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깻잎을 묶으며]-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을 묶으며 쓴웃음을 날려보낸다
오늘도 철없는 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 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맞다 맞어,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거푸거푸 웃음을 날린다
말 안 해도 뻔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 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머물다 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한나절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는, 이 얼마만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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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해도 다 알겠다
그 뻔한 회한어린 삶에도
살다보면 때로 거푸거푸 웃음나는 일 있지 않겠는가.
기쁨도 한숨과 궁핍이 잘 버무려지고 곰삭은 뒤끝에야 더욱 빛날지니...

뉘 아니라 깻잎 다발 묶으며
강물 같은 넉넉한, 그 푸른 하늘 같은 경제(?)를 꿈꾸어 보지 않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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