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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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3년 5월 파리에서 초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반란의 에너지와 제물의 죽음을 통해 삶을 찬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에 ‘제물’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다고 한다. 이 책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과 제1차 세계대전을 비교하며 그 의의를 설명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서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른’ 것처럼 전쟁에서는 ‘이름 없는 병사’들이 죽어갔다. 저자는 이 병사들을 ‘제물’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봄의 제전」에서 희생양은 애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 기려졌다. 메시지, 음악, 작품의 테마, 안무까지 모든 것이 불편했다. 이 작품은 현대적 반란의 여러 본질적 특징을 담고 있었기에 단편적 관객으로부터는 열광적 참사를 이끌어냈지만, 떠들썩한 반대의 목소리도 높았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관객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 주인공들 그 자체보다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훨씬 더 중요한 증거의 원천(p.10~11)이라고 보며 ‘관객’에 대한 묘사를 이어간다. 작품이 공연되었던 그날 밤은 그 시대의 상징이자 20세기의 지표가 되었고 최신식 파리 샹젤리제 극장, 핵심 관계자들의 사상과 의도, 관객의 소란스러운 반응까지 모두 ‘모더니즘’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이정표였던 셈이다.


러시아 발레단의 단장이었던 댜길레프는 예술을 구원과 재생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구원은 도덕적 관습과 관습의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러시아를 포함한 서구 문명의 경쟁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윤리에 지배되는 우선적 가치들로부터의 해방이었다.(p.65) 예술은 생명력이며, 삶을 붇돋우는 종교적 힘을 지닌다. 그는 예술가의 자율성과 도덕성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믿었고, 예술가는 도덕과 무관해야 한다고 보았다. 도덕은 추(醜)의 발명품이며 추의 복수였다. 미(美)를 향한 해방은 에고이즘과 개인적 구원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댜길레프는 예술이 현실을 가르쳐주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관객은 예술적 경험에 중요하다고 보았다. 


19세기의 많은 지식인에게 자아와 사회, 물질계로부터 소원해지는 진짜 원인은 성(性)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중간계급은 쾌락을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으로 해석했고 감각은 죄악이라고 의심받았다. 따라서, 성도덕 쟁점이 현대적 운동을 위해 부루주아적 가치에 맞서는 반란의 매체가 돼야 했다. 동성애자는 반란의 이미지의 중심이 되었다. 무용의 신이라 불렸던 니진스키는 뛰어난 신체능력과 대담한 정신, 순수함과 무모함의 조합으로 한 세대 관객 전체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p.71) 이전까지는 시적 영감의 원천이자 숭배의 대상, 공연 예술에서의 주인공으로 여성이 주목받았다면,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갖춘 남자가 각광 받는 시대가 되었다. 


1914년 8월, 대부분의 독일인은 자신들이 개입하게 된 무력 충돌을 정신적 의미로 이해했다. 전쟁은 무엇보다 하나의 관념이지, 독일의 영토 확장을 노린 음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p.156)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인들은 자기들의 “도덕적 우월성”, “강한 정신력”, “도덕적 정당성”을 확신했다.(p.158)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전쟁”이라는 관념이 부상했다. 많은 이에게 전쟁은 천박성, 제약, 관습으로부터의 구원이었고.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전쟁 열기에 사로잡혔다.


일부 젊은이들은 전쟁을 반가운 모험으로 여겼다. 그들은 전쟁을 미래로, 진보로, 혁명으로, 변화로 가는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의 성격이 변해감에 따라서 적은 갈수록 추상화되고 영웅은 이름을 상실하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무명의 병사로 바뀌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중반부가 되면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들은 뒤집어진다. 무인지대에서 무더기로 희생자가 된 병사들은 전쟁의 최대 이미지가 되었다. 


무수한 공격에 노출되어 시간이 지나면 병사는 반사작용에 따라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왜 앞으로 나아가는지는 몰랐지만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명예롭게 움직인다.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대의명분’은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병사는 훈련을 통해 몸에 밴 규칙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교육, 성장 배경에 의해 주입된 가치 체계에 따라 움직인다. 개전 후 몇 달이 지나자 영웅주의가 빛이 바래고 진 빠지는 소모전에 들어서자 의무라는 개념이 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목적이 변하는 지점이다.


19세기 중간 계급의 이상적 도덕률에서 개인적인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사회 조화, 공공복리, 공공선이었다. 개인적인 자제는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태도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공공에 봉사한다는 관념, 즉 의무는 이 계급의 위대한 성취가 됐다.(p.300) 1914년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전쟁에 나간 사람들은 주로 봉사와 의무 관념으로 충만한 중간계급이었다. 이전 전쟁이 왕조 간, 봉건적/귀족적 이해관계, 군주 간 대립으로 시작한 전쟁이었다면, 지금은 역사상 최초의 중간계급 전쟁, 부루주아 전쟁이었다. 의무는 신의가 없고 비열한 외국의 공격에 맞서 조국을 지킨다는 말로 들렸다. 따라서 전쟁 초기에는 이 의무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명령이었다. 


전쟁은 문명의 행진과 진보의 지속에서 거쳐가는 한 단계였고, 문명과 진보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토대로 여겨지는 것에 기반을 뒀다.(p.303) 전쟁이 길어지면서 이 의무 관념은 옅어지고, 병사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무너지거나 자제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위기 상황에서 손발이 말을 듣지 않거나 용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1917년이 되자 의무라는 말은 사라진다. 진짜 전쟁은 1918년에 끝났다.


전쟁의 이미지와 어휘는 1920년대 모든 형태의 문화에 스며들었다. 그 시대의 문학, 영화, 광고, 정치까지 청년 숭배에 지배됐다. 전쟁에서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과 슬픔에 빠진 구세대는 젊은 반항아들에게 딱히 항의하지 않았다. 1920년대의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정치를 멸시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성과 합리성, 불변성, 신념은 사라지고 운동, 우울증, 신경증만 남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이 나타난다. 


한국전쟁을 겪었던 어른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서’라는 말을 많이 했다. 누군가의 경험은 그 사람의 가치체계와 사고방식을 바꾸거나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 젊은 세대는 외국과 총칼 들고 싸우는 전쟁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삶이 곧 전쟁이라는 생각을 한다. 국가를 위한 의무와 충성보다 개인의 이익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정의인가? 


가까운 곳에서 지금도 전쟁은 계속 되고 있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민간인이 죽음을 당하며 이름없이 스러져간 군인들이 있다. 세계 질서를 바로잡는다면서 무기를 들이밀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 불이익을 강제하고, 네 편 내편 갈라서 편 먹지 않으면 따돌리고, 무시한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가까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소식을 듣고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쉽지는 않았다. 봄의 제전과 세계대전을 엮어서 생각하기 위해 두 번, 세 번을 다시 읽었다. 잠재적 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거라’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걱정’이 커진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무슨 봉사 활동 하듯 참전하러 간 개인이 있는가 하면, 자취방 이사할 때도 챙기고 알아보고 살펴볼 게 많은데, 두 달 만에 옮기겠다고 큰소리치는 정치인도 본다. 명분과 목적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실리’가 없으면 국민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축제의 제물’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희생의 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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