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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1] 이명박 시대와 인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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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하게 당선자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이명박 정부’로 칭하기로 했다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밝히고 있다. 그에게는 민주화운동을 계승해야 한다거나, 개혁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다. 이 당선자와 인수위원회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온통 ‘선진화’와 ‘실용’이다. 그는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부대운하와 호남운하와 충청운하를 2009년 2월에 착공하겠다고 하고, 건설 5개사의 참여를 요청했다고도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자유주의 개혁정권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신자유주의 정권이었다. 두 정권에서 민주화의 연장에서 자유주의 개혁이 일정 정도 이루어졌다. 자신들이 민주화운동의 적자임을 내걸고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 정권들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는 길을 닦았고,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들 정권에 대해 보수진영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정권교체를 주창했지만, 민중들에게도 고통스런 10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시적인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노동시장을 최대한 유연화시켰으며, 외자 도입을 명분으로 증권시장을 비롯한 금융시장 전반을 외국의 투기자본에 내주었고,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주주들의 배당이익만을 위한 주주자본주의적 기업경영이 일반화되었다. 그들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추진으로 인해서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져 지니계수는 3.5 이상으로 치닫고 있다. 불평등의 심화 현상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걱정되는 이명박 당선자의 공약들

외형적으로는 자유주의 정권이었던 두 정권의 바통을 정통 신자유주의자인 이명박 정권이 인계하게 되었다. 이 당선자는 당선 소감에서 선진화를 다시금 주창했다. 그러면서 “기초와 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선진화 시대의 신발전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신발전체제를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를 표현하는 첫 구상이 인수위를 통해 드러났다. 예전에 국보위 위원이었던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을 인수위원장으로 앉힌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앞으로 그의 인사 스타일을 점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력은 불문하고, 능력이 있고 이 당선자가 신뢰할 수 있으면 족하다. 그에게 민주주의나 진보적인 가치는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마치 ‘흑묘백묘론’처럼 선진화만 이룰 수 있다면 수단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실용성 중심의 사고 틀에는 오히려 인권과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대선 시기에 이 당선자와 한나라당이 제시했던 공약들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규제완화를 통한 기업투자를 활성화해서 7% 경제성장을 한다면서 국민들의 생활비 절감 30%를 약속하고 있고, 0~5세 영·유아 보육시설 및 진료비를 지원하고 암·중증질환 보장을 확대한다면서 감세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도심을 재개발하고 재건축 규제를 완화하겠다면서 집값은 안정시키겠다고 하고, 자율형 사립고 100곳을 설립한다면서 사교육비를 줄이겠다고 한다. 경부대운하와 호남대운하도 완공 시점을 앞당기겠다고 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또 지금도 유연해질대로 유연해진 노동시장을 더 유연화하겠다며,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을 적용해서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고, 노조를 손보겠다고 으르고 있다.

이들 공약을 잘 지켜도 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운하와 같은 공약들은 대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대운하를 건설하느라고 산을 절개하여 물길을 인공적으로 잇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된 다음에 이명박은 대통령에서 물러나면 그 뿐이지만, 그 뒤에 일어날 환경재앙은 누가 감당해야 할까? 자율형사립고를 100곳을 늘리고, 공교육에서 영어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공약도 마찬가지다. 고교 평준화는 이미 깨져버린 상황이고, 교육의 시장화가 한미 FTA나 신자유주의 시장론자들에 의해서 추진되어 가고 있는 상황인데, 자율형사립고가 100곳이나 늘어나면 중학교 때부터 입시 열풍이 이 나라를 휘몰아칠 것이고, 이후에는 자사고를 다니는 학생과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신분 차별을 겪게 될 것이다.

생존권의 악화를 중심으로 사회권의 급격한 후퇴

이명박 정권이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의 ‘선진화-신발전체제’라는 것은 그나마 존재하는 고삐마저 풀어서 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한 자유를 대폭적으로 보장하겠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남북관계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비해서 후퇴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그는 ‘한미동맹의 강화’를 내걸고 있으므로 미국이 북에 친서를 보내는 마당에 그가 이런 대세를 거스를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속도의 조절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미종속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북에 대한 태도는 이미 북의 개방이 자본의 입장에도 들어맞는 일이므로 이명박 정권도 반대할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내준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의해서 주한미군재배치는 완료될 것이고, 이제 한국은 미국의 세계를 향한 침략허브기지로 쓰이게 될 것이며, 미국의 요구에 따라 무기 구입도 대폭적으로 수용하면 군축은 어림없어진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정권의 무한독주는 이제 유아적인 단계를 겨우 벗어난 민주주의를 허구로 만들 수 있다. 그가 서울시장 재직 중에 청계천 복원 공사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청계천 주변의 노점상이나 영세 상인들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그의 친기업적인 개혁에서 경제 문제로 고통 받는 서민들을 고려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경제성장이 안 되어서 경제적인 고통을 당했던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서 성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런 경제지표를 나타내는 수치들과는 달리 부동산 값은 치솟고 일자리는 불안해졌다. 다수는 일해도 빈곤해지고 소수는 더욱 잘 사는 상황은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분배를 강조하는 듯한 정책을 제시했지만, 실제는 분배구조는 손을 대지 않은 채 재벌과 외자 위주의 정책을 강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조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 이 당선자 공약의 핵심 기조다.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하여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겠다는 뜻은 사실은 기업이 보다 더 자유롭게 해고하고, 다시 고용할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을 통일하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현행 비정규직법은 올 7월에 100인 이상 300인 이하의 사업장에 적용되고, 이후에 다시 100인 이하의 사업장에 적용된다. 이랜드-뉴코아에서 보듯이 비정규직에 대한 계약해지와 외주화가 일상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또 올해부터는 직권중재제도가 폐지되는 대신 필수공익사업장의 파업 시에도 기본 서비스는 제공하도록 법적인 규제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다. 파업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국의 노동운동의 현실에서 파업권은 더욱더 약화될 것이니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마지막 합법적인 수단조차도 무력해진다.

거기에 공공부문의 민영화도 가속도를 낼 것이다. 공공부문의 비효율 구조를 개혁하겠다고 하는데, 시장에 내맡겨진 공공부문은 지금은 나름대로 권리영역이지만 결국은 시장영역으로 넘겨진다는 의미다. 의료, 교육, 주거, 복지 등등 어느 분야에서건 사회권의 후퇴는 급격하고도 단호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들은 생존권과 사회공공성의 후퇴에 맞선 절박한 투쟁을 계속 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프랑스의 사르코지 정권처럼 민중들의 집단적 시위에 대해서는 강경대응하겠다는 것이 법질서를 바로 세운다는 의미다. 한미 FTA는 정부 출범을 기다릴 것도 없이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한다고 하지 않는가. 노무현 정권도 억압해마지 않았던 한미 FTA 반대 투쟁을 이 당선자가 억압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폭력과 차별이 강화된다

그럼 시민·정치적 권리(자유권) 영역은 어떨까? 집회·시위에 대한 억압이 이미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은 계속되고,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경찰은 새로운 진압장비와 수단들을 마련해놓고, 국회는 집시법 개악을 추진 중에 있다. 그리고 민중의 정치적 입장은 더욱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이런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가까스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해왔던 공안기관들은 자신들의 위상과 힘을 강화하려고 획책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바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노무현 정권이 그나마 민주화운동의 적자로서 자유주의 개혁을 진행한 결과로 성립된 외형적 법치는 사실상 형식화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권에서 입법이 지연되었던 공안관련 법제들은 강화될 것인데, 올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점하게 될 경우 곧바로 테러방지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 북한인권법과 같은 인권에 역행하는 법률들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게 될 경우 국민 개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더욱 더 치밀하게 짜일 것이 예정되어 있다. 대체복무제가 후퇴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여기서 더 나아가서 현재의 차별구조는 더욱 강화된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고, 차별금지법이 2월 임시국회에서 제정될 수 있다고 해도 실제적인 차별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가 대선 중에 내비추었던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의 근원은 그의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세계관에 기인한 것이다. 이미 보수기독교계는 차별금지법을 ‘동성애허용법’이라고 강짜를 부려서 정부로 하여금 차별 사유에서 ‘성적 지향’을 비롯한 7가지 사유를 삭제하도록 강제했다. 신자유주의에서 정체성에 의한 차이를 통한 위계화는 극한지점에 도달하고,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소수자들에게 떠넘기면서 증오를 부추기는 상황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인종주의적, 가부장적인 차별 구조의 강화는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특성이다.

인권 관련 국가기관들의 상황도 위기다. 이제 국가인권위원회가 노무현 정권에서처럼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한나라당은 끊임없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약화를 노려왔다. 과거청산 기구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들 기구들은 인권옹호적인 기관의 성격을 탈각하면서 잘못하면 인권침해에 대한 면죄부를 발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정부 부처의 기구들은 이미 이 당선자에게 줄 서기를 시작했고, 독립적인 인권관련 기구들에는 이명박의 사람들을 포진시킴으로써 본질적인 역할을 왜곡시킬 공산이 크다.

결론적으로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추구해온 신자유주의 체제를 완성해 갈 것이다. 거기에 한미 FTA를 필두로 한 FTA 체제가 완성되고, 대규모 토목공사와 뉴타운과 같은 개발공사가 기승을 부릴 것이니 민중들에게는 총체적인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재앙공화국의 도래가 이명박 정권이 가는 길이고, 이런 재앙공화국에서 인권의 보장이라는 것은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총체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하자

이 같은 상황에서 진보운동은 권리투쟁을 우선적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다. 모든 진보적인 운동이 지금까지 확보한 권리들을 방어하기 위한 운동으로 전개될 공산이 크다. 노동자와 농민, 빈민이, 그리고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들이 모두 인권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권운동은 생존권을 비롯한 사회권의 급격한 후퇴에 대해 민중운동진영과 연대해서 사회권을 구체적인 권리로 만들어가는 투쟁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사회권의 핵심적인 부분은 노동권과 사회공공성이다. 이들 분야로부터 시작되는 권력과 자본의 공격을 인권의 이름으로 막아내면서 우리가 쟁취해야 할 인권의 목표를 뚜렷이 제시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또 국가와 기업의 폭력, 감시와 통제체제에 대한 저항을 일상화할 필요가 있다. 그간 입법운동 중심의 인권운동을 넘어서 실질적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강화되는 차별의 구조를 깨기 위한 반차별운동도 인권운동이 시급히 전개해야 할 분야다.

이제 한 분야에서 인권이 후퇴하는 상황이 아니다. 인권에 대한 총체적인 공격, 그로 인한 총체적인 위기가 이명박 정권 시기의 인권상황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 맞게 대응해가는 인권운동은 민중들의 권리투쟁과 굳게 연대해야 하고, 그 권리투쟁을 옹호하면서 선도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권력과 자본의 공격 앞에서 개별적으로, 분산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연대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연대는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고, 방법이다.

그리고 마침 올해는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 되는 해다. 인권은 이명박 시대의 재앙공화국에서도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인권에 대한 공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인권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에 우리의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민중의 권리선언을 우리가 쟁취해야 할 공동의 목표로 합의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조직해가야 하지 않을까. 인권운동, 올해 참으로 할 일이 많고 어깨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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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85 호 [입력] 2008년 01월 02일 23:23:42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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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수위는 인권위 개편안을 철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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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

우리 시대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은 수백 년에 걸친 사회적·정치적 투쟁으로 누적되어온 역사의 산물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포괄하는 범위에 대하여 상이한 판단이 가능할지언정 인권의 존재와 가치에 대하여는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쉽사리 인권담론의 폐제를 말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합의된 테제이자 동시에 우리 시대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만방에 고하는 선언의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의 인권은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직접적인 행위규범이자 강제규범으로 작용한다.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민주주의, 생태주의 등등과 같은 거대담론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우리의 판단과 생활방식을 결정하고 또 강제하는 최고의 규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여기에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하나를 더한다. 개발과 반공을 내세우며 국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삶 자체를 유린하였던 지난날의 권위주의체제를 청산하고, 인간이기에 누리는 권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침해하거나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 작은 국가기구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폭압성을 순치시키고 관리하는 체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87년 이래 지속되어 온 민주화의 한 작동방식이며, 우리 정치사회가 추구하는 최우선적 가치로서 인권을 자리매김하고 이를 통해 실질적인 국민주권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한 결실이기도 하였다.

인수위의 이른바 권력분립론

하지만,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변경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이런 발전의 성과들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수위의 논거는 비교적 간단하다. 인수위는,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처럼 별도로 헌법이 정하지 않는 한 모든 국가기관은 입법, 행정, 사법 그 어느 하나의 조직 속에 들어가야 하며, 그렇다면 현재 무소속의 상태인 인권위를 대통령직속의 기구로 옮김으로서 그 ‘위헌적’인 상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대통령 직속기구로 하더라도 인권위의 독립성이나 중립성은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장담 또한 잊지 않는다.

이런 인수위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인권위의 독립성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무소속이라는 외관상의 ‘위헌성’을 교정할 수 있다면 그처럼 좋은 방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인수위의 섣부른 주장은 한계에 직면한다. 대통령 직속기구로서의 인권위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하여 현재 수준의 기능이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독립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치유하여야 할 인권위의 ‘위헌성’이라는 것조차도 근거가 박약한, 구시대의 고루한 법논리에 고착된 것에 불과하다.

실제 인수위의 방안은 단순히 인권위의 존재방식에 대한 변경의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에 대하여” 인권을 외치며 “국가로부터” 인권을 보장하는, 그래서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는 인권보장체제를 “국가에 의하여” 인권이 재규정되는 새로운 권력체제로 변경함을 의미한다. 국가의 권력에 대항하여 시민사회가 피와 땀으로 일구어놓은 성과를 이제 국가가 자신의 권력으로 변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인수위의 제안은 단순한 법개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민주화의 결실을 되돌리는 동시에 시민사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또 다른 폭력이 된다.

대통령직속기구론의 문제점

주지하다시피 국가인권기구는 모든 정치권력·정치이념들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권기구의 설립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고 있는 유엔의 권고나 ‘인권보장과 증진을 위한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원칙’(이른바 파리원칙: 1993)은 이를 국가인권기구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으로까지 간주한다. 즉, 이들은 인권의 보장을 위한 국가인권기구라면 ①법적 자치 및 운영상의 자치를 통한 독립성, ②재정적 자치를 통한 독립성, ③임면과정상의 독립성, ④구성을 통한 독립성 등 네 가지의 독립성은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지침들의 의미는 분명하다. 국가인권기구는 어떠한 조직체계를 갖추든 일단 국가적 통제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국가에 대하여’ 혹은 ‘국가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국민의 기구로 존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기구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국가기구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그들의 권력을 인권보장의 차원에서 통제하고 유도하는, 시민사회의 대리인으로 존재하여야 함을 선언한다. 그래서 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의할 경우 국가인권기구는 외형상 ‘국가’기구이면서도 실질에 있어서는 ‘시민사회’기구가 된다.

이 점은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논의와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이미 정리되었던 사안이기도 하다. 국가인권기구를 설치하되 그것을 민간기구방식의 특수법인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국가기구로 할 것인지, 국가기구로 할 경우 대통령 직속기구로 할 것인지 아니면 독립된 행정위원회로 할 것인지, 후자의 방식을 따를 경우 그의 헌법적 의미는 어떠한지 등이 빠짐없이 논의되었고 그 각각의 장단점을 따져가며 최선의 대안으로 구성해 놓은 것이 현재의 인권위제도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인수위가 내어놓은 인권위 개편안은 뜬금없는 것이 된다. 인권위의 탄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나 맥락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논의의 핵심인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에 놓여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대통령직속’의 국가기구를 내세우는 인수위의 주장은 더더욱 황당한 것이 된다.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서 개편할 경우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첫째,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권위의 직무 자체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하여 이루어지기 어렵게 된다. 인권위가 대통령 직속기구가 된다는 것은 인권위의 업무나 활동에 대하여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역으로 인권위의 업무나 활동에 대하여 대통령의 지휘·감독에 굴복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인수위의 장담처럼 대통령이 간섭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직접 상급기관에 해당하는 대통령이 내세우는 정책기조나 업무방침으로부터 하급기관인 인권위가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연목구어 격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법리적인 측면에서도 인권위의 업무영역이 현저하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인권위는 자신의 고유한 권한으로 입법부인 국회나 사법부인 법원에 대하여 일정한 정책권고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대통령 직속기구로 편입될 경우 국회나 법원에 어떠한 권고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 위헌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기관의 분리와 상호불간섭을 기조로 하는 권력분립의 원칙상, 행정부소속의 인권위가 입법부나 사법부에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헌법적으로도 용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어보자면, 권력분립의 원칙을 들어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하겠다는 인수위의 주장은 되레 권력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거나(인권위의 권한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아니면 일부 ‘음모론’의 예측처럼 인수위가 인권위의 권한을 현재보다 대폭 축소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한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소속 없는 국가기관은 위헌인가

인수위의 주장처럼 과연 소속 없는 국가기관은 위헌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답은 “아니오”다.

우선 인수위가 내세우는 권력분립제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국가권력통제장치의 하나이다. 인권보장과 권력분립이 없는 사회는 “헌법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없다”라고 하는 프랑스 인권선언 제16조의 규정은 바로 이를 말한다. 권력분립은 인권보장을 위한 도구일 뿐, 다른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것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즉, 인권보장이 상위규범이며 권력분립은 그 실현을 위한 도구이자 하위규범에 불과하다. 사정이 그렇다면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적인 규준-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 형태로 구성된 인권위의 조직형태 내지 존재방식을 권력분립의 원칙을 이유로 부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논의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위의 규범으로 상위의 규범을 부인하는 셈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둘째, 설령 권력분립의 원칙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우리 헌법체계에서 그것이 모든 것들을 무효화시킬 만큼 강력한 효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의회주권주의적 전통에 입각하여 행정부나 사법부에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고 그 외 모든 권한을 일괄하여 의회에 부여하고 있다. 반면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 중 입법권은 국회에, 집행권은 대통령에, 그리고 사법권은 법원에 일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입법권도, 집행권도, 사법권도 아닌 어떠한 국가업무가 등장하게 되는 경우 혹은 그 모든 속성을 동시에 가진 국가업무가 나타나게 되는 경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쉽게도 우리 헌법은 이 점에 대하여 별다른 대안을 내세우지 못한다. 기껏 헌법재판이나 선거관리 정도만 별도의 국가기구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 놓았을 뿐, 새 시대에 새로운 요청에 의하여 새로이 등장하는 제4의 국가업무영역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으로 방임해 놓고 있는 것이 우리 헌법이다.

이런 논의는 우리 헌법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위의 주장이 과도함을 지적함이 위함이다. 즉, 인권위가 소속 없는 국가기관이라는 사실만으로 권력분립의 원칙에 반하거나 혹은 위헌적인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국가업무를 담당하거나 혹은 3권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성격의 것이라 할 경우 우리 헌법은 그에 대한 어떠한 가치판단도 행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위와 같은 국가기구의 존재는 우리 헌법의 입장에서는 낯선 존재이거나 혹은 친숙하지 않은 존재일 뿐, 헌법의 체계에 배치되거나 위반되는 것은 아니게 된다.

물론 국가기구의 설치는 가능한 한 헌법상의 권력체계에 맞추는 것이 좋다. 그것이 헌법의 요청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헌법개정의 기회가 있다면 인권위를 헌법상의 국가기구로 규정할 필요는 의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현대의 인권레짐처럼 우리 헌법이 알지 못 했던 새로운 국가영역이 등장할 경우까지도 기존의 권력체계에 꿰맞출 것을 강요할 정도로 우리 헌법이 경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수위의 자기모순

인수위는 최근 외국인도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할 것을 선언하였다. 국민주권의 틀에 고착되었던 국가공무원체계를 보다 ‘글로벌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권위의 개편론은 고루한 국민국가식의 입헌주의에 머물러 있다. 한편으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인수위가 내세우는 인권위의 위헌성은 가장 편협한 입헌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뚜렷한 국경을 전제로 그 속에서만 타당하며 그 속에서만 최고의 규범으로 존재하는 헌법을 상정한다. 즉, 여기서의 헌법은 그 국경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최고의 법이 된다. 그래서 그 국경 내에서는 모든 국가작용은 헌법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역으로 이 국경을 넘어선 규율이나 헌법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규범은 어떤 이유에서건 위헌이며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인수위의 논의는 아쉽게도 이런 폐쇄적, 전시대적 국민국가 개념에 고착된 주권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입헌주의의 틀에만 갇혀 있다. 오늘날 굳건한 추세로 정착되어가는 ‘세계법’의 개념은 아예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 ‘세계법’이 오로지 WTO나 FTA와 같은 통상법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인권부문에 있어서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실제 현대적 추세로서의 세계법은 크게 평화법과 인권법, 통상법의 영역에서 괄목할 발전을 해 왔다. 그 중에서도 인권법의 영역은 유엔이나 지역인권기구 등 실효력 있는 인권레짐을 구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입헌주의는 바로 이런 ‘헌법외의 헌법’까지도 포섭하는 틀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이다.

‘소속 없는 국가기구’로서의 인권위가 위헌적이라는 인수위의 판단은 이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헌법은 오늘날의 국제적 규범체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고립된 섬으로서의 헌법일 따름이다. 새 정부가 내세우는 세계화, 국제화, 글로벌화 등의 지향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 판단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차폐된 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가장 쇄국주의적인 순간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법적 판단을 행함에 있어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까지도 고려하여야 한다는 헌법적 요청(헌법 제6조)은 전혀 도외시한 채, 그저 헌법의 자구나 형식적 체계에만 매달린 독단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나가며

실제 현재와 같은 모습의 인권위에 대하여 대내적으로는 국민 모두의 합의가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와 국제법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기나긴 민주화의 과정이 2001년의 인권위 설치로 한 단락을 이루고, 평화와 인권을 향한 국제사회의 피와 땀이 1993년의 파리원칙과 유엔지침으로 성문화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이 우리의 헌법이다. 혹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 헌법을 해석하고 운용하는 가장 권위적인 지침이 되어야 한다.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아니하고 권력의 분립이 규정되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없다”는 프랑스 인권선언 제16조의 규정은 인수위가 그토록 중시하는 입헌주의와 권력분립의 원칙이 종국에는 무엇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최근 인권은 가장 인기 있는 정치구호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인권보장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음도 현실이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억압들이 채 정제되기도 전에 양극화의 문제는 새로운 인권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있고, 국민주권이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터에 이주노동자들이나 다문화가정의 부담이 우리의 인권체제를 압박한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일련의 흐름들은 인권의 담론을 자본의 담론들로 대체하기를 강요한다. 우리 사회에서의 인권은 여전히 취약하며 여전히 투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인권상황은 법도그마에 함몰된 채 헌법규정의 자구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되레 지난 날 인권위를 만들고자 모든 민간단체들이 피와 땀으로 투쟁할 당시의 그 절박함이 여전히 남아 있거나 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는 상황임을 재차 확인하여야 할 때다. 상황이 그럴진대, 인수위의 인권위 개편론은 너무도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은 반동의 수준을 넘어선다. 인권보장에 관한 세계적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민주화를 향한 국내의 발전과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리고 오늘날 법이론의 흐름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역주행일 따름이다.

바라건대, 인수위는 인권위의 존재형태에 관한 개편론을 지금 당장 철회하여야 한다. 정작 필요한 것은 인권위의 헌법적 근거문제가 아니라 인권위의 인권보장기능을 실질화하기 위한 유효하고도 합리적인 대안의 모색 작업이다. 다시 말하건대, 인권은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정치구호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것은 국민적인 관심과 갈망의 대상이다. 인수위는 이 점을 주목하면서 진정 새 정부가 하여야 할 일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다시 한 번 고심해 보기 바란다.

덧붙이는글
◎ 한상희 님은 건국대 법대 교수입니다.


인권오름 제 88 호 [입력] 2008년 01월 23일 23:16:41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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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언론 참세상

http://www.newscham.net/

 

3살, 팔레스타인 최연소 수감자의 석방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이 낳은 비극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 2008년01월25일 17시13분

이건 소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으로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저 한 사례일 뿐이다. '국제 중동 미디어 센터(IMEMC)'에 실린 팔레스타인 최연소 수감자, 3살 아이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2일 세 살 배기 아기, 최연소 수감자가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아이샤는 아직 하늘색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한 번도 하늘을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이샤에게 감옥이 곧 세상 전체였고, 세상이 곧 감옥이었다.





▲  아이샤와 아이의 엄마 올이안 [출처: http://www.imemc.org]
아이샤의 유일한 죄는 “정치범”인 엄마를 두었다는 것. 아이샤를 낳은 이태프 올이안은 “적대 정당 당원”이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22일 아이샤가 감옥 문을 나설 수 있게 되었지만, 이 건 또 하나의 ‘날벼락’이다. 이제 감옥에 갇혀 있는 엄마를 떠나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완전히 낯선 가족들과 다시 ‘친해지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이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70세의 할머니 움 웰리드. 아이샤의 아빠도 이틀 전 이스라엘 군에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감옥 앞에서 아이샤를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는 “만약 (이스라엘 군인이) 아들을 체포를 며칠만 더 늦게 했더라도 딸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안아보지도 못했어. 한 번 가까이 해보지도 못했어”라며 근심어린 얼굴이다.


그녀는 아이를 넘겨받아 가족에게 전해주도록 지정된 올이안의 변호사의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감옥의 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왔다. “오 아가, 내 손녀. 나에게 오렴.” 그리고 그녀는 세 살 배기 손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할머니가 아이샤에게는 낯설기만하다. 그리고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샤의 변호사는 이스라엘 법에 따라 아이가 세 살이 되면 석방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아이샤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다섯 명의 아이들이 감옥에서 태어났다. 이 중 세 명은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즉시 풀려났으며,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라말라의 집에서 아이샤는 엄마를 찾느라 난리다. 할머니가 할 수 일이라고는 그저 아이를 진정시키는 일 뿐이다.


“난 너무 늙었고 당뇨도 있어. 내가 애를 돌봐야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풀려났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소망이다. “혼자서는 애를 돌볼 수도 없어.”


아이샤가 집에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웨딩사진을 발견한다. 물론 아이샤는 아빠를 알아보지 못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며 아이샤는 말한다. “엄마, 엄마, 엄마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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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유님 서재에서 퍼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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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이슈]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 세상
 
글 : 김소희 (<한겨레21> 기자) | 2008.01.14 
 
없는 집 아이들이 땟국은 흘려도 있는 집 얼굴 하얀 아이들보다 더 팔다리가 야무지던 때가 있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저놈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리라 다짐하면 위로가 되던 시절이다. 가진 자들은 없는 병도 만들었지만 없는 이들은 있는 병도 모르고 잘 지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시대, 무병·무탈·장수는 하늘의 뜻이 아니라 자본의 뜻이다.

경기도 이천시 호법동의 한 냉동창고 공사장에서 발생한 참사는 안전과 생명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밑천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노동자, 코리안 드림을 안고 온 재중동포 일가족, 유족조차 나타나지 않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 등 40명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경찰이 ‘화인 조사’, ‘신원 확인’, ‘공사 관계’, 세 갈래로 나눠 수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밀어붙이는 공사 관행과 이에 따르는 불·탈법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우선 규모상 노동부에 신고하도록 돼 있는 ‘안전 총괄 책임자’가 없었다. 각종 위험물질을 취급하면서도 지방노동청의 관리·감독을 전혀 받지 않았다. 지난해 6월 허가없이 착공해 고발을 당하고도 보름 만에 이천시에서 건축허가를 받았다. 설계·시행·시공사는 물론 감리회사까지 같은 회사인데 아무런 제재없이 넘어갔다. 지난해 한 차례 불이 나 소방차가 출동했으나 사흘 뒤 소방시설 완공검사를 버젓이 받았다. 창문이나 환기구도 변변히 없는 축구장 세배 넓이의 작업장에 비상구는 단 한곳이었다. 화재경보는 울리지 않았고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 세계 용어로 ‘야리까리’라고 하는 ‘물량도급’은 작업이 끝나면 돈을 주거나 다른 일감을 계약하는 방식이다. 공기를 단축시켜야 이익이 나므로 배선, 용접, 도색 등을 한꺼번에 한다. 이번 화재 현장도 영업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냉동 설비와 전기 설비, 파이프 보온 등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루가 급하니 옆에서 누가 무슨 작업을 하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고, 기름증기와 유해가스가 들어찬 밀폐된 공간에서 환기 한번 제대로 못 시키고 일했을 것이다. 그 결과 우연한 불꽃이 “쇠가 다 녹는” 끔찍한 폭발을 일으켰다. 현장에서 일하던 57명 가운데 17명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죽고 다친 이들 가운데 이런 위험한 작업 환경을 가리고 따질 만한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유족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한다. 명복과 빠른 치유를 빈다.
 
글 : 김소희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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