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 죽을 만큼, 죽일 만큼 서로를 사랑했던 엄마와 딸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진환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모성'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읽으면 나는 괜히 삐뚤어져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 '위대한 어머니'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나'가 아닌 '어머니'로 틀에 묶어버린 느낌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어 봐야 마치 뭔가가 완성된 것처럼. 누군가는 그러한 자신이 자랑스럽고 멋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죽을 만큼 죽일 만큼 서로를 사랑했던 엄마와 딸"


1973년생인 저자 미나토 가나에는 나와 동년배이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가 쓴 작품 속 '모성'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10월 20일 오전 6시경, Y현 Y시의 공영주택 화단에 여학생(17세)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되었다. 신고자는 여학생의 어머니였다. 신고자의 어머니는 "모든 걸 바쳐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이렇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여학생이 투신을 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신고를 했던 어머니는 신부님의 조언을 받아 "자기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생각나는 말을 그대로" 적어나간다. 애지중지 키운 딸, 모든 걸 바쳐 키운 딸이 투신을 했는데 신부님은 왜 그랬냐고 묻는다. 왜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냐고? 아마도 누구든지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 어미라면 그렇게 자식을 키우는 게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당연한 걸 왜냐고 묻는다는 건 나쁜 짓을 왜했냐고 묻는 추궁이 아니라 확인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학생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딸과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나는 회사 동료의 권유로 들어간 시민문화센터의 회화교실에서 알게 된 타도코로 사토시와 결혼을 했다. 타도코로의 그림은 늘 어두침침했고 우울하고 답답했지만, 나의 그림은 사랑받으면서 컸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의 어머니는 진심을 담아서 칭찬을 해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가 좋아할 대답을 한다. 오로지 어머니로부터 칭찬 받고 어머니가 기뻐하길 바라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날 어머니는 '나'가 아닌 '타도코로의 그림'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분신이므로 어머니와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간걸까? 어머니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타도코로와 결혼을 하는 나. 그런 나에게 히토미는 타도코로와의 결혼에 대해 충고를 한다.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그런 충고가 얼마나 귀에 들어올 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당사자보다 제3자가 더 정확하게 꿰뚫어본다. 물론 히토미는 또다른 관계를 형성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오로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한다. 음악이나 시, 영화까지도 취향이 맞았던 어머니와 타도코로, 어머니와 같은 전업주부가 되고 싶었던 나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둔다. 임신을 했을 때는 두렵고 무서웠지만 어머니는 이런 말을 전한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엄마는 이 세상에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싶어. 널 낳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는 더 기쁘거든 내 삶이 더 먼 미래로 이어져 나간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엄마가 어렸을 때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뭘까 계속 생각하곤 했어. 이대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죽더라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지.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잖니? 나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든 없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 그런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런데 널 낳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난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더라도 내 아이는 무언가를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 아이가 못 하더라도 이 아이가 낳은 자식이 무언가를 남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바로 나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잖니.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지. 그럼으로써 역사 속에 점이 아닌 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거야. 이 정도로 멋지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P.28


여기까지 읽었을 때, 투신한 여학생의 어머니 '나'의 삶의 방식에 동조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어머니'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어머니'와 같은 삶을 동경하고 '어머니'와 같아지기를 원하는 '나'에게 나는 공감할 수 없었다. 딸에게 하는 모든 행동도 '나와 딸'의 관계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일까? '나'는 왜 '어머니'가 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딸'이어야 했을까? 


딸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소설을 계속 읽어본다. 딸인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다. 어른들의 반응을 신경 쓰는 어린이, 용서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린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기뻐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P.47)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아이.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것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원하는 말만 했다. 외할머니에게서 받은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고백과 딸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는다. 


"이러다가 늦겠어, 빨리."

"나 말고!"

"왜? 어째서?"

"네가 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니."

"엄마는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날 낳고 길러준 사람이잖아."

"바보처럼 굴지마. 넌 이제 애가 아니야. 엄마란다."

"싫어, 난 엄마 딸이야."

"그만해. 그만하렴. 왜 엄마 말을 못 알아 듣니?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부터 구해야지."

"싫어요. 싫어. 난 엄마를 구하고 싶어. 자식은 또 낳으면 되잖아."

"부탁이니까 엄마 말 들어. 난 내가 살아남는 것보다 내 생명이 미래로 이어지는 게 더 기쁘단다. 그러니까.."

"싫어!"

"널 낳아서 엄마는 정말로 행복했어. 정말 고맙다. 네 사랑을 이번엔 이 아이에게 주렴 애지중지 아끼면서, 모든 걸 바쳐서 키워주렴."(P.79~81)


그것이었다. 이 날의 일로 '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과 작별하였고, 그날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엄마가 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내리사랑이라고들 하는데, '나'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만이 있다. 그 사랑을 딸에게로 옮겨놓지 못한 채 여전히 '딸'인채로만 살아가는 '나'. 


"나한테는 어머니가 없는데, 이 아이에겐 있다. 엄마! 하고 부르면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있다. 어째서 이 아이에겐 있고 나한테는 없는 걸까?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 아이는 어머니를 잃은 내 마음 따윈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나한테 어리광을 부리는걸까?" (P.105)


어머니는 자식을 지키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딸아이가 나를 위해 시어머니와 맞서는 것도 달갑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더 불편하다. 딸은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 딸인'나'는 다른 사람을 만지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만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외할머니를 잃은 그날 이후 엄마는 나를 거의 만져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를 대신해서 내가 엄마 편이 되어주자. 어머니를 지켜주자'(P.135)고 생각했던 '딸'과 그런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엄마. 


과연 모성이란 것은, 엄마가 되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일까? 요즘 미디어나 매체를 통해 '비정한 부모'에 관한 뉴스를 자주 접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부모가 저럴 수 있냐고, 특히 어머니를 향한 비난은 더욱 심하다.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버려지거나 하는 아이들 뒤에는 언제나 그 아이들을 지키지 않고 학대한 '어머니'만 있다. 자식을 키우고 사랑하고 길러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부모'이다. 이 이야기 속에도 타도코로는 무기력하다. 오히려 가족들에게서 도망을 치는 남자다. 이 여학생의 투신에 아빠인 타도코로의 책임은 없는가. 세상에는 모성만 존재하고 '부성'이란 건 아예 없는 것인가. 


"사쿠라를 잃으면서 제 자식은 세상에 오직 한 명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줄 그 아이가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P.176)


둘째를 유산한 후 '나'가 하는 말이다.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줄'대상일 뿐이다. 나는 이런 문장들이 가슴 아프다. 



'모든 걸 바쳐서'라는 말은 어째서 '어머니의 손맛'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을까? 비유를 해보자면, 매일 고기감자조림과 고등어 된장조림 같은 요리를 만드는 어머니가 있다고 해보죠. 이 사람에게 평소에 아이에게 어떤 음식을 해주냐고 묻는다면,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요리를 해준다고 대답할까요? 아마도 그냥 평범한 음식을 해준다고 대답할 것 같은데요. 반면에 인스턴트 식품이나, 심한 경우 하루 세 끼도 제대로 먹이지 않는 부모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어머니의 손맛이라느니, 아이를 위해 균형 잡힌 건강한 식단을 만들어준다고 대답하지 않겠어요?"

"결국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수록 거창한 말로 둘러댄다는 거로군."(P.201)


이 이야기에는 제3자로서 신문기사를 읽은 사람들의 반응도 보여준다. 투신한 여학생의 어머니가 '모든 걸 바쳐서 애지중지 키웠다'는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 지나치게 독자에게 친절한 문장이긴 하지만, 그렇구나. 그 문장이 그래서 이상하게 느껴졌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를 칭찬해주고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나, 엄마가 죽길 바란 적도 없고 싫었던 적도 없다. '나'는 엄마가 싫어하는 내가 싫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엄마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다. 


과연 모성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갈구하고 바라는 것, 그것을 내 자식에게도 무조건적인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것, 그것을 모성이라고 하면 될까?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