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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프리즘 총서 소식이 그동안 뜸했는데요, 지난 9월에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의 [생명자본]이

출간되었습니다. 

 

 

 

 

 

 

 

 

 

 

 

 

 

 

생명자본이라는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성을 얻어갈 만한 주제인데요,

그동안 국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별로 주목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05년 황우석 사건 때 큰 충격을 받아서

생명권력, 생명정치, 생명자본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06년 [문학과사회]에서 "푸코와 생명권력"이라는 특집을

꾸민 것은 그런 관심의 소산이었는데, 그뒤 일하게 된 직장이

이 문제와 크게 관계가 없는 곳이어서 솔직히 그동안 이 문제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앞으로 비판이론이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라잔의 이 책은 생명권력과 생명공학, 의료자본 복합체가

제기하는 쟁점들을 탐구하는 선구적인 저작입니다.

많이 읽어주시고 토론해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프리즘 총서에서는 생명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주요 저작들을 꾸준히

출간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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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2-12-2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리즘 총서의 출간 결정은 발마스 님이 하시는 건가요?

balmas 2012-12-25 11:32   좋아요 0 | URL
예, 제가 주로 의견을 내지만 출판사와 논의를 하죠.
 

프리즘 총서의 두번째 책으로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출간됐습니다.  

 지난 2004년에 이제이북스에서 초판이 나온 뒤, 몇 년 간 절판됐다가 이번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2판이 나왔습니다. 2판을 내면서 초판에 담긴 몇 가지  

  인쇄상의 오류와 용어 및 인명 표기의 잘못 등을 바로 잡고 문장 표현들도  

  여러 곳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초판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기 때문에  

  초판을 읽고 논의하고 인용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2판을 내기 위해서 애써준 그린비 출판사 여러분들, 특히 편집부의  

   김재훈 씨에게 깊이 감사드리고 싶네요.^^ 아주 꼼꼼하게 교정을 봐줘서 

   초판의 잘못들을 바로 잡는 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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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2010-04-0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나왔군요. 올해 몇 권(수정판을 포함해서) 정도 출간되는지 궁금하군요.

balmas 2010-04-08 03:01   좋아요 0 | URL
글쎄요, 한 10여권 정도는 낼 생각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4-09 15: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 주머니가 가벼워지겠군요. 언젠가는 목침으로 사용 가능한 발마스 님의 두툼한 논문모음집이나 "스피노자 읽기(가제)" 같은 저작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balmas 2010-04-12 21:21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그렇지 않아도 목침만한 책을 하나 준비중입니다.^^

... 2010-04-07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별 관련없는 질문인데... 논문들은 어떤 학술지에 주로 제출하시나요? 발마스 님 같은 분들이 올리는 학술지라면 꼭 읽어보고 싶은데요...

balmas 2010-04-08 03:06   좋아요 0 | URL
예, 지금까지 많이 낸 학술지는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에서 내는 [철학사상](3편),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내는 [근대철학](3편)이고, 그밖에 박종철출판사에서 낸 [트랜스토리아]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내는 [민족문화연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서 내는 [인문논총],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내는 [철학논집], [세계의 문학], [문학과 사회], [사회비평], [현대비평과이론] 같은 곳에도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이 학술지나 계간지들 중 상당수는 각 대학도서관 홈페이지에 있는 DBPIA나 한국학술정보 같은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해보실 수 있고, 아니면 [민족문화연구]나 [인문논총] 같은 경우는 해당 홈페이지에서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서재 카테고리 중에 "단상들"을 살펴보시면 제가 지금까지 발표한 글들을 올려놓았고, 거기에 출처를 표시해놓았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EGEL 2012-11-1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랑스 革命이 流血과 恐怖로 흐른 것은 個人의 自由가 國家를 무너뜨릴 만큼 지나치게 肥大해진 탓이라고 본 헤겔은 <法哲學>에서 立憲 君主制를 擁護하고 選擧制에 의한 上`下 議院의 設置와 民間 官僚에 의한 行政府를 主張했다.

balmas 님은 21世紀의 헤겔이 되려는 것은 아닐까?
 

프리즘 총서의 첫번째 책인 얀 아스만의 [이집트인 모세]가 이번 주에 나왔습니다.  



경북대에 계신 변학수 선생님께서 번역의 수고를 맡아주셨습니다. 사실 이 책은 번역자에게는 무척이나  

괴롭고 귀찮은 책인데, 이집트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로 된 수많은 문헌들이 인용되고  

있고 많은 경우 번역 없이 그대로 각주에 노출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번역을 해주신 변학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첫번째' 책이라는 것에 대해 큰 의미는 부여하고 싶지 않은데, 프리즘 총서에서는 1, 2, 3 같은 숫자보다는  

책 하나하나가 지닌 독특한 내용과 의미, 효과를 중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번째 책이라는 것보다는  

이 책의 탁월한 내용과 깊은 의의, 또 그것들이 국내의 인문학 논의에서 산출하게 될 효과들이라는 측면에서 

좀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탐독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참고로 표지에 대해 말씀드리면, 프리즘 총서는 7개의 작은 갈래로 이루어져 있고 각 갈래에서 나오는 책들은 

고유한 색깔을 띤 표지로 구별되는데, 얀 아스만의 이 책은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에 속해 있어서 노란색 

표지로 돼 있습니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낸 책 소개인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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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reenbee.co.kr/book/book_info.php?article_id=171&series=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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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01-1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나요?

balmas 2010-01-1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오랜만이세요.^^ 저는 재미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어요.^^ 서양문명사나 종교사 등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아주 유익하고 좋은 책이랍니다.

stella.K 2010-01-19 11:18   좋아요 0 | URL
헉, 오늘에야 님의 댓글을 보네요. 그렇군요.
정말 오랫만이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10-01-20 15:44   좋아요 0 | URL
예, 스텔라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책들을 접할 때마다 항상 의문이 든다. 과연 우리가 유럽인들보다 더 자세히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지 하는 의문이 떠나지를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 조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지식생산자 또는 소비자들의 언급은 항상 빈약하다. 유럽중심주의적 이분법을 비판하면서도 본인이 그런 이분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화여대 강철구 씨 같은 분이다. 아닌 것 같다고?

현실의 인식은 각자가 항상 다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닌가? 권력은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보면 이 세계에 민주주의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돌출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이 문제인가? 아니면 문명 자체가 문제인가?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라? 과연 그런 것이 있을까? 우연적인 전개과정을 어떤 결과가 주어진 시점에서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라고 인식하고 결론을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프리즘 총서가 나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기존에 나왔던 책들이 다시 나온다는 점에서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기존에 나왔던 책들은 소프트커버로 나오면 사고 안 나오면 안 살 것이다. 믿을 수 있는 번역들인지는 발마스 님이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다.

balmas 2010-01-19 01:44   좋아요 0 | URL
ㅎㅎㅎ 프리즘 총서의 책들은 모두 소프트커버로 나올 예정입니다.^^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번역은 될 수 있는 한 유능한 분들께 맡기고 세심하게 검토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리즘 총서가 나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왜 탈-근대적인 것, 포스트식민적인 것, 철학적인 것, 예술적인 것, 정치적인 것, 신자유주의, 생명권력을 서로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어봐도 저 프리즘들은 모두 겹쳐서 이야기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푸코는 분과학문의 경계는 자의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발마스 님 또는 프리즘 총서의 저 자의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푸코를 얘기하지만 별로 푸코적이지도 않다.

탈-근대적이면서 포스트식민적이고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이며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면서 예술적인 것 아닌가? 그것들이 별개의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이 프리즘 총서의 기획에서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이 프리즘 총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을 꿈꾸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들의 저작들을 내는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

발마스 님이나 프리즘 총서 기획자는 내 글을 부당하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면 물어 보자. 라틴 아메리카 해방 철학의 대가인 엔리케 두셀이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이 아니라 왜 포스트식민주의의 프리즘에 속해 있는가?

그는 "트랜스모더니티"라는 개념으로 유명한데 그러면 탈-근대성의 프리즘에 넣을 수도 있지 않는가? 또 정치적인 프리즘에 넣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화보다는 글로벌화 또는 전지구화라는 번역이 더 나아 보이지만 어쨌든 신자유주의가 모던이나 식민주의와 무관한가? 그것은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것과 나아가서 예술적인 것과 생명 권력과 무관한가?

쓸데 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아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진보적이며서 새롭기만 한 것은 문제가 있다. 우물 안 개구리인 내가 진보적인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 것은 이런 근거 때문이다.

balmas 2010-01-19 01:43   좋아요 0 | URL
오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네요.^^ 맞습니다. 프리즘의 갈래 분류는 얼마간 자의적입니다. 하지만 그 분류를 확정된 경계로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얼마간 실용적이고 편의적인 분류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두셀의 저작은 철학적인 것에 들어갈 수도 있고, 탈-근대성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저작들도 마찬가지죠. 우물안개구리 님처럼 이 저작들을 상호 연관성의 시각에서 봐주신다면 편집자로서 더할나위없이 기쁘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차피 지식생산자들은 독자들(소비자들)을 지배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발마스 님은 권력자인 것이다. 소비자들은 그런 불평등한 관계 안에서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다. 이것은 발마스 님의 인격과는 무관한 조건이다. 그렇다고 지식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은 필요하다.

나는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대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화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이미 인식론적 폭력을 수반한다.

대화가 아니라 대결을 해야 한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대결은 가능하다. 역사 속의 수많은 농민봉기를 상기해 보시기 바란다. 독자는 저자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인 언어적 구성물과 대결하면서 저자조차 모르는 그 언어적 구성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 "의미의 의미"를 통해 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 2010-01-27 23:2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독자들은 소비자고 발마스=권력자라니 그건 정말 어이가 없군요; 그건 대체 얼마나 "자본주의"적인 정식화입니까? 대화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데, 푸코에 대해서 생각해보신다면 오히려 대화가 평등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충분히 생각해 보실 문제 아닐지.

푸코광신도 2010-02-12 19:2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님 제가 보기에 우물 안 개구리는 푸코광신도가 아니라 알튀세르나 스피박의 광신도입니다. 형식적인 의미에서의 대화가 아니라 서로 절대적인 타자로 만나는 것, 서로 대등한 관계로 대면하는 것을 대화로 생각하는 거지요. 스피박이 들뢰즈나 푸코를 어떻게 비판했는지 상기해 보세요. 지식생산자가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타자화시키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나요? 대상화되는 자들도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고 그들을 마치 주체인 것처럼 묘사하는 지식생산자도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다는 거죠. 거기서 무슨 대화가 가능할까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거기서 발생하는 거죠. 아무튼 제가 이해하는 우물 안 개구리 님의 얘기는 그렇습니다. 이름부터가 우물 안 개구리 아닙니까?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강조한다. 역사 속에서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란 것이 있을까?

그 필연적인 전개과정은 항상 결과가 주어진 시점에서 인식이 시작된다. 우연적일 수도 있는 것을 필연으로 배치하고 인식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 한마디가 발마스 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프리즘총서가 나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프리즘총서가 나오는 것이 필연적인 전개과정일까? 아닐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해야 할 것인가? 전개과정은 우연이고 인식방법이 필연적인 것은 혹시 아닌가?

<말과 사물>도 재출간됐으면 좋겠다. 7개의 프리즘 중에 어디에 속할지 알 수 없지만 그 책의 앞부분의 동물을 분류하는 방식이 프리즘 총서의 분류 방법과 묘한 조화 또는 부조화를 이룰 것이다.

소프트커버주의자 2010-01-18 18: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럼 뭐 해! 뻘짓인 걸!

발마스 님 로그인 걸어 버리세요.

miro 2012-01-13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책이네요. 감사합니다. *ㅍ*

balmas 2012-01-14 00: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미로님.^^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 하시길. :)
 

 올해부터 그린비출판사에서 '프리즘 총서'라는 제목의 총서를 하나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작년 초부터 나와서   

한 1년 간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올해 초부터 이제 책을 내게 됐습니다. 총서의 기획과 운영은 예전부터 해보려고 하던 

일이었는데, 그린비 출판사의 후의와 배려 덕분에 올해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안팎으로 엄혹한 상황이어서 더 부담스럽고

어깨가 무거운데, 멀리 내다보고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낌없는 조언과 질책,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프리즘 총서를 소개하기 위해 써본 것인데, 다소 거창한 것 같아서 좀 쑥스럽긴 하지만, 총서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좀더 논의를 다듬고 발전시켜보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프리즘 총서"에  

대한 일종의 소개문으로 얼마간 쓸모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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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총서를 시작하며

 

 

총서에 대하여

 

총서는 국내의 독자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사실은 매우 낯선 어떤 것이다. 국내 출판계에는 지금까지 다수의 총서들이 존재해왔고 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름은 “총서”(叢書)나 “신서”(新書) 아니면 “문고”나 “시리즈” 등과 같이 제각각 불려 왔지만,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총서를 선보였다. 가령 창비의 “창비신서”나 민음사의 “이데아 총서” 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는 “현대의 지성”, “우리 시대의 고전” 같은 것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또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에서 조금 더 작은 규모로, 하지만 좀더 전문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펴내는 총서들도 존재한다. 1990년대 초에 솔 출판사에서 출간했던 “입장” 총서는 당시에 국내에 막 소개되고 있던 알튀세르와 데리다, 들뢰즈, 세르 등의 저작을 소개하고 루카치, 벤야민, 아도르노 및 국내 비평가들의 저작을 함께 출간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또 문학동네에서는 “모더니티 총서”라는 표제 아래 조르주 바타유,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과 같은 현대의 주요 사상가들의 저작을 펴내기도 했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후마니타스에서 내는 “폴리테이아 총서”, 경성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경성대 문화총서” 등이 있다. 이 두 총서는 뚜렷한 주제를 중심으로 국내외의 주요 저작들을 지속적으로 펴냄으로써 총서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국내에는 엄밀한 의미의 총서가 존재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고, 또 그것이 출판 활동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지도 못한 것 같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의 총서란, 주로 인문사회과학계의 지식인들이 해당 학문 분야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담론들을 생산하거나 소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학풍 내지 학문적인 흐름을 형성해나가는 지적 중심을 가리킨다.

 

프랑스에서 총서의 위상

 

국내와 달리 외국, 특히 학술 선진국이라고 할 만한 구미의 여러 국가에서 이런 의미의 총서는 출판 및 학술 활동의 기본적인 토대이자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인문사회과학계와 출판계는 가히 총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할 만큼 총서 형식이 출판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들은 거의 대부분, 프랑스어로는 “콜렉숑”(collection)이라고 불리는 총서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학문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동료들 및 후학들과 더불어 독자적인 사상의 흐름을 개척했다.

예컨대 구조주의의 전성 시대에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수아 마스페로(François Maspéro) 출판사에서 “이론”(théorie) 총서를 중심으로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도미니크 르쿠르, 미셸 페쇠 같은 제자들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또한 자크 데리다는 동료들인 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사라 코프만과 함께 처음에는 플라마리옹(Flammarion) 출판사에서, 나중에는 갈릴레(Galilée) 출판사에서 유명한 “효과 속의 철학”(la philosophie en effet)이라는 총서를 해체론의 본산으로 삼아서 활동했다. 폴 리쾨르 역시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철학의 질서”(L'ordre philosophique)라는 총서를 만들어 수많은 외국 철학자들 및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출간한 바 있다. “철학의 질서”는 현재는 알랭 바디우가 바르바라 카생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는 미뉘(Minuit) 출판사에서 “공통감”(sens commun)이라는 총서를 맡아서 자신의 저작들을 비롯하여 프랑스 국내외의 철학, 사회과학, 언어학, 예술론 분야의 걸작들을 출간하고 소개했다.

프랑스의 총서들은 이처럼 세계적인 학자들만이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학계에서 나름의 학문적 위치를 인정받는 학자들은 너나없이 모두 한두 개의 총서를 맡고 있으며, 심지어 5-6개의 총서를 담당하는 연구자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총서를 맡은 학자들의 학문적인 역량에 따라 어떤 총서들은 프랑스 지식계를 대표하는 학문 활동의 거점으로 인정받는다. 가령 저명한 헤겔 연구자이자 프랑스 강단철학계의 거목이었던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가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창설했고 현재는 프랑스 데카르트 연구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이 맡고 있는 “에피메테우스”(Epimethée) 총서는 프랑스 철학사 연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총서로 인정받고 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쥘 뷔유맹의 [대수의 철학], 장-프랑수아 쿠르틴의 [수아레즈와 형이상학의 체계], 장-뤽 마리옹의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프리즘],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의 [스피노자. 경험과 영원] 등과 같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강단 철학 연구의 걸작들이 이 총서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 총서에서 책을 출간하는 것은 그만큼 학문적인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프랑수아즈 발리바르 등이 1982년에 프랑스대학출판부에서 창설한 “철학들”(Philosophies)이라는 총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스피노자와 정치], [클라우제비츠와 전쟁], [뒤르켐과 자살]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상가들의 한 가지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이 총서에서 내는 책들은 문고본 판형으로 권당 120여쪽(최근에는 160여쪽으로 증면되었다) 분량의 작은 책들이지만, 총서에 참여하는 저자들이 프랑스 철학계를 주도하는 학자들(가령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프랑수아즈 다스튀르 등) 및 유망한 신진 학자들이기 때문에, 책들이 하나 같이 우수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 총서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밖에도 인문학계에는 수없이 많은 총서들이 존재하며, 갈리마르나 쇠이유, 프랑스대학출판부 등과 같은 대형 출판사에는 각각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총서들이 존재한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내는 수십 개의 총서들 중에는 유명한 “사상 총서”(Bibliothèque des idées)가 있으며, 이 총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갈리마르 출판사의 인문학 출판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1949),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 알렉상드르 쿠아레의 [뉴턴 연구](1968), 레지스 드브레의 [이미지의 삶과 죽음](1992) 등이 이 총서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따라서 프랑스 학계 및 출판계의 흐름을 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권위 있고 신망 받는 총서들에서 어떤 책들이 나오고 있는지, 저명한 학자들이 새로 시작한 총서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누가 어떤 총서들을 맡아서 어떤 책들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프랑스 학계나 인문사회과학 출판계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 학계에서 총서의 역할

 

프랑스처럼 철저하게 총서 체제로 운영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는 영미권 출판계에서도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총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지난 1970년대 이후 미국 인문학계에 “비평 이론”(critical theory) 내지 “이론”(theory)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형성되는 데서 총서가 수행한 역할이다.

“비평 이론”이나 “이론”은 미국 인문학계에서 대륙 철학, 특히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현대 프랑스 철학과 그것을 원용하는 다양한 인문학 작업들(문학, 역사학, 여성 이론, 정치학, 인류학, 유럽 철학 등)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최근에는 정치철학과 사회철학 연구에서 대륙 철학 내지 포스트구조주의적 이론을 원용하는 작업들을 “정치 이론”(political theory)이라는 명칭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론”은 주로 영문학과나 불문학과, 독문학과, 비교문학과 같은 문학부들, 그리고 인문학부 같은 데서 많이 하며, 유럽,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소속되어 강의나 강연, 연구활동을 하는 곳도 이런 곳이다. 예컨대 데리다나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의 불문학 및 로만스어 학부 소속이었고, 우리가 볼 때에는 철학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미국의 학자들(프레드릭 제임슨, 주디스 버틀러, 로돌프 가쉐 등)도 소속은 이처럼 문학부 쪽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이론>이라는 분야는 대개 196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프랑스 철학 및 인문학의 수용, 특히 1966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유명한 구조주의 학술회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회의에는 데리다와 라캉, 롤랑 바르트, 르네 지라르, 장-피에르 베르낭 같이 이후에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과 문화계를 대표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으며, 이 회의 이후 미국에 본격적으로 구조주의 및 프랑스 철학과 이론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의 철학계는 분석철학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과에서는 이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여지가 없었고, 대신 이 사람들은 불문학과나 비교문학과 등으로 초빙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자들 및 다른 유럽의 철학자들이 문학부 소속으로 활동하게 된 건 얼마간 우발적인 제도적 환경 때문이었는데, 이게 놀랍게도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된다. 미국의 문학 이론계는 1950년대까지 신비평이라는 흐름이 지배적이었으며, 1960년대 이후로 소수의 이론가들이 이 흐름을 대체할 새로운 비평이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명한 게 바로 구조주의였다. 구조주의는 신비평의 이론적 엄격함 못지않은 엄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신비평처럼 문학 자체의 영역에 폐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문학계에서 구조주의는 점차 확산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구조주의 자체는 원래 철학에서 처음 시작된 게 아니라 인류학이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및 과학사 같은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이 각 영역의 문제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지고 확산된 지적 흐름이었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워낙 그 성격 자체가 학제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고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서 좁은 의미의 문학 분야를 넘어서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체에 걸친 논의에 개입하게 되었고 이들 분야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는 이처럼 인문학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학술지들이 창간되는데, [크리티컬 인콰이어리](Critical Inquiry)나 [다이아크리틱스](Diacritics) 등과 같은 학술지들이 대표적이다. 이 학술지들은 구조주의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만이 아니라, 기호학과 문학이론, 인류학, 사회학,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영화이론,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같은 다양한 분야의 논의들을 소개하고 토론하기 위한 장을 제공해 주었다. 이 학술지들의 대표적인 필자들이 바로 데리다, 폴 드 만, 푸코, 리오타르,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학술지들이 큰 성공을 거두고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비슷한 성격의 학술지들이 여럿 창간되기 시작하고 “이론”의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론”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출현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총서의 역할이다. 이론의 형성 및 확산에서 특히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미네소타 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했던 “문학의 이론과 역사”(Theories and History of Literature)라는 총서다. 비교문학자인 블라드 고드지히(Wlad Godzich)와 독문학자 요헨 슐테 자세(Jochen Schulte-Sasse)가 편집 책임을 맡았던 이 총서는 주로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철학자, 문학이론가, 비평가들의 책을 100여 권 가까이 번역ㆍ소개함으로써 미국 인문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총서에서 출간된 대표적인 책들로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조건』, 『쟁론』,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모리스 블랑쇼의 『무한한 대화』, 만프레트 프랑크의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의 『언어와 죽음』, 미하일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 등이 있다.

존 힐리스 밀러 같은 대표적인 비평이론가가 평가하듯이 “‘문학의 이론과 역사’ 총서는 10여년 이상 동안 중요한 이론 저서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미국의 지적인 삶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The Theory and History of Literature series has done an immense service to American intellectual life for more than a decade in making available important books in theory.” 그 결과 <이론>이라는 분야는 단순히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의 한 조류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받는 결과를 낳았으며, 데리다 같은 사람은 “이론”의 등장을 20세기 후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학문적 사건으로 꼽은 바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이 총서가 중단된 다음에는 스탠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지금도 출간 중에 있는 “자오선”(Meridian) 총서나 “현재의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같은 총서가 비슷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총서에서는 데리다, 레비나스, 블랑쇼, 장-뤽 낭시, 베르나르 스티글레, 조르조 아감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등과 같은 현대 사상의 거장들의 저작을 다수 번역ㆍ소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권의 중견 이론가 및 신예 학자들의 저작들을 출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이러한 총서들은 외국의 사상들을 독자적으로 변용하고 재창조하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미국 인문사회과학계의 대표적인 총서 중 하나인 “독일 사회사상 연구”(Studies in German Social Thought)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철학자인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의 책임 아래 MIT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고 있는 이 총서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하버마스의 이론을 미국에 체계적으로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총서에서 출간된 하버마스의 저작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 [탈형이상학적 사유], [사실성과 타당성] 등 20여권에 이르며, 80년대 중반 이후에 출간된 거의 모든 하버마스의 저작들이 이 총서에서 출간되었다. 그밖에도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같은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사상가들 및 악셀 호네트를 필두로 한 3세대 학자들의 저작도 체계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따라서 “독일 사회사상 연구” 총서가 없었다면 오늘날 영미권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및 하버마스의 사상이 자신의 영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저명한 좌파 학술 출판사인 버소(Verso) 출판사의 경우에도 다수의 총서를 운영하고 있다. 가령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맡고 있는 “프로네시스”(Phronesis) 총서에서는 두 사람의 저작들만이 아니라 정치철학 및 사회이론에 관한 빼어난 저서들을 여러 권 펴내고 있으며, 마이크 데비이스가 편집을 맡은 “헤이마켓” 총서에서는 주로 문화정치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50여권에 이르는 저작들을 출간하고 있다. 그밖에도 시카고 대학 출판부나 뉴욕대학 출판부 같은 대형 대학 출판부들을 비롯해서 영미권의 대형 출판사들에서도 여러 가지 총서들을 운영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총서의 의미

 

구미 학술계에서 총서가 지니는 이러한 위상을 감안해봤을 때, 총서가 학술 활동 및 출판 활동에서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총서의 일차적 의미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와 출판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출판”은 “publishing”이라는 원어가 가리키듯이 좁은 의미의 상업적 활동을 넘어서 사회 전체에 대해 지식과 정보의 내용을 생산ㆍ유통하고 그것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목표로 삼아왔으며, 또 마땅히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더욱이 전자통신기술 및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의 “publishing”은 전통적인 의미의 문자 매체 및 활자 인쇄의 영역을 넘어 각종 전자 매체를 사용하는 영역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게다가 웹사이트와 블로그 등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publishing”은 과거와 같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엄격한 구별과 위계를 더 이상 전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출판이 지니는 의미는 훨씬 더 막중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는 모두 급격히 변화하는 여건 속에서 “publishing”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1990년대 초에 일부 지식인들이 전자출판이 열어놓을 새로운 미래에 대해 자못 기술결정론적인 낙관론을 펼친 적이 있으나, 새롭게 확장되고 변화된 출판 공간에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과제를 어떻게 심화하고 전진시킬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이 수행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이에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는 신자유주의적인 학술 영역 재편 속에서 점점 비판적 사고를 위한 입지를 잃어갔고, 인문사회과학 출판계 역시 지적 시장의 개방과 학습 교재 및 실용서적 중심의 출판 흐름 속에서 대중적인 저술들의 출판에서 자신의 활로를 찾아왔다. 하지만 대중성 일변도의 출판만으로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만그만한 수준의 대중적인 교양서들의 출판만으로는 독자들의 지적 욕구들을 얼마간 충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지적 활동을 수행하는 교양 대중을 형성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의 형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오늘날 “publishing”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와 출판계가 공통으로 직면한 과제 중 하나는 한국 사회 공론장의 강화와 교양 대중의 확장이라는 선순환 구조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학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뜻있는 출판인들의 선의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계는 대학의 좁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면서 오직 등재지 논문 쓰기에 매달리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사유의 과제를 감당해야 하고, 출판계는 “publishing”이라는 개념이 본래 함축하는 “공론 형성”이라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양자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총서 체제의 구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총서 체제가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총서 체제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좀더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긍정적인 경쟁 관계를 도모하는 장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총서 체제가 갖는 두 번째 의의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한국 지식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이전보다 공론장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학술계, 특히 인문사회과학계가 이른바 “학진 체제”로 재편되고 등재학술지 중심의 학술지원정책이 정착되면서, 과거 한국 사회의 공론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공론 학술지의 기능이 약화되고 그 대신 각종 전공 분야의 학술지를 내는 분과학회를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은 점점 더 협소한 전공 분야로 축소되고 파편화되어갔다. 등재학술지 중심의 지원정책이 학술 평가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개별 논문의 수준을 향상시킨 것은 긍정적인 기여라고 볼 수 있으나, 그 대가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기능이 약화된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87년 이래 한국 사회가 이른바 민주화의 시기로 접어든 이후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또는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확장과 내실화가 필수적이었지만, 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고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의 방향에 따라 재편되면서 사회적 공공성과 더불어 공론장 역시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물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가 거의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성과 공론장의 기능 약화를 피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특별히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를 탓할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고, 남미를 비롯한 주변부 국가들에서도 대안적인 세계화를 위한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데 비하면, 한국의 경우 개별적인 몇몇 사례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비판적인 지적 흐름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것이 인문사회과학 스스로 자신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얼마나 연결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정권이 바뀐 이후에야 비로소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협소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비판적인 논의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한 이론적 입장을 선도하거나 공유하는 지식인들이 총서를 조직하여 작업한다면 좀더 효율적인 이론의 생산과 유통 및 대중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며 또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나 미국 등의 사례에서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문제는 국내의 지적ㆍ물질적ㆍ제도적 조건 속에서 이러한 모범적인 사례들을 얼마나 독자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셋째, 총서 형식은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광범위한 교양 대중의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질적ㆍ양적 측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1980년대 이후에는 고등교육 졸업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교양 대중의 규모가 급격히 성장했다. 그리고 교양 대중의 증가는 인문학에 대한 수요의 증가로 이어져서 대학 바깥에서 다수의 인문학 연구 공간이 생겨나고 대중 교양 강좌들이 개설되었다. 또한 출판에서도 대중적인 인문학 저술의 수요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처럼 두드러진 교양 대중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학에서는 이러한 수요를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대학 바깥의 사설 기관들에게 일임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인문학 위기에 대한 목소리는 바로 대학 영역 안에서의 인문학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목소리 속에 대학 바깥에 존재하는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의 문제에 관한 관심과 고민은 그다지 많이 담겨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인문학 수요가 증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반기고 있지만, 그러한 수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교양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출판계는 대중 교양서와 인문서 출간으로 “공론 형성”의 기능을 대신해왔다.

이러한 괴리를 넘어서 교양 대중과 좀더 의미 있는 지적 소통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총서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대학이 지닌 인문사회과학 역량을 좀더 효과적으로 교양 대중에게 제시하는 일이면서 출판사가 지닌 공론 형성의 기능을 좀더 충실히 수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교양 대중은 단지 지식의 객체, 교양 지식의 소비자인 것만은 아니다. 스피노자와 그람시 또는 랑시에르가 각각 강조했듯이 인간은 사고하며 대중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은 대학의 연구자들이 대학 바깥의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일방적인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담론이 사회의 좀더 넓은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대중들이 지닌 집단적인 창발적 능력이 새로운 지적 담론과 상상력을 고무하는 상호 구성적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총서 체제가 이러한 관계 방식을 고무하기 위한 유용한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리즘 총서의 지향

 

프리즘 총서는 총서가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해야 하는 이러한 역할에 대한 자각에 더하여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학계 및 출판계의 동향에 대한 비판적 반성 위에서 출발한다. 프리즘 총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신자유주의라는 “유일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단일한 백색의 빛을 뿜어대는 그 유일사상을 분해하고 그 빛에 감춰진 다양한 사고 및 실천의 잠재력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전개되기 시작한 이후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시장 원리의 확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국가 구조 및 사회적 관계에서부터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전면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총체적인 지배 원리로 군림해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이나 고발, 심지어 저주의 목소리는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이론과 정책 및 제도적 실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서유럽에서는 좌파 정당들마저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를 대부분 수용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나 단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급진적인 반(反)자본주의적 전망을 제시하지만, 입장의 선명함에 비해 설득력 있는 분석과 논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이며 총체적인 지배 원리로 군림해왔다고 해서 그것이 단일한 중심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은 항상 다양하며 긍정적으로 작동하며, 그것이 총체적인 지배 효과를 산출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양한 층위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구축되고 재구축되고 변화하고 수렴하면서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단일한 권력, 단일한 지배 원리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유일한 중심이나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환원하지 않고서도 그것이 발휘하는 총체적인 지배효과를 분석하고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오늘날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근본 과제라고 믿는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면적인 분석이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가 산출하는 총체적인 지배 효과에는 사회 구조의 재편성과 더불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익 추구자로서의 개인, 유일한 조직 원리로서의 시장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관철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및 미래의 전망에 대한 획일화도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근대성의 형성 과정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이해가 동반되어야 하고 현재의 사회적 지평을 넘어서기 위한 풍부한 정치적 상상력의 개발도 요구된다. 또한 근대 문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던 제국주의/반제국주의, 식민화/반식민주의의 첨예한 대립이 남긴 유산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지양하는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심미적 감수성의 도야를 요구하는 일이다.

이처럼 역사와 사회,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전망에 기초하여 신자유주의의 총체적인 지배 효과들을 해체하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사고하고 모색하는 것이 프리즘 총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길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난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상가들에 대한 물신숭배 경향이다.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변혁의 사상과 조직 체계가 와해된 이후 그 빈 자리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을 비롯하여 각종 현대 사상가들 및 이론가들의 이름들로 채워져 왔다. 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가타리, 보드리야르, 하버마스, 호네트, 라클라우/무페, 지젝, 네그리, 아감벤, 랑시에르, 고진 등과 같은 현대 이론의 스타들의 이름과 그들의 주요 개념들이 마치 유명 연예인이나 패션 브랜드처럼 회자되어 왔고 또 소비되어 왔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사상이 한국 사회의 문제들과 현상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얼마나 기여해왔는지, 새로운 사유와 문제의식을 개발하고 고무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그들의 숱한 저작들은 값비싼 로얄티를 물어가며 끊임없이 번역ㆍ출판되고(하지만 많은 경우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내포한 가운데) 팔려왔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읽히고 응용되고 비판받고 변용되어 왔는지 역시 의심스럽다. 오히려 그 사상가들은, 그들의 저작들은, 마치 조금 갖고 놀면 싫증나는 장난감처럼, 한 계절 입고 나면 금방 촌스러워 보이는 패션 상품처럼 그렇게 판매와 구매의 좁은 회로 안에서만 유통되었던 것은 아닌가?

프리즘 총서가 지향하는 또 다른 목표 중 하나는 이러한 불모의 사상가 물신숭배에서 벗어나 문제를 개발하고 분석을 고무하고 행동을 촉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리즘 총서는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명망 높은 사상가들의 저작보다는 역사와 사회에 관한, 우리 시대의 핵심 쟁점들에 관한 깊은 성찰과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저작들을 발굴하고 소개할 것이다. 하나의 위대한 사상, 위대한 텍스트는 항상 자신이 속한 컨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깊은 숙고의 결과로 생겨나며, 그러한 천착 덕분에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좁은 컨텍스트를 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반향을 미치고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촉발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상에 고유한 소비와 전유의 방식은 이름을 소비하고 숭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컨텍스트 속으로 그것을 끌어들이고 그 속에서 그것의 적합성과 효용성을 시험해보는 데 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제들은 그러한 시험 과정 속에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프리즘 총서의 구성

 

프리즘 총서는 7개의 프리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프리즘은 전체 프리즘의 지향을 구현하면서도 고유한 분야에서 제 각각 독특한 색채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사상, 신자유주의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이 프리즘에서는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사상, 유일한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의 해체를 추구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단일한 이데올로기와 조직, 실천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신자유주의가 절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내적 모순이나 간극, 공백을 포함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를 좀더 면밀하고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신자유주의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것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위력과 정치ㆍ경제ㆍ문화적 뿌리들을 드러내는 것은 세심하면서도 끈기 있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보여주는 저작들을 계속 출간할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적 합리성의 구성 과정으로 이해하는 크리스티앙 라발ㆍ피에르 다르도의 [새로운 세계 이성]과 세계화 시대에 출현하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분석하는 메리 칼도어의 [새로운 전쟁과 낡은 전쟁] 등이 그 사례들이다.

탈-근대성의 프리즘 근대 세계를 형성한 여러 갈래의 길을 보여주기, 또 다른 장래의 가능성들을 열어놓기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의 의미는,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근대성의 종언에 대한 선언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 방식들 사이의 갈등에 있다. 만약 근대성의 종언과 탈근대성의 도래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근대성(들)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탈-근대성의 프리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성(들)을 읽는 새로운 방식, 근대성을 형성하고 근대의 출구로 이끄는 다양한 길들의 가능성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교조적인 근대의 정통으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독단에 맞서서 탈-근대의 새로운 전망들을 개척하는 것, 그것이 탈-근대성의 프리즘의 목표다. 이를 위해 탈-근대성의 프리즘에서는 주로 근대성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저작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재출간될 것이며, 사회사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 시민권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한 로베르 카스텔의 대작 [사회 문제의 변모], 제라르 누아리엘의 [국가, 국민, 이민], 정신분석의 사회 문화사에 관한 탁월한 저작인 엘리 자레츠키의 [영혼의 비밀] 등이 우선 소개될 것이다.

생명권력의 프리즘 생명 그 자체를 좌우하게 된 권력의 지도를 그리기

생명에 대한 인식과 기술, 권력의 발전은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생명공학의 비약적 발전은 두 가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 속에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틀을 가두는 경향이 있다. 그 한쪽 편에 기술 유토피아가 섣부른 열광을 자극한다면, 다른 쪽 편에는 생명의 종말에 관한 묵시록적 경고가 맹목적인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정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미 우리의 삶과 존재 자체의 일부가 된, 생명에 대한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권력의 메커니즘과 그것에 내재한 위험과 잠재력을 경험적이면서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생명권력의 프리즘”이 추구하는 바다. 이를 위해 생명권력의 프리즘은 생명 그 자체는 처음부터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인공적인 것이었으며, 권력은 지배이면서 자유의 조건이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생명권력의 프리즘을 통해 출간될 저작으로는, 영미권 통치성 학파의 대표자인 니컬러스 로즈의 [생명 그 자체의 정치]와, 인류학적인 현장 조사와 마르크스주의 잉여가치론 및 포스트구조주의의 독창적인 결합을 통해 생명권력 분석의 새 지평을 제시한 카우시크 선더 라한의 [생명자본] 등이 있다.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 또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정치적 사유의 모험에 참여하기

정치적 사유는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좁은 틈새에 갇혀 왔으며, 국내에서는 여전히 이 두 가지 대립항들 사이에서 질식된 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외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 정치이론의 발전을 감안해보면 이것은 크나큰 지체이고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은 오늘날 외국에서 논의되는 가장 빼어나고 독창적인 정치적 사유의 면모들을 소개함으로써 한국에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일깨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민주주의, 인민주권, 시민권, 대표, 입헌주의, 인민주의(populism), 인권, 노동, 혁명 같이 매우 익숙해 보이는 개념들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곧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들을 모색해보기로 하자.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에서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인 클로드 르포르의 고전, [정치적인 것에 관한 시론], 시민권 및 공동체에 관한 독창적인 저작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시민권 이론], 포퓰리즘에 관한 혁신적인 저서인 벤자민 아르디티의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 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예술의 프리즘 세계와 불화하는 감각의 움직임들을 탐색하기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종종 들리는 매혹적인 구호는, 사실은 오늘날 예술은 신(新)귀족들의 재테크 수단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자본 축적 회로의 말단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포섭되었다는 사실의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한 철학자의 표현대로 하면 정치는 감각의 질서의 문제이고 감각의 질서가 함축하는 세계와의 불화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예술이라면, 예술은 자본과 권력에 대한 포섭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포섭의 사실 덕분에 처음부터 정치적인 저항의 출발점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또한 다른 철학자의 표현을 빌릴 경우 예술은 탁월한 시빌리테(civilité)의 도구라면, 예술은 저항의 또 다른 방식을 실천하기 위한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프리즘”은 그러한 실천들을 모색하기 위한 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예술의 프리즘에서는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새 번역본과 장-뤽 낭시/필립 라쿠-라바르트의 [문학적 절대], W.J.T. 미첼의 [그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외에 미술과 영화, 물질 문화 및 미학 일반에 관한 저작들이 출간될 것이다.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 명사로 정형화된 철학이 아닌, 동사로서의 철학적인 것을 실천하기

오늘날 철학은 다시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이 어떤 미래(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던 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철학의 형태와 실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새로운 전환기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사란 철학이 자신의 영역들을 하나하나씩 상실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재규정해온 역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는 아무런 영역도 남지 않은 철학의 활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철학은 자신보다 더 철학적인 탈-분과학문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포스트 철학의 시대로의 진입을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장래를 기약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급진적인 유명론을 추구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미 유명무실해진 자신의 영토를 고수하려는 헛된 노력 대신,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 이미 유령화된 철학의 “경계 위에서의 삶”(sur-vie)의 방식일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의 이론적 내기다.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에서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저작들로는 루이 알튀세르 등이 공동 저술한 [‘자본’을 읽자] 완역본과, 서양 유일신교의 역사를 혁신적으로 재조명하는 얀 아스만의 문제작 [이집트인 모세],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베르나르 스티글레의 [기술과 시간], 헤이든 화이트의 [형식의 내용. 서사 담론과 역사적 재현] 등이 있다. 

탈식민주의의 프리즘 제국과 식민의 상처를 가로질러 새로운 세계 문명들의 가능성을 꿈꾸기

어떤 시각에서 본다면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세계사는 탈식민주의 운동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성의 역사가 동시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 경쟁과 그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였다면,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세계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탈-근대성의 시작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식민주의는 아마도 인류 문명의 새로운 전환의 다른 명칭일 것이다. 그러한 전환이 평화와 공존의 장래를 가져다줄지 아니면 또 다른 갈등과 폭력의 장래를 가져다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따라서 필연적인 전개 과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동안 국내에서 탈식민주의는 미국에서 출세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로 치부되거나 ‘근대성=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등식의 이론적 정당화의 토대 정도로 기능해왔다. “탈식민주의의 프리즘”은 탈식민주의가 본래 지니고 있는 광범위한 이론적ㆍ실천적 질문들을 소개하고,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 그 질문들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총서에서는 서발턴 연구의 대표작 중 하나인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의 [유럽을 지방화하기](Provincializing Europe) 및 라틴 아메리카 해방 철학의 대가인 엔리케 두셀의 [정치에 관한 20개의 테제] 이외에 탈식민주의의 역사와 주요 쟁점을 다루는 저작들이 소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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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10-01-06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리즘 총서의 지향" 절의 3번째 문단의 3번째 줄 "지배 이데올로"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balmas 2010-01-07 17:17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truth 2010-01-0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로운 책들이 많네요. 특히 생명권력 프리즘과 신자유주의 프리즘 쪽. 라한의 경우는 국내강연을 듣지 못하고 강연문만 읽어서 아쉬웠는데, 번역본을 벌써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기대됩니다.

balmas 2010-01-07 17:18   좋아요 0 | URL
관심 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에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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