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열심히 산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58
김화진 지음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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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나타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빌까.

돈, 건강, 젊음, 성공.  

당장 생각나는 것은 많지만 막상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쉽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아는 나이가 되었고, 하물며 상대가 악마라면야. 무언가를 얻는 대신 내가 내놓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할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소원을 빌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김화진의 『악마는 열심히 산다』에는 정말 악마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악마가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인간을 파멸시키겠다는 거대한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인간을 유혹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건드리며 제법 열심히 자기 일을 한다.


그래서 제목 그대로다.

악마는 열심히 산다.


작가의 북토크를 듣다가 재미있었던 것은 이 악마에게 작가 자신의 직장인 시절 마음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

엄청나게 승진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일을 대충하는 것은 또 스스로 견디기 어렵다. 무언가를 해냈으면 누가 잘했다고 해주면 좋겠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 이하로 업무 성과가 떨어지는 것이 더 괴롭다.


듣고 있으니 너무나 익숙한 마음이다.

직장인이 다 그렇지 뭐.

대단한 야망이 있어서 매일 출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일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기왕 하는 일이니 잘하고 싶고, 잘했다면 알아줬으면 좋겠다.


​

악마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야망은 없어도 자기가 맡은 일은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성과도 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악마가 묘하게 인간적이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말


이 소설은 코로나 시기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처음에는 코로나라는 말을 소설에 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실제로 겪은 일이지만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어서 이야기로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약속을 취소하고 또 취소하다가 정말 이것만큼은 취소할 수 없겠다 싶어 조심조심 나갔는데 하필 그날 감염되는 것처럼, 그 시기에는 우리가 준비하고 대비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현실에는 소설처럼 그럴듯한 개연성이 없다.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지금인가 싶은 일들이 그냥 생긴다.

그러다 작가는 현실을 꼭 현실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찾아낸 존재가 ‘악마’였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악마 하나를 현실에 집어넣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지나온 현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가영이 있다.

가영은 원래도 혼자 있기를 선택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되어야 했던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작가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했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내가 원했던 것보다 조금 길어지면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말 붙일 사람을 찾게 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사는 것은 다른 일이었던 거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혼자 놀고 싶어.”  

“나는 혼자라서 좋아.”  

“혼자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실제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공연을 보고, 혼자 여행을 하는 것도 꽤 좋아한다.

그런데 또 독서모임 사람들과 만나 책 이야기를 하고 떠드는 시간은 즐겁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좋다.

그러니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혼자’였을까.

생각해보면 사람이 싫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나를 귀찮게 하는 것들, 신경 써야 하는 것들, 끊임없이 반응하고 대답해야 하는 것들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혼자이고 싶은 것과 외롭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

원하는 것은 꼭 필요할 때 오지 않는다


​간절히 기다렸던 것은 끝내 오지 않기도 하고, 한참을 돌아서 오기도 한다. 이제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데 싶은 순간 뒤늦게 찾아오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영에게 악마가 찾아온 것도 그런 순간이다.

악마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정작 가영에게는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가영이 내놓은 소원이 ‘그냥 잘 죽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그 말을 자기 식대로 해석한다.

지금 상태로 죽는 것은 잘 죽는 것이 아니니, 잘 죽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리고 그동안 어차피 사용하지 않을 가영의 몸을 자기가 좀 쓰겠다고 한다.


그렇게 계약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악마한테 소원을 빌 때는 말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니까’ 하고 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 서늘하다.

가영은 정말 죽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지금의 시간이 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래 혼자 있었고, 너무 오래 지쳐서 새로운 무언가를 욕망할 힘조차 없어졌을 때.

그럴 때 사람이 바라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이 시간이 별일 없이 끝나는 것.

그 정도일 수도 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되는 순간


나는 종현의 이야기도 오래 남았다.

어린 시절 악마를 만난 종현은 다른 사람의 열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한다.

아픈 친구를 양호실에 데려다주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단둘이 보내는 친밀한 시간을 경험했고, 그런 시간을 다시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종현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데 종현은 그것을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악마에게 받은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대하는 마음. 나 이 정도면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받기에 충분하지 않나? 하고 빼기는 마음, 자신하는 마음, 그런 게 사라진 것 같아요. 포기만 남았어요. 능력이 아니면 나는 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줘도 그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면 사랑도 포기해 버려요. 누가 좋아져도요.”  p.42


이 문장을 읽고 나면 종현이 악마에게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능력이 아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다.


나 정도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도 그 정도의 좋은 점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마음.

그것이 사라졌다.


그래서 작가가 북토크에서 한 말도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이 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믿지 못하게 되는가.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의 능력이나 매력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운이 좋아서.  

누가 도와줘서.  

상황이 좋아서.  

어쩌다 보니.


잘한 일을 두고도 이런 이유를 붙인다.

좋은 평가를 받아도 온전히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도 ‘나를 제대로 알게 되면 달라질걸’ 하고 의심한다.

그러고 보면 악마가 굳이 대단한 일을 할 필요도 없다.

“그게 정말 네 능력일까?”

그 정도의 의심 하나만 심어놓아도 된다.

그다음부터는 인간이 알아서 자기를 의심하고, 깎아내리고, 포기할 테니까.

어쩌면 이게 가장 무서운 악마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이 더 일을 잘한다

이 소설에서 내가 재미있었던 부분 중 하나는 악마가 사랑을 못마땅해하는 장면이다.


“악마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이곳저곳 찌르고 다니느라 쉴 틈이 없는데 말이야. 정작 인간들을 못나게 슬프게 만들고, 죽고 싶게 만들고, 인간들을 붕 띄우거나 나락으로 처박는 건 자꾸만 사랑이다. 악마의 몫인 걸 자꾸 사랑이 해냈다.”  p.46


읽으면서 웃었다.

그러게.

악마는 인간 하나 망가뜨리겠다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사랑은 별 노력도 하지 않고 사람 하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사랑 때문에 행복해 죽겠다고 했다가, 또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자신을 망치기도 하고, 상대를 망치기도 하고, 멀쩡했던 관계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한다.

악마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할 만하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사랑이 자꾸 먼저 해버리니까.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집착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가 또 누군가에게는 가장 깊은 상처가 된다.

같은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모양은 모두 다르다.


종현과 가영의 관계도 그렇다.

딱 잘라 이것은 사랑이라고 설명해주지 않는다.

종현이 겨우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니 이번에는 가영의 마음을 모른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내 마음을 알았다고 상대의 마음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생긴다.

삶은 참 친절하지 않다.


결국 다시 살아야 한다


가영과 악마의 계약은 깨진다.

‘잘 죽게 해달라’는 가영의 소원은 실패한다.

가영은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한다.

밖으로 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뜻하지 않은 일들을 겪어야 한다.

작가는 이것을 ‘삶의 번거로움이 다시 가영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표현이 참 좋았다.


삶의 번거로움.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일은 정말 번거롭다.

일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오해가 생기면 풀어야 한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좋아했다가 상처받고, 내가 벌이지도 않은 일을 수습해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정말 지친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 번거로운 것들 속에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다음 여행을 기다리고,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고,  

별것 아닌 일에 웃고,  

맛있는 것을 먹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그러고 보면 삶을 귀찮게 만드는 것과 삶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가영은 잘 죽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살아야 했다.

잘 죽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것이 정말 실패인가 싶어진다.

가영에게 다시 ‘삶의 번거로움’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앞으로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또 상처받을 수도 있고, 어쩌다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살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들이 계속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것들을 하나씩 겪으면서 살아간다.


조금 귀찮고,  

가끔 지치고,  

때로는 다 그만두고 싶다가도.

또 다음 날이 오면 할 일을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꽤 열심히 산다.


악마만 열심히 사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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