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훈민정음
박춘명 지음 / 이가서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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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을 둘러싼 가설 논쟁, 그 불씨를 지피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는 책 뒷표지의 문구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소설은 소설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표지문구들은 독자를 자극하는 문구로 가득차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로 인해 또 하나의 가설이 세워지고 그 가설이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는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 내세우는 가설은, 일부에서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학계의 정설과 다르다고 해서 무시할 일은 아니다. 정 무시하고 싶으면 "소설"일뿐이라고 생각하면된다.

서두가 길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북한 작가의 소설이란 점을 의식하게 되었다. 보통 소설을 읽을 때 작가의 국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안쓰는 편인데, 이 책은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신지문자를 응용한 집현전학자들의 작품이라는 점은 바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우리민족제일주의]사상에 의거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뭐, 세종대왕이 無에서 有를 창조하듯 창제했든, 중국의 한자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문자가 있었고 민중이 사용하던 신지문자를 집현전 학자들이 응용하여 창제하였든 간에, 우리의 글자가 하나의 소설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 의해 창제되었고, 창제된 시기가 정확하고, 목적이 있는 문자를 가졌다는 것이 많은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다.

세종대왕은 이 소설에서 조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표지의 문구처럼 세종대왕이 창제하지 않았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세종대왕이 우리문자의 창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집현전학자들이 제아무리 멋진 문자를 내놓았다한들 그것이 우리의 문자로 반포될 수 있었을까? 거기에, 성삼문이 우리글을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을 때 세종대왕은 민중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제시해주었다. 지도자의 탁월한 영도력이란 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집현전 학자 중에서도 성삼문을 중심으로 씌여졌다. 집현전 학자들이 토론을 하고 문자를 만드는 과정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이 성삼문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 우리의 옛 문자였다고 짐작되는 신지문자를 찾아가는 과정, 그 과정을 통해 성삼문에게 힘을 주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왕이라는 절대권력을 권력화시키지 않고, 학자들의 고뇌를 담은 점과 더불어, 소외받고 있었던 여성과 노비들에게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소설은 더욱 힘을 얻는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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