 의해 공격을 받은 타자와 대면하게 되는 사후에야 비로소 의식[양심]에게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제 다른 쪽이 대립물과 적대자로 나타나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의식하게 된다.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범행이 이루어질 때 분출하는 어두운 잠재적 힘, 자기[의] 의식conscience de soi은 이러한 행동 속에서 이 힘을 깨닫게 된다. 의식은 또한 이러한 무의식을 갖는다는 것, 또는 이러한 무의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식에게는 낯선 일이지만, 이는 한편으로 의식이 내리는 결정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살해된 공공의 적대자는 아버지임이 밝혀지고, 결혼한 여왕은 어머니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역주: 여기에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힘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양심]”의 원어가 “la conscience éthique”라는 여성형 명사로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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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하나의 삼단논법이 이루는 경탄할 만한 악순환. 여기에서는 무의식이 계속 무의식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의식―의식은 무의식을 몰라도 무방하도록 허락받고 있다―의 법들을 인식하고 있다고 가정되어 있으며, 이 법들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더 억압받게 된다. 하지만 두 개의 윤리적 법, 성적으로 다른 두 현존재를 아래층/위층으로 나누는 것―게다가 이는 오빠와 누이의 죽음 속에서 그 자체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은 자기Soi에서 유래한다. 정신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는 운동은 이러한 층화를 필연적이게 만들며, 타자가 구덩이로 더욱 깊이 매장될수록[우물 속으로 더 깊이 잠겨들수록] 더 쉽게 자신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처럼 [남성적] 하나는 타자로부터 새로운 힘, 새로운 형태를 다시 끌어내기 위해 타자와 결합하는(성교하는, copule) 반면, 타자는 아무런 독특성의 표시 없이 자신을 소비하는 어떤 실체가 거주하는 땅 속으로 항상 더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성적] 타자에 대해 계속 자행되는 강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지조차 확실치 않은데, 왜냐하면 이러한 [강간] 작용은 여성이 점점 더 뒤로 물러나 자신의 납골당으로 자신을 밀폐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다른 경우에는, 너무나 “다른” 본질이 생겨나서 이 본질이 자신을 “외부로부터 생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본질을 동일자로, (인간적인 법만을 의식하는 [남성적] 무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은) 어떤 무의식으로 환원시킨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범행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자행될 수 있고, [강간] 작용은 사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항들 각자를 근본적으로 이중화하여, 하나의 변증법만으로는 이 항들의 결합을 표현하는(접합하는, articuler) 데 충분치 못하게 만들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한 성격과 다른 성격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분할되고 각자가 스스로 이러한 대립을 야기시킨다는 점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무의식의 법들이 의식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고, 소위 신의 법들은 철학의 법들로, 여성성의 법들은 남성성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계속 남기 때문이다. 정신의 다음 운동에서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로 이행하게 되는가? 또는 오히려 정신의 운동은 이 차이를 어떻게 해소하는가? 정신은 사후 효과effet d'après-coup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 차이에 관해 입법하고 차이의 생성을 언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차이를 해소하지만, 실은 이미 모종의 언표 과정(언표의 소송, procès d'énonciation)이 동일자로 복귀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러한 차이를 배제해버렸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남성적인 것은 자신의 담론 기획의 법칙이 전개된 과정을 되밟아갈 수 있지만, 여성적인 것은 자신을/자신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의 법을 규정해 놓은 것은 바로 남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관념상으로는, 전자와 후자 모두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의식적인 것은 오히려―또는 훨씬 일찍부터?[역주: 불어에서 “plutôt”는 “오히려”, “차라리”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와 발음이 같은 “plus tôt”는, “plus”가 “더 ~한”을 뜻하는 비교급 부사이고, “tôt”는 “일찍, 빨리”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훨씬 일찍부터”을 의미한다.]―남성쪽에 속하고, 무의식은, 모성적인 것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에 억압된 채로 여성쪽에 속하게 된다. 이는 남성성―남자쪽에 존재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쪽에도 존재하는―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성에 대한 자신의 관계들 및 모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모성에 대한] 소속성을 변증법화할 수 있는 반면(여기에는 모든 여성적 독특성에 대한 부정 작용이 포함된다), 여성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는 점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l'être라는 추상적 직접성이나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역주: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의 원문은 “un (comme) être”이다. 괄호를 빼고 읽으면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고, 괄호를 함께 읽으면 “하나로서의 존재”, 곧 “존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종류”로 되어 있지 않으며 “존재는 한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에 대한 거부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성 및 심지어 남성과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자기로서의 하나un comme soi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보편화될 수 있는 연계를 긍정하는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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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그녀를 [그녀] 자신(과 같은 것)으로 정체화할―자기 자신으로 복귀할―수 있게 해주고, 그녀를 자연적인 거울 반영 과정에 대한 속박에서 떼어내고 [자연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사변화 과정에 대한 시각이나 담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여자는 역사Histoire의 생성에서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여자는 여전히 무차별적이고 불분명한 감각적 질료에 불과하며,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내지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역주: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모두 지양되어야 할 즉자적 상태들이다.]의 지양을 위한 실체(의) 저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곧 여자는 언표작용이 이루어지는 어떤 하나의 현재 순간의 복제물redoublement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녀가 이 현재 순간에 자기 자신의 유사-주체성으로 도래할 때, 이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보편적인 현재 자체로 이행한 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재 순간의 복제물은 [여자의] 자기 의식으로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나는 결코 나와 같지 않으며(않을 것이며), 여자는 주인이 전유하는 이 독특한 의지에 불과하고, 동일자에 대한 주인의 정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너무] 감각적이고 저항적인 물질성의 잔여, 또는 달리 말하면 그의 대역 배우doublure에 불과하다. 여자는 그 자신만으로는 역사Histoire의 담론의 언표 과정을 성취하지 못하며, (동일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결여된 노예로 머물러 있다. 곧 자신의 주인에 대해 소외되어 있듯이 이러한 역사의 담론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타자, 곧 말하는 존재인 당신Toi[역주: 여기서 “Toi”는 한편으로는 나보다 윗사람이거나 신분이 높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불어 표현인데, 우리말로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당신”이라고 번역했다.]―또는 그분Il―안에서만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자아―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있다. 그녀의 고유 의지는 이러한 주인에 대해 겪게 되는 공포 속에서, 자신의 부정성[쓸모없음]에 대한 내밀한 감정 속에서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타자, 이 대타자Autre를 위한 그녀의 노동은, 그녀 자신에게 종별적인 어떤 욕망의 비현실성(비실효성, ineffectivité)을 구성한다.
        하지만 여자가 욕망의 소유를 이처럼 포기함으로써 외부 사물들은 실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데, 이 사물들의 형태는 어떠한 독특한 파토스, 어떠한 우연적 자의성에 의해서도 재-표시되지 않는 어떤 자기에 의해 규정되며, 이 사물들 속에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대상적 실재성으로 재-직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자에게 제기되는 복종의 요구, 곧 여전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여자의] 자연 본성의 비본질적인 변덕스러움은 보편적인 의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요구의 궁극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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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피의 수호자이다. 하지만 피와 여자 모두가 피의 실체로부터 보편적 자기 의식을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피와 여자는 핏기 없는 그림자들―무의식적 환상들―이라는 형태로 기저에서 영속적으로 존립하고 있다. 대지에 대해 무기력한 그녀는, 발현하는 정신이 자신의 어두운 뿌리를 두고 자신의 힘을 길어내는 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자기―남성성, 공동체, 통치―의 확실성은, 망각의 물 속에 무의식적이고 침묵한 채 억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이 실체 속에서 남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자신의 말과 서약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로써 여성성은 본질적으로 대지의 품[자궁]으로 죽은 남자를 다시 안치하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선사해주는 데 있음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que)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알고 있는 매개이며, 이를 통해, 묻혀 있는 있는 가장 독특한 생명체로부터 이러한 모든 [독특한] 자기이기를 그만 둔 어떤 현존재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러한 매개적 계기를 기억함으로써, 적어도, 망각 속에 소실되어 버린 남자 및 공동체의 영혼을 보존해줄 수 있다. 그녀 자신을 망각함으로써 자기 의식의 기-억[내면-화][역주: “기-억/내면-화”의 원어는 “Er-innerung”이다. 이 독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기억”, “회상”을 뜻하는데, 이처럼 분철된 형태로는 “내면-화”를 의미한다.]를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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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러한 지하의 힘들의 세계, 밝은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여 적대적으로 변화된 이 세계가 솟구쳐올라 공동체를 황폐화시키겠노라고, 뒤집어 엎겠노라고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연을 양육하는 무의식적인 대지이기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은 스스로 쾌락plaisir, 향락jouissance의 권리, 심지어 현실적인 능동성의 권리를 요구하며, 이로써 자신의 보편적 운명을 배반한다. 더 나아가 여성성은, 보편적인 것만을 사고하는 나이든 시민을 조롱하고 미숙한 젊은 여자의 경멸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의 소유[속성]을 도착시킨다. 여성성은 나이든 시민에게 아들, 오빠, 젊은 남자의 젊음이 지닌 힘을 대립시킴으로써 이렇게 하는데, 여성성은 이들에게서 정부의 권력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주인, 동등한 자, 연인을 인지하고 있다. 공동체는 이러한 요구들을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타락의 요소들이라고 억압함으로써만, 이러한 요구들에 맞서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반항의 씨앗들은 원칙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시민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목적들로부터 분리된 것들로서 이미 무로 환원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는 젊은 남자들―여자의 욕망은 이들에게서 쾌락을 얻는다―이 피흘리는 갈등 속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살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 힘들을 자신의 무기들로 전환시켜야 한다. 여전히 살아 있는 자연의 실체는 바로 이 힘들을 통해, 형식적이고 공허한 보편성에게 자신의 최후의 자원들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결코 친밀한 가족의 동굴[역주: 이는 '자궁'의 은유적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속으로 다시 모아들일 수 없는 다수의 점들로 자신의 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뿌림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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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역주: 원어는  “se/s'en relever”이다. ] 대표적인repré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적어도 절대적으로는―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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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가레의 글을 하나 번역해서 올립니다.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책의 일부인데, 이리가레의 텍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입니다. 이 텍스트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다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독해하는 텍스트입니다. 따라서 이 텍스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리가레의 텍스트가 상당히 난해하고(또는 암시적이고) 매우 실험적인 문체(나쁘게 말하면 괴퍅한 문체^^)로 되어 있어서, 제대로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번역이 썩 신통치 못해서 더욱 이해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리가레의 불어 문장은 주어와 접속사가 거의 없고, 분사 구문이 많은 데다, 중의적인 어휘 사용이 빈번하고, 의미 전달 방식 자체가 매우 함축적이어서, 번역이 정말 쉽지 않더군요.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불어 텍스트를 읽어볼 것을 권해 드립니다. 번역에는 영어 번역본이 도움이 많이 됐는데, 몇 가지 오역들도 있고 이리가레의 문장들을 너무 평범한 문장들로 바꾸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내용 전달을 위해서는 얼마간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글은 이번 학기에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주제로 제가 하고 있는 수업에서 학생들하고 같이 읽기 위해 번역한 글입니다. 소포클레스에서 헤겔,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로 이어지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상징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고찰인데, 이리가레의 논의를 빠뜨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텍스트하고 [성적 차이의 윤리]라는 텍스트(이 두 글은 모두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입니다)를 번역해서 한번 읽어보자고 말했는데, 막상 번역을 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서 사실은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습니다(^^).

고학번 학생들이 꽤 많아서 한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교재로 선택하긴 했는데,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됩니다.

별로 재미 있지는 않겠지만, 재미 있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오역이나 어색한 문장들이 있으면 지적도 해주시구요.

 

Luce Irigaray, “l'éternelle ironie de la communauté”, in Speculum de l'autre femme, Minuit, 1974, pp. 266-281.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


  수컷 안에 있는 자궁이 단순한 분비기관으로 퇴화되는 것처럼, 암컷 안에 있는 고환은 낭소 안에 갇혀 있으며, 대립물로 이행하지 못하고 대자적으로(자기 자신을 위해, pour soi) 능동적인 두뇌가 되지도 못한 채 머물러 있다. 그리고 클리토리스는 수동적인 감정 일반을 표상하고 있다. 반대로 남성 안에는 능동적인 감정, 부풀어오른 중추coeur가 존재하며, 비어 있는 신체의 부분들 및 요도의 해면조직의 틈새들을 메우는 피가 존재한다. 남성 안에 있는 이러한 피의 분출에 상응하는 것이 여성의 월경에서 피의 상실이다. 이렇게 해서 단순한 (보관용) 수용기로서의 자궁이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에서는 생산적인 두뇌의 실체와 외부로 분출하는 중추로 분화된다. 이러한 분화의 결과로 남성은 능동적인 원리가 되는 반면, 여성은 수동적인 원리가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은 전개되지 못한 자신의 통일성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산출물이 두 형태[형상] 또는 두 형태의 부분들의 재결합인 양, 산출을 [암컷의] 난소와 수컷의 정자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그게 아니라 여성 안에는 물질적 요소가 존재하며, 남성 안에는 주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수태는 단순한 통일체 안으로, 자신의 대표 안으로 개체 전체가 농축되는 것이다. 씨앗[정자]은 이러한 단순한 대표 자체이다. 곧 이름으로서의 이고, 자신의 총체성으로 존재하는 자기인 것이다.

죄머링이 말하기를, “정맥은 눈에 이르러 가장 가느다란 혈관, 붉은 피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혈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 [자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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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족parent par le sang[역주: 이 글에서 “sang”, 영어로는 “blood”는 매우 다양한 의미(“피”, “혈연”, “핏줄”, “혈족”, “가문” 등)를 지니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개념적인 통일성을 살리기 위해 모두 “피”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피”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약간씩달라지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gue)를 돌보는 것을 행위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의 내생적 의무는 죽음mort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정신적 행위로 전환시킴으로써 죽은 이(죽은 남자, le mort)[역주: 불어에서 “la mort”는 “죽음”을 뜻하며, 정관사 la가 붙는 여성 명사이다. 그런데 이리가레는 “le mort”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이는 원래는 “시체”, “죽은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가레는 le mort의 경우 “죽음”과는 달리 여성 명사가 아니라 남성 명사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단어를 단순히 “시체”나 “죽은 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고, “죽은 남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의 묘지를 안전하게 돌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처럼 단순한 보편성의 평화로 고양된 남성을, 우연적인 생명 및 분산되어 있는 그 현존재의 계승의 불안함에서 벗어나서 완수된 남성의 형상화figuration 속으로 맞이하는 일이 피[혈통]의 장소의 수호자인 여성성에게 귀착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은 그녀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되는 일체의 악조건을 무릅쓰고서, 이 시신, 자신의 순수 존재의 상태로 존재하는 남성인 이 시신을 매장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休止)(또는 보편성과 휴지)이다―왜냐하면 이는 순수 진리를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1) 남성은 분명 아직도 (자연적)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독특한 개인에게 돌발적으로 일어난 이러한 [자연적 죽음이라는] 우연적 사고accident, 자신의 자연적 성격 때문에 의식을 의식 자신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의식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여 자기 의식이 되지 못하도록 의식과 자기 복귀를 절단시키는 이러한 우연적 사고를 정신의 운동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만약 남성성virilité이 도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예컨대 전쟁에서) 이러한 부정성을 윤리적 행동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면, 여성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파괴의 작업opération을 감행함으로써―이는 정신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생략할 수 없는 일이다―죽은 남자를 그 자신과 화해시켜 주는 효과적이고 외재적인 매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죽은 존재―분명히 보편적이지만, 독특하게도 힘을 박탈당하여 비워진 채 수동적으로 타인에게 내맡겨진―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중에 그를 그녀 자신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모든 저속한 비합리적 개체성으로부터,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보다 더 강력해진 추상적 물질의 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로부터 무의식적 욕망들의 불명예스러운 작업들 및 자연적 부정성을 떼어냄으로써―아마도 그를 그녀의 욕망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그녀는 이 부모의 자식을 대지의 품[자궁]sein de la terre으로 되돌려보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불멸의 원소적인 개체성과 재통합시킨다. 또한 그를 하나의―종교적―공동체로 재결합시키는데, 이 공동체는 이 죽은 남성을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결국 그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독특한 물질의 폭력들 및 하층의 생명운동을 통제한다. 이러한 지고한 의무가 신의 법, 또는 독특한 개인에 대한 실정적인positive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법은 독특한 개인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사실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성원은 독자적인 존립과 고유한 대자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정신은 여기서 자신의 실재성 또는 자신의 현존재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은 전체의 힘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정신은 이 부분들[각각의 성원]을 부정적인 일자(一者, un) 안으로 결집시킨다
.(2) 성원들에게 그들이 이 총체에 의존하고 있음을 환기시킴으로써, 오직 이 총체 안에서/이 총체로부터만 자신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시킴으로써.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특수한 개별 목적들(부의 획득이든 향락의 추구든 간에)을 위해 설립된―가족을 포함하는―결사(結社, association)들은 개별 성원들의 친밀한 삶을 동요시키고, 독립된 그들의 삶을 뒤집어엎고, 그들의 독자적인 삶을 침해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전체를 해체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독특한 개별성의 질서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인, 곧 죽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곧 이들이 자연적인 현존재에 밀착하지 못하고, 감각적인 영역으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또는 의식적인 자기가 전유할 수 있는 모든 술어를 결여하고 있는 몰아적인 피안으로 도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어야 한다. 따라서 죽음의 숭배죽음의 문화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접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적어도 윤리적 차원으로 고양된다면―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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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은 이러한 관계는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들은 같은 핏줄이지만, 핏줄은 이들에게서 정지와 균형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러한 대자적 존재être-pour-soi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체성들로 존재한다.(3) 그렇다면 이들이 서로 통일을 이루어 각자가 타자로 이행하게 될 만큼 이들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서로 각자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길래 이들이 이처럼 서로간의 교환으로 이끌리는 것인가? [혈연]에 대한 인정인가? 같은 피[혈연]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공통의 헌신인가? 모권제 유형의 계보에 의해 좀더 순수하고, 좀더 보편적인 존재로 보증받는 피의 영속성 및 존립을 이들이 공모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의 가문은 매우 모범적인데, 왜냐하면 남편의 어머니는 또한 부인이기도 하며, 이는 이들의 결합에서 나온 자식들―무엇보다 폴뤼네이케스와 안티고네―에서 핏줄의 연계를 재-표시[역주: “재-표시”의 원어는 “re-marque”이다. 불어의 remarque는 원래는 영어의 remark와 마찬가지로 “언급하다”, “지적하다” 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이리가레는 데리다의 특수한 용법에 따라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에게 “marque”는 기록(inscription이나 êcriture)의 흔적, 표시를 가리키며, “re-marque”는 로고스, 이성, 사유 등의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기록의 작용이 계속 되풀이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곧 계속 기록 작용을 하지 않고서는 로고스나 사유, 정신 따위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결합의 흔적, 표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re-marque”는 이러한 결합의 흔적이 그 자식들에게서 “다시-표시됨”, “다시-나타남”을 가리킨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외삼촌―어머니의 남자형제―은 여전히 부권적인 권력의 대표자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또는 오히려 이는 오빠와 누이가 동일한 정자를 공유하고, 이에 따라 혈족관계[근친교배][역주: “consanguité”에는 “혈족관계”와 “근친교배”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에 (또다른)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정념(수난, passion)을 통해 마법적인 정념[수난]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결국 혈족관계가 마법적인 정념[수난]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인가?(4) 하지만 사실은―오랫동안 그렇게 생각되어오긴 했지만―정자는 피와 결합되지 않고 오히려 난자와 결합되며, 만약 이러한 결합이 자신의 모든 “현실성”을 부여받았었다면, 이는 이미 정신과 인륜적 실체의 통일성을 회복 불가능하게 파열시켰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합은 비순수하게 맺어진 남편과 아내의 결혼에서만 산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빠와 누이의 화합accord은 같은 이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곧 이들이 같은 자궁[같은 모계 혈통][역주: “같은 자궁/같은 모계혈통”의 원어는 “co-utérine”이다. “utérine”은 “자궁”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를 가리키기도 하며, “모계혈통”을 뜻하기도 한다.]에 이끌리는 것은, 아버지의 성(姓)으로 대표(재현되는, représentée) 상징적 규칙들―이 규칙들은 핏줄의 위력을 이어받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이미 가족 공동체를 도시에서 시행되는 법률의 유형으로 고양시킨다―에 대한 복종을 통해 벌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어떤 순간 오빠와 누이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곧 타자 안에서/타자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각자의 능력(권력, pouvoir)―붉은 피의 능력[권력] 및 이를 재흡수하는 능력[권력], 그리고 명명의 언어행위를 통한 이 능력[권력]의 지양―에서 기인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서로를 인지[역주: “인지”의 원어는 reconnaissance이다. 이는 “인정”, “재인지” 등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헤겔이 사용하는 독일어 Anerkennung(이는 “인정” 또는 “인지”의 의미는 갖고 있으나, “재-인지”라는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에 비해 의미론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하게 된다. 유사한 자(동류, semblant)를. 이는 모권제 및 부권제의 (인륜적) 실체가 상호 공존하면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평화, 욕망 없는 관계 속에서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존립을 회복시켜 주는 이상적 분배이다. 여기서 성들간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순간은 신화적인 순간이며, 이러한 헤겔의 몽상은 이미 부권제의 담론에 의해 생산된 변증법의 효과이다. 위무해주는 환상이고, 불균등한 군대들이 벌이는 투쟁의 휴전이고, 이미 정신의 생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죄의식에 대한 부인이며, 각각의 성이 타자[다른 성]와 관계를 맺고 타자[다른 성]로 이행함으로써 각각의 성에 대해 보증되는 양성성의 미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성―남성 또는 여성―은 이미 각각의 성에 대해 상이한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운명에 묶여 왔다. 비록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 강간, 살해, 침탈, 상해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적어도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중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역주: 이 문장의 의미는 좀 모호한데, 뒷부분에 나오는 “유년시기의 낙원”에 대한 언급과 관련된 내용인 듯하다. 곧 헤겔의 몽상은 아직 성적으로 발달된 주체들로 되기 이전의 오빠와 누이 관계, 따라서 비폭력적이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동류의 관계를 성들 사이의 인륜적 관계의 전범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헤겔 자신이, 누이에 대해 오빠는 인정의 가능성이지만 어머니이자 배우자로서의 누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누이와 오빠의 이러한 처지는 상호 교환 가능하지 않다[역주: 곧 오빠는 누이에 대해 누이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반면, 누이는 오빠에 대해 그러한 가능성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는 점을 긍정하면서 시인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중지되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오빠는 이미 누이에 대해 하나의 가치를 투여받고 있지만, 누이는 이러한 가치를 오빠에게 되돌려 베풀어줄 수 없으며,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오빠에게 의례를 베풀어줌으로써만 겨우 이를 해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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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소포클레스에서는 확실히 아직 사태가 그렇게 명료하지 못하다. 여기에서는 아직 어느 쪽이 더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기에서 피는 이미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버지는, 적어도 일정한 시간 동안에는 왕이었다. 이 시간 동안 왕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권리들을 주장하고 있고, 따라서 (부권제적인) 가장의 권력과 국가의 권력이 서로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비극은 피[혈연]에 대한 취향이 빚게 되는 징벌을 극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유한 이름[고유명사]의 특권은 아직 순수하지 않다. 곧 만약 아버지의 이름의 권능이 이미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면, 이는 오이디푸스가 살해와 근친상간을 범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욱이 형제들 각자, 자매들 각자가 여기서 이중화된다는 사실은 또한 그리고 아직 양 극단들―이는 나중에 또하나의 남성 또는 또하나의 여성(곧 에테오클레스와 이스메네)으로 드러날 것이다―이 거의 희화적인 것들로 나타나는 하나의 이행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만약 이스메네가 안티고네와 같은 핏줄에 속하는 여동생으로 특징지어진다면, 폴뤼네이케스가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오빠로 특징지어진다면, 에테오클레스는 같은 아버지와 같은 어머니의 아들로서 특징지어진다.
       또는 사태를 다음과 같이 언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메네는 그 연약함과 겁많음, 고분고분한 복종, 눈물, 광기, 히스테리로 인해 이론의 여지 없이 “여성”으로 보이며, 게다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왕으로부터 얕보이고 멸시를 당한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른 여자들, 곧 가장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용기를 꺾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다른 여자들과 함께 궁 안에 유폐되는 처분을 받게 된다. 안티고네의 경우는 상황이 이처럼 간단치 않아서, 왕은 그녀가 죽음으로 오만방자함의 댓가를 치르지 않을 경우 자신의 남성다움이 그녀에게 찬탈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정말이지 이제 나는 사내가 아니고, 이 계집이 사내일 것이오.”[483행] 안티고네는 도시의 법, 도시의 주권자의 법, 가족의 가부장, 곧 크레온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핏줄의 유대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분신을 개와 맹금의 먹잇감으로 방치하여 끊임 없이 고통받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어떤 남자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처녀로 죽기를 선택할 것이다. 신의 법에 봉사하는 것을 포기하느니, 지하의 신들에 대한 소명을 저버리느니[지하의 신들에 대한 애정을 그만두느니] 차라리 죽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향락jouissance은 좀더 잘 인정받게 될 텐데, 왜냐하면 지하에 속함으로써 인간들의 고안물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데스에 대한 관계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에 맞서는 것이다. 어두운 세계에 대한 정념passion 속에서 그녀는―적어도 왕의 말에 따른다면―사람들(남자들, hommes)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굴복하고 마는 이 비열한 범죄들과는 전혀 다른 도착적 행위들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이 일을 포기하는 것보다 죽음이 훨씬 더 좋은doux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더욱이 왕과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까지 선언한다. 따라서 그녀는 카드모스의 후예들, 식자alphabètes 후예들 중에서 이처럼 사고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적어도 공공연히 말하는(높은 목소리로 말하는, à haute voix)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이를 통해 주인의 권위에 맞선 반역을 숨죽여 낮게, 은밀하게 웅얼거리고 있을 뿐인 백성들, 노예들의 동조를 끌어낸다. 친구들 없이, 배우자 없이, 눈물 없이 그녀는 이 망각된 길을 따라 산 채로 바위 틈의 구멍 안에 유폐되고 결코 태양빛을 볼 수 없게 된다. 권력을 보유한 자들은 자신의 납골당, 감옥, 태내(胎內)에 혼자 갇힌 그녀에게 겨우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먹을 것을 주어 부패된 그녀의 더러움, 수치가 도시를 훼손시키지 않게 하려고 한다. 그녀가 숭배하는 지하의 신들과 혼자서만 대면하도록 만들었을 때 그녀가 과연 이 고독한 의식(儀式)에서 살아남게 될지―다시 한번―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 représentations)만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욕망은 이러한 징벌을 견뎌낼(지양할, relève) 수 없다.(5) 그녀는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자기 어머니의 저 불행한 결혼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저 끔찍한 포옹들(교미들, étreintes)에서 태어난 죄를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저주받은 그녀는, 정말 부당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불가피한 고통을 감내하기로 마음먹는다.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se donnant elle-même la mort) 자신의 향락의 애도―또는 이 애도는 바로 그녀의 향락이 아닐까?―를 받아들인다.(6) 권력이 자신에게 내린 처형 명령을 선취한 것인가? 이를 복제(배가, redoublant)함으로써? 이미 순응함으로써? 아니면 반항함으로써?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하지만 피는 흘리지 않은―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녀가 도시의 법과 현재 어떤 논쟁을 벌이고 있든 간에, 또다른 법은 그녀가 걸어가게 될 길로 이미 그녀를 인도해 왔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역주: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는 “sa/la mère”의 번역이다. 원문에서 “sa mère”는 안티고네의 어머니, 곧 이오카스테를 뜻하고, “la mère”는 이런저런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와의 동일시(정체화, identification)가 바로 그 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여자, femme),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자신의 남편의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한 어머니의 불행한 패러다임이 있는 데 말이다. 그리하여 누이는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멜 것이다. 그녀는 자기 오빠, 그녀의 어머니의 욕망이 영원히 살아남게 하기 위해, (한) 무덤의 그림자로, 죽음(의) 밤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허리띠의 베일로 숨―말, 목소리, 호흡, 피, 생명―을 끊게 될 것이다. 결코 아내(여자, femme)가 되지 못한 채. 하지만 배타적으로 팔루스적 관점에만 중심을 두고 볼 때 생각할 수 있듯이, 그녀가 남성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은 [여성적] 애정과 연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막혀 있는, 결코 뚫린 적이 없었던 어떤 욕망의 길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폴뤼네이케스, 두 형제 중 더 여성적인 폴뤼네이케스 안에서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발견하게 될 것은 무엇인가[재발견하게 될 사람은 누구인가]? 더 젊은? 어쨌든 그는 더 연약한, [매장을] 거부당한 인물이다. 더 성마르고 더 충동적이며, 노여움에 못이겨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rouvrir les veines de son sang 인물이다.(7) 한 여자, 결혼한 한 여자를 위한 사랑/그 여자의 사랑으로 무장을 한 그는, 이 낯선 결합(외국인과의 결혼, hymen étranger) 때문에[역주: 폴뤼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드라스토스의 딸 아이게이아와 결혼한다.] 그의 누이가 산 채로 매장되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적어도 피에 대한 자신의 정념 때문에 자기 형제―에테오클레스―의 통치의 권리를 소멸시키고, 자기 형제―이름상으로는 형인?―가 권력과 이성, 소유 및 부권의 계승과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생명도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통치의 실행양식이 변화되지는 않았다. 또다른 남자, 곧 크레온이 통치권을 이어가기 위해 등장했다. 그 역시―안티고네처럼―고립무원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는 법이라는 도구를 지니고 있다. 분명 절망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그는 모든 권력은 자신의 것임을 주장한다.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음으로 이끌어갔지만 그는 사랑 없이 왕좌에 다시 등극하며, 이 왕좌의 왕권sceptre은 그의 수중에 들어온다. 죽음에 사로잡힌 그는, 하지만/그리고 통치권을 엄격하게(가혹하게, rigides) 집행한다. 전혀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서. 냉혹하게 이성적으로. 부수기 쉬운 만큼 부서지기도 쉬운 그 연약한 강함은 그로 하여금 쾌락에 지배당하는 것, 하나 또는 여러 여자들에 지배당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기 아들이 대표하는 젊음의 열정, 백성들의 연합, 노예들의 반란, 심지어 욕망에 굴복한 끝에 서로 갈라진 신들, 그리고 따라서 신성한 것들 및 “원로들”에 조심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말과 진리, 지성과 이성, 곧 소유물 중에서 가장 값진 것들에 대한 유일한 보호자로서의 특권을 옹호한다. 하지만 그가, 예컨대, 여성 및 신성과의 관계에서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가문의 모든 사람의 죽음 속에서―이스메네는 황금 감옥, 주권의 변화로 인해 평범한 사적 주거지로 변모될 위험에 처한 황금 감옥에 격리되었다―, 이 전반적인 피의 분출 속에서 그는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다. 하지만 그는 불행을 자초하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그는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로서[역주: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는 “homme en trop”의 번역이다. 불어에서 “en trop”는 “과도한”이라는 의미와 “여분의”라는 의미, “쓸모 없는”이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신에 대해 무모하게 도전하는 남자”와 함께 “가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자”, 또 “혹독한 불행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하고 쓸모없는 남자”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견딜 수 없는 운명에 무겁게 짓눌려 있으며, 이제 그에게 각각의 모든 사람은 똑같이 우연적인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과, 내용(혈통의 실체) 없는 대자적 존재의 엄격한 주권성, 자기 자신에게 낯선(이질적인, étrangère) 엄격한 주권성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으며, 독특한 개인들 사이의 (피의) 유대를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해소시킨 어떤 법을 집행함으로써만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곧이어, 유사한 외관semblant을 지닌 것―자아Moi―의 지위stase 안에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을 지니지 않은 신이 도래할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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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가 마슈레의 [넓은 의미의 철학] 세미나에 초대되어 했던 강연의 번역본입니다. 발리바르가 최근 여기저기서 언급했던 "정치의 비극적 차원"에 관해 궁금해한 분들이 많았을 텐데, 이 글을 읽어보면 궁금증이 많이 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매우 개략적이고 함축적인 데다가 마키아벨리 [군주론]으로 대상이 한정되어 있지만(따라서 다른 식의 작업들이 기대되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글인 듯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미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발리바르의 글을 읽고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사실 80년대까지 쓰여진 발리바르의 많은 글들은 극히 복잡한 문장들 때문에 읽기가 곤혹스러울 뿐더러 번역하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는데(더욱이 직역 또는 오히려 <직문>(?)^^ 위주의 번역 때문에, 저처럼 문체가 망가져 오랫 동안 고생한 사람들도 꽤 많을 듯합니다(형편없는 문체에 대한 웬 낮뜨거운 변명?-_-;;)), 최근에 발표하는 글들이나 책들은 문장이 상당히 간결하고 명쾌해서, 읽거나 번역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글은 내용만이 아니라 문체상으로도 탁월한 성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서툴고 서두른 번역으로 그 탁월함이 많이 훼손되었겠지만. 꼼꼼히 검토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고, 이 글을 읽어보기를 원할 분들이 여럿 있을 것 같아 먼저 올렸습니다. 좀더 읽어본 뒤에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고쳐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공적 매체에서의 인용은 불허합니다.

 

 

Etienne Balibar, “Machiavel tragique”, in La Philosophie au sens large, Séminaires de Pierre Macherey, 2001. 4. 4. http://www.univ-lille3.fr/set/sem/BalibarMachiavel.html


비극적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바탕으로 자클린 리세Jacqueline Risset와 안 토레스Anne Torrès 및 그들의 동료들이 해낸 훌륭한 작업[이는 자클린 리세와 안 토레스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희곡으로 각색하여 연극화한 것을 가리킨다―역자]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목소리, 비극적인 것(또는 비극), 잔혹몰락이라는 네 개의 단어와 결부되어 있는 네 가지 관념을 토론에 부치고 싶다. 나는 이 관념들을 순차적으로(selon une progression) 배열해볼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에 인위적인 체계성을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관념들이 가리키는 주제가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주제도, 주요 주제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제가 본질적인 한 측면, 『군주론』에 대한 모든 독해 및 『군주론』이 제기하는 이론적 문제들에 대한 모든 토론을 어떤 식으로든 “과잉결정”하는 본질적인 한 측면―특히 우리가 여기 모이게 만든 상황에 의해 호출되는―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목소리

자클린 리세와 안 토레스의 기획의 난점 및 그 아름다움과 흥미를 이루는 것은, 내가 확신하기로는 『군주론』을 읽는 모든 세심한 독자가 생각할 만한 한 가지 직관을 [물질적 장치 안에] 구현하려(matérialiser) 했다는 데 있다. 그 직관은, 이 텍스트는 “일인칭으로”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이 텍스트를 서술하는(qui le signe) 유일한 인물이 다수의 목소리로 증가하고, 이 목소리들의 교대와 중첩은 그의 글쓰기에 독특한 복잡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직관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통사가 아무리 기묘하다 해도(마리 가이유Marie Gaille는 『군주론』의 글쓰기에서 파격문법anacoluthe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사람들은 그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품고 있는 “목소리들”은 들릴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 목소리들이 공명(共鳴)하게 해야 한다. 한 목소리에서 다른 목소리로의 이행이 감지될 수 있게 해야 하고, 한 대사에서 다른 대사로 이 목소리들이 전이하도록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연극의 정의 자체다. 목소리들[대사들]을 분리하는 간격들을 [물질적 장치 안에] 구현해야 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자신이 자신의 “목소리들”에 대한 장면분할이나 배역설정 등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목소리들을 부여할 수 있는 인칭들[인물들]의 성(性)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안 토레스의 알레고리적인 역할배정은 나에게는 완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런 식으로 역할 배정을 했는지 그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역량(la Vertu), 호기(好機, la Fortuna), 전쟁(la Guerre) [이 셋은 여성이다―역자] ... 또는 군주(le Prince)와 인민(le Peuple) [이 둘은 남성이다―역자]. 『군주론』 서두의 <헌정 편지>는 정치적 인식이 군주와 인민 사이에서 배분되고, 따라서 치유 불가능하게 분할되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또는 오히려 나는 이 모든 배역설정은 좀더 은밀하고 좀더 규정적인 한 가지 분할, 마키아벨리 자신의 두 개의 목소리의 분할, 자신의 텍스트를 수신자들(군주 및 아마도 그 뒤에 있는 인민. 이 양자 모두는 “도래해야 할” 존재자들이다)에게 전달하는 이가 그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는(se partage) 분할에 의해 지배되고 유지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글쓰기 안에서는 누가 말하는가? 『군주론』을 쓰면서, 그리고 이 글쓰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면서 『군주론』을 “말하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들은 어떤 것인가? 하나는 이성의 목소리이고 하나는 정념의 목소리,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하나는 사건들 및 역사적 상황들, 고대 및 근대의 정치적 활동의 인물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성찰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촉구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호명하고 권고하는 목소리, 곧 마지막 장 맨 마지막의 독립된 싯구에서 숨김없이 자신을 들려주는, 하지만 우리가 앞의 장들에서 그 대위법적 주제(le contrepoint)를 지각할 수 있는 목소리(이탈리아의 “구세주”에 대한 호소)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두 가지 목소리를 통합할 수도, 하나를 다른 하나로 환원할 수도 없고, 역으로 이것들을 분리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군주론』은 지난 모든 시기에 걸쳐 그것이 제기한 해석의 문제들과 더불어서만, 이 목소리들의 중첩 안에서만, 그리고 이 목소리들이 계속 들릴 수 있는 한에서만 바로 그 저작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곧 마키아벨리가 분석한 사례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한에서만, 그리고 이 사례들이, 필요할 경우에는 명칭들을 바꿔가면서(가령 “이탈리아” 대신 “유럽”으로) 우리를 호명할 수 있을 정도로 계속 호소력을 지니는 한에서만 『군주론』은 바로 그 저작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좀더 근원적인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비록 뛰어난 기교로 목소리들을 중첩시키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한 열쇠를 보유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제는 텍스트 배후에 자신의 목소리들을 배치하고 상연하는 일종의 “초-마키아벨리”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이해관계들”로 갈등을 겪고 있는 텍스트―이 텍스트는 이러한 이해관계들의 증인이나 관객이기도 하다―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들의 중첩과 간격들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침묵의 밑바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향해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사물의 실제적인 진리에 관심을 경주하기andar dritto alla verità effetuale della cosa”라는 15장의 유명한 정식이 가리키듯이, 이는 “사물” 내지는 “사물 자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다음의 몇 가지 지적들을 통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 “사물”의 정체를 밝혀보고,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들의 연기(jeux)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해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만약 여기 내 앞에 있는 안 토레스의 시도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것

내가 “비극적 마키아벨리”라는 제목을 제시한 이유는 『군주론』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비극이론을 구성해 보거나, 마키아벨리를 이 미학 범주로 가두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의 저작(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군주론』)의 비극적 차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마키아벨리와 함께, 역사 및 정치 안에서 “비극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한 가지 성찰을 재개해 볼 수 있으리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클린 리세는 매우 정당하게도 『군주론』의 텍스트에 현존하는 “영웅들”에 준거하고 있는데, 『군주론』 텍스트는 대부분 영웅들의 발흥과 이들에 대한 평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이는 정체(政體)들에 대한 “분류” 및 그 실존조건들에 대한 연구와 대위법적 관계에 있다). 체사레 보르자가 이 영웅들 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이지만, “군주”의 이러저러한 행동 요령 및 이러저러한 성공과 실패의 조건들을 예시해주는 다른 영웅들도 존재한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최종 분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실패다. 영웅들은 그 자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체사레 보르자는 그 으뜸가는 사례이다.
  이는 어떻게 “군주”(아주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군주국”를 정초하는 “새로운 군주”)의 이상이 영웅주의 모델과 관계되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군주의 이상은 영웅주의를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인가? 아니면 결국 그것을 멀리해야 하는 것인가? 알다시피 이는 텍스트 해석의 중대한 난점들 중 하나다. “새로운 군주”는 반(反)영웅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비르투”의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특징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이 특징들을 합리적으로 통제하여 자신의 “도구들”로 삼는 방식(군주는 자기 자신의 도구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사적 인간에서 군주가 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또한 자기 자신의 도구가 되고 이로부터 군주에 걸맞는 능력들을 길러내야 한다)을 통해서도 영웅주의의 형상들을 전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불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겉보기에는 매우 반마키아벨리적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영웅을 요구하는 나라는 불행하다”는 문장을 재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헤겔의 성찰들이 지닌 적합성(헤겔은 브레히트 및 그의 정식의 심원한 양가성의 원천이다)에 주목해 볼 수 있다. 곧 헤겔에 따르면 자신의 사적 행위를 통해 공적 질서의 변동이나 정초를 수행하는 국가의 인간(정치인, homme d'Etat), “위대한 인간”, 이 “범죄자”는 사실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이 때문에 헤겔은 마키아벨리와 그의 “군주”를, 고대적이고 야만적인 역사에서 합리적인 역사와 근대성으로, 시초의 역사에서 목적/종국의 역사로 나아가게 해주는 역사적 이행의 형상들 안에 기입하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장르”를 이루고, 주기적으로 비극을 재활성화시키는 질문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이 질문들은 행위를 문제화하는 커다란 반정립들의 작용에 따라 분석된다. 수단과 목적 또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마키아벨리는 이것들을 비르투와 포르투나 같은 원리들의 지반 위에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군주들과 인민들 같은 세력들의 지반 위에서도 분석한다), 결정의 모델과 기예의 모델 사이에서 행위자(agent)(또는 영어에서 좀더 적절하게 말하듯이 agency, 곧 “대행자agence”)의 동요, 자비나 잔혹의 수단을 통해 주권이나 권능을 추구하는 권력의 양가성 등이 바로 그러한 반정립들이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후에도 비극을 재발명한 위대한 작가들, 곧 셰익스피어(『리처드 3세』)와 코르네이유(『시나』), 라신(『브리타니쿠스』, 『베레니스』, 『바자제』)은 항상 마키아벨리 및 그가 불러일으킨 논쟁들과의 긴밀한, 그리고 심원하고 성찰된 관계 속에서 이런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은 “마키아벨리언”이거나 “반마키아벨리언”, 또는 “초마키아벨리언”이다. 하지만 만약 마키아벨리 자신이 정확히 『군주론』에서 내가 비극적인 것의 가장자리들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곧 비극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하는 메시아적 구원의 질문(『오이디푸스』나 『햄릿』에서처럼)이나 이해관계들 및 열강들 사이의 갈등의 변증법에 관한 질문(브레히트라면, 다른 미학적-정치적 범주의 의미를 변경시키면서 “서사극”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잔혹 및 좀더 일반적으로는 악의 비애에 관한 질문과 조우하게 되는 분리와 만남의 경계선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에서는, 선행한 모든 새로운 군주의 약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구세주rédemteur(이 신성모독적인 명칭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목적들에 종속시키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주요한 권능puissance은 교회의 권능이기 때문이다)에 대한 “음화적(陰畵的)인” 소개와 권능들이나 “체질들humeurs”의 변증법(마키아벨리는 다른 저작에서 여기에 대해 체계적인 외연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 변증법의 쟁점은 항상 인민의 정념들의 부정성, 인민에게 고유한 “예종에 대한 거부”를 통치 내지는 국가의 삶의 실정적 조건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념들 및 그 정치적 효과들에 대한 분석론(특히 잔혹에 대한 분석이 중요한데, 마키아벨리는 주목할 만한 “냉정함”으로 이를 다루고 있으며,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환각적인 기원invocation에 가까운 몇몇 [잔혹한 장면들의] “상연”을 제외한다면, 이는 스피노자 및 사드와 연결될 수 있다)이 서로 혼융되지 않는 가운데 중첩되고 있다. 비극적인 것, 어쨌든 마키아벨리식의 비극적인 것은 이 모든 차원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별도로 취해진 이 각각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잔혹

  이 세 가지 차원들 중 마지막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 또는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분명 “잔혹의 정치”가 존재하는데, 이 정치의 수단들에 대한 서술 및 그 필연성에 대한 정당화가 『군주론』의 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사람들이 『군주론』을―진지하든 아니면 가식적이든―거부하는 이유들 중 많은 것들을 해명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는 매우 독특하다.
  이는 외설적인 성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게 무엇인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마키아벨리가 잔혹의 기술 및 통치 방법으로서 이 기술의 효력에 관해 제시한 논의들―여기서 사례exemplum는 단지 성찰과 분석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유덕한” 행위의 모델로 나타난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생산할 수밖에 없는 효과는 사상사에서 매우 보기드문 다른 텍스트들과 비교해 볼 만하다. 나로서는 『규방철학』의 사드나 악덕의 번창을 “증명하는” 다른 텍스트들보다는 오히려 『도덕의 계보학』의 니체 및 원시적인 “금발의 야수”의 “순진무구한” 잔혹성에 관한 그의 논고들과 연결하고 싶은데, 그렇기는 해도 “선악을 넘어” 위치해 있는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과, “상위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개인들을 다른 사람들―이들은 이 목적들의 실현을 위한 대행자들이다―의 생명 및 존엄성의 “주인들”로 확립하는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변론이 내포하는 도착성perversité 사이에 거리를 둔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이에 관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관점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며, 우리가 “인문주의humaniste” 시대―이 시대에는 르네상스 시대 못지 않게(또는 반대로 어쩌면 더 광범위하게) 폭력이 현실적으로 발생했지만, 더 이상 정치의 “순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의 원칙 내지는 선입견들에 따라 마키아벨리 텍스트에 나오는 폭력에 대한 변론에 반발하고 있다고 논박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정반대로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곧 마키아벨리는 그가 그 물질성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는 [폭력의] 관행들이 편재해 있던(정치적 암살이 문제이든 고문 또는 배반이 문제이든 간에) 시공간의 맥락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그의 화두는 사실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의 화두는, 잔혹의 유효성의 조건들 및 이를 실행하는 전략들의 합리성,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목적들의 가치에 관해 계속 되풀이되는 문제제기라는 의미에서, 사실에 대한 “비판”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잔혹의 정치학은 고전적인 “실천적 지혜prudence” 이론을 권력을 획득하고 보존하는 데 유용한 수단들 전체로 확대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으며, 전쟁을 정치의 영속적 지평으로 간주하는 홉스나 슈미트식의 관점 또는 폭력을 문화 및 제도들로 “변환conversion”하려는 헤겔식의 관점 역시 훨씬 뛰어넘는다. 사실 그의 정치학은 정치와 관계하는 폭력의 개념 자체를 파열시킨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마키아벨리 정치학을 사적 정념들과 공적 정념들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와 관계시키면서, 초월적이거나 전통적인 정당성을 갖지 않는 권력의 “정초”로서 마키아벨리 정치학의 영속적인 목표를 “증오 없는 공포”의 제도화로 정의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폭력의 극단성과의 이러한 대면이 갖는 궁극적 역설을 간과했다고 믿는데, 이는 폭력이 모든 도구화를 초과하는, 또는 폭력의 결과들을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으로 변용시키는―왜냐하면 이 결과들은 “만족”(또는 향락jouissance)과 공포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형태들 아래서 재현/상연되는 바로 그 순간에, 폭력이 온전하게 제어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의 부하 장수에 의해 억압받은 인민들에게 이 부하 장수의 시체를 두 토막내어 전시함으로써 그 억압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있는(『군주론』 7장은 인민들이 이것을 보고 “만족을 느낌과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저 유명한 간계scénario야말로 정확히 이것의 사례이다. 만성적인 내전 상태에서 폭력이 궁극적으로 권력의 독점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폭력은 “익숙해진” 형태들을 초과해야 하며, 이러한 초과는 여기서 (두토막난 시체의) 전시 광경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 앞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사적” 개인들 다수는 살이 떨리는 공포를 느낌과 동시에 일체의 동일화 가능성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고 모종의 합리성을 성취하고 있는지, 아니면 “효과적인” 정치의 목적들 및 수단들에 관한 자신의 체계 안으로 이러한 정치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사물이 침투하도록 방임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다. 『로마사론』은 믿음들(특히 종교)에 대한 조작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대중들은 오랫 동안 통제될 수 없다는 점에 관해 길게 논의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정치”(또는 여론 정치)의 최초 판본과 동일시해 왔다. 공포의 효과와 함께 우리는 이러한 도구적 합리성을 넘어서게 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기원”은 더 이상 신화나 제의의 형태로 재활성화될 수 없고, 대신 각자가 경험하고 억압하는 어떤 집합적 외상―이것의 결과들은 예견 불가능하다―에 준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체사레 보르자의 모험이 이루는 (또는 이탈리아에서 권력imperium을 재정초하는 데 거의 성공할 뻔했던 그의 이야기의 이면을 이루는) “파멸의 과정” 한 가운데 이 삽화를 기입함으로써 마키아벨리 자신이 수긍했던 바로 그 점이다.

몰락ruine

  이로부터 내가 오늘 끝으로 말하고 싶은 마지막 용어가 나온다. 이는 『군주론』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어휘들 중 하나―아마도 제일 많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이다. 잠시, 안정된 권력(나중에 스피노자는 이를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부르게 되겠지만, 그가 목표로 삼게 될 것은 정치 전략이 아니라 제도들의 체계, 심지어 헌정constitution이다)의 보증 수단들에 대한 논증 내지는 탐구라는 관념을 “중립화”하면서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어보자. 우리는 이에 관한 서술(구세주에 대한 호소는 정념 및 지성의 발휘에 의해서만 이러한 서술[의 차원]을 넘어선다)에서 모든 “군주국”은 몰락하고 만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또한 모든 군주들 역시 몰락하며, 군주들은 자신들이 정초할 수도 있었을 국가도 몰락시키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 국가는 그들의 비르투의 구현물, 실현될 법하지 않은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종말을 고하지 않을”(알튀세르), 따라서 영원으로 투사될 국가나 사회의 정초라는 관념―이는 주권에 관한 고전적인 신화와 분리될 수 없을 듯하다―에 맞서 마키아벨리와 함께 [모든 국가의] 정초들은 불가피한 몰락을 지연시킬 뿐이라고 사고해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초들은 가장 간교하고 가장 뛰어난 역량을 지닌 정치가들이, 겉보기에는 우연적(자신의 질병과 아버지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비했던 체사레의 계산상의 실수처럼)이지만 실제로는 불가피한 어떤 “오류”의 형태로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양상들 및 기한들에 달려 있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곧바로 몰락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오류와 지성에 의해 대비되어 오랫 동안 지연되는 오류―이는 실제로는 성공과 혼동된다. 또는 그 본성상 시간이 항상 정치에 도래하는 것은 아니라면 혼동될 수 있을 것이다―사이에는 아무런 등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필수불가결하며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폭력의 과잉과 더불어―심원하게 비관주의적인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비극적 차원을 이루는 것이며, 활동적인 인간들 및 그들이 이끄는 대중들의 대담함과 젊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기 위해 그것이 차례차례 빌려오고 있는 목소리들과 공유하는 기쁨 속에서 표현되지 않고 있는 『군주론』의 비밀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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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4-0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보니 거친 표현들이 몇군데 눈에 띄어서 좀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좀더 다듬어서 올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조금 바빠서 그랬다면 변명이 될까요?

2004-04-06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04-0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리아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카이사르>는 <체사레>가 맞군요. [군주론]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지요. 그리고 연극적인 의미가 들어갈 경우에는 <영웅>은 <주인공>이라는 의미도 갖겠지요. 좋은 지적을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국내에는 코르네이유 비극 작품이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고, 라신의 경우는 몇몇 작품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서울대 출판부에서 [라신 희곡선집]이 나와 있고, 장성중 교수의 [페드르] 번역이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옛날 불어로 된 작품들이라서 그리 소개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은데, 코르네이유나 라신 작품들이 좀더 많이 번역된다면,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문화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balmas 2004-04-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출판상황을 보니까 제가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더군요. 코르네이유 작품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으로 [연극적 환상/오라스]가 번역되었더군요. 작가 이름이 <코르네유>로 되어 있긴 하지만요. 저도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오라스]는 코르네이유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번역되어 있어서 무척 반갑군요.
 

E. Balibar, “Sed intelligere”, Lignes(nouvelle série) 4, 2001.

* 이 글은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리뉴』(‘노선’을 뜻한다)가 “혁명의 욕망”이라는 제목의 특집호를 내면서 실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기고문 중 한 편이다. 『리뉴』는 바타이유 연구자인 미셸 쉬르야(Michel Surya)가 편집을 맡고 있는 잡지로, 알튀세르 계열의 철학자들(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등)과 데리다 계열의 철학자들(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카트린 말라부 등)이 자주 글을 싣고 있다. 이 글 역시 복사나 퍼가기 등은 허락하지만, 공적 매체에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한다.

 

우선 인식하라

근본적으로는 『리뉴』의 관심사와 대의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여기 『리뉴』가 우리에게 성찰해보도록 제시한 정식들에 대해서는 얼마간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사실은 단어들에 관한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내가 이 단어들에 물신fétiche과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믿게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또한 단어들(및 나 자신이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념들, 곧 혁명과 욕망이라는 관념들을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덕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끝에서부터 시작하자면, 베를(Berle)의 정식의 의미에 관해 묻게 된다[베를이 제시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세계에 대해 정신이 대립시키는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refus pur et simple opposé par l'esprit au monde qui l'indigne”]. 우리처럼 [작가와는] 다른 “글쓰는 이들écrivants”(왜냐하면 나 자신을 “작가écrivain”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은 불어에서 관계사는 “서술”과 “한정”의 이중 용법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정식은, 세계는 그 자체로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를 거부함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은 어떤 세계, 정신이 거부하는 세계임을 뜻할 수도 있다. 세계는 그것의 실존 자체에 의해, 그 물질성(그것의 “산문”(散文), 그것의 공리주의)에 의해 정신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다는 관념은 전혀 부조리한 게 아니며, 이는 심지어 세계를 정의하는 관념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의미라고, 곧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어떤 세계(어떤 세계? 부르주아 도덕의 세계, 부르주아 세계 일반)라고 가정해보자. 정신[의 의미]에 대해 논란을 벌이기보다는(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신체 또는 대중이나 인민,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를 더 선호할 것이다 ... 하지만 이렇게 해서 본질이 변화될지는 확실치 않다)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자. 혁명에 대한 열망들의 “최소의 공통적인 특성”(“엄밀한 최소한의 것”)으로서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순수하고 단적인 거부”를 혁명에 대한 열망들의 “최소의 공통적인 특성”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불일치가 시작된다. 반대로 나는, 더 이상 어떤 구실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수용과 모든 용법, 모든 전통, 모든 강령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이라도, 우리에게는 엄밀한 의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처음에는, “욕망할 만한 것[바람직한 것, désirable]”이라는 관념을 단순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잡화하기 위해서, 혁명이라는 관념을 “혁명의 혁명”이라는 관념―이전에 레지 드브레가 대중화시킨 이 정식을 (많은 사람들 이후에) 전유해 사용한다면―과 분리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엄밀한 의미가 필요한 것이다. 
  나로서는 예컨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관념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관념에 차이를 두고 싶다. 어떤 통속적인 생각에 따르면 전자와 후자는 부르주아 사회와 대립할 것이다. 서로 동일시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 양자는 필연적으로 “단계들”이나 “국면들”로서 분절된다. 나는 양자를 대립시키지는 않더라도 분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적”이거나 “집산주의적”인 것도, “개인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는 아마도 부르주아 사회와의 대립에 따라 순수하게 단적으로 정의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의 세계(및 특히 이 세계 내에서 우리에게 참을 수 없고, 어떤 점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가 어떤 한에서 “부르주아” 세계인지 진지하게 질문해볼 수 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자본주의적인 한에서라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밖에 다른 것들(성차별적, 인종주의적)도 더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를 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이를 극복할 어떤 공산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앞의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가능한 것과 욕망할 만한 것[바람직한 것], 이 양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내게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확실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농지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만약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의 등의 투사들이 부여한 의미에서 [정관사 la가 들어간] “혁명la révolution”은 가능하지 않거나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는 아주 단순하게도, 사람들이 말하곤 했던 것처럼 혁명의 “주관적․객관적” 조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어떠한 과거에 대한 향수도, 어떠한 유토피아도 이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용어의 역사적 의미에서 혁명들은 단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며, 질문 전체는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하게 될까 알아보는 데 있다... 루소가 『에밀』(1762)의 유명한 구절―이는 회고적으로 볼 때 예견적인 구절로 드러났다―에서 “우리는 혁명들의 세기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그는 이 말로써 통치형태와 사회질서의 급격한 변전을 지시했지만, 그 변전의 형태나, 특히 가치에 관해서는 예단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이 문장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혁명들의 역사(“망상들illusions”의 역사)로서의 역사l'Histoire의 종말을 보았다고 우쭐대거나 절망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둘 모두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도래할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인데, 이 혁명들은, (붉은 깃발과 함께 또는 그것 없이 이루어진) 과거의 혁명들 중 많은 것들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산업”혁명이거나 “민족”혁명, “보수”혁명이거나 “수동”혁명 등일 수도 있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문제는 어떤 조건들 하에서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지 아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두 개의 정식을 대립시켜보고 싶다. 유명한 한 연설(1792년 11월 4일)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지롱드파를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시민들이여, 여러분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가?” 나는 이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논쟁에서 이 정식을 인용했었다. 당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가 보기에는 자명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일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시에 혁명적 폭력(이는 항상, 최종 분석에서는, “내전”의 유형에 속한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든 달성하지 못하든 간에, 결코 자기 자신에 맞서 “파시스트 폭력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제 다른 정식을 보자. 아마도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욕망의 혁명”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나는 방금 이 표현을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이 표현이 이 선언의 의미,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다면, “정신”을 집약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양자를 다음과 같은 가설 속에서 결합시켜 보고 싶다. 곧 욕망의 혁명 없이는 혁명의 욕망도 없다! 따라서 특히 “혁명의 욕망”의 혁명 없이는 혁명의 욕망도 없다.
  이는 혁명의 욕망은 일차 수준에서 사고될 수 없고 그 자체로 “욕망될”(왜냐하면 의지의 의지가 존재하듯 욕망의 욕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도 없다는 의미다. 다른 곳에서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인용하면서(그에게 러시아 혁명의 근본 문제는 어떻게 혁명이, 자본주의와 국가로부터 유래한 그 자신의 “야만성”을 물리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이를 “혁명을 문명화하기civiliser la révolution”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는 혁명의 욕망은 동시에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시빌리테, 더 많은 상상력의 욕망이라고 제안하는 것인데, 이것들이 없다면 혁명은 그것이 “거부하는”, 그리고―혁명이 더 이상 그것의 도구가 되지 못할 때는―“그것을 무시해버리는l'indigne” 세계의 전도된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차 수준으로 올라간 욕망은 지연된 욕망, 자기 자신을 (재)부정하는 또는 자신의 실현을 두려워하는 욕망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증명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스스로를) 사고하는 것, 따라서―이 후자는 전자와 분리될 수 없는데―(스스로를) 사고하려는 욕망으로 되는 것은 바로 욕망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다. 1982년 에밀리아 지안코티(『스피노자 어휘집Lexicon Spinozanum』의 저자로, 1992년 사망했다)가 조직한 최초의 대규모 스피노자 회의[이 회의에서 발리바르가 발표한 논문이 바로 <대중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 스피노자, 반(反)오웰>이다]에 참석하러 우르비노에 갔을 때, 나는 회의장 벽에 그려진 그림에 “우리는 반역할 이유를 갖고 있다”는 마오의 구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여기에 에밀리아는 다음과 같이 써넣었다. “우선 인식하라Sed intelligere.” 타협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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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2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i, Mr. balmas, I read your paper in Moscow. Thank you for your keeping your post, but I'm in trouble in searching my post , my language^^

balmas 2004-03-2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모스크바에 계시군요. 사정을 보니 아마도 한글 자판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좀 답답하시겠습니다. 연구 때문에 가셨을 테니, 유익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Etienne Balibar, “Une philosophie politique de la différence anthropologique: Entretien avec Bruno Karsenti”, in Multitudes 9, juin 2002.

* 이 대담은 매우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정치철학에 관한 발리바르의 최근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읽을 수 있는 매우 시사적인 대담이다. 발리바르의 작업 스타일을 감안할 때, 여기서 가설적으로 소묘된 내용들은 다른 글들을 통해 좀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모습으로 제시될 것 같다. 제한된 분량 내에서 다면적인 문제들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려다 보니까 문장이 복잡해지고 때로는 매우 모호한 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감안해서 얼마간 풀어서 번역을 했는데, 좀더 검토를 해본 다음 오역이 있다면 바로 잡겠다. 이 글 역시 (당장) 출판할 목적으로 번역한 게 아니고 충분한 교열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한다. 

 

인간학적 차이의 정치철학: 브뤼노 카르젠티와의 대담


브뤼노 카르젠티: 『다중』(Multitudes) 창간호에서 우리는 지배적인 정치철학 조류와 전혀 다른 지반 위에 정치에 관한 접근법을 위치시키려는 기획을 공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는 특히 정치에 대해 발본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정치는 초월론적인 것(transcendantal)의 술책에 말려 들어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 사용될 수 있는 계약 장치들을 정비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면서 민주주의적 권력 제도의 적법한 조건들을 검토하거나 아니면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얼마간 기쁜 결혼들을 축복하는 데 머물러 왔기 때문에, 이런 성격을 지닐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 사상의 이러한 법적-제도적 전회는 70년대 후기 구조주의의 주요 성과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풍요한 유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분명 퇴보이며, 1995년 이래 등장한 새로운 투쟁 형태들 및 투쟁들의 급속한 연계는 이 전회의 한계들을 계속 비난해 왔습니다. 『다중』 편집진 사이에서는 우리가 이뤄내야 할 도약을 가늠해보기 위한 방편으로 들뢰즈적인 한 가지 구호가 자주 언급되곤 했습니다. 진정한 정치는 바로 존재론이다! 이 구호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의미가 있습니까? 이 구호는 선생님이 정치적인 것을 좀더 잘 정의할 수 있게 해줍니까, 아니면 반대로 혼란의 원천에 불과합니까?

에티엔 발리바르: 이 구호를 전도시키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겠군요. 알튀세르라면 오히려 이 구호를, 진정한 존재론은 바로 정치이다라고 굴절시켰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에게 본질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본질적인 것은 정치 그 자체의 환원 불가능한 성격을 경계짓고 위치짓는 것이며, 이론적 활동 그 자체를 정치로 다시 이끌어가는 것, 곧 이론적 활동이 가장 사변적이고 가장 형이상학적인 자신의 대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다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분명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주체에 관한 질문, 예속화와 주체화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은 전략적 차원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따를 경우, 정치에 관한 접근법들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담론을 존재론적 가정들로 유도하거나 역사철학으로 재기입하는 것―이 양자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을 거부하는 것은, 정치의 형태들 및 쟁점들을 실체화함(hypostasier)으로써 정치가 생산되는 지반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의 새로운 모습의 출현을 준비하는 존재론으로 복귀하는 것은, 역으로 본다면 정치를 파악하는 한 가지 방식, 심지어 정치를 새롭게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제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바로 존재론 안에서 균열이 작용하게 됩니다. 투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 내부에서 사람들은 긍정적인 또는 구성적인 노선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존재론적-정치적 관점의 위력은 전적으로, 스피노자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역량 개념의 내적 경제에 놓여 있습니다. 역량은 본질적으로 관계이며, 증대하거나 감소하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역량이 수동성과 능동성의 미분(différentiel), 예속화와 주체화 사이의 영속적인 이행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량 개념은 결코 미리 구성되어 있는 정초적인 주체의 존재론화가 아닙니다. 이 개념은 또다른 존재론의 토대, 또는 적어도 그 존재론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정치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을 정의하려는 두번째 시도는, 선생이 질문에서 말한 것처럼, “초월론적인 것의 술책”을 실제로 따르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제시한 것과는 반대로 저는 이것이 반드시 정치의 뇌관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경향의 가장 흥미있는 대표자는 데리다입니다. 그가 “유령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초월론적인 것의 최후의 형상(figure)인데, 여기서 실천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변 이성을 압도합니다. 이 경우 모든 존재론적 관점은, 스스로 윤리적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필요한 경우에는 예언적이라고 말하는 어떤 “명령”을 위해 비판당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의 도덕적 정초라는 관점을 재생시키고, 이런 한에서 주체의 새로운 형상을 재확립하는 게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확립은 실천적 주체를 실체화하는 모든 형태에 대한 비판과 분리할 수 없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쪽] 사람들은 스피노자주의의 현대적인 형태들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량이라는 관념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형태의 정치철학에서 초월론적 극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긍정합니다. 곧 행위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 항상 아직 가능하며, 동일성 중심적인 태도 및 이것이 함축하는 “상상적 공동체”에 사로잡히지 않는 행위를 타인 및 자기에게 전달되는 호명의 행동과 연계시키는 것이 항상 아직도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명의 행동은 실천 주체 및 정의를 위한 행동이, 자신들의 고유한 존재론과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파스칼식의 내기(pari)의 몇몇 어조를 재발견하려는 태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치적 문제제기가 접합을 시도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극점 사이에서, 또는 이것들을 넘어서 또다른 관점을 구분해내는 게 가능한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제 작업이 위치해 있는 관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편으로 자율성 및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옹호와 다른 한편으로 어떤 규정된 사변적 담론에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사이에서 정치적 담론이 끊임없이 겪게 되는 불안정성은, 우리가 정치와 인간학의 접합에 대해 질문할 때, 해소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좀더 인식 가능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맹목들 및 근본적으로는 마르크스에서도 분명히 발견되는 부인(dénégation)을 재검토해 본 이후, 인간학적 문제를 재정식화하고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학적 차이들을 기입하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분리하는―끊임없이 재정의되는―경계선을 따라 갈등의 질문을 규범의 질문으로 전환하거나 전치시킴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식별적인(critique) 인간학적 차이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적 관계들의 제도화나 변혁의 조건들을 열어 놓음으로써, 정치를 구성하는 난점들이 사변적으로 배가되는[거울반영적으로 복제되는, se redoublent spéculativement] 것은 바로 인간학적 수준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태를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포이어바흐에 관한 유명한 여섯번째 테제는 미완의 테제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 본질은 독특한 개체 안에 들어 있는 보편자가 아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ensemble)이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들은 우리가 이것들을, 가변적인 형태들 하에서 항상 인간적인 것의 규범을 구성하고 고착시키며, 이에 따라 이러한 규범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지니는 것으로까지 확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형이상학적 추상물로 대체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니체에서 푸코, 캉귈렘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노선을 그리는 질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생명정치의 의미를 정의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러한 노선과 대면해보는 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사회적 관계들은 종(種)의 내부에 차이들―생명 자체 내의 실재적-상상적 차이들, 생명체 내의, 인간 개체군(populations) 내의 “본성”이나 “가치”의 차이들―을 정립함으로써 기능하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한편으로] 이러한 차이들의 제약을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차이들의 궁극적 불가능성을 비난하도록 이끌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치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질문은 제가 보기에는 폭력의 질문, 곧 인간학적 차이의 작용에 의해 생산되는, 규범적인(정상적인, normative) 또는 때로는 극단적인 폭력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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