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열네 번의 인생 수업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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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가장 자주 듣는 소식 중 하나가 부고가 되었다. 지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나의 지인들의 부고 소식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다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혹은 타인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커서인지, 아니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 그것을 피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지, 자신의 죽음은 아주 먼 곳에 있다고 여긴다. 


나에게 찾아올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죽을 때,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죽어서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면, 내가 살아있을 때 그들이 그렇게 변했으면 좋겠다.


햇수로는 6년 전, 나도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지인들이 나의 태도, 생활모습 등을 보면서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함'을 보고 놀란 이들이 많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삶도 죽음도 커다란 의미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기에, 어쩌면,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버릴 것 같다. 


마침 바로 전해에 시어머님이 위암에, 그리고 다음해에 내가 유방암에 걸림으로써 가족들은 많이들 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예전에는 그냥 노환인줄 알고 넘어갔을 일들이, 의학의 발달로 빨리 확인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치료를 할 시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까?


나는, 모리 교수가 루게릭병으로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동안, 미치 앨봄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읽으면서, 나와는 조금 다르겠구나 생각했다. 모리교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을 힘들어한 것 같다. 아마도 그 자신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의논하고, 함께 했던 순간들에 의미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나는, 어쩌면 이것도 나의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만의 시간을 갖기를 더 원하며, 여러사람과 어울리기 보다 그냥 혼자 침잠하기를 원하는 나의 태도를 볼 때, 굳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를 기억해달라 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

삶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삶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p.8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죽어야할지를 고민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서 방점을 찍고 싶은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지금, 당장, 바로, 살아가는 내가 행복하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을, 읽고 싶은 것을, 먹고 싶고 보고싶은 것을 모두 누리며 살아가고 싶다. 삶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나중에 아쉬워하며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 


그는 '죽어 간다'라는 말이 '쓸모없다'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p.54


'죽어간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어가는 것이 쓸모없다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취급받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쓰레기'가 될 운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된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비록 제 손으로 제 몸조처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리 교슈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듯이, 또는 생각할 꺼리를 만들어주었듯이 여전히 가치가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라”

“과거를 부인하거나 버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타인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라"

"너무 늦어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p.63


모리 교수가 아포리즘처럼 남긴 말들이다. 앞선 자들이 남긴 어록들을 살펴보면, 뭔가 특별한 가르침이기 보다는, 평범하지만, 실천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특별한 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것인가라기보다, 지금보다 더 많이 남은 '창창한 내 삶'을 살아갈 진로를 결정해야한다. 십대에만 진로결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제 반백년 살고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죽어 가는 것은 그저 슬퍼할 거리에 불과하네. 

불행하게 사는 것과는 또 달라.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불행한 사람이 아주 많아."

"나는 죽어 가고 있지만 날 사랑하고 염려해 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 않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p.83


모리교수와 나는 이런 점에서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하고 염려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외롭지 않게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건 모리교수의 상황이다. 


나라면, 조용하고 고요한 곳에서, 남은 인생을 조용히 반추하며 사람들과 좀 떨어져서 살고 싶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고, 사랑받으려 애쓰고 싶지 않다. 사람마다, 삶이 달랐듯이 그렇게 죽음도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모리교수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따뜻했다. 찾아갈 노은사가 없음을 아쉬워하기도 했고, 누군가의 죽음이 '평생 회환'이 아닌, '그와 함께 했던 즐거움'으로 남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반백년 살고 나서, 연초에 읽기에 꽤 괜찮았던 책이라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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