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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획연재 1부 2회 글이 오늘 실렸습니다.

 

2회는 "죄르지 루카치: 베버를 넘어-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입니다.

 

아래 링크로 따라 가시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222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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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연재 2회분 기사를 올립니다.

 

제목을 "베버, 볼셰비키를 근대성에 갇힌 아마추어로 규정"이라고 뽑았네요.

 

아래 링크로 가시면 기사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203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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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월요일(1. 20) 한겨레 신문 "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 연재에 실릴 막스 베버 편 글을 올립니다. 

 

본격적인 연재의 시작인데,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 신문에 수록될 때에는 다소간의 첨삭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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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막스 베버: 정치의 비극-근대성의 쇠우리에 갇힌 러시아혁명

 

 

 

막스 베버(1864~1920)는 생애의 말년에 ‘직업’과 ‘소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독일어 ‘베루프’(Beruf)를 제목으로 삼아 두 차례의 강연을 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충격이 유럽을 휩쓸던 무렵인 1917년 11월 7일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강연을 했고, 약 1년 뒤 이번에는 독일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1919년 1월 28일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을 했다. 이 두 개의 강연은 막스 베버의 이론적 유언으로 불릴 수 있을 만큼 그의 사상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다.

 

또한 이 두 강연은 왜 베버가 마르크스주의의 영원한 이론적 적수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혁명 및 독일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목표로 삼지는 않지만, 베버는 도처에서 볼셰비키 혁명과 독일의 혁명 운동에 대한 비판과 불신을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강연, 특히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일종의 ‘반(反)사회주의 혁명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베버를 반동적인 사상가, 적어도 보수적인 이론가라고 규정해야 할까? 베버의 정치 사상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사상은 단순히 보수주의로 분류되기에는 너무 심원한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 두 개의 강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더 나아가 해방의 정치 일반)의 한계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실로 베버의 문제제기는 죄르지 루카치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를 넘어 한나 아렌트, 모리스 메를로퐁티, 위르겐 하버마스를 거쳐 오늘날의 에티엔 발리바르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비판적 정치 사상에 지속적인 화두를 제공하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사상적 반향의 첫 번째 장소를 베버의 두 강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논점과 관련해보면 베버의 두 강연의 핵심 주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서양의 근대성을 탈주술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탈주술화란 세계의 배후나 근저에 이 세계를 움직이는 무언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 대신 합리화 과정이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이 세계와 사물들을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근대적 개인이 미개인들에 비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미개인은, 인류학자들이 잘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가령 미개인은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고 각종 약초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반면 현대인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전철을 타고 다녀도, 정작 그것의 작동 원리나 설계 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베버의 논점은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를 통해 근대인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이전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을 포함한 세계는 더는 숭배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가 더는 내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베버는 그것을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찾는다. 생명의 유기적 순환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전통 사회의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면 무한한 진보와 끊임없는 변화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근대의 인간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진보 자체가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삶이란 그 진보의 선상에 놓인 작은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버의 탈주술화 테제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의 사회학적 변용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베버는 그렇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우리 시대의 운명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이제는 집단적인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과거에는 예언자의 성령 아래 대중의 격렬한 열정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이제 그것은 광신적인 종파를 만들어낼 뿐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 따라서 베버가 볼셰비키 혁명을 “‘혁명’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장식되고 있는 광란제”(‘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조롱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대인에게 남은 것은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조종하는 정령(Daimon)을 찾아 그에게 복종하는 길이다.

 

탈주술화의 사회ㆍ정치적 표현은 관료제로 나타난다. 베버는 근대 정치의 핵심적인 특징을 관료제의 발달에서 찾는다. 베버는 국가를 일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는 지배관계로 규정한다. 과거에는 군주나 지배자 이외에도 자주적인 귀족들이 독립적인 폭력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지만, 근대 국가에서 이것은 주권자에게 모두 귀속된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이 독립 생산자들의 소유물을 몰수함으로써 이루어졌다면, 근대 국가도 행정 관리 및 노동자로부터 정치적 경영 수단을 몰수하고 그들을 직업적인 관료 집단으로 만들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료제는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정치가 합리적인 경영의 문제가 되면서 잘 훈련받은 전문적인 관료 집단은 더욱 더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국가라는 지배관계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행정이 필요하며, 위계와 규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료제 아래에서 “정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된”(곧 독자적인 지적 판단 및 생산 능력을 상실하고 “물건처럼 되어버린”) 대중적 개인들은 독자적인 가치관과 판단 능력에 따라 결정을 하기보다는 지도자의 명령을 추종하는데 그치기 때문에, 위대한 정치는 불가능해지고 만다.

 

따라서 베버는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정치적 경영 수단으로서 ‘장치’(machine)를 수반하는 지도자민주정치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도자 없는 민주정치, 곧 카리스마적 자질이 없는 직업정치가의 지배를 택할 것인가? 신념윤리에 따라 위대한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결과들에 대한 책임윤리를 지닌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정치만이 탈주술화되고 관료제의 쇠우리에 갇혀 가는 근대 세계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러한 베버의 관점에서 보면 볼셰비키 혁명은 대의에 대한 헌신이라는 점에서는 신념윤리에 충실할지 모르지만, 근대 국가 및 정치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아마추어적이며, 순진한 낭만주의에 빠져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의 이율배반에 대해 맹목적이다. 감격적인 혁명이 지나가면 일상이 찾아온다.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합리적인 경영이 요구된다. 가령 국가와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맞서 싸운 부르주아 제도를 다시 받아들이고 외국 자본을 이끌어 들여야 하며, 과거 러시아의 비밀경찰 요원들을 국가권력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폭력의 악마성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점이다. 베버에게 정치 윤리의 근원은 정치가 폭력을 통해 수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폭력을 사용하여 지상(地上)에 절대적인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요구되며, 이것은 추종자들을 도구화하는 것, 곧 정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통해 성립한 새로운 질서 내에 이미 타락과 부패의 씨앗을 심어놓는다. 그들 각자가 고귀한 윤리적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는 한, 그들은 쉽게 또 하나의 지배 계급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버에게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의 지배와 구체제 권력집단의 지배 사이에는 인물이 교체되었다는 점과 이들의 아마추어리즘을 제외하면”(‘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울한 베버의 진단은 냉철하지만 또한 뚜렷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특히 젊고 야심만만한 사상가들에게 그것은 여러 모로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베버가 죽은 뒤 곧바로 두 명의 이단적인 제자들이 베버를 넘어서는 것을 이론적 목표로 삼았다. 한편으로 헝가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출신의 보수적인 법학자 칼 슈미트는 가톨릭 신학에 기반을 둔 정치학으로 베버를 넘어서려고 했다. 극히 대조적인 이 두 가지 시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의 정치와 사상의 경로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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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집에 일이 있어서 그동안 서재에 들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찾아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 말씀 드리면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오는 1월 6일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한겨레 기획연재를 안내해드리기 위해 페이퍼를 씁니다.

 

이번 연재는 격주로 총 28회까지 진행될 예정이니까 대략 1년 1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글이 실릴 듯합니다.

 

기획 연재의 제목은 <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로 잡았습니다.

 

기획의 취지는, 총론에 나와 있듯이,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사건과 전개과정에 대한 사상적 대응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21세기 새로운 진보 정치와 사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한 40여 명을 다뤄보고 싶었는데, 신문사 사정상 그렇게 오래 연재를 하기는 어렵다고 해서

 

줄이고 줄여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ㅠ.ㅠ) 27명의 사상가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상가들, 이론가들이 빠졌다고 생각하실 분들이

 

꽤 있으실 듯한데, 저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낼 때는 이번 연재에서 다룰 27명 이외에 10여 명을 추가해서

 

40여 명 정도를 살펴볼 생각입니다.

 

아무튼 1년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될 이번 연재에 많은 성원과 조언, 비평을 부탁드립니다.

 

 

 

 

아래 링크로 가시면 전체 총론과 목차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183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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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1. 러시아 혁명의 반향

 

2. 막스 베버: 근대성의 쇠우리에 갇힌 러시아 혁명

 

3. 지외르지 루카치: 베버를 넘어-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4. 칼 슈미트: 사회주의 혁명에 맞선 보수주의 선언

 

 

2. 파시즘과 저항

 

5. 안토니오 그람시: 파시즘을 극복하라-헤게모니ㆍ진지전

 

6. 발터 벤야민: 역사를 구원하는 좁은 문

 

7. 허버트 마르쿠제: 기술적 합리성이 일상을 지배할 때

 

 

3.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8. 존 메이너드 케인스: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하라-수정 자본주의

 

9.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10. 이사야 벌린: 전체주의의 대안-자유민주주의

 

11. 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2. 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4.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13. 장-폴 사르트르: 역사의 총체성을 다시 회복하기

 

14.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먼 우회의 길

 

15. 위르겐 하버마스: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성으로

 

 

5. 68혁명의 철학

 

16.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욕망의 역사유물론

 

17. 미셸 푸코: 규율권력과 주체화

 

18. 마리오 트론티: 노동자 계급에 기생하는 자본

 

 

6. 여성, 해방을 말하다

 

19. 시몬 드 보부아르: 남성과 평등한 여성

 

20. 뤼스 이리가레: 성차의 권리와 정치의 변혁

 

21. 주디스 버틀러: 성 정체성 전복에서 타자의 윤리로

 

 

7. 유럽 중심주의 넘어서기

 

22. 에드워드 사이드: 서양문명이라는 이름의 지배 원리

 

23.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8.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도래

 

24.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급진민주주의

 

25.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의 공산주의

 

26. 필립 페팃: 비지배로서의 자유-신공화주의적 민주주의

 

27. 자크 랑시에르: 몫 없는 이들의 몫-무정부주의적 민주주의

 

28. 에티엔 발리바르: 평등자유명제-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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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를 시작하며

 

 

  20세기는 끝났는가? 21세기는 시작되었는가? 이 연재가 품고 있는 화두는 바로 이 질문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자축했을 때, 20세기의 종말은 자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10월 혁명에서 시작된 세계의 변혁을 향한 거대한 대장정이 결국 부질없는 백일몽에 불과했다는 고해성사를 수반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는 것으로 보였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지난 2008년 이후 심각한 균열과 모순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와 더불어 아랍의 민주화 운동,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의 봉기, 뉴욕의 오큐파이 운동이 전개되었고, 중남미에선 좌파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민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역사란 객관적 연대기의 기록이 아니라 권력과 저항, 지배와 해방의 세력들이 전개하는 길항의 과정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지난 세기의 진보의 실패를 딛고 일어설 새로운 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는 이런 관점에서 20세기~21세기 초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사상적 대응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역사와 시대가 던진 질문에 답하고자 했던 사상가들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낳은 사상적 반향이 연재의 출발점이다. 20세기의 시작을 알린 러시아 혁명은 환호와 더불어 공포와 불안을 낳았다. 막스 베버가 말년의 강연에서 정치의 비극이라는 이름 아래 러시아 혁명의 미래를 불길하게 예언했던 반면, 지외르지 루카치는 러시아혁명에서 베버 사상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의 주체 프롤레타리아를 발견했다. 다른 한편 칼 슈미트는 소비에트주의와 아메리카주의에 맞설 수 있는 보수주의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정치적 반응은 파시즘으로 표출되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로 이어지는 반동의 정치는 유럽을 어두운 대륙으로 만들었다. 이 반동의 흐름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파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고, 발터 벤야민은 좌절의 끝자락에 역사의 메시아를 호출하여 파시즘에 저항하려고 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 자본주의 세계 속에 일상적 전체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음을 폭로했다.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자유주의 진영은 곧바로 새로운 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른바 냉전이 시작되었고, 자유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수정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제시했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에 맞서 신자유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었다.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가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한나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입각한 정치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또한 존 롤스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소련과 중국의 갈등으로 표출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이라는 문제였다. 장-폴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조건이라고 선언하면서 역사적 총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탐색했다. 반면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로 돌아가기 위해 스피노자, 프로이트를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서독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주의 대신 근대성의 미완의 잠재력에서 비판이론의 토대를 발견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를 휩쓴 68 혁명은 전후 자본주의 체계의 모순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정통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급진적인 해방의 사상을 위한 동력을 제공해주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반(反)오이디푸스󰡕에서 욕망에 근거를 둔 역사유물론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미셸 푸코는 이 책을 격찬했지만, 그들과는 사뭇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역사유물론의 길을 걸어갔다. 이탈리아에서는 마리오 트론티가 마르크스주의 생산양식 개념을 급진화하면서 노동자주의에 입각한 역사유물론을 구상하고 있었다.

 

20세기 사상이 이룩한 탁월한 성과 중 하나는 페미니즘 및 서구 중심주의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과 평등한 여성의 가능성을 모색했고, 뤼스 이리가레는 여기에 맞서 성적 차이에 기반을 둔 정치 문명을 추구했다. 초기에 젠더 정체성의 문제에 주력하던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에는 근대의 실패와 폭력을 윤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길을 탐색하고 있다. 영원한 망명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 문명이 보편 이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비서구인들을 차별하고 지배하기 위한 원리였음을 보여주었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해체론의 관점에서 서발턴이라는 이름에 담긴 아포리아를 해명했다. 그것은 피억압자를 위한 해방 운동 속에 피지배자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담겨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신자유주의적 예속화를 동반하면서 이론가들에게 새로운 사상적 과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라는 과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제창하면서 급진민주주의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면, 󰡔제국󰡕의 공저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다중에 기초를 둔 공산주의적 민주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또한 영미 정치철학의 후예인 필립 페팃은 로마적인 공화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비지배 공화주의 이론을 제안하고 있다. 한편 알튀세르와 결별한 뒤 오랫동안 노동자 문서고에서 작업했던 자크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의 몫에 기반을 둔 정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제시한다. 그리고 에티엔 발리바르는 1789년 󰡔인권선언󰡕에 대한 재독해를 통해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연재가 20세기 변혁 운동의 실패와 한계를 딛고 새로운 해방의 세기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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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4-01-0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단독으로 글을 쓰시나요? 아니면 다른 (전공자) 필자분들도 참여하시나요?

balmas 2014-01-04 23:45   좋아요 0 | URL
예 이번 기획은 저 혼자 단독으로 쓰는 기획입니다.

독자2 2014-01-0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아침 한겨례에서 읽었습니다. 의미있는 작업이 되실 것 같군요. 그런데 서양사상사위주라 이걸 동양과 한국에서 받아들이면서 일어났던 사상가, 철학가들을 중간중간에 넣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들었습니다.

balmas 2014-01-07 01:01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양이나 비서구 사상가들이 좀더 많이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저도 좀 유감입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낼 때는 고려하도록 하겠습니다.

2014-01-09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4-01-0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이 기획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이 기획은 연재가 끝난 후에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쳐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김동우 2014-01-1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다 서구 유럽과 북미 지식인들이군요. 20세기 사상에 비서구는 없나 보네요

balmas 2014-01-10 20:2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 비평이 당연히 나올 수 있겠죠.

그런데 사이드나 스피박은 적어도 유럽인이나 북미인은 아니죠.

저도 비서구 사상가를 몇 사람 더 추가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네요.

책으로 낼 때는 조금 더 보완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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