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획연재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17회차 원고입니다.

 

국내에는 아주 생소한 이탈리아 철학자인 마리오 트론티에 관한 글입니다.

 

신문사에서는 제목을 "노동자가 자본의 일부임을 인식할 때 주체젹 변혁 가능"이라고 잡았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593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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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16회 원고 올립니다.

 

원래는 이번 주 월요일에 나갔어야 할 글인데, 신문사 사정으로 한 주가 연기되어

 

다음주 월요일치 신문에 실릴 예정입니다.

 

 

신문사에서는 "예속적 주체를 생산하는 ‘규율 권력’의 작동"이라고 제목을 잡았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신문에 실린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571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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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내가 상상하는 대로의 미셸 푸코>(1986)라는 짧은 책에서 자신은 푸코와 생전에 아무런 개인적 교류가 없었지만 단 한 번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와 결코 만난 적이 없다. 단 한 번, 68년 5월 당시, 아마도 6월인가 7월 경에(하지만 누군가 그때가 아니었다고 내게 말한다) 소르본 대학 교정에서의 만남을 제외하면. 나는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는데, 그는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5월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뭐라 하든 이때는 좋은 시절이었다. 이때는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익명적으로 누구인지 상관없이 말을 할 수 있었고, 그저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이유 이외에 다른 정당화 없이 환대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바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 비범한 사건의 와중에 내가 다음과 같이 자문하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가 여기에 없을까?”


  68년 5월에 푸코는 어디에 있었을까? 사실 당시 푸코는 튀니지에 있었다. 그는 1966년 출간된 <말과 사물>이 마치 “빵처럼 팔려나가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학계와 문화계의 스타가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파리 대학의 자리를 얻지 못하자 튀니지 대학의 자리를 얻어 프랑스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집필한다. 그동안 그는 단 한 번 파리에 다녀갔을 뿐이다. 따라서 블랑쇼가 말했듯이 그는 프랑스를 뒤흔든 68년 5월의 와중에 프랑스에, 파리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블랑쇼가 “그런데 왜 그가 여기에 없을까?”라고 자문했던 것은 우연한 일일까? 블랑쇼의 말은 푸코가 파리에 있었어야 마땅하다는 뉘앙스를 띠고 있다. 마치 푸코가 없는 68년 5월은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이는 상당히 과장된 생각이다. 68년 5월 당시 시위대들이 열광했던 사상가는 푸코가 아니라 마르크스와 마르쿠제, 그리고 마오쩌둥이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사르트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이들에게는 아직 낯선 사상가였다. 더욱이 푸코 자신이 68년 5월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깐 파리에 다녀가는 동안 소르본 대학에 들렀지만, 시위대의 행렬을 보고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블랑쇼의 물음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68년 5월과 가장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 철학자 중 한 명이 바로 푸코이기 때문이다.


  68년 5월의 반역은 정치 권력을 탈취하지 못했고 가시적인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도 못했지만, 프랑스철학사에서는 하나의 단절을 산출했다. 그것은 지배의 핵심은 사회경제적 지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 질서에 순응하는 예속적 주체의 생산에 있다는 통찰이 낳은 단절이었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68년 반역 직후 저 유명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1970)이라는 미완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예속적 주체를 생산하는지 탐구했다.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1972년 <반오이디푸스>를 써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욕망하는 대중들의 욕망의 도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분석하려고 했다. 그리고 푸코는 <감시와 처벌>(1975)이라는 책을 써서 권력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나의 첫 번째 책”이라고 부를 만큼 이 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현한 바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푸코의 사상적 여정에서 큰 의미를 지닌 책이며, 현대 프랑스철학사에서, 더 나아가 넓은 의미의 해방사상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선출되었을 때 푸코에게 마련된 자리는 “사유체계의 역사” 담당 교수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푸코는 <말과 사물>(1966) 및 <지식의 고고학>(1969)의 연장선상에서 사유체계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 이후 진행된 그의 강의는 애초의 계획과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형벌이론과 제도>(1971~72), <처벌 사회>(1972~73), <정신의학 권력>(1973~74), <비정상인들>(1974~75) 같은 강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권력의 문제로 탐구의 초점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러한 탐구의 결과가 집대성된 책이 <감시와 처벌>이었다.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감시와 처벌>은 일차적으로 근대적인 감옥 제도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탐구하는 역사책이다. 하지만 이것은 독특한 역사학을 보여주는 책이다. 푸코가 “계보학”이라고 부른 방법론에 입각해 있는 이 역사학은 “현재의 역사”를 탐구하는 역사학이다. 현재 우리 사회(곧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구조와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사회와 문화,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지적인 틀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분석하는 것이 “현재의 역사”인 것이다.


  단절의 사상가인 푸코에게 현대 유럽의 사회와 인간은 초역사적인 본질을 지닌 것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라는 먼 과거의 기원에서 연속적으로 계승되어 내려온 것도 아니다. 역사학의 통상적인 관점에 의하면 근대성(modernity), 근대 사회, 근대인이라 불리는 것이 탄생한 시점은 18세기 말, 곧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시민혁명을 통해 중세 질서가 무너지고 보편적인 인권과 시민권이 성립하게 된 시기다. 이 시기는 신분적 질서와 인격적인 예속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와 평등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 시기다. 푸코의 “현재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가정을 문제 삼는다.


  푸코가 보기에 인간의 자유를 발명했다고 하는 계몽주의 시대는 사실 규율권력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속 메커니즘을 수반한 시기였다. “부르주아지가 18세기를 통해 정치적 지배 계급이 된 과정은 명시적이고 명문화되고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적 틀의 설정과 의회제 및 대의제의 형식을 띤 체제의 조직화에 의지한 것이다. 하지만 규율 장치의 발전과 일반화는 이러한 과정의 어두운 이면을 만들어 놓았다. 원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법률 형태는 이러한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규율로 형성된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불균형적인 권력의 모든 체계에 의해 그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다. [...] 현실적이고 신체적인 규율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자유의 기반을 마련했다.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푸코, <감시와 처벌>)


  더 나아가 규율권력 개념은 권력에 대한 통상적인 관점을 해체한다. 우리는 권력을 공적인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곧 청와대나 의회, 행정부, 대법원 같은 곳이야말로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고, 권력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반면 푸코는 권력이 작동하는 실제 영역은 감옥과 병원, 학교, 군대, 공장과 같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이 영역이야말로 개인들을 개인들로서 제작하는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규율은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규율은 (효용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신체의 힘을 증대시키고 (복종이라는 정치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동일한 그 힘을 감소시킨다. 간단히 말하면 규율은 신체와 능력을 분리시킨다.”(<감시와 처벌>) 그렇다면 감옥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사실은 근대적 개인을 생산한 규율권력의 전개과정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따라서 사회의 기원에 개인들 간의 계약을 위치시키는 사회계약론이 기각된다. 왜냐하면 개인은 자연상태에서부터 존재하는, 그리고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권력을 창출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규율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유물론의 한계가 드러난다.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역사의 전개과정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토대라고 주장한다. 푸코가 보여준 것은 사회경제적 토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규율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속적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개조하고 변혁할 것인가? 68년 5월의 반역에서 푸코가 발견해낸 것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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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2014-09-25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전 무슨 일이 있으신가 했습니다.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balmas 2014-09-25 14:51   좋아요 1 | URL
본문에 잘못된 사항이 하나 있었습니다. 두번째 문단에 나오는 ˝모로코˝는 사실은 ˝튀니지˝가 맞습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09-29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에는 혁명이다가 지금은 반역이군요. 다음에는 뭔가요? 역모!

그냥 68년 5월 사건이라고 하면 충분합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09-29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68년 5월은 알제리 독립전쟁이나 쿠바 혁명 및 베트남 전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도 놀랍게도 국내의 학자들은
최대한 그것을 배제하거나 희석화해서 말하더군요.

한국 역시 놀라워요.

르네상스 창녀 2014-09-29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민혁명이라는 말은 여성들은 배제하고 비유럽인들을 배제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을 희석화시키는 말이다.

아이티 혁명도 알고 당시의 남성적인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여성들이 모조리 처형된 걸 알면서도 이런 얘기를
무비판적으로 하는 걸 보면 이런 게 바로 유럽중심주의의 식민적 지배효과일 것이다.
 

14회차 하버마스에 관한 글을 싣는 김에, 다음 주에 실릴 15회차 글도 함께 올립니다.

 

15회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에 관한 글입니다.

 

신문에 실릴 때는 다소 수정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문사에서 잡은 제목은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비밀 ‘오이디푸스 구조’에 맞서라"입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신문에 실린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535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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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0년 (허구적인) 독일 출판사에서 익명으로 책이 한 권 출판되었다. 17~18세기 내내 유럽에서 불경한 무신론자의 책으로 악명을 떨치게 될 이 책 서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그 지주와 버팀목은, 사람들을 기만의 상태 속에 묶어두고, 종교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공포를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바루흐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그로부터 약 250년 뒤, 독일의 한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가는 당시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떠오른 파시즘의 비밀이 무엇인가 질문했다. 그가 보기에 파시즘 문제의 핵심은, 객관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에 속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을 지지하는 노동자 집단의 대중심리였다. 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면서 파시즘을 지지할까?


  그가 보기에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맹점을 잘 보여주는 문제였다.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난 정치적 반동이 대중들을 ‘몽롱하게’ 만들고 ‘타락’시키고 ‘최면’에 빠지게 했다는 설명 역시 비생산적이다. (...) 우리는 그러한 폭로가 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대중들에게 확신을 줄 수 없다는 것과 사회경제적 문제제기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교훈을 경험으로부터 얻는다. 대중들 속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대중들은 파시즘의 기능을 인식할 수도,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목표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노동자들은 깨달아야만 한다’ 는 식의 전형적인 교시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 노동자들은 깨닫지 못했는가? 왜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는가?”(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리고 다시 이로부터 약 40년 뒤인 1972년, 프랑스의 한 철학자와 한 정신분석가가 공동으로 저술한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두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착취와 굴종, 예속을 감내해 왔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착취와 굴종, 예속을 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라이히가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몰인식이나 미망에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의 욕망을 해명할 수 있는 설명, 욕망의 관점에서 정식화된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는 사상가로서 가장 심원한 경지에 도달한다. 대중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질 들뢰즈ㆍ펠릭스 가타리, <반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 분석>)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사상가들이 각자 제기한 이 동일한 질문은 1968년 파리를 뒤흔들었던 반역과 해방의 운동 이후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가령 알튀세르, 들뢰즈ㆍ가타리, 푸코, 리오타르 등)에게도 중요한 철학적 화두, 어쩌면 화두 그 자체가 되었다. 이는 이 질문이 근대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주체성의 원리를 문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근대성의 근본 원칙은 주체가 인식과 행동의 궁극적 근거라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활동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주체, 더 나아가 계몽과 해방의 원칙에 기초하여 불합리한 사회적 조건을 변혁시키는 주체라는 이상은 독일 관념론에서 루카치에 이르는 고전적인 주체철학에서 근대성의 근본 원칙으로 숭앙받았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열광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독일과 이탈리아를 휩쓴 파시즘과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노동자ㆍ농민 대중의 이름으로 자행된 스탈린주의적 독재는 유럽 좌파 지식인들에게 혁명적 주체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해방적 주체의 자기지배라는 이 역설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예들은 고전적 주체의 이상을 개조하고 변형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지만,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이론적 반(反)인간주의’라는 새로운 출발점을 찾아냈다. 이들이 보기에 주체는 자신에 선행하는 어떤 구조적 조건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다. 그리고 이 구조적 메커니즘은 자신이 산출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자율적 존재로 상상하게 만들고,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 다시 말해 지배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간주하고, 그리하여 이 관계를 재생산하도록 만드는 것을 자신의 기능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들이 보기에 지배의 문제는 예속적 주체의 (재)생산 메커니즘의 문제이며, 고전적 주체철학의 맹목은 지배의 근원적 장소를 간과한 가운데 결과로서의 주체를 원인으로서의 주체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흔히 말하듯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인 지배 또는 파시즘적인 지배의 중추를 이루는 예속적 주체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들뢰즈ㆍ가타리의 <반오이디푸스>의 의의는 지배구조의 근본 형식을 “미시 파시즘”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 내에서 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으로서 오이디푸스 구조를 해명했다는 점이다. 들뢰즈ㆍ가타리에게 파시즘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미시 파시즘의 문제라면, 이는 히틀러의 나치즘은 역사적 과거로 지나갔지만, 이를 가능하게 했던 파시즘의 미시적 그물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이를 토대로 파시즘은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계급관계는 전(前)의식적 차원의 현상일 뿐, 무의식적 차원에서 사회적 관계의 양상들을 규정하는 것은 욕망의 투여방식이다. 따라서 무의식적 차원에서 지배의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욕망의 도착이나 해방적 주체의 자기배반의 이유를 밝힐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핵가족 제도에 기반을 둔 오이디푸스 구조에서 자본주의적 재생산 메커니즘의 비밀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근친상간 금기를 인류에게 보편적인 금기로 보고, 이에 기초하여 인간의 무의식과 성욕의 근본구조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제시했다. 곧 어린아이는 엄마에 대한 성적 충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함으로써 인간적 자아 또는 주체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ㆍ가타리는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근친상간 금기와 자본주의적인 현상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전혀 상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후자는 핵가족이 사회의 유일한 재생산제도로 분리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구조이며, 이것의 기능은 초월적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의 법 아래 욕망의 생산적 역량을 억압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반오이디푸스>에서 이들의 노력은 초월적 권위의 이름에 따라 무의식을 조직하려는 자본주의의 편집증적 경향에 맞서 정신분열적인, 곧 다면적이고 해방적인 무의식의 분자적인 흐름을 강화하려는 데 맞추어져 있다. 이는 특히 오이디푸스 구조에 의해 복속된 주체들과는 상이한, 횡단적-분자적 집단들의 구성가능성에 대한 시사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반오이디푸스>는 한편으로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에 대한 낭만적 찬양’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욕망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의 프랑스 식 버전이되, 훨씬 더 비합리주의적이고 괴팍한 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오이디푸스>의 화두는 두 저자가 8년 뒤에 출간한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파시즘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분자적이거나 미시정치적인 역량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의 운동이기 때문이다.”(<천 개의 고원>) 어떻게 대중을 그 파시스트적 생성으로부터, 파시스트 되기로부터 분리시킬 것인가?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소수-되기”에서 찾았다. 이들이 말하는 소수란 기존의 거시적 사회관계 속에 존재하는 타자, 곧 피지배 계급이나 저항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러한 타자의 타자, 곧 이 피지배 계급 내에서도 주변화되고 배제된 집단(여성, 이주 노동자, 소수 민족 등)이다. 따라서 문제는 실제로 존재하는 소수 집단을 지원하거나 옹호하는 것을 넘어, 이들을 타자의 타자로 만든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그것의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파시즘에서 해방될 수 있는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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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마음 2014-09-0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항상 받기만 해서 죄송한 마음으로 추석인사드립니다.
좋은 글들, 그리고 그 글들과 함께 주시는 깨우침 많이 감사드립니다.
해피 한가위 맞이 하시기 바랍니다.

추석 연휴엔 좀 쉬시나요?~~~

balmas 2014-09-09 15:47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네요. 추석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지금 연구실에 나와 있답니다.^^;

궁금이 2014-09-2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많이 바쁘신가요?
정치적인 것의 시상사 업데이트가 안돼 무척 궁금하답니당~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면 정말로 좋은 소식?

balmas 2014-09-25 10:50   좋아요 0 | URL
예, 업데이트가 좀 늦었죠?

사실은 추석 연휴 한번 쉬고, 신문사 사정으로 또 한 주가 연기되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미셸 푸코 편이 나갈 예정입니다.^^

관심 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요즘 바쁘다 보니까 서재에 거의 들르지 못하고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연재도 제때제때 글을 올리지 못하는군요.

 

지난 번 회차에 실린 하버마스에 관한 글입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515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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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창녀 2014-09-2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버마스는 ˝나이브˝한 근대주의자일 뿐입니다.
 

사르트르 편을 올리는 김에 다음 번 원고인 루이 알튀세르 편도 함께 올립니다.

 

이 원고는 원래 내일치 신문에 실릴 예정이었는데,

 

신문사 사정으로 인해 한 주 연기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문에는 "마르크스주의 토대에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쌓아"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신문에 실린 원고는 아래 주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486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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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프랑스의 정치와 문화의 전면에서 연일 성가를 높이고 있었을 때, 파리의 윌름가에 위치한 고등사범학교에서는 무명의 한 철학 강사가 마르크스의 저작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1918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동안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그는 1960년에 이르기까지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1959)라는 작은 책과 포이어바흐의 저술을 편역한 <포이어바흐: 철학 선언>(1960) 두 권만을 출간한 상태였다. 몽테스키외에 관한 저작이 호평을 받았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5년 두 권의 책을 함께 출간하면서 루이 알튀세르라는 이름의 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는 일약 파리 지성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부상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이 두 권의 책 제목은 당시 그와 그 주변의 젊은 제자들의 이론 작업의 지향을 요약하고 있는 슬로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저작이 왜 짧은 시간 내에 그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지적정치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0년대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나는 스탈린이 사망한지 3년 후인 1956년 열린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행한 비밀연설이었다. 이 연설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집권 시절 이루어졌던 정치 암살과 고문을 비롯한 각종 비리를 고발함으로써 스탈린 격하 운동을 개시했다. 다른 하나는 1956년 헝가리에서 있었던 민중혁명이었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헝가리 노동자당의 실정(失政)을 비판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일어난 봉기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지만,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군 군대가 혁명 세력을 진압하면서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 두 사건은 서유럽 좌파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1940년대 말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고발하는 문헌과 증언이 잇달았지만, 대중의 기억 속에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반()파시즘 전쟁의 중심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발이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당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 이루어진 스탈린 독재에 대한 고발과 헝가리 혁명에 대한 잔인한 탄압은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실망을 낳았다. 아울러 사회주의 양대 강국이었던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 정세는 이론적으로는 청년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계급 착취와 인간 소외에서 벗어난 해방의 정치 체제와 거리가 먼 것이라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인 계급 지배와 폭력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면,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소외 및 착취에 대한 비판과 인간주의적 이상이 현실 사회주의를 쇄신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개입은 이러한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밝히는 데서 출발했다. 그가 보기에 이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 방식이 아닐뿐더러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기 구분을 제안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사상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었으며, 연속성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1846) 무렵부터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인식론적 절단의 징표가 되는 이유는 이 저작에 청년기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르크스 자신의 고유한 개념들, 곧 생산양식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에 사로잡혀 있는 청년기 저작이 아니라 <자본>을 중심으로 한 후기 저작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절단 이후의 마르크스 사상이 동질적이거나 완결되어 있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논점은 절단을 이룩한 이후에도 마르크스 사상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고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나 인간주의 같은 여러 가지 이론적 편향들이 발생하며, 다시 이는 정치적 오류 및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위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진 마르크스 사상을 개조하고 좀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과제였다.

 

철학자로서 알튀세르의 이론적 독창성은 불완전한 상태의 마르크스 사상, 곧 모순에 빠져 있는 마르크스 사상을 좀더 일관된 사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비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요소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특히 스피노자와 프로이트 사상에 주목했다.

 

우선 이들의 사상은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고유성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프로이트의 과잉결정이라는 범주는 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던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됐는지 해명할 수 있게 해준다. 사회주의 혁명은 식민지 착취와 전쟁,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 정도와 농촌의 중세적 상태 사이의 모순, 지배 계급 내부의 모순이 자본주의적 모순을 과잉결정할 때”(<마르크스를 위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 철학에 담겨 있는 구조 인과성이라는 범주는 역사의 전개 과정이 경제라는 최종 심급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법, 정치, 이데올로기 같은 다른 심급들 간의 상호 작용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좀더 정확히 사고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알튀세르 이전까지 이데올로기 개념은 허위의식이나 기만 또는 지배 계급에 의한 대중의 조작술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며, 또한 그 핵심을 착각이나 기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 없는 투명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충격적이게도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삶의 영역을 상상계로 규정했던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 역시 이데올로기를 생활세계 자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제시된 주장이었다.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마르크스를 위하여>)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핵심은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기만이 아니라 예속적 주체 생산에서 찾아야 한다. 알튀세르는 유명한 호명개념을 통해 자본주의가 계급적 착취에도 불구하고 재생산되는 비밀을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에서 찾으려고 했다. 호명 개념의 핵심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개인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곧 호명 개념은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인식과 실천의 자율적 중심으로서 주체에 기반을 둔 근대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또한 해방적 주체 개념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에 대한 선언이었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탄핵이 제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알튀세르 이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이론적 혁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신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적 운명은 마르크스주의의 운명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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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odna 2014-07-2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알튀세르의 사상은 이것이 핵심이었군요

balmas 2014-07-21 10:02   좋아요 1 | URL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문에 실리는 글이라 충분히 쓰지 못해 찜찜한 대목이 좀 있긴 한데,
아마 이것이 알튀세르의 대략적인 논점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