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 선덕 여왕을 꿈꾸다 푸른도서관 27
강숙인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선덕여왕과 지귀(志鬼)의 이야기를 담은 ‘지귀설화’를 처음 들었던 것이 언제였나. 꽤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신라시대에 ‘지귀’라는 사람이 선덕여왕을 사모하여 몸이 여윌 정도였다.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지귀의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는데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었다.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본 여왕이 자신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는데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 더욱 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화귀로 변하였다고 한다. 지귀가 화귀가 되어 돌아다니자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는데 선덕여왕이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 몸을 태워 화귀가 되었네. 마땅히 창해 밖에 내쫓아 다시는 돌보지 않겠노라.’는 주문을 지어주고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 뒤로는 화재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지귀설화’이다.

설화들은 그 이야기 구조나 내용이 듣는 이 혹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다양한 이야기로 변모 가능한 것이 설화의 매력이 아닐까?

2. 작가가 다시 살려낸 설화 속 인물 ‘지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어떻게 그려질 지에 대해서도 궁금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 중에는 분명 뛰어난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여성인물들은 그 자체로서보다 그 여인의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시되는 면이 없잖아 존재한다. 이 책은 그러한 점을 탈피하고 있을까? 어쩌면, 이 책 역시 선덕여왕보다는 지귀와 그를 둘러싼 주변 남자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펼쳤다.

3. 지귀는 어떤 인물일까? 설화 속에서는 선덕여왕을 사모하다 화귀가 되고,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가 사라지는 인물이다. 작가가 그려낸 지귀는 화랑인 ‘가진’과 ‘법민’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존재이다. 사실, 이 책 속 지귀는 선덕여왕을 꿈꾸었다기보다 화랑의 낭도로서 ‘가진’에 대한 사모가 더 크게 느껴졌다. 자신을 천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해 준 ‘가진’에 대한 마음과 자신을 추천하고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준 김유신장군, 그리고 신라와 왕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갈등과 방황을 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귀와 선덕여왕 사이의 어떤 사건은 그저 지나가는 일화에 불과하다. 선덕여왕의 당찬 행보와 정치적 역량과 더불어 한 인간(혹은 여성)으로서의 개인적인 감정 또한 이 책의 큰 줄거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이 ‘지귀’와의 관계라기보다 ‘가진’과의 관계에 더욱 무게가 쏠리므로 ‘지귀’는 그저 주변인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결국은 내게 있어서 이 책은 ‘지귀’와 ‘선덕여왕’이 아니라 ‘지귀와 가진’, 혹은 ‘선덕여왕과 가진’의 이야기로 읽혀진 셈이다.

4. 우리의 역사를 배우면서 왜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엄격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는 역량과 능력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에 여성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선덕여왕이 제도의 덕을 보았기는 하나 그녀 자신이 왕의 자질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역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