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처음 지역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탄광촌이라는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상은 내가 잘 모르는 지역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가 아닌 것에 대해 그리고 깊이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다. 나에게 사북은 드라마의 배경이었을 뿐이고, 내가 가기 힘든 곳이기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도 접하기 힘든 장소였다.
이 책을 추천받았을 때, 그냥 그 제목만으로 '사북사건'을 다룬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하였다. 사북이라는 지명 자체를 제목으로 쓴 게 그런 느낌이었다.
그저 믿어야 했다. 저들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기를 바라며, 무력하고 비참한 밤이 지나고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들의 폭주를 그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저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적어도 국민의 눈치를 아니면 이 세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격식이라도 갖출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저들에게 양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명백한 내란이었다. 그 목적이 분명했다.
국가 전복 시도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이 나라의 권력은 쿠데타를 일으킨 일부 군인들, 그들이 독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신명 나게 웃고 노래하며 축배를 들었고 오랜 역사를 지닌 군사정권은 그 전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이어져 온 군인들의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진압 또한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는 막연히 기대했다.
p.70
초반부에 나온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지난 겨울의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명백한 내란이었고, 명백한 불법이었음에도, 오히려 그들은 더 당당했다. 이건 뭐지? 무엇이 그들을 저토록 당당하게 만드는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당당함이 '당당함'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사이비 종교보다 더한 믿음을 드러내는 모습에 기가 찼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막막함을 느꼈다.
사북 사건이 있었던 그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음에도 '믿음'이라는 눈가리개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엔 '믿음'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젠 그렇지 않다. 그 믿음이 무엇을 위한 믿음인지, 해결하지 않고 덮어두는 것이 과연 '믿음'인 것인지...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한 일을 당하겠죠. 저는 저들과 싸우겠습니다. 제 위치에서."
그 맹세를 듣고 한없이 초라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p.135
그랬을거다. 그도,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을테니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만 있어도 뭔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시절에는.
사북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북을 폭력시위라고 규정하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광부들의 기대와 다르게 첫 보도는 무자비했다.
공포의 탄광촌
사북 광부폭동
치안 마비
경찰서 방화
경찰 사상자 다수
북괴의 개입 의심
비열하고 참담한 보도였다. 광부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뉴스에서는 선량한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광부들의 불법 시위라고 떠들어댔다. 그 어디를 눈 씻고 찾아봐도 광부들의 피해와 소장의 부패에 관한 소식은 없었다. 사북은 고함과 욕설로 시끄러웠다.
p.136~137
그랬다.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는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의 시선이 한쪽으로 치우쳤다면, 그건 당연히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사북의 광부들이 분노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한쪽으로 기울어진 정보를 접할 수 밖에 없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편향된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들은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건지 자꾸 의심이 드네요.'
"내가 네 나이였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한거지. 변명할 수 없어."
p.139
너는 단 한 번도 책임을 진 적이 없잖아. 총칼에 죽어간 이들에 대해서 책임을 진 적이 있냐고. 무참히 짓밟힌 민주주의에 대해서 책임을 진적이 있냐고 대답해 보아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나라가 망가질 때까지. 모른 척 외면하고 도망가는 비겁자, 그게 바로 너 아닌가.
머릿속 목소리가 나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비겁한 겁쟁이가 맞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겠다. 성인의 책무를 지고 한번 싸워 보겠다. 그림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겠지.
p.140~141
무자비한 경고에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협박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대개 협박은 허풍과 과장이 가득하다. 그러나 저 협박은 결이 다르다. 저런 종류의 협박은 실행력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저 남쪽 지방에서 실행했었다. 태극기를 들고 있는 시민들에게 찾아간 것은 자유의 여신이 아니라 길고 긴 전차 행렬과 공수부대원들이었다. 염증이 나는 현실이다.
평화로운 시위가 일어나면 그 연쇄반응은 항상 똑같다. 결국 군인들이 시위를 찾아간다. 그리고 피해자가 발생한다. 누군가는 죽거나, 누군가는 불구가 되거나, 누군가는 어눌하게 간신히 말을 내뱉는 바보가 된다. 늘 그래왔다.
폭도들을 진압했다.
간첩들을 색출했다.
질서를 되찾았다.
모든 게 종료되면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알린다. 항상 이랬다. 굳건하고 듬직한 국군이 빨갱이 폭도들을 진압하고 대한민국을 지켜 냈다는 것. 이렇게 위대한 군사정권의 치적이 또 하나 추가된다.
이에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무관심하거나 믿지 않거나. 무관심한 이들은 위태로운 사회에서 불똥이 자기에게 튀기지 않기만을 원했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 나름대로 반항해 보고자 했다.
p.144
이 소설은, 사북 사건의 한쪽에 관심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갖고 온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미쳐간다. 아이들의 곁에는 그들 틈을 파고 든 무당이 있다. 창은,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아이들을 살려보겠다고 움직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동이 여전히 사북의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왔지만 거기에는 끼고 싶지 않다. 그런데 학생들이 미쳐간다. 아이들을 구해보겠다고 애써본다. 애써 다른 현실로 눈을 돌려버리려는 모습 같다.
종교적 믿음과 신념도, 사북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권력자들의 믿음도, 다 하나로 이어진다. 저자는 사북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두 번째 기회
그러나 반드시 신문사에서 일해야만, 그와 관련된 직종에 몸을 담아야만 기자가 되는 것일까?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언론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언론을 선택하겠다.
다치고 짓밟힌 이들을 위하여, 죽어 간 이들을 위하여.
더는 숨지 않겠다. 더는 방관하지 않겠다.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 눈치를 보며 가능성을 저울질하지 않겠다. 진정으로 믿겠다. 나 자신을. 내가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겠다. 의심하지 않겠다. 남에게 끌려다니지 않겠다. 확고해지겠다.
뭐, 믿음이 배반당할 수도 있겠지. 아무렴 어떤가.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믿기로 했는데.
진실은 사북에 있다.
p..294~296
2024년 11월에 출간된 이 책을 지금 읽어보는 이유는, 아마도, 그렇게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는 상황을 한번쯤 되돌아보고 싶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