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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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하여서,
그 시절 그 목소리 그 얼굴 그 표정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처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그날의 하늘빛 땅빛 바람소리 때론 봄밤의 뒤척임이거나 그토록 온몸에 척척 감기던 먼 먼 빗소리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산다는 건 또 그렇게 옛일, 무심한 짓거리처럼 까맣게 잊고도
얼마나 바쁘게 잘 살아 지는지...
이 세상 모든 애인과의 연애란 지나고 나면
지지 눌려 짜디짠 소금물처럼 숨죽여
어느날 문득 먼 산 진달래 피고 개나리가 지고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교정에서라도
하나도 그리움이라 부를 수 없지요.
너무 쉽게 잊혀진 옛 일,
이제와 추억이란 명찰을 달고
품어 간직한 사랑이거나
상처 같은 알싸한 슬픔이거나
이 세상의 애인은 정말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보아라.
때로 시간에도 물이끼 끼고 녹도 스는가
이토록 도저한 체념의 목소리
끝끝내 하찮은 옛 기억의 통로에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이 뜨거운 역설의 미학(美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