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ienne Balibar, “Une philosophie politique de la différence anthropologique: Entretien avec Bruno Karsenti”, in Multitudes 9, juin 2002.

* 이 대담은 매우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정치철학에 관한 발리바르의 최근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읽을 수 있는 매우 시사적인 대담이다. 발리바르의 작업 스타일을 감안할 때, 여기서 가설적으로 소묘된 내용들은 다른 글들을 통해 좀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모습으로 제시될 것 같다. 제한된 분량 내에서 다면적인 문제들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려다 보니까 문장이 복잡해지고 때로는 매우 모호한 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감안해서 얼마간 풀어서 번역을 했는데, 좀더 검토를 해본 다음 오역이 있다면 바로 잡겠다. 이 글 역시 (당장) 출판할 목적으로 번역한 게 아니고 충분한 교열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한다. 

 

인간학적 차이의 정치철학: 브뤼노 카르젠티와의 대담


브뤼노 카르젠티: 『다중』(Multitudes) 창간호에서 우리는 지배적인 정치철학 조류와 전혀 다른 지반 위에 정치에 관한 접근법을 위치시키려는 기획을 공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는 특히 정치에 대해 발본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정치는 초월론적인 것(transcendantal)의 술책에 말려 들어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 사용될 수 있는 계약 장치들을 정비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면서 민주주의적 권력 제도의 적법한 조건들을 검토하거나 아니면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얼마간 기쁜 결혼들을 축복하는 데 머물러 왔기 때문에, 이런 성격을 지닐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 사상의 이러한 법적-제도적 전회는 70년대 후기 구조주의의 주요 성과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풍요한 유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분명 퇴보이며, 1995년 이래 등장한 새로운 투쟁 형태들 및 투쟁들의 급속한 연계는 이 전회의 한계들을 계속 비난해 왔습니다. 『다중』 편집진 사이에서는 우리가 이뤄내야 할 도약을 가늠해보기 위한 방편으로 들뢰즈적인 한 가지 구호가 자주 언급되곤 했습니다. 진정한 정치는 바로 존재론이다! 이 구호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의미가 있습니까? 이 구호는 선생님이 정치적인 것을 좀더 잘 정의할 수 있게 해줍니까, 아니면 반대로 혼란의 원천에 불과합니까?

에티엔 발리바르: 이 구호를 전도시키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겠군요. 알튀세르라면 오히려 이 구호를, 진정한 존재론은 바로 정치이다라고 굴절시켰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에게 본질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본질적인 것은 정치 그 자체의 환원 불가능한 성격을 경계짓고 위치짓는 것이며, 이론적 활동 그 자체를 정치로 다시 이끌어가는 것, 곧 이론적 활동이 가장 사변적이고 가장 형이상학적인 자신의 대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다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분명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주체에 관한 질문, 예속화와 주체화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은 전략적 차원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따를 경우, 정치에 관한 접근법들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담론을 존재론적 가정들로 유도하거나 역사철학으로 재기입하는 것―이 양자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을 거부하는 것은, 정치의 형태들 및 쟁점들을 실체화함(hypostasier)으로써 정치가 생산되는 지반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의 새로운 모습의 출현을 준비하는 존재론으로 복귀하는 것은, 역으로 본다면 정치를 파악하는 한 가지 방식, 심지어 정치를 새롭게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제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바로 존재론 안에서 균열이 작용하게 됩니다. 투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 내부에서 사람들은 긍정적인 또는 구성적인 노선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존재론적-정치적 관점의 위력은 전적으로, 스피노자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역량 개념의 내적 경제에 놓여 있습니다. 역량은 본질적으로 관계이며, 증대하거나 감소하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역량이 수동성과 능동성의 미분(différentiel), 예속화와 주체화 사이의 영속적인 이행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량 개념은 결코 미리 구성되어 있는 정초적인 주체의 존재론화가 아닙니다. 이 개념은 또다른 존재론의 토대, 또는 적어도 그 존재론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정치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을 정의하려는 두번째 시도는, 선생이 질문에서 말한 것처럼, “초월론적인 것의 술책”을 실제로 따르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제시한 것과는 반대로 저는 이것이 반드시 정치의 뇌관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경향의 가장 흥미있는 대표자는 데리다입니다. 그가 “유령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초월론적인 것의 최후의 형상(figure)인데, 여기서 실천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변 이성을 압도합니다. 이 경우 모든 존재론적 관점은, 스스로 윤리적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필요한 경우에는 예언적이라고 말하는 어떤 “명령”을 위해 비판당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의 도덕적 정초라는 관점을 재생시키고, 이런 한에서 주체의 새로운 형상을 재확립하는 게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확립은 실천적 주체를 실체화하는 모든 형태에 대한 비판과 분리할 수 없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쪽] 사람들은 스피노자주의의 현대적인 형태들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량이라는 관념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형태의 정치철학에서 초월론적 극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긍정합니다. 곧 행위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 항상 아직 가능하며, 동일성 중심적인 태도 및 이것이 함축하는 “상상적 공동체”에 사로잡히지 않는 행위를 타인 및 자기에게 전달되는 호명의 행동과 연계시키는 것이 항상 아직도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명의 행동은 실천 주체 및 정의를 위한 행동이, 자신들의 고유한 존재론과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파스칼식의 내기(pari)의 몇몇 어조를 재발견하려는 태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치적 문제제기가 접합을 시도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극점 사이에서, 또는 이것들을 넘어서 또다른 관점을 구분해내는 게 가능한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제 작업이 위치해 있는 관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편으로 자율성 및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옹호와 다른 한편으로 어떤 규정된 사변적 담론에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사이에서 정치적 담론이 끊임없이 겪게 되는 불안정성은, 우리가 정치와 인간학의 접합에 대해 질문할 때, 해소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좀더 인식 가능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맹목들 및 근본적으로는 마르크스에서도 분명히 발견되는 부인(dénégation)을 재검토해 본 이후, 인간학적 문제를 재정식화하고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학적 차이들을 기입하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분리하는―끊임없이 재정의되는―경계선을 따라 갈등의 질문을 규범의 질문으로 전환하거나 전치시킴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식별적인(critique) 인간학적 차이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적 관계들의 제도화나 변혁의 조건들을 열어 놓음으로써, 정치를 구성하는 난점들이 사변적으로 배가되는[거울반영적으로 복제되는, se redoublent spéculativement] 것은 바로 인간학적 수준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태를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포이어바흐에 관한 유명한 여섯번째 테제는 미완의 테제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 본질은 독특한 개체 안에 들어 있는 보편자가 아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ensemble)이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들은 우리가 이것들을, 가변적인 형태들 하에서 항상 인간적인 것의 규범을 구성하고 고착시키며, 이에 따라 이러한 규범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지니는 것으로까지 확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형이상학적 추상물로 대체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니체에서 푸코, 캉귈렘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노선을 그리는 질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생명정치의 의미를 정의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러한 노선과 대면해보는 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사회적 관계들은 종(種)의 내부에 차이들―생명 자체 내의 실재적-상상적 차이들, 생명체 내의, 인간 개체군(populations) 내의 “본성”이나 “가치”의 차이들―을 정립함으로써 기능하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한편으로] 이러한 차이들의 제약을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차이들의 궁극적 불가능성을 비난하도록 이끌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치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질문은 제가 보기에는 폭력의 질문, 곧 인간학적 차이의 작용에 의해 생산되는, 규범적인(정상적인, normative) 또는 때로는 극단적인 폭력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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