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미의 개발

한때 화류계 여성들이 즐겨 살갖에 펴서 얼굴에 바르던 연분(鉛粉)은 그 인기가 매우 좋았더랬다. 그런데 이 연분의 실상을 알고보면 엄청난 중독 현상이 뒤따르는 무서운 것이었다. 여기서 연분이 만들어지는 그 제조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본래 연분은 납조각에 식초 기운을 쐬어서 보름날(15일)쯤 숯불에 계속해서 달구어 놓으면 납조각에는 납꽃이 돋아서 피어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 돋아난 연가루를 긁어서 모은 것이 연분의 주성분이 되는데 이것이 물이나 기름에 잘 녹아서 혼합이 잘되고 사람의 살갗(皮膚 ,피부)에도 잘 받는다고 한다. 이처럼 피상적으로만 좋다 해서 그 당시에는 별스런 위험 의식없이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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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고름에 한(恨)을 풀고

또한 앞서도 잠깐 비쳤지만 양분(洋粉)과 왜분(倭粉)이 모두 그 값이 비싸서 그지음 여염집 부녀자들의 형편으로는 손에 쥐어 보기란 그림의 떡과도 같은 그런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정(市井)의 가난한 형편을 재빨리 낌새를 채어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것이 朴家粉(박씨 집안에서 만든 국산분)으로 제법 이르게 선을 보였더랬다. 이런만큼 그 값도 대중상대로 싸게 매겨서 한 때 그 인기도 매우 좋았었다.

그리고 그 당시로는 가위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판매방법을 도입한 것으로도 또한 이채(異彩)를 띠었다 하겠다. 즉 매분구(賣粉 , 분팔이 여인)를 두어서 가가호호(家家戶戶찾)로 찾아다니며 판매전을 벌였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백계로서아인(白系露西亞人이)의 화장품 행상이다. 이들은 으레 '아코디온'이나 북을 치면서 행상을 하였더랬다. 일찍이 이들은 '볼셰비키'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쓰러지자 뒤따를 피의 숙청을 피하여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을 재촉해서 이 땅으로 표류(漂流)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그 후 집단으로 목장을 이루어 삶의 터전을 닦기도 했으나 그중 일부의 사람들은 저나름의 재주(技術)를 살려서 그 나름의 방면으로 진출을 하였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런 백계(白系) '러시아'인의 화장품장사였다. 이들은 자신의 솜씨로 직접 백분이나 '크림'을 제조해서 이것들을 손수레에 싣고 행상으로 나섰다. 그 무렵 양인으로는 유일한 풍각쟁이 행상으로 그 인기가 대단했었다. 이들은 이동네 저동네로 골목길까지 누비고 다니면서 '아코디온'의 경쾌한 '리듬'이나 북(鼓)을 쳐서 우선 동네 조무래기들부터 모아서 판을 벌였다.

그리고 여기에 태엽풀린 듯한 특유의 발음으로 곧잘 우리말로 너스레를 늘어놓곤 하였다. '앞집의 예쁜이 뒤집의 꽃분이 옆집의 곱단이들 어서어서 나와요. 돈 없어 못사는 사람 공짜로도 발라줘요'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을 꾀어놓는다. 그러다 보면 웅성웅성 사람들이 꼬여들게 마련이다. 그쯤 되어서야 수줍음 많은 그 무렵 젊은 새색시들이나 처녀들은 슬금슬금 발길을 해서 어린 도련님을 핑계잡든 동생을 구실로 삼든 구경꾼틈에 끼어들어 눈을 팔고 선다. 그런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분 한 갑(匣) '크림'한 통을 못살 지경이면 그 답답하고 야속한 마음을 애꿎은 저고리 옷고름에다 한(恨)을 풀듯 물고 지근지근 입에 물어 씹는다. 이제는 이러한 광경(光景)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세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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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고름에 한(恨)을 풀고

또한 앞서도 잠깐 비쳤지만 양분(洋粉)과 왜분(倭粉)이 모두 그 값이 비싸서 그지음 여염집 부녀자들의 형편으로는 손에 쥐어 보기란 그림의 떡과도 같은 그런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정(市井)의 가난한 형편을 재빨리 낌새를 채어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것이 朴家粉(박씨 집안에서 만든 국산분)으로 제법 이르게 선을 보였더랬다. 이런만큼 그 값도 대중상대로 싸게 매겨서 한 때 그 인기도 매우 좋았었다.

그리고 그 당시로는 가위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판매방법을 도입한 것으로도 또한 이채(異彩)를 띠었다 하겠다. 즉 매분구(賣粉 , 분팔이 여인)를 두어서 가가호호(家家戶戶찾)로 찾아다니며 판매전을 벌였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백계로서아인(白系露西亞人이)의 화장품 행상이다. 이들은 으레 '아코디온'이나 북을 치면서 행상을 하였더랬다. 일찍이 이들은 '볼셰비키'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쓰러지자 뒤따를 피의 숙청을 피하여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을 재촉해서 이 땅으로 표류(漂流)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그 후 집단으로 목장을 이루어 삶의 터전을 닦기도 했으나 그중 일부의 사람들은 저나름의 재주(技術)를 살려서 그 나름의 방면으로 진출을 하였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런 백계(白系) '러시아'인의 화장품장사였다. 이들은 자신의 솜씨로 직접 백분이나 '크림'을 제조해서 이것들을 손수레에 싣고 행상으로 나섰다. 그 무렵 양인으로는 유일한 풍각쟁이 행상으로 그 인기가 대단했었다. 이들은 이동네 저동네로 골목길까지 누비고 다니면서 '아코디온'의 경쾌한 '리듬'이나 북(鼓)을 쳐서 우선 동네 조무래기들부터 모아서 판을 벌였다.

그리고 여기에 태엽풀린 듯한 특유의 발음으로 곧잘 우리말로 너스레를 늘어놓곤 하였다. '앞집의 예쁜이 뒤집의 꽃분이 옆집의 곱단이들 어서어서 나와요. 돈 없어 못사는 사람 공짜로도 발라줘요'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을 꾀어놓는다. 그러다 보면 웅성웅성 사람들이 꼬여들게 마련이다. 그쯤 되어서야 수줍음 많은 그 무렵 젊은 새색시들이나 처녀들은 슬금슬금 발길을 해서 어린 도련님을 핑계잡든 동생을 구실로 삼든 구경꾼틈에 끼어들어 눈을 팔고 선다. 그런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분 한 갑(匣) '크림'한 통을 못살 지경이면 그 답답하고 야속한 마음을 애꿎은 저고리 옷고름에다 한(恨)을 풀듯 물고 지근지근 입에 물어 씹는다. 이제는 이러한 광경(光景)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세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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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囚人)들의 비누

그런데 특히 여인들의 경우 팥이나 녹두가루가 몸의 때를 밀어 깨끗해 지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날팥이나 녹두에서 풍겨나는 날비린내는 몸을 씻고 물기를 닦고 나서도 좀체로 가시질 않았었다. 흔히 그 무렵의 여인들을 보면 이러한 팥이나 녹두비린내를 가실양으로 향내나는 꽃을 모아 이것들을 기름에 재웠다가 몸을 닦고나서 조금씩 몸에 바르므로 해서 겨우 그 날비린내를 가셔내는 형편이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오늘날 여인들이 상용하는 향수에걸맞는 쓰임새였다고나 할까.

그후 '사분'(불어 SAVON의 擬音)이라고 불리던 비누가 그 첫선을 보이고 나서도 대중화되기에는 많은 시일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기에는 비누만 하더라도 무척 귀한 물건으로 다루어졌었다. 그래서 그 무렵 화장비누를 사서 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형세(形勢)있는 사람들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본래 화장비누에는 향이 함유되어 있어서 이런 화장비누 냄새를 그무렵 사람들은 곧잘 '멋장이 냄새'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했었다.

그 무렵 멋쟁이노라고 행세라도 할 양이면 그 몸에서 화장비누 냄새쯤 풍겨야 했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앞서의 이야기는 모두 밖의 세상에서 그런대로 생겨난 일들이지만 또한 그 지음 감옥(교도소)안의 수인들의 사정은 어떠하였는지....

진작에 내가 들어 알고 있었던 일인지라 잠시 옮겨본다. 그 무렵 수인들에게는 목욕비누라는 명목으로 지금의 빨래비누 보다는 훨씬 못하고 탈모비누(부산피난시절 군에서 말썽을 빚던 비누)보다는 조금 나을 성싶은'미쓰와'(三輪)라고 불리던 저질의 왜(倭) 비누가 감방마다 배당이 되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인들간에는 이 비누 한토막을 제몸을 지켜주는 부적처럼 소중히 다룬다고도 한다.

그래도 명색이 목욕비누인지라 약간의 향료는 첨가 하였겠는데 그 냄새가 잘은 몰라도 그리 좋은 편은 못된다는 것이 그 무렵 이 방면 경험자의 말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 무렵 수인들간에 불문율로 지켜지던 일인데 가족으로부터 수인에게 면회신청이 들어오면 그 수인에게는 이 비누 토막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한다고 한다. 그래서 미처 세수할 만한 여유가 없다보면 그 수인은 그 비누토막으로 얼굴, 손 할 것없이 마른 비누질로 맨살에다 마구 문질러 댄다고 한다. 그래서 수인특유의 감방냄새를 조금만이라도 제거하려고 안간힘들을 쓴다고 들었다.

이러한 예로 미루어 보더라도 인간은 극한 상황하에 놓이면 곧잘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처럼 받아들이는 그런 도착(倒錯)된 행동을 스스러움없이 해대나 보다. 어쨌거나 이러한 비누가 이 땅의 고로(古老)들에게 그냥 그대로 수월히 받아 들여지진 않았었다. 그래서 비누를 사용해서 짐짓 그 냄새가 집안에 풍겨 나돌 양이면 '쯧쯧 고얀놈의 냄새 또 맡게 되나보다'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몸을 멀리 하든가 보다 심한 경우 고개를 외로 틀고 '우엑 우엑'하면서 향내가 그리도 역한지 헛구역질까지 해대는 바람에 가뜩이 어려워서 쉬쉬하던 젊은이들을 안절부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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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化粧)비누 냄새를 풍기며

이땅에서 개화(開化)다운 개화의 물결이 드세게 작용한 연대라면 아무래도 1920년대를 손꼽아야 될성 싶다.

이 무렵에는 남녀간의 벽도 타파되고 사회는 이미 남성만의 독단장(獨斷場)이 아닌 여성들의 사회에의 관심과 자각이 뚜렷해져서 이에서 오는 참여도 제법 활발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새로운 사조가 물밀듯 밀어닥치면서 재래 전통과의 사이에는 번번히 충돌을 일으키고 저항과 대립으로 맞서서 적지않은 진통을 겪던 시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사회는 날로 새로운 사조에 편승해서 전이(轉移).변천(變遷)하여 그때마다 새 풍조를 낳고 사회의 실상도 그 모습을 달리하기에 이르렀다. 그즈음 외국선박에 실려서 청상(淸商)의 손을 빌려서 들여오던 박래품(舶來品)이라 불리던 양품(洋品)이며 일인(日人)의 손으로 들여오는 왜상품(倭商品)은 하나같이 별스럽고 신기해서 그 값도 비싸 귀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북새통을 비집고 약삭빠르게 대어선 상품 중에는 여인들의 화장품이 제법 이른 축에 끼어든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우리네 여인들의 손길에서 다루어지던 화장품의 대강을 살피면서 넘어가기로 하자.

본래 이 땅에 재래(在來)한 화장품을 찾자면 우선 그 원료부터 천연(天然)에서 얻어지는, 그것도 일상의 생활 주변에서 쉽사리 얻어 질 수 있는 것들이다. 먼저 분가루(白粉)로는 분꽃의 열매를 곱게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서 쓰여졌다고 한다. 또한 머리칼에는 동백기름이나 아주까리 기름들을 써서 매만져졌더랬다. 그리고 이러한 머리를 매만지던 솜씨도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니 머리털을 빗는데도 참빗으로 한오리의 머리칼도 흐트러짐이 없이 곱게 다스려서 잠재워 빗는 것을 그 으뜸의 맵시로 쳤다고 한다. 지금처럼 자연미를 살린다고 해서 부수수하게 부풀려 빗거나 하면 그 무렵 어른들이라면 쓸개빠진 년이나 할 짓이지 하면서 내몰아쳤을 것으로 짐작해서 틀리지 않으리라.

내가 본 바로도 비누가 나돌기 전에는 사람들은 몸의 때밀이로 팥이나 녹두를 맷돌에 대충 갈아서 가루를 내어 씻었다. 그래서 몸을 씻는데 그 가루를 한웅큼 손안에 쥐어들고 떠다논 세수물에 비벼대면 거품이 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처럼 비누가 나돌기 전까지는 이러한 곡물(穀物)의 분말(粉末)로 때를 미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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