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깻잎을 묶으며]-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을 묶으며 쓴웃음을 날려보낸다
오늘도 철없는 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 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맞다 맞어,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거푸거푸 웃음을 날린다
말 안 해도 뻔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 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머물다 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한나절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는, 이 얼마만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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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해도 다 알겠다
그 뻔한 회한어린 삶에도
살다보면 때로 거푸거푸 웃음나는 일 있지 않겠는가.
기쁨도 한숨과 궁핍이 잘 버무려지고 곰삭은 뒤끝에야 더욱 빛날지니...

뉘 아니라 깻잎 다발 묶으며
강물 같은 넉넉한, 그 푸른 하늘 같은 경제(?)를 꿈꾸어 보지 않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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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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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하여서,
그 시절 그 목소리 그 얼굴 그 표정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처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그날의 하늘빛 땅빛 바람소리 때론 봄밤의 뒤척임이거나 그토록 온몸에 척척 감기던 먼 먼 빗소리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산다는 건 또 그렇게 옛일, 무심한 짓거리처럼 까맣게 잊고도
얼마나 바쁘게 잘 살아 지는지...

이 세상 모든 애인과의 연애란 지나고 나면
지지 눌려 짜디짠 소금물처럼 숨죽여
어느날 문득 먼 산 진달래 피고 개나리가 지고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교정에서라도
하나도 그리움이라 부를 수 없지요.

너무 쉽게 잊혀진 옛 일,
이제와 추억이란 명찰을 달고
품어 간직한 사랑이거나
상처 같은 알싸한 슬픔이거나
이 세상의 애인은 정말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보아라.
때로 시간에도 물이끼 끼고 녹도 스는가
이토록 도저한 체념의 목소리
끝끝내 하찮은 옛 기억의 통로에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이 뜨거운 역설의 미학(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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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4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중한 건 모두 그렇게 찰나적으로 우리에게 머무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아끼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청춘도, 사랑도, 봄날도...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가다 문 밖 동그라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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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모든 것이 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도 비 그을 곳 없어서 일 것이다
마흔 날 마흔 밤을 아직도 끝간데 없이 비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겐 아직 그칠 기색없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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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리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치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그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내게도 있던 그 여자네 집
옛날 옛날 그 옛날에
기쁘게 슬프게 때론 천둥치듯 문득 아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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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시를 안도현의 작은 시모음집에서 처음 만났어요.
먼 여행을 다녀오셨다구요. 그 얘기도 페이퍼에 들려주심 안 될까요?
저의 졸시를 보고 가셨더군요^^
 

[몽불랑
-나의 신부에게] ..고운기

이름만 들어도 설렌 그 만년필
그대가 보낸 선물속에 들어 있었다
잉크를 채워 첫 글을 쓰면서
갖고 싶었던 오랜 소원을
나는 몇자 적어 풀어본다
홀로 눈을 이고 있다는 흰 산
만년설로 뒤덮여
깊은 전설처럼 골짜기를 거느리고 내려오는데
내가 이룬 건 만년필이 아니다
더 오랜 소원
그대를 만난다는 사실

흰 산이 한 처마 아래 있다.

...................................................................................................
*토요일 오후
만날 사람도 선약도 부질없이 심심한 날,
강 같은 세월 같은 걸 느끼는 나이가 되어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시간의 뒷곁에서
중학교 졸업식날 받은' pilot, 만년필이거나
smith corona, 중고 타이프라이터로 치던 닭발 타자를 생각하곤 했다.
지금은 잊었지만 쓰고 지우고 다시 종이를 갈아 끼우며
뛰엄 뛰엄 투두둑 탁 탁
잊혀진 사연의 글귀를 추억해 내곤 했다.

이제는 가물가물 이름도 생각나지 않아도
실룩거리던 눈섭의 미세한 떨림이거나 습자지 물먹은듯 번져나던 홍조
까물어 칠 그리움의 현을 짚어 나가노라니
사소하던 예전의 말소리나 동작 하나 지나친 골목길이나 노래 한소절도
이제금 어찌나 눈물겨운지...

탁탁 투두둑 두 손가락만으로
보낼 곳 없는 닭발 타자를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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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04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전에 처음 타자 배울 때 썼던 수동타자기와 남편이 쓰던 언더우드 타자기 생각이 나네요. 탁탁타닥... 휘리릭... 차작... 밤이면 그 소리 참 크게도 나지요. 몽블랑의 소원에서 님의 시까지 잘 읽고 갑니다. "까물어칠 그리움의 현..." 오늘밤 쉬 잠을 청하지 못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