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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평점 :
위화의 책은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고, 그 다음은 기억에 없다.
이 책을 읽은 다음, 다른 책을 더 읽어볼 마음은 가졌으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산곡미풍』은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아니라 위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만나는 책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부모, 고향, 병원에서 보낸 시간, 가족과 함께한 일상처럼 아주 개인적인 기억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오래된 기억을 읽고 있는데 자꾸 내 기억이 따라 나왔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경험을 계속 쌓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것. 그때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전혀 다른 의미로 돌아오는 것.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의 풍경이나 그때 먹었던 음식, 함께했던 사람들, 아무 생각 없이 주고받았던 말 같은 것들 말이다. 당시에는 그것들이 이렇게 오래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살아오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은 따로 있었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주 사소했던 순간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좋은 기억만 그런 것도 아니다. 힘들었던 일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하면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산곡미풍』을 읽는 동안 위화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자꾸 내가 살아온 시간을 생각했다. ‘산곡미풍’, 골짜기에 부는 산들바람이라는 제목도 책을 다 읽고 나니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바꾸는 것이 언제나 거창한 사건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불어온 바람처럼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가 불쑥 찾아와 오래전의 나를 만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은 결국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어느 날 문득 불어온 바람 하나에 되살아날 오래된 풍경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 책에서 2024년 4월 10일자로 쓰여진 [청춘이 없다]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베이징에 와서 가장 매료된 점이 "난방기"였다고 한다.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손을 불어가며 글을 쓰던 작가의 과거는 베이징에 와서 본 난방기가 꽤 인상깊었던 것이다.
초대소의 2인 1실을 사용하던 천홍과 친구네 집 빈방에서 지내던 위화가 야간 산책 때 울긋불긋 화려한 커튼을 다양하게 보았던 기억을 풀어낸다. 낮에는 꾀죄죄했지만 밤이 되면 불 켜진 창에 걸린 커튼이 화려하게 보였던 것이다. 위화와 천홍은 커튼에 비친 사람이 부러웠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집이 있었지만 그들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위로했는데 "우리는 집이 없어도 청춘이 있잖아."(p.241)라고...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 우리는 집이 생겼지만, 청춘이 없다."(p.241)라고.
나도 얼마 전까지는 내 집이 없었다. 지금도 물론 3분의 2 이상이 은행 지분인 집이지만, 자기 집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다. 옛 시절을 살았던 어르신들이, 화려한 야경을 내려다볼 때 "저 많은 불빛으로 반짝이는 집이 있는데, 저 안에 왜 내 집은 없을까"라고 읖조리리던 말들이 겹쳐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위화의 이 산문집은 그 시절을 조금이라도 겪었던 우리 또래에게 위로가 되는 글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