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책상 서랍 속의 타자기와 회전목마에 관하여 - 세계를 담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김운하 지음 / 필로소픽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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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제목이 주는 묘한 끌림과 '책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입만 했을 뿐, 다른 책들에게 밀려 계속 책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 책을 어서 해방시켜야겠다는 마음에 독서 동아리에서 읽을 책으로 추천을 했다.

내가 속한 독서 동아리는, 회원들이 추천한 책을 함께 읽는다. 오로지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그리고 자기만의 취향에 따라. 그러다 보면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이나 절대 손에 잡지 않았을 책도 읽게 되고 의외의 발견도 하게 된다.

독서 취향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기준'이 명확하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군가가 줄 세워 놓은 필독서가 나에게는 아무 재미를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겠다.

독서동아리 선생님들과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5명의 취향이 때로는 이쪽 저쪽으로 튀기도 하지만, 가끔은 한 방향을 보기도 한다. 내가 몰랐던 다른 책의 세계, 그러니까 저자가 말한 것처럼 평생을 읽다 죽어도 다 못 읽을 그 책들을 적어도 5배는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내가 처음으로 책과 관계를 맺은 것은 나 자신의 존재와 삶, 그리고 이 세계를 둘러싼 온갖 의혹을 풀어보고 싶은 강렬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독서 행위 자체가 주는 재미와 기쁨, 그리고 행복을 위해 책을 읽는다."(p.10-11)

나는 저자처럼 멋있게 나의 독서의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어린 시절의 독서는 세상과 만나는 길이었다. 독서하는 시간은 내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시간들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나를 기대했다. 그 기대가 와장창 깨진 것은 대학생 때였는데, 내 독서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친구의 눈길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짧은 생을 살다 간 그 친구는 그 나름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봤던 것이니... 그게 상처가 되어 내게 남아있지 않다.

지금의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유일한 내 휴식과 쉼의 시간을 채워주는 개인적 취향 때문이기도 하고, 번잡스러운 현실에서 눈 감고 귀 닫는 길이기도 해서다. ---> 한 번 더 고민해 봐야겠다. 나는 왜 이런 이유로 책 속으로 파고드는지.

책으로 읽기보다 연극으로 봐야 제맛을 알 수 있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p.30)를 나는 연극으로 두 번을 봤다. 책을 읽은 기억은... 음 없는 것 같다. 대학생 때 인문대학 안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학도들 사이에서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소설 하나쯤은 입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쉽사리 책을 펼쳐보지 못했던 것은, 쉽지 않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 것이다.

처음 연극을 봤을 때, 나는 멍해서 나왔다. ---> 왜 인지는 짐작하리라.

두 번째 연극을 본 것은 얼마 전이다. 내가 나이가 든 때문일 수도 있겠고, 수십 년 연기 내공이 쌓인 노배우들의 연기로 보아서 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책을 해석하기보다 책에서 자신의 고민을 발견하기(p.38)

우리는 여태 책을 해석하는 일을 해왔고, 그 해석의 정답을 정해놓고 얼마나 잘 맞추냐를 평가해왔다. 그러니, 책이 재미있을 리 없고, 읽고 싶을 리 없다. 수많은 도서 목록보다는 나의 취향에 맞는 책을 선호한다. --->이것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닌듯하다만...

마치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가 클릭하는 영상과 비슷한 것만 보여주듯, 온라인 서점의 추천 마법사는 내가 산 책과 비슷한 책을 자꾸 보여준다. 안다. 나는 또 지갑을 열 것이라는 것을.

"더욱이 한가롭게 고전만 파고들 경우, 당대의 과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고전 독서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 자신이 '지금 현재' 상황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개인적인 관심과 문제의식, 나아가 당대가 제기하는 문제와 대결하기 위한 사유의 연장에서 자신에게 필요할 때 찾아 읽어야 한다. 취향이 너무나 고전적이라 고전이 자신의 영혼에 딱 맞는 옷이라면 고전만 찾아 읽어도 된다."(p.40)

고전만 그러한 건 아니다. 그러나 고전만큼 오해를 받고 있는 책이 또 있을까? 고전 한 두 권쯤 읊어댈 수 있어야 책 좀 읽은 사람 티가 난다. 하지만 그 고전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고전이어서가 아니라, 그 책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것(그것이 재미든, 지식이든 간에)을 발견할 수 없다면 굳이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 지금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들, 알고 싶은 것들, 즐기고 싶은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독서로 즐거움을 얻고자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존재로 '변화'하기를 원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야말로 모든 독서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독서가 주는 순수한 기쁨과 재미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이 자기 자신과 삶,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인식의 쾌락과 연결될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얻는다. 독서에서 재미와 인식은 분리 불가능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p.43)

"그럼에도 요즘도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다 밑줄을 긋고 싶어 펜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안절부절못할 때가 많다.

사실 책에다 밑줄을 긋는 습관은 고질병과 비슷하여 생각보다 고치기가 힘들다. '참아야지, 참아야 하느니라!' 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지만, 끝내 밑줄을 긋고 싶은 욕망에 굴복하고 말 때도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책에 밑줄을 긋고 싶어 할까? 밑줄을 긋는 습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나 참고서에 빨간 볼펜, 파란 볼펜으로 밑줄을 긋기 시작한 게 기원일 듯싶다.(p.163-164)

사실, 나도 밑줄 그으면서 낙서하면서 책을 읽는 편이라,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 또 프래그 같은 걸 붙이는 것도 내게는 잘 맞지 않다. 그거 붙이고 있는 행위 자체가 내게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처럼 느껴져서이다. 그래서 나는 책에 밑줄을 긋는다. 빌리지 않고 사서 보는 책이 많은 이유도, 그 많은 책을 헌책방이나 중고로 팔아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는, 줄 긋지 않은 책(필시 읽지 않았던 책일 확률이 높다)을 온라인 중고서점에 내다 팔았다. 나머지 수천 권의 책은 종이쓰레기로 버려졌다.

버리면서도 이번에는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사야 할 책을 조금 더 신중하게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책에 관한 책, 독서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읽은 책은 그들이 소개하는 책 중에 1%도 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만큼 많은 책이 있고, 그만큼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을 읽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이 책을 덮으면서, [역시 사 놓았지만 읽지 않은 '돈키호테']를 마음 먹고 읽을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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