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으로 용어 해설 하나 더 올립니다.

책에는 몇 가지 용어 해설이 더 있는데, 여기에는 그냥 이 정도만 올리겠습니다.

역량potentia-권능/권력/권한potestas


우리가 역량이라고 번역한 포텐샤potentia/puissance 개념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피에르-프랑수아 모로 같은 이는 심지어 스피노자를 “역량의 철학자”로 부르기까지 했다). 이는 라틴어의 “포세posse”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보통은 “~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개념은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고유성은 당대의 이론적ㆍ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적 입장의 특징을 매우 잘 표현해주고 있다.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고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포테스타스potestas/pouvoir라는 개념과 결부시켜 고찰하는 게 좋다. 스피노자가 대개의 경우 이 두 개념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두 개념의 상관적인 용법은 두 개념의 차이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고유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1) 존재론-신학적 의미

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윤리학󰡕에서 포텐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분명한 규정을 얻고 있다.

“포텐샤는 실존할 수 있는 있음이다posse existere potentia est.”(󰡔윤리학󰡕 1부 정리 11의두 번째 또 다른 증명)

“신 자신과 모든 실재가 그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포텐샤는 신의 본질 그 자체다Potentia Dei, qua ipse, et omnia sunt, et agunt, est ipsa ipsius essentia.”(󰡔윤리학󰡕 1부 정리 34의 증명)

  이 두 가지 규정은 각각 분명한 이론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으로, 곧 실행될 수도 있고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포텐샤가 현행적인 힘으로 이해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실존할 수 있음”과 “실존할 수 없음”을 존재론적으로 불균등한 사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실존할 수 없음은 무능력/비역량posse non existere impotentia est”(1부 정리 11의 두 번째 또 다른 증명)이며, 따라서 실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특정한 원인이 지정될 수 있는 사태이지(“모든 실재에 대해 그것이 실존하는 사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유 또는 원인을 지정해야 한다.”(1부 정리 11의 첫 번째 또 다른 증명)), 원초적인 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미 정리 18 및 정리 25의 주석 등을 통해 증명되었지만, 스피노자는 1부 마지막 부분에서 포텐샤의 관점에서, 곧 원인의 관점에서 신과 자연 실재들의 내재적 관계를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신은 항상 능동적이고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에 의해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받은 모든 자연 실재는 항상 최소한의 포텐샤, 곧 원인으로서의 능동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 1부가 “그 본성으로부터 아무런 결과도 따라나오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정리로 끝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표준화된 현실태-가능태의 구분법을 해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포테스타스는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주로 논쟁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에 양자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7의 주석이나 1부 정리 33의 따름정리 2 같은 곳에서 역량의 관점에서 포테스타스의 신학ㆍ존재론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신이 자유로운 원인인 이유는―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우리가 그의 본성으로부터 따라나온다고 말했던 것, 곧 그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것을 그렇지 않게끔, 다시 말해 그 자신에 의해 산출되지 않게끔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1부 정리 17의 주석)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indifferenti cuidam Dei voluntati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은, 신이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사람들은 신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것, 신이 자신의 작용에서 표본으로 삼거나 마치 정해진 목표인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어떤 것을 신 바깥에 설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신을 운명fato에 종속시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1부 정리 33의 주석 2) 

  스피노자가 이처럼 포테스타스의 신학ㆍ존재론을 치열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유는, 포테스타스 개념을 중심으로 자연을 설명하게 되면, 자연을 구성하는 실제 인과관계 및 그 일부로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곧 비합리적인) 위치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인격신이나 주권자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윤리학󰡕 1부 「부록」에 잘 나타나 있다).


2)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용법이나 관계는 존재론-신학의 경우와 좀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영역에서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에, 포텐샤 개념이 항상 능동적이고 현행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포텐샤는 코나투스, 곧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윤리학󰡕 3부 정리 6)으로 표현되며, 이러한 코나투스는 모든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된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코나투스는 “충동appetitus” 또는 "욕망cupiditas"로 제시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나 욕망으로 규정되면 포텐샤는 항상 능동적인 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는 길이다. 󰡔윤리학󰡕 3부 이하의 논의는 이처럼 인간이 수동적인 정서 또는 정념들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는 상이한 쟁점을 갖게 되는데, 핵심적인 것은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이라는 문제다. 이는 특히 󰡔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과 5부 「서문」에서 잘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 2의 주석에서 두 가지 대립항을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으로서, 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이것은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서 인식된다. 이로부터 실재들의 연관과 질서는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하나이며, 따라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simul는 점이 따라나온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가상의 적수들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가 상반되며, 더 나아가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mentis decreto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후자의 관점은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suarum actionum sunt conscii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하기causarum a quibus determinantur ignari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상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이 내리는 결단이나 신체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또는 그 인간적 표현인 욕망에서 생겨나지만, 가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정신에 고유한 포테스타스, 또는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랄한 표현에 따르면,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유 의지로 지껄인다고 믿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5부 「서문」에서 스토아학파 및 데카르트, 특히 󰡔정념론󰡕의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가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곧 이들은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며 우리는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absolute imperare고 믿고” 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송과선”(뇌 안에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가 결합하는 부분)이라는 “은밀한 성질qualitas occultus”로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 포테스타스를 확립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상 역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작용을 규정하는 것은 동일한 코나투스이며, 우리 신체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은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몰인식한다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학-윤리학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 관계의 쟁점은, 신체에 대한 정신 또는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이 우리의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로막고, 이에 따라 윤리적인 능동화의 과정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3) 정치학적 의미

정치학의 영역에서도 두 개념은 체계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지만, 존재론-신학이나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는 달리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고, 비제도적인 또는 선(先)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는 법적ㆍ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기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 이 점은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 모두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특히 󰡔정치론󰡕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먼저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또는 그렇다고 가정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실재들의 행위는 그가 갖고 있는 자연권 곧 그의 포텐샤에 따라 규정된다. “나는 자연권을 자연의 법칙들 자체로, 또는 모든 사물이 생산되는 규칙들, 곧 자연의 포텐샤 자체로 이해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자연 전체의 자연권 및 따라서 각 개체의 자연권은 그것의 포텐샤가 미치는 곳까지 확장되어야 한다.”(󰡔정치론󰡕 2장 4절)  

  반면 사회 상태에서 각각의 개인은 그가 지닌 자연권을 계속 보존하고 있지만, 이제 그의 행위는 자연권 자체가 아니라 법적으로 부여받은 권한, 곧 포테스타스에 의해 규정된다. “만약 국가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갈 권리, 따라서 포테스타스[권한]를 부여한다면, 이로써 국가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셈이며, 이를 그 자신이 이러한 포테스타스를 부여한 사람에게 양도한 게 된다.”(3장 3절)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 궁극적으로는 주권자에 의해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부여된 권력 내지는 권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 내지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주권이 존재하는 국가 안에서만 부여받고 행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횡단보도를 걸어갈 수 있는 자연적 역량, 곧 포텐샤를 지니고 있지만, 교통법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 곧 포테스타스는 갖고 있지 않다.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이러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대중들의 포텐샤와, 주권, 곧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정치론󰡕 3장 2절은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존재론-신학이나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권이 없이는 국가, 정치 질서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포테스타스는 단순한 가상이나 착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용법은 이 개념들, 특히 포테스타스라는 개념을 한 가지 용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를 선택한다면, 나는 포텐샤의 경우는 “역량”이라고 번역하고, 포테스타스의 경우는 각각의 영역에 따라 “권능”, “권력”, “권한” 등으로 번역하고 싶다. 

  포텐샤는 그동안 국내에서 주로 “역능”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왔다. 이 번역은 “역능”이라는 단어가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는 점에서 일차로 포텐샤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단어가 특별히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의미와 용법을 잘 표현해준다면, 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이 단어는 내용상으로도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굳이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이를 “역량”(力量)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대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一樣的)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possibilitas”이나 “실재성realitas”, “완전성perfectio”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나 “완전성의 정도” 또는 “포텐샤의 차이”(곧 “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 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 비교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두 용어는 불어로는 각각 “puissance”와 “pouvoir”이라고 번역하고 독어로는 대개 “Macht”와 “Gewalt”로 옮기지만, 영어로는 모두 “power”로 옮기고 있다. 이는 영미권 주석가들이 그동안 이 두 가지 용어의 구분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네그리 번역자들 중 일부가 전자를 대문자로 된 “Power”로, 후자는 “power”로 옮기거나 전자는 “potential”로, 후자는 “power”로 옮기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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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multitudo


“multitudo”는 지난 1980년대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 개념이다. “많은”, “다수의” 또는 “큰”이라는 뜻을 지닌 “multus”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17세기 정치철학자들,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물티투도는 법제도의 틀 안에서 구성된 인민people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군중” 내지는 “무리”(󰡔시민론De Cive󰡕 영역본에서는 이를 “crowd”로 번역하고 있다. Hobbes 1998 참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홉스 정치학의 원칙에 따를 경우 물티투도는 적법한 정치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전혀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물티투도는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홉스 정치학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홉스는 물티투도를 서로 독립해 있는 “다수의 개인들” 또는 “다수의 의인(疑人)들persons”로 해체함으로써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이 문제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참조). 

  반면 스피노자는 물티투도에 대해 좀더 미묘한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의 첫 번째 주저인 󰡔신학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단 세 차례만 사용되고 있으며, 거의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6년 뒤에 씌어진 󰡔정치론󰡕에서는 사용 빈도도 늘어날뿐더러, 스피노자의 논의의 핵심 대상으로 등장한다. 󰡔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한편으로 주권 또는 통치권을 규정하는 위치에 놓인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정치론󰡕 2장 17절(강조는 인용자). 또한 3장 2절, 7절, 9절도 참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물티투도를 결코 자기통치적인 주체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물티투도의 삶을 지배하는 정념적인 동요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이를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인 매개를 추구했다. 따라서 󰡔정치론󰡕에서 물티투도는 기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1981)이라는 저서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반오웰」(1982)이라는 논문 덕분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단지 스피노자 정치학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가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이 책 2부에 수록된 「스피노자, 반오웰」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몇 가지 점만 지적하겠다.

  첫째,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새롭게 고찰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네그리는 물티투도 개념이 실체, 속성 같은 초월적인 형이상학의 범주들 없이 유한양태들의 차원에서 완전한 구성의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중시하며, 이 때문에 이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재정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본다. 반면 발리바르에게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이 개념이 󰡔윤리학󰡕 1부와 2부에서 전개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존재론’에서 자연학, 그리고 인간학에서 정치학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관개체성의 관점에서 재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둘째, 네그리는 물티투도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 더 나아가 해방 운동의 주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가 현대 사회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대중masse”이나 “군중crowd”와 구분되는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다고 본다. 곧 대중이나 군중은 자신의 독특성을 상실한 익명적인 개인들의 집합, 따라서 지배장치에 포섭되어 있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데 반해,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능동적인 역량과 독특성을 지닌 개인들의 결합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물티투도는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 다수의 독특한 개인들의 결합체라는 점에서 해방 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존재론적’으로 토대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집단으로서 “대중”이나 “군중”이라는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발리바르에 따르면 물티투도에 고유한 이러한 양가성, 이중성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이 관계론적 존재론이라는 것, 곧 능동과 수동의 끊임없는 변이과정이라는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물티투도의 양가성이라는 관점의 중요성은 정치를 막연한 유토피아적(또는 목적론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조와 변혁 운동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 있다.    

  셋째, 이러한 차이점은 두 사람이 선호하는 용어법의 차이로 이어진다.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라틴어 multituo를 줄곧 “multitude”라고 번역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국내의 네그리 연구자들은 다시 이를 “다중多衆”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물티투도가 지닌 “다수, 여럿”의 의미(곧 주권의 초월적 “하나”에 대립하는)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네그리의 주장과 일치하게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이 책 2부에 수록된 세 번째 논문의 한 각주에서 물티투도에 대한 가장 좋은 번역어는 “masses”, 곧 “대중들”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을 (단수로 쓰인) “multitude”, 곧 “다중”으로 번역하는 데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이 지닌 이중성 내지는 양가성을 보존하기 위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라틴어 원어는 하나인 데 반해, 이 용어에 대한 적어도 두 가지 상이한 현대적 번역과 용법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에는 또 다른 번역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발리바르는 이 책에 수록된 글들에서 물티투도를 몇 가지 상이한 불어 단어(“masse”와 “masses”, 그리고 “multitude”)로 번역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발리바르가 “masses”, 곧 “대중들”이라는 번역을 물티투도에 대한 최상의 번역어로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번역어들이 혼재되어 있는 점을 감안해서 발리바르가 “masse”라고 번역할 때는 “대중”으로, “masses”로 번역할 때는 “대중들”로, 그리고 “multitude”로 번역할 때는 “다중”으로 각각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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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wchen 2005-05-10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발마스님의 용어 해설을 매일 읽으면서 제가 사이버 대학을 다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어요^^* 무지하게 공부되네요 감사합니다.....

瑚璉 2005-05-1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순전히 우리말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대중'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다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대중들'이라는 역어는 좀 부적절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역전앞'같은 말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balmas 2005-05-1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nwchen님,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호정무진님, 좀 그런 점은 있죠. "대중들"에서 "들"이라는 게 군더더기 비슷한 셈인데 ...

그런데 또 이런 게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몇년 전에 창간된 [Multitudes]라는 좌파

학술지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네그리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는 학술지인데,

재미있는 건 네그리처럼 그냥 "multitude"라고 하지 않고 "s"를 하나 더

붙였다는 거죠. 그러니까 네그리의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또 네그리의 관점에

 함축된 "목적론"적 경향과는 얼마간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죠.

제 요지는, 불어로 "masses"나 "multitudes"라고 하는 거나

우리말로 "대중들"이라고 하는 거나,

일상적인 어법의 측면에서 보면 군더더기가 들어간 단어들이지만,

개념적인 또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꼭 필요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뭐 이 정도의 일탈이야 해볼 만하지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 


2005-05-13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05-14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알겠습니다, 숨어계신 님.
 

 

관개체성貫個體性transindividualité


2부 세 번째 논문 제목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의 핵심 개념이기도 한 “transindividualité”, 곧 관개체성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Glibert Simondon(1924-1989)이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개념이다. 시몽동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철학자이지만, 구조주의 운동에 중요한 이론적 동력을 제공해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생전에 국가박사학위 주논문의 일부인 󰡔개체와 그 물리ㆍ생물학적 발생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PUF, 1965), 그리고 부논문인 󰡔기술대상들의 실존양식에 관하여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Aubier-Montaigne, 1969) 두 권만을 출간했고, 그의 사후에도 국가박사학위 주논문의 나머지 부분인 󰡔심리ㆍ집합적 개체화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Aubier, 1989)만 출간되었을 정도로 과작寡作의 철학자이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 이 세 권의 저작은 프랑스 철학계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몽동 철학의 핵심 과제는 개체를 원초적인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그 발생 과정 속에서, 곧 개체화 과정 속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시몽동은 개체 및 개체화individuation를 사고하는 서양 철학의 두 전통, 곧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질료형상론과 원자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두 전통은 이미 형성된, 또는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원초적인 단위로서 개체에서 출발하여 한 개체가 시공간 상에서 변화를 겪는 양상들이나 다른 개체들과 맺는 관계(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개체화다)를 사고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철학 전통에 맞서 그는 개체는 원초적 실체, 기원이 아니라 개체에 구조적으로 앞서 개체를 생산하는 과정, 곧 개체화 과정에 의해 생산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개체화 과정에 의해 개체들로 산출되는 , 그것은 무엇인가, 곧 개체화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시몽동은 이처럼 개체에 앞서는 이것을 “선先개체적 존재être préindividuel”라고 부른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러한 선개체적 존재는 “하나 이상”, 곧 “통일성/단위 이상이자 동일성 이상”(Simondon, 1989a, p. 30)인 것이다. 왜냐하면 개체들에 대해서만 하나나 통일성 또는 정체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으므로, 개체화 이전에 존재하는 이 선개체적 존재는 정의상 하나, 통일성, 정체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개체적 존재는 이처럼 부정적으로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선개체적 존재를 단순히 “하나 아님non-un”이 아니라 “하나 이상” 또는 “통일성/단위 이상이자 동일성 이상”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는 선개체적 존재가 고정된 동일성을 갖는 개체들 이상의 어떤 것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곧 시몽동이 말하는 선개체적 존재는 이행/변화의 역량, 포텐셜 자체로서, 이는 개체화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일 뿐만 아니라, 개체화 과정을 통해 산출된 개체가 자기 차례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자신을 재생산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또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재생산하거나 일정한 임계점을 통과하면 스스로 변화되도록 하는 힘이다. (따라서 데리다 식으로 말한다면, 시몽동의 “하나 이상plus qu‘un”이라는 개념은 또한 동시에 “더 이상 하나 아님ne plus qu’un”이기도 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몽동은 열역학에서 빌려온 준안정성métastabilité이라는 개념을 통해 선개체적 존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열역학 또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준안정적인 상태란 체계의 변수들 중 하나(가령 압력, 온도 따위)가 최소한으로 변동되기만 해도 평형 상태가 깨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쉬운 사례를 하나 든다면, 이른바 “과냉각액체supercooling liquid”로 남아 있는 물, 곧 0°C 이하에서도 얼지 않고 계속 액체 상태로 남아 있는 물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 물은 약간의 충격만 가해도 바로 얼어버린다. 시몽동에 따르면 선개체적 존재는 바로 이처럼 준안정적인 상태에 있는 체계 일반을 가리킨다. 따라서 선개체적 존재는 서로 긴장상태에 있는 이질적인 포텐셜들(예컨대 액체와 고체)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으며, 포텐셜들의 긴장이 해소되는 것, 곧 “위상변화déphasage”를 통해 포텐셜들이 서로 다른 수준, 서로 다른 위상의 체계로 해소되는 것이 바로 개체들의 생성이다.  

  따라서 선개체적 존재는 단순히 개체에 시간적으로 앞서는 상태가 아니라, 개체 안에서 개체의 존속 및 변화를 이끌어가는 포텐셜 또는 역량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그리고 이 때문에 “préindividuel”은 前개체적이라고 해서는 안되며, 구조적으로 우선한다는 의미에서 先개체적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하다).   

  관개체성 개념은 󰡔심리ㆍ집합적 개체화󰡕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원래는 심리적 개체화와 집합적 개체화라는 두 가지 개체화 사이의 관계, 또는 오히려 인간의 개체화의 두 측면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곧 이 개념은 정신 또는 심리활동은 인간의 내면을 이루고(심리주의), 사회 또는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는 인간의 외면을 이룬다고 보는(사회학주의) 대개의 이원론적 관점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2부 두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에서 시몽동의 이 개념을 빌려와서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이 개념을 시몽동이 원래 사용하던 맥락보다 좀 더 넓은 ‘존재론’ 일반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관개체성 개념은 시몽동이 말하는 일차적 개체화/이차적 개체화(또는 발리바르의 용어법대로 하면 개체화/개성화)를 포괄하는 개체화 과정 전체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관개체성”의 원어는 “transindividualité”인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윤소영 교수는 이 개념을 “초개인성”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적합하다. 첫째, “individualité”는 “인간 개인”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존재론적’(또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따르자면 “비非존재론적mé-ontologique”) 함축을 지닌 개념이기 때문에, “개인성”보다는 “개체성”으로 번역하는 게 옳을 것이다. 둘째, 이 개념의 접두어인 “trans-”는 “초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traverser”라는 단어처럼 “가로지다”, “관통하다”는 의미, 또는 “transformer”라는 단어처럼 “전환하다”, “형태가 변화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trans-”는 선개체적인 준안정상태의 퍼텐셜이 나중에 성립된 개체들을 관통하여 존립하고 있고, 더 나아가 이 퍼텐셜이 개체의 형태들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셋째, 더 나아가 이 접두어는 부분과 전체, 개체와 우주, 개인과 국가/사회 등과 같이 미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항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추상적 관계 개념을 해체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trans~”의 집합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초-”라는 번역은 다소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trans-”라는 접두어가 지닌 다의적 의미를 살리고, 무엇보다도 이 개념이 기계론 및 유기체론(또는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에 맞서 관계의 우월성 내지는 원초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를 “관貫”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trans-”가 갖고 있는 복합적 의미를 모두 담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개체를 관통하는 퍼텐셜 또는 역량의 흐름을 표현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초”나 “횡단” 등보다는 좀 더 적절한 역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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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5-10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개체성은 어떠세요(이러다가 트랜스개체성을 지나 통닭성이라는 말까지 나오겠구만 -.-;).

balmas 2005-05-10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하, "통닭성" ...
저는 사실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이냐를 두고 꽤 생각을 많이 한 편입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게 10년이 넘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남들 하는 대로 그냥 "초개인성"이라고 따라 불렀는데,
암만 해도 이 번역어는 transindividuality라는
개념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번역해주기 어려울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범개체성"이나 "통개체성" 같은 말도 생각해보고, "구를 전"자를 써서
"전개체성"이라고 써보기도 했는데, 다 좀 문제가 있더라구요.
"관개체성"이라는 번역어는 그래서 몇 개의 대안들 이후에 생각해본 말인데,
지금으로서는 그래도 제일 나은 번역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놀람/경탄admiratio; admiration


“admiration”은 일상 어법에서는 보통 “경탄”이나 “찬양”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들의 정념 이론(따라서 인간학 및 정치학)에서는 고유한 개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데카르트는 정념passion을 여섯 가지 기초 정념들passions primitives로 분류하는데, 이 중 첫 번째 기초정념이 바로 admiration이다. 그러나 이 때의 admiration은 경탄이나 찬양 등을 의미하지 않으며, “놀람”을 뜻한다. 곧 알려지지 않은 외부 실재와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마음이 느끼는 놀라움의 감정이 바로 admiration이다. 따라서 이는 이로움과 해로움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나는 정념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반대항을 갖지 않는 정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단순성을 정념분류의 기준으로 삼는 데카르트에게 admiration은 제일 첫 번째 정념이 된다.

  반대로 정확히 같은 이유, 곧 아직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고, 따라서 우리의 역량의 증대나 감소와 무관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admiration은 스피노자에게는 정념으로 분류되지 않고 상상의 한 종류로 간주된다. 스피노자에게 정서는 바로 역량의 증대나 감소를 낳는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에게 admiration은 알려지지 않는 외부 실재와의 마주침을 함축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부적합할수록 사람들의 수동성은 더욱 강화되는데, admiration은 새로운 어떤 것과의 마주침을 뜻하기 때문에 다른 관념들과 연결되기 어려우며, 이러한 연관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실재에 대한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인식, 곧 부적합한 인식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admiration이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신학정치론󰡕에 나타나는 이 개념의 용법을 고려하면 그렇다. 󰡔신학정치론󰡕에는 admiration에 관한 적어도 두 가지 상이한 용법이 나타난다. 곧 󰡔신학정치론󰡕에서 admiration은 한편으로는 놀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찬양이나 경탄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컨대 󰡔신학정치론󰡕 「서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용법은 admiration이 “놀람”의 의미로, 게다가 우중vulgus과 관련된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만약 그들이 커다란 놀라움과 함께cum admiratone 신기한 어떤 것을 본다면, 그들은 이것을 신이나 지고한 신성의 분노를 드러내는 기이한 징조라고 믿게 된다.(모로판, 56-58쪽)


[종교가 타락한 이후] 신전 자체는 연극무대로 타락해서, 사람들은 더는 여기에서 교회 교사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연설가들의 말만 듣게 되는데, 이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기보다는 경탄으로써 그들을 매혹시키고 자신들의 견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우중이 가장 찬양해마지 않는maxime admiraretur 새롭고 신기한 것들만을 가르칠 뿐이다.(모로판, 64쪽)  


이러한 용례에서 admiration은 일차적으로 무지와 관련된 놀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무지로 인해 생겨나는 놀람은 곧잘 경탄이나 찬양으로 연결되어 예속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다음과 같은 용례는 admiration이 반드시 예속의 도구로만 사용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신은 유일하다.

신이 헌신devotio, 곧 사랑과 경탄의 지고한 대상이 되기 위해서 이러한 교의가 필요하다는 점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존재들에 대한 한 존재의 우월성이야말로 그에 대한 헌신, 곧 경탄과 사랑을 낳기 때문이다.(모로판, 475쪽)


스피노자는 여기서 보편 신앙을 위한 교의, 곧 참된 종교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공통 통념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로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제 또는 공통 통념이야말로 사람들의 헌신을 이끌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경탄 또는 적어도 사랑과 결부된 경탄(곧 헌신)은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 정서적 동력이 될 수 있다. (발리바르가 본문 152쪽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경탄이나 찬양은 상상적인 놀람을 전제한 가운데 생겨나는 감정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윤리학󰡕에서 정의한 admiration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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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9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10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될 용어해설을 한 가지 더 올립니다. 스피노자의 정치학 저술들을 읽을 때

염두에 두면 얼마간 유용한 구분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가imperium/Respublica/Civitas


스피노자 정치학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국가”(영어로는 state, 불어로는 état)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키비타스civitas와 레스푸블리카respublica, 임페리움imperium이라는 세 가지 상이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스피노자는 󰡔정치론󰡕 3장 1절에서 이 용어들에 대해 간단한 정의를 내리면서 이 세 가지 용어를 구분하고 있다.


어떤 유형의 것이든 간에 임페리움imperii이 있는 상태는 사회 상태[또는 본문에서 발리바르가 번역한 대로 하면 시민 사회]status civilis를 가리킨다. 임페리움의 몸체 전체는 키비타스라 불린다. 임페리움을 보유하고 있는 이의 지도에 의존하는 임페리움의 공통의 업무는 레스푸블리카라 불린다.


이 정의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국가의 내포를 규정하는 것은 임페리움이고, 이러한 내포에 상응하는 국가의 외연은 키비타스라는 점이다. 곧 이 정의에 따를 경우 정치적 질서(“사회 상태”)로서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임페리움이며, 이러한 임페리움이 적용되는 “몸체 전체integrum corpus”는 바로 키비타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임페리움은 내용상 “주권summa potestas”이나 “통치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사실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주권이라는 사태를 가리키기 위해 임페리움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위의 정의에 따를 경우 레스푸블리카는 임페리움, 곧 주권의 보유자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국가의 활동을 총칭해서 부르는 개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구분을 잘 염두에 둔다면 본문에 나오는 발리바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국가 개념은 지배장치imperium와 함께 공화적 성격respublica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신민의 조건은 시민성, 곧 민주주의 국가가 충분하게 발전시키는 능동성(과, 평등성이 능동성과 비례적인 한에서, 평등성)을 전제한다.”(이 책, 58쪽)


  더 나아가 이런 구분법은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스피노자의 다소 상반된 주장의 진의를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20장에서 “그러므로 사실 레스푸블리카의 목적은 자유다”(모로판, 636쪽)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정치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사회 상태의 목적은 평화 및 생활의 안전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qui[fine status civilis] nullus alius est quam pax vitaeque securitas”(󰡔정치론󰡕 5장 2절). 만약 우리가 “respublica”와 “status civilis”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국가”로 이해한다면, 전자는 “국가의 목적은 자유”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후자는 “국가의 목적은 평화 및 생활의 안전”이라고 주장하는 게 된다. 그리고 몇몇 주석가들은 이러한 차이를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 보여주는 입장의 변화의 한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스피노자가 정의한 대로 두 용어를 구분해서 이해한다면, 이는 그리 명확한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스피노자가 이미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 5장 2절의 주장과 거의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전체 사회 및 전체 국가의 목적은 [...]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nam finis universae societas & imperii est [...] secure & commode vivere.”(󰡔신학정치론󰡕 3장 6절, 모로판, 158쪽)  

  발리바르는 이 책에서 “imperium”이라는 용어를 “통치권”이나 “국가권력” 또는 “국가” 등과 같이 비교적 다양한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고, “civitas”와 “respublica”는 대부분 “국가”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때로 “respublica”는 “공화국”으로 이해할 때 좀 더 의미가 정확해진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imperium과 관련하여 하나 더 주목해둘 만한 표현법이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서문」 및 󰡔신학정치론󰡕 몇 군데에서 “국가 속의 국가”로 번역될 수 있는 “imperium in imperio”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간이 자연과 분리된 그 자신만의 독립적인 본성과 세계를 지니고 있는 듯이 생각하는 가상을 가리킨다. 곧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자연이라는 국가 안에 그와 별개의 또 다른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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