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가을바람이 부는 들판의 작은 꽃에는 무슨 벌레가 찾아드는 겔까.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은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서희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神)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P.19

"뭐니뭐니 혀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혀서 나도 니 아부지를 믿고 정이 들어서 따라가는 거 아니겠어? 부모 자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린 배 채우주는 거로 시작된다 그거여. 저기 보더라고. 저기 물새도 모이 찾아서 지새끼 먼저 먹이는 거, 어디 사람뿐이간디?"

(중략)

"야. 참새들이 모이서 수수알갱이를 묵고 있는데 모두 새끼들을 데리고 안 있겄소? 어미 참새가 한 놈 한 놈 주둥이를 열어서 수수 알갱이를 먹이는거 아니겠소? 어미 참새도 여러 마리고 새끼 참새는 더 많아요. 참 신기스럽더마요."

"길상이아재가 수수알갱이를 뿌리준 거라요. 그런데 길상이 아재는 홍아! 어째 참새란 놈이 저리 사람을 안 믿으까? 문을 열고 내다보믄 다 달아나거든. 지금도 쫑긋쫑긋 사방에다 정신 파니라고 어미는 제대로 묵지도 못한다 말이다. 벌써 여러 날짼데 도모지 나하고는 친하려 안 하거든, 함시로 슬픈 얼굴을 하더라 말입니다. 나도 그때 문구멍에서 새끼 주둥이 열고 모이 먹이는 것 똑똑히 봤소." (P. 33-35)

훈춘의 오득술 내외 생각이 난다. 손님만 보면 기갈 든 사람같이 붙잡는 그들 심리 속에 깊이 뿌리박힌 외로움을 생각해본다. 내외가 함께, 그리고 유복한 살림이건만, 귀화하여 보상되고 약속받은 터전이건만 이민족 속의 우리, 이민족 속의 나, 그 의식이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흘러온 수만 이곳 조선인들의 사무친 슬픔이다. 늙어 쇠잔해졌고 단신의 김훈장의 경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모시올 같은 수염을 흔들며 치매 같은 꼴을 하고 앉아 있는 김훈장이 미구에 찾아올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고국 땅을 다시 밟을 희망이 없는 늙은이, 담뱃대를 물고 큰 기침을 하며 마을 길을 거닐

어볼 꿈조차 꾸어볼 수 없는 늙은이, 십 년 이십 년 후의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십년을 보내고 나면 독립이 될까? 기약이 없다. (P.73)

"신발이란,"

담뱃대를 빨고,

“발에 맞아야 하고, "

담뱃대를 빨고,

“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담뱃대를 빨고,

“이공의 말씀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편이 상책인 성싶소.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요."

"......."

“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다. (P. 77 )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 그만하면 되었구먼. "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한 일로 석이는 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큰일을 향한 길을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해주는 것, 석이는 뚜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가 내리눌리는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 결의한다. 어미의 가랑잎 같이 야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손등에 피딱지가 앉았던 누이동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등잔불 밑에서 물레를 돌리던 젊은 날의 어미 얼굴이 스치고 간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서 석아 니도 따라갈라나? 하던 아비 모습이 스치고 간다. (P. 361 )

토지의 수많은 인물을 따라 가다보면 그 시대라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했던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면, 그에 못지않게 한 개인 개인의 상황과 특수성에 의해 빚어진 인관관계가 드러나보인다.

애국지사거나 애국지사흉내를 내거나, 친일을 하거나, 혹은 동학에 몸을 담거나 간에 표면적이고 역사적인 당위성을 만들어내는 건 개인이라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내면 고백을 읽어보면 사람이 처음부터 하나의 성정을 가지고 있거나 변하지 않는 일은 잘 없다는걸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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