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고름에 한(恨)을 풀고
또한 앞서도 잠깐 비쳤지만 양분(洋粉)과 왜분(倭粉)이 모두 그 값이 비싸서 그지음 여염집 부녀자들의 형편으로는 손에 쥐어 보기란 그림의 떡과도 같은 그런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정(市井)의 가난한 형편을 재빨리 낌새를 채어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것이 朴家粉(박씨 집안에서 만든 국산분)으로 제법 이르게 선을 보였더랬다. 이런만큼 그 값도 대중상대로 싸게 매겨서 한 때 그 인기도 매우 좋았었다.
그리고 그 당시로는 가위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판매방법을 도입한 것으로도 또한 이채(異彩)를 띠었다 하겠다. 즉 매분구(賣粉 , 분팔이 여인)를 두어서 가가호호(家家戶戶찾)로 찾아다니며 판매전을 벌였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백계로서아인(白系露西亞人이)의 화장품 행상이다. 이들은 으레 '아코디온'이나 북을 치면서 행상을 하였더랬다. 일찍이 이들은 '볼셰비키'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쓰러지자 뒤따를 피의 숙청을 피하여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을 재촉해서 이 땅으로 표류(漂流)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그 후 집단으로 목장을 이루어 삶의 터전을 닦기도 했으나 그중 일부의 사람들은 저나름의 재주(技術)를 살려서 그 나름의 방면으로 진출을 하였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런 백계(白系) '러시아'인의 화장품장사였다. 이들은 자신의 솜씨로 직접 백분이나 '크림'을 제조해서 이것들을 손수레에 싣고 행상으로 나섰다. 그 무렵 양인으로는 유일한 풍각쟁이 행상으로 그 인기가 대단했었다. 이들은 이동네 저동네로 골목길까지 누비고 다니면서 '아코디온'의 경쾌한 '리듬'이나 북(鼓)을 쳐서 우선 동네 조무래기들부터 모아서 판을 벌였다.
그리고 여기에 태엽풀린 듯한 특유의 발음으로 곧잘 우리말로 너스레를 늘어놓곤 하였다. '앞집의 예쁜이 뒤집의 꽃분이 옆집의 곱단이들 어서어서 나와요. 돈 없어 못사는 사람 공짜로도 발라줘요'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을 꾀어놓는다. 그러다 보면 웅성웅성 사람들이 꼬여들게 마련이다. 그쯤 되어서야 수줍음 많은 그 무렵 젊은 새색시들이나 처녀들은 슬금슬금 발길을 해서 어린 도련님을 핑계잡든 동생을 구실로 삼든 구경꾼틈에 끼어들어 눈을 팔고 선다. 그런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분 한 갑(匣) '크림'한 통을 못살 지경이면 그 답답하고 야속한 마음을 애꿎은 저고리 옷고름에다 한(恨)을 풀듯 물고 지근지근 입에 물어 씹는다. 이제는 이러한 광경(光景)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세상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