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18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허삼관매혈기를 읽어보라는 이야기를 꽤 오래 전에 들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독서동아리에서 서로 책을 추천하고 그 책을 읽다보니 이렇게 내 손이 가지 않는 책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위화 작가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 이야기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죽음만이 유일한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평등은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생활의 편리함이나 불편함은 개의치않지만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는다. 작가는 허삼관을 통해서 그러한 '평등'을 이야기한다.

허삼관은 생사(生絲) 공장에서 누에고치 대주는 일을 한다. 할아버지는 허삼관에게 "피를 팔러 자주 가느냐?"고 묻는다. 뼈대가 튼튼하고 건강하다는 증거로 피를 팔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몸이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은 밥도 한 그릇 이상을 먹어야 하고, 성 안에 가서 피도 팔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노동력의 대부분이 몸을 쓰는 일이니 당연히 신체 건강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벌 수 없는 돈을 피를 팔면 벌 수 있어서 건강한 사람들이라면 피를 팔러 간다는 것이다. 몸이 부실하면 피를 팔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건강을 확인해주는 방법이기도 하고 '돈'을 버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허삼관이 처음 피를 팔러 간 것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후이다. 사람들은 물을 마셔서 피를 묽게 만들어서 양을 늘리고, 혈두에게 뇌물을 주고 피를 팔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피를 팔겠다는 사람은 많고 피가 필요한 사람은 적을 때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을 팔았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가 판 건 힘이라구. 이제 알겠나? 자네 같은 성안 사람들이 말하는 피가 바로 우리 촌사람들이 말하는 힘일세. 힘에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피에서 나오는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피에서 나오는 힘은 살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쳐주는 법일세."

"어떤 힘이 피에서 나오고, 어떤 힘이 살에서 나오는 건가요?"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우리 집에서 근룡이네 집까지 갈 때는 별로 힘이 들지 않지. 이런게 바로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하지만 자네가 논밭 일을 하거나 백여 근쯤 되는 짐을 메고 성안으로 들어갈 땐 힘을 써야 한단 말씀이야. 이런 힘은 다 피에서 나오는 거라구." (p.31)

허삼관은 처음 피를 판 날 "피땀 흘려 번 돈이 어떤 건지를 안 셈이죠. 제가 공장에서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써야죠."(p.33)라고 말한다.

이후 허삼관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가족의 생사가 걸려 있거나 할 때) 피를 판다. 매혈기라 함은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인 것이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번 돈과 일해서 번 돈을 사용할 때 구분을 한다. 피를 팔아 번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허삼관은 장가를 가기로 한다.

허삼관은 '눈 내리는 겨울에 이불 속에서 꼭 껴안고 지낼 만한 여자'로 임분방이라는 아가씨를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결혼은 꽈배기 서시라 불리던 '허옥란'과 하는데, 그녀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것저것 사주며 환심도 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데릴사위'라도 되겠다고 한다. 허옥란은 하소용이라는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허삼관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셋을 낳는다. 나중에 문제가 된 것은 그녀의 첫째 아들 즉 일락이다. 일락이는 자라면서 점점 하소용의 얼굴을 닮아가는 바람에 허삼관의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허삼관은 일락이가 자기를 닮지 않았지만 이락이, 삼락이와 닮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일락이는 엄마인 허옥란보다 아빠인 허삼관을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허옥란이 도와달라고 할 때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댔지만 허삼관에게는 자기가 먼저 다가가서 이런저런 일을 도왔다. 허삼관은 "일락이는 나를 닮고, 이락이는 당신을 닮았는데 삼락이 저 녀석은 누굴 닮은거지?"라고 하며 일락이를 좋아했다. 그러다, 삼락이가 싸우다가 형들을 불러오게 되고 일락이가 돌로 상대방 아이의 머리를 찍은 후 그 병원비를 물어주는 과정에서 자기 아들도 아닌 일락이가 저지른 일에 왜 자기 돈을 써야하는가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가 그랬어요. 한 번 아버지라고 불러서 대답이 없으면 다시 여러 번 부르라구요. 제가 벌써 네 번이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대답도 안하고.... 꺼지라고만 하시니.... 그럼....갈래요." (p.98)

일락이더러 자기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했지만, 결국은 허삼관이 피를 팔아서 병원비를 갚아준다. 허옥란의 가구며 살림살이를 가져갔던 방씨는 모두 돌려준다. 허삼관은 임분방을 찾아가 관계를 맺는다. 허옥란이 하소용과의 사이에서 일락이를 낳은 것처럼 자기도 임분방과 같은 일을 해버린 것이다. (이런 걸 평등이라고 해야할까?)

일락이는 계속해서 허삼관이 키우지만, 이락이, 삼락이와는 다르게 대한다. 예를 들면 피를 팔아 번 돈은 이락이, 삼락이에게 쓸 수 있지만 일락이에게는 쓰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관계도 하소용이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극적으로 해소가 된다. 사실 이 장면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허삼관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 거 아니냐. 널 십일 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일 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다.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하련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키킬테니..."(p.191)

이야기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로 흘러간다. 허옥란은 중상모략으로 화냥년이 되고 결국 인민재판을 받게 된다. 거리에서 목에 간판을 걸고 벌을 받는 허옥란을 위해 허삼관은 도시락을 싸서 간다. 허삼관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허옥란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리던 시기에는 아껴둔 쌀로 죽을 해먹이고, 장갑실을 풀어 옷을 해입는 등 살림을 똑부러지게 하는 여성이다. 허삼관이나 허옥란이나 모두 자기 가정을 지키고 건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민들이다. 중국의 대변혁을 겪으면서도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를 위해서라면 피 한번 더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락이가 간염에 걸렸을 때 허삼관은 일락이를 위해 연거푸 피를 판다. 피를 판 돈을 일락이에게 쓰는 것은 할 수 없다던 허삼관이 일락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이 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연거푸 피를 파는 장면은 코끝을 찡하게 한다.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서민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옥수수죽을 먹어도 나만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굶주리고 있다는 것에 같이 감내한다. 내 아내가 인민재판을 받아 한길에서 벌을 서고 있어도 그건 들러리일 뿐이라며 그 상황을 또 견뎌낸다. 생산부대에 가게 된 일락이와 이락이에게 피 판돈을 보내고, 생산대장에게 잘 보여서 아들들을 좀 편한 곳으로 보내려고 애를 쓴다. 우리 가족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삶이 행복할 리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 가족의 안전을 위해 걱정하고 보듬는다. 객관적인 행복의 증거가 없다고 해서 그들이 불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동안 묘한 감동이 있었다. 피 파는 이야기라고 해서 처음에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들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들만의 '평등'에 관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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