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종의 나라 1 (양장)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6년 3월
평점 :
김진명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책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였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소설 속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던 때이기도 했지만, 책을 읽으며 느꼈던 묘한 흥분은 아직도 기억난다.
김진명 작가의 소설에는 그런 게 있다.
우리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의식하게 만들고, 역사와 민족, 국가라는 조금 거창한 단어에 마음이 움직이게 만드는 힘. 요즘 말로 하면 이른바 ‘국뽕’이 마구 솟아나게 하는 이야기 말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후에도 김진명 작가는 소재를 달리하면서 이런 결의 소설을 계속 써온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종이다.
사실 당장 읽으려고 산 것은 아니었는데, 한번 꺼내 읽기 시작하니 후루룩 읽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금방 1권을 다 읽었다.
짧은 소제목을 따라 이야기가 빠르게 이어지고 문장도 어렵지 않다.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건과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속도가 붙는다. 조금 어린 친구들도 충분히 읽을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화요설, 그리고 사라진 역사의 흔적
1권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것은 ‘반화요설(反華妖說)’이다.
세종에게 반화요설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과거 반화요설때문에 스승은 죽임을 당했고, 그 내용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서책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입을 닫는다. 양녕대군 역시 알고 있는 것이 있지만 끝내 발설하려 하지 않는다.
세종은 한석리를 불러 이 오래된 흔적을 좇게 한다.
그래서 반화요설은 단순히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수수께끼라기보다, 누군가에 의해 지워지고 사라진 역사와 생각을 되짚어가는 장치처럼 보인다.
첫 장에서 명나라 사신은 세종에게 조선은 법률도, 월력도, 서책도, 글자도 명나라의 것을 가져다 쓰면서 왜 소리는 제멋대로 내느냐고 몰아붙인다. 심지어 ‘백두산’조차 중국식으로 소리 내야 한다고 한다. 상당히 도발적인 시작이다.
이 장면을 읽고 나면 반화요설을 둘러싼 이야기가 단순히 명나라에 맞서느냐 따르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1권에서는 본격적인 한글 창제 과정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대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것을 향해 조금씩 길이 놓인다.
한석리와 숙현 아씨
또 하나의 축은 한석리와 숙현 아씨다.
숙현은 꽤 인상적인 인물이다. 조선시대 여성이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성향과 심지를 지녔다. 양반이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나무라는 사람에게 숙현은 오히려 양반이 일하지 않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먹는다면 도적과 무엇이 다르냐고 되묻는다. 지금 들어도 꽤 당돌한 말이다.
포석정에서 한 줄의 글로 선비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장면도 그렇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모습도 그렇다. 실제 조선시대에 이런 여성이 가능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현대적인 인물이다.
소설을 읽다가 조금 뜬금없다고 느낀 것도 있었다. 연잎의 성질을 이용해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만든 옷이 나오고, 지금으로 치면 핫팩 같은 열주머니도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벌써 이런 걸?’ 싶었다. 다만 이런 장치들을 장영실이라는 인물과 연결한 것은 꽤 영리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발명가 장영실’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소설적 상상력을 펼치기 좋은 인물이다.
그리고 1권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장영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세종이 장영실에게 묻는다.
“영실아, 목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치를 만들 수 있겠느냐?”
글자가 그림이라면 글자가 가진 소리 역시 그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세종의 생각이다.
우리는 이미 이 생각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고 있다.
역사소설을 읽을 때는 한편으로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세종, 장영실, 양녕대군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훨씬 생생해진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허구의 인물만 등장하는 소설보다 쉽게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세종이 한 생각과 행동이 모두 역사 속 세종의 것은 아니고, 소설 속 장영실이 만든 물건과 그가 한 역할 역시 모두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소설이든 마찬가지다.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작품 속에서 한 일까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역사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실제로는 어땠을까?’를 한 번쯤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세종의 나라』 1권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역시 이것이다.
김진명 소설은 잘 읽힌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고 다음 장면이 궁금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마음 한구석을 건드린다.
우리의 말은 무엇인가. 우리의 글은 왜 필요했을까. 강대국의 문화와 질서 속에서 우리의 것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런 질문을 아주 직선적으로 던지는 것이 김진명 소설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또 ‘국뽕’이 슬그머니 차오른다.
물론 나는 이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읽던 때처럼 소설 속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을 구분하려 하고, ‘정말 그랬을까?’ 하는 의심도 품는다.
그리고 1권 마지막에 가까워져 세종이 던진 질문 하나 때문에 2권이 궁금해진다.
목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소리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미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