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16회 원고 올립니다.

 

원래는 이번 주 월요일에 나갔어야 할 글인데, 신문사 사정으로 한 주가 연기되어

 

다음주 월요일치 신문에 실릴 예정입니다.

 

 

신문사에서는 "예속적 주체를 생산하는 ‘규율 권력’의 작동"이라고 제목을 잡았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신문에 실린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57193.html 

 

 

 

------------------------------------------------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내가 상상하는 대로의 미셸 푸코>(1986)라는 짧은 책에서 자신은 푸코와 생전에 아무런 개인적 교류가 없었지만 단 한 번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와 결코 만난 적이 없다. 단 한 번, 68년 5월 당시, 아마도 6월인가 7월 경에(하지만 누군가 그때가 아니었다고 내게 말한다) 소르본 대학 교정에서의 만남을 제외하면. 나는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는데, 그는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5월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뭐라 하든 이때는 좋은 시절이었다. 이때는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익명적으로 누구인지 상관없이 말을 할 수 있었고, 그저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이유 이외에 다른 정당화 없이 환대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바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 비범한 사건의 와중에 내가 다음과 같이 자문하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가 여기에 없을까?”


  68년 5월에 푸코는 어디에 있었을까? 사실 당시 푸코는 튀니지에 있었다. 그는 1966년 출간된 <말과 사물>이 마치 “빵처럼 팔려나가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학계와 문화계의 스타가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파리 대학의 자리를 얻지 못하자 튀니지 대학의 자리를 얻어 프랑스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집필한다. 그동안 그는 단 한 번 파리에 다녀갔을 뿐이다. 따라서 블랑쇼가 말했듯이 그는 프랑스를 뒤흔든 68년 5월의 와중에 프랑스에, 파리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블랑쇼가 “그런데 왜 그가 여기에 없을까?”라고 자문했던 것은 우연한 일일까? 블랑쇼의 말은 푸코가 파리에 있었어야 마땅하다는 뉘앙스를 띠고 있다. 마치 푸코가 없는 68년 5월은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이는 상당히 과장된 생각이다. 68년 5월 당시 시위대들이 열광했던 사상가는 푸코가 아니라 마르크스와 마르쿠제, 그리고 마오쩌둥이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사르트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이들에게는 아직 낯선 사상가였다. 더욱이 푸코 자신이 68년 5월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깐 파리에 다녀가는 동안 소르본 대학에 들렀지만, 시위대의 행렬을 보고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블랑쇼의 물음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68년 5월과 가장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 철학자 중 한 명이 바로 푸코이기 때문이다.


  68년 5월의 반역은 정치 권력을 탈취하지 못했고 가시적인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도 못했지만, 프랑스철학사에서는 하나의 단절을 산출했다. 그것은 지배의 핵심은 사회경제적 지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 질서에 순응하는 예속적 주체의 생산에 있다는 통찰이 낳은 단절이었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68년 반역 직후 저 유명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1970)이라는 미완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예속적 주체를 생산하는지 탐구했다.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1972년 <반오이디푸스>를 써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욕망하는 대중들의 욕망의 도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분석하려고 했다. 그리고 푸코는 <감시와 처벌>(1975)이라는 책을 써서 권력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나의 첫 번째 책”이라고 부를 만큼 이 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현한 바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푸코의 사상적 여정에서 큰 의미를 지닌 책이며, 현대 프랑스철학사에서, 더 나아가 넓은 의미의 해방사상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선출되었을 때 푸코에게 마련된 자리는 “사유체계의 역사” 담당 교수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푸코는 <말과 사물>(1966) 및 <지식의 고고학>(1969)의 연장선상에서 사유체계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 이후 진행된 그의 강의는 애초의 계획과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형벌이론과 제도>(1971~72), <처벌 사회>(1972~73), <정신의학 권력>(1973~74), <비정상인들>(1974~75) 같은 강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권력의 문제로 탐구의 초점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러한 탐구의 결과가 집대성된 책이 <감시와 처벌>이었다.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감시와 처벌>은 일차적으로 근대적인 감옥 제도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탐구하는 역사책이다. 하지만 이것은 독특한 역사학을 보여주는 책이다. 푸코가 “계보학”이라고 부른 방법론에 입각해 있는 이 역사학은 “현재의 역사”를 탐구하는 역사학이다. 현재 우리 사회(곧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구조와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사회와 문화,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지적인 틀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분석하는 것이 “현재의 역사”인 것이다.


  단절의 사상가인 푸코에게 현대 유럽의 사회와 인간은 초역사적인 본질을 지닌 것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라는 먼 과거의 기원에서 연속적으로 계승되어 내려온 것도 아니다. 역사학의 통상적인 관점에 의하면 근대성(modernity), 근대 사회, 근대인이라 불리는 것이 탄생한 시점은 18세기 말, 곧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시민혁명을 통해 중세 질서가 무너지고 보편적인 인권과 시민권이 성립하게 된 시기다. 이 시기는 신분적 질서와 인격적인 예속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와 평등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 시기다. 푸코의 “현재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가정을 문제 삼는다.


  푸코가 보기에 인간의 자유를 발명했다고 하는 계몽주의 시대는 사실 규율권력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속 메커니즘을 수반한 시기였다. “부르주아지가 18세기를 통해 정치적 지배 계급이 된 과정은 명시적이고 명문화되고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적 틀의 설정과 의회제 및 대의제의 형식을 띤 체제의 조직화에 의지한 것이다. 하지만 규율 장치의 발전과 일반화는 이러한 과정의 어두운 이면을 만들어 놓았다. 원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법률 형태는 이러한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규율로 형성된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불균형적인 권력의 모든 체계에 의해 그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다. [...] 현실적이고 신체적인 규율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자유의 기반을 마련했다.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푸코, <감시와 처벌>)


  더 나아가 규율권력 개념은 권력에 대한 통상적인 관점을 해체한다. 우리는 권력을 공적인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곧 청와대나 의회, 행정부, 대법원 같은 곳이야말로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고, 권력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반면 푸코는 권력이 작동하는 실제 영역은 감옥과 병원, 학교, 군대, 공장과 같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이 영역이야말로 개인들을 개인들로서 제작하는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규율은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규율은 (효용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신체의 힘을 증대시키고 (복종이라는 정치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동일한 그 힘을 감소시킨다. 간단히 말하면 규율은 신체와 능력을 분리시킨다.”(<감시와 처벌>) 그렇다면 감옥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사실은 근대적 개인을 생산한 규율권력의 전개과정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따라서 사회의 기원에 개인들 간의 계약을 위치시키는 사회계약론이 기각된다. 왜냐하면 개인은 자연상태에서부터 존재하는, 그리고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권력을 창출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규율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유물론의 한계가 드러난다.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역사의 전개과정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토대라고 주장한다. 푸코가 보여준 것은 사회경제적 토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규율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속적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개조하고 변혁할 것인가? 68년 5월의 반역에서 푸코가 발견해낸 것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궁금이 2014-09-25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전 무슨 일이 있으신가 했습니다.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balmas 2014-09-25 14:51   좋아요 1 | URL
본문에 잘못된 사항이 하나 있었습니다. 두번째 문단에 나오는 ˝모로코˝는 사실은 ˝튀니지˝가 맞습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09-29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에는 혁명이다가 지금은 반역이군요. 다음에는 뭔가요? 역모!

그냥 68년 5월 사건이라고 하면 충분합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09-29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68년 5월은 알제리 독립전쟁이나 쿠바 혁명 및 베트남 전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도 놀랍게도 국내의 학자들은
최대한 그것을 배제하거나 희석화해서 말하더군요.

한국 역시 놀라워요.

르네상스 창녀 2014-09-29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민혁명이라는 말은 여성들은 배제하고 비유럽인들을 배제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을 희석화시키는 말이다.

아이티 혁명도 알고 당시의 남성적인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여성들이 모조리 처형된 걸 알면서도 이런 얘기를
무비판적으로 하는 걸 보면 이런 게 바로 유럽중심주의의 식민적 지배효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