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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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를 꽤 많이 읽었다. 그런데도 신들이, 영웅들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나만큼이나 좋아하던 딸아이는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잘도 기억하던데... 내게는 여전히 각각 따로인 이야기이다.


키르케를 읽으려고 손에 잡았을 때, 내가 읽은 책 속에서 한 두페이지로 소개되던 키르케가 주인공인 책이 나왔다는 사실에 신기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아, 한 두페이지로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것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형제 자매도, 그의 주변에 있었거나 스쳤던 인연들이 이렇게 연결되고 저렇게 연결되는 동안 나는 이야기의 매력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이렇게 한참이 걸릴 줄이야. 어쩌면 누나는 파르마키스가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려던 참이었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던 단어였다.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라는 뜻이었다. (p.90~91)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도 한다. 신화 속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힘과 능력을 갖고 있거나, 역경을 이겨내며 자기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키르케는 자신이 마녀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의 남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알았다는데, 키르케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차리지 못한 님프였지만, 그녀도 마녀였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알고 있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마녀'는 어떤 존재일까? 주류에 속하지 못하지만 그들보다 오히려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존재인 마녀. 신들과 달리 약초나 마법약 등을 이용한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으려면 많은 것을 공부하고 깨우쳐야 한다. 키르케가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때 나는 그녀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역사 속에서 마녀로 몰려 죽어간 여자들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거주하던 지역 외곽으로 그녀들을 쫓아내놓고 병이 들거나 아프거나 먹을게 없고 아쉬울 때는 그 힘을 빌어 도움을 받으면서도 집단적 광기로 나쁜 일이나 재앙의 원인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서기도 한다.


이 이야기 속 세상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신들의 영역을 침범할까 두려워하면서도 그들 지위에 올려주지 않고 이용만 한다.


새장에서 사육당하는 새는 되지않을거야. 흐리멍덩해서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숲속으로 들어갔고 이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p.108)


자각하는 순간, 탁 하고 무릎을 치는 순간이 있다. 주어진 환경과 제약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을 깨고 나오는 순간. 쉽지 않은 각성의 순간이다. 자기 울타리에 갖혀서는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다.


나로서는 30년 전, 가방 하나 들고 일본에 가서 보낸 1년이 내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순간이다. 평탄하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다 보면 거기에 안주하고픈 생각이 든다. 굳이 애써서 성취하지 않아도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놀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1년의 시간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공부하게 하였고,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문이 열려있는데도 새장 밖으로 날아가지 않는 새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전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걸 탓하려고 하는건 아니다. 자기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나는 그렇게 새장 밖으로 나가고 싶다.


"내 섬에서 침묵하지 않겠어요."(p.295)


점점 주체적으로 변하는 키르케를 본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하나의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혼자서 키워야 할 때는더욱 그러하다. 신화 속의 신들은 여기저기 애들을 낳고 돌아다닌다. 아이를 임신하게 하지만 그들이 키우거나 돌보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거기에 오디세우스도 이타케에 두고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도 이 섬 저 섬에서 여자들과 산다. 그렇게 해서 겨우 집으로 돌아가지만 결국은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지 못한다. 신이 정해 준 운명이겠지만, 인간의 몸은 유한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며 방랑한 건. 왜였을까요? 한순간의 자부심이죠. 아버지는 아무도 아닌 존재로 지내느니 신들에게 저주받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면 구혼자들은 찾아올 일이 없었겠죠. 제 어머니의 삶은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테고요. 제 삶도. 아버지는 저희와 집이 그리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이타케에 돌아온 뒤로는 만족을 모르고 항상 수평선만 바라보셨으니 말이죠. 일단 우리를 손에 넣고 나니까 다른 것을 갖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게 끔찍한 인생이 아니면 뭡니까? 사람들을 꼬드겨놓고 내팽개친 게 아닙니까.” (p.417)


키르케의 이야기를 하면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오디세우는 영웅이라기보다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았던 고집 센 남자 어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순간의 자부심.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사느니 신들의 저주 받는 쪽을 택했을거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로만 기억하던 그리스로마신화를 등장 인물들과 연결하며 잠깐이지만 그들의 계보를 한번 그려본다. 이제 이 부분은 잘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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